바라캇 서울 홈페이지: http://www.barakat.kr/sub/introduce_detail.php?j_no=27&j_type=2&j_sort=
9월 27일부터 11월 26일까지 삼청동 바라캇 서울에서 엘 아나추이 개인전 <관용의 토폴로지>가 열린다. 아래에는 바라캇 서울에서 제공한 해설을 파란색으로 싣는다.
바라캇 서울이 선보이는 <엘 아나추이: 관용의 토폴로지 1>는 작가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실제적인 변화의 힘을 조명한다. 현대미술에서 예술의 실질적인 힘에 관한 논의는 주로 사회 참여적인 작업이나 교육 활동, 혹은 선언문을 바탕으로 한 단체 활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오랜 기간 작업을 지속하며 주변의 삶과 환경의 변화를 이끈 작가의 '내적인 힘', 곧 엘 아나추이의 예술에 나타나는 작가적 태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엘 아나추이의 대표작은 가나 공화국의 마을 아수카(Asuka)에서 소비된 수천 개의 병 뚜껑을 가공하고 구리선으로 엮어 테페스트리처럼 만든 거대한 설치 작품이다. 그는 이 작업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의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전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는 등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가나의 쿠마시 소재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학교에서 예술을 전공한 작가는 전토적인 서양 고전 회화의 기법을 수학하였으나 관습적인 미술 교육에 매이지 않는 자신 만의 기법을 위해 노력했다. 나무, 돌, 흙과 같은 주변의 다양한 소재와 매체를 끊임 없이 실험한 엘 아나추이는 버려진 술병의 뚜껑을 가공하여 독특하고 화려한 금속성의 조각 작품을 만들게 된다.
엘 아나추이는 바려진 병뚜껑에서 그것을 사용한 개개인의 흔적을 포착하고 이를 직물처럼 엮는다. 이 금속의 씨실과 날실에는 소재의 공급자와 운송자, 작품의 디자인 작업자와 여러 관계된 마을 주민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이렇게 마을 주민과 작품을 엮어내는 작업은 그 자체로 작가가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다. 쓰고 버린 병뚜껑은 이를 소비한 '개인의 기억' 뿐만 아니라 구미권 국가들에 의해 아프리카에 술이 공급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는 '집단의 기억'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는 노예 제도와 식민지 시대를 지나는 아프리카의 트라우마적 근현대사를 호출하고 있다.
이처럼 엘 아나추이의 작품은 객인의 참여가 엮인 결과물이자, 역사적 시간과 현재의 순간이 교차하는 직조물인 셈이다. 다양한 층위의 내러티브가 결합하여 하나의 그물망을 이루는 그의 작업은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현대의 네트워크 체계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예술을 통해 보여주는 관용의 태도이다. 위계적인 중심 없이 각 교점(node)이 연결된 네트워크처럼, 엘 아나추이는 작가가 절대적인 감독관이 되는 것을 지양하고 작품의 제작 및 설치, 감상 등 모든 과정에 타인의 개입을 허용한다. 그는 가나의 마을 사람들을 작업에 참여시키고, 전시 공간에 따라 설치 방식을 변형하면서 관람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바라캇 서울의 <엘 아나추이: 관용의 토폴로지>전은 이러한 작가의 관용적인 태도를 표현하고 그의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토폴로지(topology)의 개념을 제안한다. 토폴로지는 20세기 초 수학에서 공간의 이론으로 처음 제시되었는데 이후 여러 분야에서 고정적으로 고착되지 않고 연결된 관계에 의해 변형되는 공간과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 공간 안의 물체가 고정적이지 않고 여러 교점의 배치에 따라 유동적이고 변화하고 확장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에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던 힘의 균형이 분산되고,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어지며 창의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다.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토폴로지적 대상에 비유되며, 직각의 전시 공간을 '구기고', '접어' 변형시킬 것이다. 이 공간 안에서 관객은 작품과 사적인 관계를 맺으며 의미의 확장과 공간의 변형을 더하게 된다. 이러한 토폴로지적 사유는 그간 아나추이의 작품이 아프리카의 민족적 지형학적 분류로 해석되던 것을 넘어 예술을 보는 여러 시점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을 나타내고 있다. 2 그의 작품은 설치되는 장소의 맥락, 작품과 마주하는 관람자 개개인에 따라 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폭넓은 사유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는 삶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며이를 작품에 반영하는 작가의 태도와 무관한 우연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엘 아나추이는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새로운 매체의 실험과 또 다른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엘 아나추이: 관용의 토폴로지>전에는 마드리드의 팍툼 아르떼(Factum Arte) 기관과 협업한 작가의 프린트 신작도 선보인다. 그의 예술적 실험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본질적인 예술의 힘을 추구하며 미래로 향한다. 삶의 궤적을 통해 일궈낸 새로운 지평에서 엘 아나추이는 '예술'을 다른 시각을 보는 관점을 제안하고 있다.
<엘 아나추이 El Anatsui>
엘 아나추이는 1944년 가나에서 태어난 아프리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조각에 대한 전통적 관습과 정의를 거부하는 예술적 실험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그는 40년 간 조각가이자 교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정치, 역사적 입장을 표방해 온 사회참여적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조각 작업은 술병 뚜껑 혹은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버려진 물건과 같은 소박한 재료들을 통해 제작되며, 작가는 이러한 재료들을 복합적인 아쌍블라쥬로 변형시켜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그의 후기 작업에서 잘 드러나는 '꿰매기'와 같은 작업방식과 의식적으로 사슬톱, 용접통 토치, 전동 공구 등 일상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예술의 분류 기준인 조각에 대한 관념을 거부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아프리카 가나의 서구권, 양자의 시각 전통과 동시대적 삶에 대한 보편적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엘 아나추이의 작품은 런던 대영박물관,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드 영 미술관,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뒤셀도르프의 쿤스트팔라스트 박물관, 도쿄의 세타가야 미술관 등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과 기관들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1990, 2007, 2015 베니스 비엔날레, 2012 파리 트리엔날레 등 다양한 국제 전시 행사에서 소개되어 왔다. 영국의 왕립 미술원이나 베니스의 고성인 팔라쪼 포츄니의 전면을 덮는 거대한 설치작업으로 세계적인 이목을 받았으며,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ㅡ 바라캇 서울
Skylines?
Aluminium and copper wire
300x825cm
2008
내가 찍은 사진이 너무 형편 없는데, 이는 바닥의 반영까지 포함한 전체 작품을 담기 위해서였다.
언뜻 보면 넝마처럼 생각될 수도 있을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시선이 계속 가는 기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쓰고 버린 병뚜껑을 하나하나 일일이 네모나게 접은 후 구리철사로 연결시켜 만든 이 작품은 무겁게 늘어지면서도 그 형태의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이전에는 진흙과 나무를 즐겨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곤 했던 엘 아나추이가 최근 들어 이처럼 병뚜껑이나 쓰다 버린 병을 사용하는 것은 소비-쓰레기-환경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에서 기인한다.
이 작품의 제목을 보자. <Skylines?> 왜 ?가 붙었을까. 위의 설명에도 있듯 엘 아나추이 작품의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작가로서의 권위의식 내려놓기'이기 때문이다. 2003년 Fowler Museum catalogue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독재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뭔가를 제시하는 누군가가 되기를 원해요 (I don’t want to be a dictator. I want to be somebody who suggests things.)” 3라고 말했다. 이처럼 엘 아나추이는 작품의 제작에서부터 마을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전시 형태를 큐레이터에게 일임하며, 감상을 독자에게 맡김으로써 작품에 대한 작가로서의 권위를 최소화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그만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과 협업함으로 그들과 작품에 대한 권한을 공유하는 행위다. 롤랑 바르트가 들으면 만세를 부를 일이다. 개인적으로 작품에 대한 소유권의 절반은 독자의 몫이라 생각하는 내게도 잘 맞는 이 방식은, '큐레이터'분들의 자리까지 적극적으로 조명함으로 나자신의 협소한 사고의 지평을 또 한 단계 넓혀 주었다 하겠다.
큐레이터 분께서 말씀하셨다. "엘 아나추이의 작품은 늘어지기 때문에 벽에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는 큐레이터의 몫으로 주셔요. 그래서 똑같은 작품이 여러 곳에서 전시될 때마다 큐레이터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되는 것이죠." 이 얼마나 자유롭고 혁신적인 방식인가! 엘 아나추이는 자신의 작품 제작 과정에 큐레이터분들을 창작 작업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물론 걸어 놓고 작가분의 허가를 받죠. 그런데 이번 바라캇 서울에서의 전시 형태에는 상당히 만족해 하셨어요"라던 큐레이터분의 말씀.
전대미문의 과학기술혁명을 겪으면서 수천 년을 지탱해 온 여러 전통적 가치관들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21세기의 예술은 이처럼, 작가와 큐레이터와 감상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작품 자체의 자율성과 유동적 생명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야기가 또 새었는데;; 다시 제목으로 가자. <Skylines?>. 스카이라인. 그렇다면 이 스카이라인을 설치함으로 마지막 제작과정을 '완수한' 이는 바로 큐레이터가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작품을 거꾸로 걸지 않고 저 황금빛 부분을 뒤틀린 형태로 상부에 배치했는가. 큐레이터분께 그것은 여쭙지 않아 모르겠다만, 그 부분이 아래에 있었으면 안정성이 떨어졌을 것 같기도 하고. 아래에 노랗게 주름잡힌 부분은 어쩌면 반짝이는 별을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다.
직사각형 네모난 전시장의 벽을 굽실굽실 변형하는 작품이 어떻게 보면 위트 넘치는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서 보면 이토록 아름다운 사각의 향연이 펼쳐진다.
Untitled (from the Circular Series)
Ink on Somerset 300gsm paper, with chine colle gold foil
84.3x84.3cm
2016
자세히 못 본 작품.
Untitled (from the Circular Series)
Ink on Somerset 300gsm paper, with chine colle gold foil
84.3x84.3cm
2016
Untitled (from the Circular Series)
Ink on Somerset 300gsm paper, with chine colle silver foil
84.3x84.3cm
2016
Untitled (from the Circular Series)
Ink on Somerset 300gsm paper, with chine colle blue foil
84.3x84.3cm
2016
Rehearsal
Aluminium and copper wire
406x465cm
2015
앞서 말한 <Skylines?>와 동일선상에서 파악하면 좋을 작품이다. 엘 아나추이의 작품들을 전시하게 되면 큐레이터분들은 신나지 시지 않을까 싶은데 이것도 물어보지 못했네. 원래 이 작품은 사각형인데 큐레이터께서 이런 형태로 걸어 전시하였고, 작가는 몹시 흡족해 하셨다는 이야기. 재미난 일이다. 작가는 작품과 제목을 제공하고, 그것을 큐레이터가 완성하고. 철저한 작가 의식으로 무장하여 전시 때마다 작품 하나하나의 조명과 작품-감상자 사이의 거리까지 정확하고 꼼꼼하게 확인했다는 마크 로스코와는 사뭇 다른 작가관과 예술관을 지녔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작품의 제작과 배치는 다른 사람이 담당한다, 라는 개념은 옛날로는 르네상스 시기의 공방 작업에서부터 가까이로는 데미안 허스트의 공장형 제작에까지 연결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데미안 허스트의 기업화된 시스템과는 거리가 있지만, 작품 제작의 아이디어제공부터 제작의 완성까지 오롯이 작가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배치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정말 이 시점에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작가의 고유이자 의무인 영역인가.
'리허설'이라는 제목에서 큐레이터분은 어쩌면 연극배우의 의상을 떠올리셨던 것일까. 반듯한 사각형의 작품을 어째서 저런 형태로 설치하신 것일까. 전시 가시는 분 혹시 큐레이터분의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저 대신 여쭈어 봐주셔요.;;
Dzi II
Aluminium and copper wire
290x331cm
2015
이 작품을 설치하실 때 큐레이터분은 다른 전시에서처럼 작품을 접거나 구부리지 않고 평편하게 폄으로써 모든 부분을 감상자가 확연히 볼 수 있기를 의도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벽에서 좀 더 떨어뜨려 설치함으로, 벽에 비치는 그림자까지 감상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싶었다는 말씀에서, 이번 전시 작품의 설치에 큐레이터께서 얼마나 심사숙고하셨는가를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벽에 드리워진 베일과 같은 저 그림자는 아픈 아프리카 역사의 눈물의 흔적 같기도 하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희망 같아 보이기도 한다. 혹은 아리따운 아가씨의 살짝 비치는 속치마 밑단이라거나. 생각 외로 상당히 아름다운 그림자였다.
엘 아나추이의 테피스트리 같은 작품은 가나 남부지역에 아칸족의 '켄테 (Kente)'라는 이름의 천을 직물이 아닌 건축의 개념으로 작가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는 평이 있다.
이것이 아칸족의 켄테천인데, 원래는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에웨(Ewe)족의 기술로 만든 천이었는데, 나중에 아칸족에게 가르쳐주었다나 뭐라나 하고 주장한다 한다. 대개는 아칸족이 사용하는 천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중요한 의식에 왕이 사용하는 성스러운 옷감이었으나 훗날 대중화가 되었다 한다.
같이 감상하시던 분들 중에 이 작품을 보시더니 "클림트가 떠오른다"하신 분이 계셨는데, 나도 딱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위의 파란색 설명에 친절하게 나와있지. 그것은 서구중심적 예술관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그 부분을 읽고는 뜨끔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인이 저 작품을 보고 어찌 클림트의 <키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노란색과 은색이 저토록 찬란한데 말이다.
Gustav Klimt
The Kiss (Lovers)
Oil and gold leaf on canvas
180 cm × 180 cm
1907–1908.[1]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클림트 작품 보다 보니 보고 싶어지네. 우리나라엔 클림트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 없는 걸까. -_ㅜ
Cadmium-Vermillion Eclipse
Intaglio print wit collage and chine-colle
98.5x98.5cm
2016
이 작품과 아래의 작품 두 개는 전 세계에 세 개 밖에 없는 판화작품이라 들었는데, 내가 정확히 들은 건지 자신이 없다. 작가가 다른 작품 만드느라 사용한 도구를 다시 제작해 판화로 만든 작품이라 들은 것 같은데... 암튼, 이 작품은 희귀한 작품이어서 컬렉터 분들께 적극 권하게 되신다고.
White Eclipse
Intaglio print with collage and chine-colle
98.5x98.5cm
2016
역시 사진으로 보니 느낌이 잘 안 사는데, 이 두 작품은 실제로 보면 묘한 흡입력이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상하게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얼굴의 느낌이 든달까. 내게는 그랬단 이야기.
아프리카-유럽 -미국이 연결되는 식민의 역사와 경제적 관계에 대한 슬픔이 묻어나는 것도 같고, 단단한 못이 박힌 등근육과 마음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도 어떤 큐레이터, 감상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든 자유롭게 변형되는 특징 속에 무한한 변화에의 가능성을 상상해 보는 재미가 특별한 전시였다. 잘 보았습니다.
- 토폴로지topology)는 위치나 공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 (τόπος)'와 학문, 지식의 뜻을 가지는 '로고스(λόγος)'가 결합된 단어로, 공간의 성질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토폴로지에서의 공간은 늘림, 구김, 구부림 등의 연속적인 공간의 변형 속에서도 여전히 본래의 성질을 유지한다. [본문으로]
- 만약 아나추이가 비엔나 출신의 작가였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의 작품이 클림트의 금빛을 닮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작품이 중세 비잔티움 미술의 화려함과 영적 느낌을 자아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정은 아프리카인이라는 아나추이의 정체성을 알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작품을 인식하는 태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아나추이의 작품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미술 전반을 서구적 시각으로 정의하려 했던 태도가 반영된 결과이다. <대화: 수잔 보젤과 엘 아나추이> 인터뷰. 2013년 2월 10일. [본문으로]
- ※ 출처: http://www.jackshainman.com/artists/el-anatsui/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