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니버설발레단 홈페이지:
http://www.universalballet.com/korean/performances/performance_view.asp?cd=703&furl=performance
기다렸던 유니버설의 <지젤>이 시작되었는데 에너지가 부족하다. 2주 전까지 달렸던 국립의 <지젤>이 아직 빠지지 않아서 그렇다. 내가 발레 볼 때 정말 에너지를 많이 쓰긴 하나 보다. 좋아하는 발레이고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보니 충분한 에너지를 모으고 싶은데, 국립 공연 때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보름으로는 차오르지 않아서 힘겹다. 군무지존 유니버설의 <지젤>인데. 속상하다. ㅠ
유니아트센터는 내 공간에서 가기에 많이 힘들다. 거리도 멀고 전철도 힘들고 버스도 갈아 타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해서 한 번 다녀오면 예당에 비해 몸이 몇 배로 더 힘들다. 예당 공연은 끝나고 한 시간 반을 걸어 집에 와도 다리가 아프고 힘들지언정 마음이 힘들진 않다. 공연 메이트와 함께 걷거나 혼자 걷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니아트에서 돌아올 때면 버스나 전철에서 인파에 시달리는 것 자체가 힘겹다. 그저 집에 가서 뻗고만 싶어. 가뜩이나 <지젤>을 볼 만한 에너지가 모이지 않은 상태여서 피곤이 더 심하다. 유니아트는 힘들어요... ㅡㅠ <돈키호테>는 충무아트던데. 유니보다야 낫지만 그 역시 만만찮은 충무 아트. 유니버설을 좋아하는데 이런 건 속상하네.
힘들어서 캐스팅도 확인하지 않고 가서 보았다. 여러가지 이유로 평소처럼 자세한 감상을 쓸 순 없겠다.
아... 이 날이 나탈리아 쿠쉬였구나. 이 날 좌석이 3층 박스석 가장 앞좌석이었기에 이날 감상은 다른 무용수들의 경우와 비교가 불가하다. 무대 바로 옆의 위였기 때문에 다른 좌석과는 비교가 안 되게 무용수분들이 가깝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무대가 가려서 지젤이 알브레히트에게 꽃을 주는 장면을 볼 수가 없고, 무엇보다 3층 바로 위에서 보는 좌석이기에 점프의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무용수별 비교를 하자면 2층 중앙에서 보아야 하는데, 유니아트의 최장점이 바로 이 좌석이라, 예당에서도 결코 맛볼 수 없는 그 특장점을 누리기 위해 이 좌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얻는 게 있는 만큼 잃는 것도 있겠지. 그 역도 마찬가지고.
나탈리아는 생각보다 많이 작았다. 아니면 매튜 골딩이 많이 컸는지도 모른다. 높이는 확신할 수 없는 좌석이다.
일단 매튜 알브레히트. 매튜는 모오오오옵시 바람바람했다. 어휴, 그런 바람둥이란. 어쩜 그렇게 능청맞나 그래? 이재우 님이 느끼해졌다며 내 공연메이트는 투덜대지만, 한국인과 외국인의 차이인 걸까. 차원이 다르다. 능청맞고 매끈하고 바람바람하며 순식간에 표정이 휙휙 어찌나 섬세하게 연기하시는지. 특히 지젤과 키스 직후 사랑에 빠지는 듯한 그 표정과, 지젤의 어머니가 찾을 때 등 뒤에 지젤을 숨기는 장면에서 어휴, 그런 닭살행각을... 나탈리아 지젤과 함께 정말 그럴 수가 없도록 깨가 쏟아지는, 넘넘 귀여운 커플을 연기해주셨다. 매튜 알브레히트는 분명히 지젤을 데리고 놀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키스가 스치는 순간, 그녀의 순수함에 반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어? 하며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지젤이 죽었을 때의 그 충격받은 표정이란. 한국인 무용수들이 기술이 아주 강한 반면, 서양인 무용수들은 연기가 정말 강하다. 강해도 너무 강해. 지젤 죽음 직후 힐라리온과 싸울 때ㅡ힐라리온도 서양인 무용수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였다ㅡ아, 현실 칼부림나는 줄. 실감났다.
나탈리아 지젤. 음... 나탈리아였구나. 일단 선은 모르겠다. 지난 번 호두까기 때 나탈리아의 선이 좋다고 여겼으니 아마 좋았을 게다. 내 좌석의 위치가 선을 가늠하기에 좋지 않은 위치였기에 그것에 대해 말할 순 없다. 다만 몹시... 정말 많이 독특했는데. 서양인이어서인가? 캐릭터 설정과 표현이 정말 뛰어나다. 순간의 장면 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캐릭터를 확실하게 잡고 표현한다.
처음 나탈리아 지젤을 보았을 땐 좀 이상했다. 많이 이상했다. 뭔가 좀 멍한 느낌. 뭐지? 왜 저런 느낌이 나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냥 멍한 게 아니라 답답했다. 순수함과는 다른 답답함. 그런 지젤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내 마음이 더 답답했다. 그러다 그녀가 알브레히트와 더불어 사랑의 춤을 추다 아파할 때야 알았다. 어...?
그러니까 나탈리아 지젤은, 내가 느낀 국립발레단 김지영 지젤과 정 반대선상에 있는 지젤이었다. 지젤은 춤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심장이 많이 아픈 처녀다. 김지영 지젤에게서 받은 느낌은, 충격으로 죽을 만큼 심장이 약하지만 춤을 너무 좋아하는 햇살처럼 밝고 쾌활한 성격이라, 사랑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춤을 추다 죽어도 좋아! 라는 느낌이었다. 너무 아픈 순간에도, 아파서 죽을까 하는 걱정 따위 없다. 그저 춤을 더 추고 싶다,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싶다, 햇살을 누리고 싶다, 하는 그런, 눈물겹도록 생을 사랑하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그녀가 어쩌면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ㅡ지금에 와ㅡ들게 한다. 극심한 심장병을 넘어서는 그녀의 밝음과 춤과 생을 향한 사랑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나탈리아는 춤을 몹시 좋아하지만 병약한 소녀였다. 그녀는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생을 사랑하기엔 너무 아팠다. 그래서 한 번도 남성을 사랑한 적이 없었고,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만 병약한 자신과 밝은 세상 사이엔 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진 답답함은 마음의 벽이었다. 그런 그녀가 알브레히트를 처음 보았을 때 보여준 감정은 환희가 아니라 두려움을 동반한 충격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더욱 얼게 만들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어 조금씩 빠져들게 되었다. 그처럼 닫혀 있는 나탈리아 지젤에게 능글능글한 프로 바람둥이 매튜 알브레히트는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다. 그녀가 연이어 도망가도 이리 잡고 저리 잡아 자연스레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가고 마침내 마음을 열게 하는 능수능란함. 두 사람은 잘 어울렸다.
나탈리아 지젤의 하이라이트는 광기 장면이었다. 나탈리아의 광기를 보고서 깨달았다. 그동안 보았던 지젤들은 광기로 쉽게 넘어간 것이었구나. 다들 영리했달까. 하지만 나탈리아에게서 느꼈던 지젤은 몸의 병약함으로 인해 마음이 굳게 닫힌, 처녀가 아닌 소녀에 가까운 지젤이었다. 상처 받을까봐 그 누구에게도 연 적이 없었던 마음을 마침내 열었는데, 그가 배신을 한 것이다. 그런 충격 앞에 나탈리아 지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기 초기 부분에서 그녀의 동작은 뻣뻣하고 어색했다. 그런데 그것이 충격을 잘 전달해 주더라는 거. 그리고는 어떻게 할 줄을 몰라 서툴게 일어나다가는 알브레히트의 검을 딛고 섰다. 다른 지젤들은 그동안 검을 보자마자 한눈에 그것이 검인 것을 알아 보고 집어 들었다. 그런데 사실상 금방 생명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는데, 사물이 한눈에 인식되는 것이 쉽겠는가. 나탈리아는 검 위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순간, 그것이 '죽음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검'이란 사실이 섬광처럼 뇌를 스친 듯, 나탈리아는 검을 들고 휘휘 젓더니 순식간에 검을 들어 자신의 병약한 심장을 겨누었다. 그처럼 긴박감을 불러 일으키다니. 그러다 힐라리온을 보고 웃다가, 알브레히트를 지나 자신을 배신하기 이전의 알브레히트를, 즉 진정한 사랑을 찾는 듯 뛰어다니는 장면, 힐라리온 팔에 안기는 장면, 엄마에게 달려가는 장면, 그리고 알브레히트를 마침내 알아보고는 그의 팔에서 생명을 놓아 버리는 장면까지.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나 납득이 가서, 그녀가 미쳐가는 과정이 절절하게 와 닿아서 결국 울어 버렸다. 연기 너무 좋았다. 그런데 이 좌석이 무대에서 아주 가까웠는 데다, 지젤의 표정을 다 볼 수 있는 위치였어서 그렇게까지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탈리아 지젤의 내면 연기는 충격스러울 정도였다.
2막에서는 처음 뒤로 하는 회전이 빠르고 깔끔해서 눈이 즐거웠다. 내일이 또 나탈라아네. 아, 내일 2층 중앙좌석으로 끊었을 걸. 내일은 2층 박스석인데... 엇, 반대쪽이군. 그럼 얼굴표정 잘 안 보이겠네. ㅠ
알브레히트의 시종... 무용수분 이름을 잊었는데;; 작년 호두까기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드로셀마이어였다. 역시 서양인인 만큼 연기력이 좋아서는, 그 아무 것도 볼 것 없는 배역인데도 힐라리온이 뿔피리를 불었을 때 달려와 당황해서는 '무, 무슨 일이야?' '내가 안 불었어요, 나 아니예요' 하며 귀족들과 공작에게 변명하는 듯한 모습에서 깨알같은 연기력에 감탄했다.
알렉산드르 힐라리온의 연기 역시 일품이고.
그리고 윌리 군무에 박수를 보낸다. 무대 크기로 인해 24명이 아닌 18명 + 2명 + 미르타였지만, 첫날부터 완벽에 가까운 군무를 보여주셨다. 더군다나 이날 좌석은 박스석이라 군무를 아예 포기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사선 군무까지 훌륭했다?? 시작 전부터 '오늘 군무는 포기하는 걸로' 일행과 합의를 보았는데, 끝나고 둘 다 깜짝 놀랐다. 유니버설은 군무가 지존이죠.♥
이번에 홍향기 님 공연을 못 보네... ㅜㅠ 어떻게 다섯 번을 다 비켜 갑니까. 엉엉엉.ㅠ
이동탁 알브레히트는 매튜에 비해 훨씬 점잖았다. 음. 처음부터 바람둥이란 느낌은 없던 걸? 점잖고 품위 있는 귀족 같았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성실한 청년 같았는데, 거... 2막에서 공중2회전을 무슨... 제자리 뛰기 하듯 휙? 하고 해버리시는 거다? 아니, 공중2회전을 하고는 동작이 남는 것 같은 그 여유는 대체... 정말 믿음직하신 거다. 다만 이번 버전의 안무에선 알브레히트의 매력이 너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파트리스 바르가 굳이 다시 안무를 할 수 밖에 없었겠어. 전체적으로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죽을 만큼 힘든 춤을 추었다는데, 춤은 지젤이 다 춘 이 느낌을 어쩌면 좋은가 말이다. 이동탁님의 실력이 아까운 알브레히트 안무다.
강미선 지젤에게 반했다. 와... 아니 근데 요즘 한국인 발레리나들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다들 더 날씬해지시고 자꾸 가벼워지고 있다. 물성을 상실하고 있어! 눈이야 미칠 듯 즐겁지만 혹시 건강이라도 상하지 않으실까 염려가 될 정도다. 강미선 님은 다리와 발에 뼈가 없는 사람 같았다. 아주 큰 점프 외에는 토슈즈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리프트에 날아 오르실 때는 바람에 흩날리는 쉬폰자락, 지젤 치마의 한 겹이 바람에 날리는 것 같았다. 1막에서 등장할 때 얼마나 가볍고 밝고 예쁘시던지. 강미선 지젤-이동탁 알브레히트도 꽤나 즐거운 커플이었던 것이, 점잖은 이동탁 알브레히트와 좀 더 밝고 유연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다정한 강미선 지젤이 잘 어울렸다 생각한다. 강미선 지젤이 이동탁 알브레히트를 리드하는 느낌인데, 참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서 보기에 좋았다.
강미선 님은 역시 순수한 느낌이다. 그리고 토요일에 보았던 지젤은 적극적이기도 했는데, 1막에서 적극적으로 알브레히트를 이끌었던 것과 같이, 2막에서도 적극적으로 알브레히트를 보호했다. 참... 무게감 없는 분이다ㅡ는 일반인에게 사용하면 안 좋은 말이 될 텐데 말이다. ㅋㅋ 물리적인 무게감 말하는 겁니다. 몸 속이 공기로 채워진 듯 발끝이 어찌나 곱고 가볍고 부드러우신지. 아 참, 그리고 2막에서의 선도 참 좋으셨다. 강미선 님의 매력에 점점 빠져드는 것 같다. 토요일 강미선 지젤,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윌리 코르 드 발레. 아...! 사실상 발레 전체가 망쳤대도 상관 없겠을 정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부분을 완벽하게 보여주셔서 눈물이 찔끔. 좋아 죽는 줄 알았다. 스무 분이서 어쩜 그토록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호흡과 똑같은 각도, 똑같은 보폭으로 그렇게 뛰실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한 발로. 모든 것이 자로 잰 듯 똑같은 칼군무. 그 한 장면으로 인해 내가 '후기를 써야겠다'는 에너지가 드디어 생겼다. 수백 만 번의 박수를 보내도 부족한 군무입니다. 우리 유니버설 코르 드 발레가 이 정도예요. 볼쇼이 마린스키 다 덤벼! 일요 공연은 박스석이어서 중앙에서 본 만큼의 감동을 받을 순 없겠지만. 아아 유니버설 코르 드 발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사랑사랑합니다♥
아 참, 문 단장님의 그 우아한 몸짓이 참 좋다. 이번에는 윌리 춤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더해졌는데, 영혼이기에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동작이라는 설명에서 내내 궁금했던 의문이 딸칵, 하고 풀렸다. 안 그래도 국립 <지젤> 보는 내내 그 안무가 너무나 궁금했거든. 근데 아무리 검색해도 그 안무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했더랬는데, 역시 가려운 부분을 어찌 알고 콕, 집어 해결해 주시는 문 단장님. 이러니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하하. 사랑합니다♥ 덕분에 감상이 훨씬 풍성해졌어요.
나를 울리지 마시오, 제발. 에너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단 말입니다, 엉엉.
나탈리아 지젤이 문제다. 오늘은 첫날에 비해 동작이 덜 뻣뻣하고 좀 더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많이 났다. 하지만 기본 컨셉의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병약한 지젤. 나탈리아 지젤의 광기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또 울었어. 에잇ㅠ 그녀의 광기연기가 이토록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다 납득되기 때문이다. 그녀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광기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모습. 그리고 눈짓, 손짓, 발짓 그 모든 것이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탈리아는 정지 동작을 참 잘 사용하는 무용수라 생각한다. 다들 춤추고 표현하기만도 바쁜 그 순간들을 쪼개고 쪼개어 정지 상태를 만든다. 칼을 밟았을 때. 칼을 만졌을 때. 쓰러졌을 때. 안겼을 때. 위태한 분위기, 긴장된 음악 속에 동작들로 가득 찼어야 할 시간들이 초단위로 분해되고, 그 찰나의 순간들을 관객의 이해와 몰입을 위해 할애한다. 한창 격렬한 동작이 나와야 하는 순간에 그녀가 적절하게 멈춤으로써 관객과 다른 무용수들의 시선과 집중이 그녀에게로 모이고, 마침내 그녀의 발걸음 하나가 떨어지면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발끝으로 향한다. 손을 뻗으면 손끝으로 향한다.
그런 정지의 기막힌 활용으로 그녀는 기어이 쩌억 쩍 금이가고 마침내 파사삭 부서져 버리는 지젤을 너무나 훌륭히 연기했다. 지젤의 병약한 심장이 터지고 조각난 파편들이 그대로 날아와 내 가슴에 박히는 것만 같았다. 국립의 버전에선 칼을 든 지젤을 알브레히트가 막았지만, 유니버설의 버전에선 힐라리온이 막는다. 유니의 버전에선 힐라리온이, 국립의 버전에선 알브레히트가 더 강조되는 셈이다. 지젤이 검을 빼앗아 든 힐라리온을 향해 웃음을 터뜨린 순간, 그녀를 맴돌던 광기가 마침내 그녀를 집어 삼켜 버렸다. "네가 그랬잖아, 힐라리온. 내 일생의 유일한 사랑이 거짓이라고. 결국 그런 사랑을 한 나도 다 거짓이 된 거야." 그녀의 그런 반응에 대해 이동탁 힐라리온은 절망했다. "나? 너를 아프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힐라리온, 나라고?"
나탈리아 지젤의 광기 연기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1막이 끝난 후 진이 빠졌다. 일행도 혀를 내둘렀다. 무슨 연기를 저렇게 하냐. 너무 잘 하는데. 자연스러워.
맞다. 나탈리아의 또 다른 장점이 바로 그거였다. 요란하지 않은데 자연스럽다는 거. 딱히 엄청나게 우아한 것도, 화려한 것도, 눈에 확 띄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워서 자꾸 보게 된다. 2막에서도 좋았던 장면이 많았는데... 처음의 뒤로 회전은 역시 빨라서 많은 박수를 받았고. 그 외에도 참 많았는데 광기 연기가 준 인상이 너무 크다. 그 광기 연기, 에너지 엄청 들 것 같은데. 지젤 무용수분들 정말 대단하셔요.
매튜 알브레히트. 오늘 함께 본 일행이 매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저런 바람둥이...! ㅋㅋ 근데 그게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는 거다. 스킨십도 섬세하게 자연스럽고. 그 무엇도 꾸미거나 연기하는 것 같지 않게 보였다. 지... 진짜 바람둥이신 거 아니...?;; ㅋㅋㅋ 참, 지난 번 보았을 때도 느꼈던 점인데, 난 매튜 알브레히트와 나탈리아 지젤의 파 드 되가 참 좋다. 1막에서 함께 같은 동작으로 추실 때 (사이좋은) 오누이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그 다정한 분위기가 좋았는데, 보통 길이가 길기도 하거니와, 남성 무용수분들의 점프력이 훨씬 높기 때문에 같은 동작을 할 때 꼭 같기가 힘들다ㅡ는 물론, 오늘 내 위치에선 점프의 높이를 확신할 수 없긴 하다만.;; 암튼, 내 자리에서 보기엔 매튜와 나탈리의 팔, 다리 각도와 높이가 다 잘 맞아서 눈이 즐거웠다. 솔로에서 점프도 높은 것 같았는데 확신할 수 없어 아쉽네. 무엇보다 안무 특성상 알브레히트의 개별적 기량을 한껏 뽐낼 수 있는 화려한 테크닉이 없어서 아쉽다. 매튜의 기량을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공중2회전 깔끔하시고요. 연기 좋으십니다.
오늘 본 매튜의 알브레히트는 2막, 지젤이 미르타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며 십자가로 데려갔을 때 지젤에게 완전히 반한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보호에 감동한 표정. 혼자 춤을 추러 지젤이 중앙으로 간 동안 감사한 마음으로 지젤 무덤의 십자가를 어루만지며 감동 받던 모습. 바람둥이 남성을 감동시키는 건 여성의 희생인 것이냐, 젠장. 역시 스토리로만 보자면야 병맛 가득이지만 윌리 군무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지젤>인 거다.
씽크로나이즈드 댄스의 묘미가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되었는데, 다양한 패전트 파 드 되가 그러했다. 남남과 여여의 똑같은 동작들은 신기할 정도였다. 회전 시 고개의 각도까지 같다니.
참, 그리고 오늘 보니 뒤에서 각각 마임들을 하시더라...? 그렇게 많이 보았는데도 처음 깨달았다. 공작과 바틸드 장면에서 오른쪽 뒤에 있던 마을 처녀가 "저 옷을 봐요. 내 옷은 이런데, 저 귀족의 옷은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하더니, 또 다른 사람은 "어? 설마 저 목걸이를 주겠다는 거야?" 하는 등, 여기저기서 소소하게 재잘재잘... ㅋㅋㅋ 아유, 재잘재잘. 기분 좋게 시끄러워 재밌고 신났어요. 깨알같은 마임, 즐거웠습니다.
아, 그리고 이동탁 힐라리온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나는 힐라리온의 죽음을 아쉬워한 적이 없는데, 오늘 이동탁 힐라리온이 윌리의 처형대에 섰을 때 심장이 철렁했다. 아, 앙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 왜 그러지? 왜 이동탁 힐라리온의 처벌이 그토록 안타까웠던 거지?
오늘 이동탁 님의 매력을 찾았다. "범생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범생이 보다는 선비에 가깝다. 예의 바르고 마음이 곧고 점잖고 자상한 사람. 개인적으로 나쁜 사람을 싫어하고 범생이를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내가 보기에는 즐거운 힐라리온이었다. 어제 보았던 이동탁 알브레히트에게서도 같은 걸 느꼈었지? 역시 범생이나 선비, 착한 교회/성당/절 오빠?의 느낌이다.
알브레히트를 대하는 이동탁 힐라리온은 거칠었다. 남성미 뿜뿜 넘치는 모습. 그런데 지젤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그 큰 키의 이동탁 님이 쪼그만 나탈리아 지젤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다. 병약한 그녀를 자신이 만지면 깨지기라도 할까 무섭다는 듯, 차마 만지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마음이 바른 남성인 자신의 눈에는 다 보이는 저 세기의 프로 바람둥이 나쁜 남자 알브레히트에게 이 순수하고 소중한 지젤이 속아 넘어가는 건 도저히 못 보겠고. 어제 알렉산드르 힐라리온도 지젤을 소중히 대하긴 했지만, 그에게선 지젤을 향한 자신의 욕망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동탁 힐라리온에게선 물론 지젤을 간절히 원하긴 했지만, 단순히 자신의 욕망 때문이라기 보다는 지젤을 위해 그녀의 사랑을 반대한 착한 마음씨가 엿보여서 굉장히 신선했다. 힐라리온이 착하고 매력적으로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지젤이 죽었을 때 이동탁 힐라리온의 땅을 치며 우는 모습. 알브레히트가 버리고 도망친 지젤의 숨이 끊어진 몸을 향해 막이 내려가는 순간까지 기어서 다가가려던 모습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처절하게 살리시는 모습으로 비극성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동탁 힐라리온의 연기 정말 좋았다.
공연 후 일행과 감상을 나누었는데 일행 역시 이동탁 힐라리온의 연기가 인상적이고 독특하다고 평했다ㅡ몇 년간 나와 여러 번의 <지젤>을 함께 즐겨온 일행이다. 일행의 소감인 즉, 윌리들에게 죽을 때 이동탁 힐라리온은 마치, '그래, 나는 죽어도 싸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동탁 힐라리온에 대한 나의 감상을 말하기 전에 들은 이야기여서 놀랐다. 나와 비슷하게 느꼈구나. 힐라리온이 착하고 바를 수도 있구나. 생각해 보면 그렇다. 주인공이 알브레히트고 힐라리온은 조연이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알브레히트는 그래도 동정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 힐라리온은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갖고 있었나 보다. 이래서 작가가 독자들을 속여 먹기 쉽ㅡ아, 아니, 이 말이 아닌데.;; 암튼, 감상자에겐 은연 중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주연들이 공감을 얻기 좋은 구조인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동탁 힐라리온을 보고 생각해 보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조연이라고 꼭 나빠야 하는 법은 없는 거다. 그래. 알브레히트가 비겁하고 힐라리온이 오히려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 적어도 지젤을 향한 순박한 시골 청년으로서 그의 사랑 만큼은 진심이고 진정이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알브레히트보다 나은 인격을 지닌 사람임에 틀림 없다. 단지 윌리들에게서 처단을 받았다 해서 그를 악인이라 보아선 안 된다. 윌리 자체가 악령이기도 하고.
이동탁 힐라리온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아... 멋지다, 이동탁 님! 그 매력을 알게 되어 기쁨기쁨♥.
그렇게 여러 번 보았는데도, <지젤>은 아직도 볼 때마다 새롭구나...! 이 모두가 다양한 버전을 훌륭하게 소화해주시는 무용수분들 덕분이다.
그리고 오늘의 코르 드 발레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칭찬이 그 칭찬이지 또 무슨 다른 칭찬을 할 수 있겠나. 그렇지만 그렇지 않더랍니다 세상에. 오늘 코르 드 발레를 보고 나오면서 일행과 얼빠진 반응만 반복했다. 한 마디로ㅡ죄송합니다, 아름다운 코르 드 발레 여러분;;ㅡ "이 무슨 미친 군무!!!!" 하며...;; 아니, '미쳤다'가 아니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열이 맞는 거 짜릿하다. 행도 맞는 거 굉장하다. 그런데 사선 군무까지 맞는 걸 대체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북한도 아닌데. 단순히 팔을 올리고 다리를 움직이는 군무가 아니다. 토를 신고 발끝으로 서서 이동을 하며 한 발로 뛰는 고도의 기술과 예술을 함께 담은 동작들을 어떻게 팔, 다리, 목 각도는 물론이고 열과 행에 사선까지 맞출 수가 있는 건가 말이다. 오늘 내 자리가 박스석이라 지난 번 맞은 편 박스석에서 보았을 때 군무가 괜찮았어서 조금의 기대는 했지만? 사선까지 다 맞춰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보고는 멘붕이 왔는데.;;; 아라베스크 대열 이동에서 사선까지 맞는 거 보면서 퓨즈가 퍽, 하고 나가 버렸다. 이런 미친 군무를 봤나!
가늘고 여린 무용수분들께서 얼마나 수고하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다. 그런데 이런 희열을... 맛볼 수 있게 해주시다니, 유니버설 코르 드 발레 여러분. 사랑합니다♥ㅠ
에너지를 바득바득 긁어 모아 간 보람이 다 채워지고도 남았다. 이런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살 만도 하지, 그럼.
유니아트 박스석의 위력. 이렇게 가깝게 보인다.
토요 저녁 공연의 감상 포인트는 콘스탄틴 알브레히트와 강미선 지젤, 그리고 제임스 프레이저 힐라리온이다. 그동안 시종으로만 나왔었던 제임스가 힐라리온을 맡아 기뻤다. 알브레히트를 의심하며 등장하는 장면에서 고민하듯 이마에 손을 얹고 들어오는 모습과 지젤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장면 등, 세밀한 디테일은 역시 좋았다.
강미선 지젤은 2부 윌리에서 독보적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지난 번 이동탁 알브레히트와의 연기 때도 강미선 지젤이 적극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막 적극적인 게 아니라... 부끄럼도 많고 순수하고 여리여리한데, 알브레히트를 리드하는 느낌이랄까. 이동탁 알브레히트와 콘스탄틴 알브레히트의 캐릭터가 진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2부에서 강미선 지젤 윌리는 그 어떤 지젤 윌리보다도 따뜻하다. 확실히 따뜻하고, 알브레히트에 대한 배려가 깊다. 그를 살리는 데 적극적이고 애절하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알브레히트를 자신의 무덤가로 안내해서 꽃다발 근처에 머리를 뉘여 주고는 사라지는 모습이 몹시 다정했다. 2막에서의 강미선 윌리 지젤은 그야말로 바람에 날리는 천조각 같았다. 사뿐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우아하다.
사선까지 다 맞는 코르 드 발레가 주는 감동은...! ㅠ 박수 백만 개도 모자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콘스탄틴 알브레히트. 나는 콘스탄틴이 참 좋다. 비록 최근 이동탁 님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지만, 유니버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성 무용수가 콘스탄틴이다. 믿고 보는 콘스탄틴. 이동탁 님을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한데, 내가 콘스탄틴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남성 무용수의 경우 어떤 무용수는 여성을 참 잘 서포트하지만 개인적 기량이 아주 눈에 띄지는 않는다. 또 다른 무용수는 본인의 기량은 훌륭하지만 여성을 빛내도록 서포트를 할 때는 본인을 뽐낼 때 만큼 의욕적이지 않아 보여, 빛나야 할 여성 무용수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게 보인다. 그런데 이동탁 님도 그러하고 특히 콘스탄틴은, 본인의 기량을 보일 때도 높은 점프, 빠른 회전, 탄탄한 안정감, 깨끗한 선 등으로 빛이 나지만, 여성 무용수를 서포트 할 때도 참 안정감 있게 받쳐주고 높이 들어주고 잘 맞춰주어서, 그분들과 함께 하면 여성 무용수분들이 반짝반짝 더욱 빛이 나게 된다. 그래서 정말 훌륭한 무용수라 생각해. 이동탁 님과 콘스탄틴의ㅡ우열이 절대 아니라ㅡ차이점을 들자면, 이동탁 님은 정직하고 남성적인 선이 매력적이고, 콘스탄틴은 뭐니뭐니해도 낭만적이라는 점. 콘스탄틴의 무대는 늘 기대치를 채운다. 해서 고민 없이 볼 수 있다.
어제의 콘스탄틴은 기대치를 넘었다. 음. 일단 1막에서의 연기를 보자면... 콘스탄틴은 낭만적이다. 그의 모든 동작이 낭만을 말한다. 그런데 어제의 콘스탄틴 알브레히트는 뭔가 좀 슬퍼 보였다. 왜 슬퍼 보였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슬퍼 보였다기 보단 뭔가를 많이 억제하고 자제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엄격한 귀족으로서의 교육 때문이라고 느꼈다. 아니면 정직한 마음을 지닌 귀족으로서 처음부터 사랑스러운 처녀 지젤을 속이고 있는 자신이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콘스탄틴은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몹시 진지했다. 그리고 귀족으로서 기품 있었고 무게감도 굉장했다. 서두르거나 얄팍하지 않고, 진중하고도 여유로웠다. 그러면서도 시골 처녀 지젤 앞에선 사랑 한 번 못 해본 것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소년 같았다. 지젤이 가르쳐주는 귀족이 아닌 평민들의 춤 자체를 처음 접하고 그것에 매료된 것 같은 표정. 그에게 지젤은 단지 한 소녀가 아니라 그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온갖 의무들로 짓눌린 귀족의 세계에서 벗어난 평민의 자유롭고 즐거운 세계를 그는 기쁨으로 즐겼다. 그러다 바틸드를 만나고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콘스탄틴의 표정은 예의 바른 것이었지만 우울했다. 콘스탄틴 알브레히트는 바틸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무용수에 비해 키가 너무 크진 않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이 연기한 알브레히트가 가장 무겁고 진중했다. 캐릭터가 그랬다는 이야기다. 몸은 누구 못지 않게 가벼운 콘스탄틴이 아닌가. 점프 높고, 회전 빠르고, 선 아름답고. 다만 어제의 박스석에선 점프의 높이와 선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지만, 콘스탄틴의 연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콘스탄틴의 깜짝 선물! 이것이... 누구의 안무지? 마리우스 프티파? 잊어버렸는데.;; 암튼 이 버전에서는 24 바뜨리가 없다. 그래서 '알브레히트가 죽음에 이르는 춤을 춘다'는 설정이 잘 와닿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 정작 춤을 춘 것은 지젤 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파트리스 바르가 굳이 알브레히트에게 24 바뜨리를 넣어 안무를 다시 했어야 했는지를 이 버전을 보고는 이해하게 되었다. 원래 없는 버전이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젤을 따라 무대를 나가야 하는 장면에서 콘스탄틴이 무대 중앙에 섰다? 국립이 공연했던 파트리스 바르의 버전에서 알브레히트의 24 바뜨리가 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다. 그러더니... 어엇...;;; 코, 콘스탄틴이 뛰기 시작한다...? 그것도 바뜨리를 계속, 또 계속, 계속, 또 계속! 관객석 열광하고.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18회가 넘어가면서 정줄 놓고 박수 치는 바람에 몇 회인지 정확히 헤아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24는 했고, 한 25, 6회였는지도 모른다. 암튼, 예상치 못했던 바뜨리에 넋이 기어이 탈옥을 해 버렸고. 그리고는 모든 알브레히트의 동작을 다 하는 콘스탄틴. 어휴...;;; 그 뿐이 아니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막이 내려가는 순간에조차 돌아서 공중에서 점프를 계속하더라는 거. 콘스탄틴! 대체 뭘로 만들어진 인간입니까!
감동하는 거다. 콘스탄틴이 감동적인 것은, 하나라도 더 하고 더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매번 공연 때마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도 있는 힘껏,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그의 열정에 늘 가슴이 뭉클하다. 사실 어제의 그 24 바뜨리는 할 필요가 없었다. 없는 안무였어. 그런데 콘스탄틴은 했다. 그런 무용수라니. 콘스탄틴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객을 위해 늘 할 수 있는 이상의 최선을 다 하는 콘스탄틴. 또 감동해 버렸다.ㅠ
어제 콘스탄틴은 다른 안무를 많이 했다. 지젤에게 여기서 춤을 추라고 말하는 장면이라거나 에또... 몇 군데 더 있었는데. 전체 스토리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무용수별로 살짝 다른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은 여러 번 공연을 보는 관객으로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다.
그나저나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선 콘스탄틴이 끝없이 바뜨리를 뛰고 있다. 당분간 종일 계속될 것 같은데... ㅋ
2018 <지젤>이 끝났다. 믿기지가 않는다. 이제 <지젤>이 없다니.ㅠ 물론 지방 공연에서야 마밍 알브레히트도 볼 수 있다지만 지방까지 다녀와 본 결과 몸이 너무 힘들었어서 도저히 그것까지는.;; 유니버설 따라 천안과 대전에 다녀온 적이 있다. 정기공연이 아니었던 <지젤>을 본 것은 너무나 좋았는데, 귀한 주말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어서는. 국립의 <지젤>과 그 후 내내 아돌프 아당의 음악이 머리를 맴돌았다가 겨우 4-5일 다른 곡으로 채우자마자 다시 유니버설의 <지젤>이 진행되는 바람에, 요즘은 종일 지젤 음악이 메아리치고 있다. 발레 음악이 꽂히면 곤란한 것이, 소리 뿐 아니라 동작까지 영상으로 재생되는 점이다. 어제 본 콘스탄틴의 24 바뜨리가 재생되고 있어서, 내 머릿속에선 종일 콘스탄틴이 바뜨리를 뛰고 있다. 끝없이 끝없이.;;
끝날 것 같지 않던 <지젤 2018>이 끝났다. 너무 서운한데. 서운하다. 서운해.
일단 유니버설 아트센터의 박스석은 참 좋았지만, 동작을 비교 감상하기엔 힘든 좌석이었다. 표정과 연기 감상에 최적화된 좌석이다. 그리고 아끼는 무용수분들께 원 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기에 가장 좋은 자리다. 그런데... 주말 주차가 정말 너무 힘들어요. 한 시간을 주차하는 데 써야 하다니. 덕분에 식사는 날아갔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밥을 먹고 들어가려 했더랬는데. 주일 낮 세 시 공연의 주차는 그야 말로...;; 유니 아트 같은 구조의 건물이 예당 근처에 있으면 좋겠다. 다니기 너무 힘들어요.ㅠ
아쉬움은 거기까지. 이제부터 본격 후기로 들어가자.
오늘의 후기는 아무래도 주연인 김기민 님과 예카테리나 오스몰키나, 그리고 힐라리온 역 이동탁 님에 집중될 것 같다.
김기민 알브레히트는 이래서 기밍기밍 하는구나 싶었다. 작년 마린스키 <백조의 호수> 때 김기민 지그프리드를 놓쳤는데, 그때 내가 보았던 세르게이 우마넥 보다 김기민 지그프리드가 훨씬 우수한 평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속이 쓰라렸더랬다. 그리고는 드디어 본 김기민 알브레히트는 굉장했다.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장면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혼이 빼앗기는 줄. 다리만 뻗어도 작품이 되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모든 선이 깨끗하다. 너무나 정확하고 선이 예뻐서 눈동자를 뽀득뽀득 닦은 기분이 들 정도다. 길쭉한 팔다리를 뻗기만 해도 시원한데, 모든 동작이 예쁘다. 딱히 남성적이라기보단 아주 예쁜 동작을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발동작 할 때마다 살짝 안으로 굽혔다가 뻗으시는데, 그것이 동작 전체를 완성도 있게 보이게 만든달까. 기품있는 화려함으로 장식되는 동작이었다. 1막에서, 알브레히트가 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그 1막에서 지젤과 함께 하는 파 드 되. 그냥 평범하게 점프를 하시는데 관객석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나로 말하자면 '헉!!!' 하고 놀랐더랬다. 그 흔한 점프 하나를 하시는데, 아니 이 분이 허공에 솟아 올라 내려올 줄을 모르는 거다. 성큼, 너무나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점프였다. 그리고 지젤과 팔을 낀 채로 함께 동작을 하시는 모습이 예뻤는데, 여성 무용수분과 팔 다리의 각도, 타이밍, 그리고 점프의 높이를 모두 잘 맞추셔서 한 셋트 같아 보였다. 그러면서도 따로 동작을 하실 때는 높고 시원ㅡ한 점프를 뽐내셨고. 김기민 님의 점프가 특히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확인하니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점프는 처음 본 것 같아.
2막에서는 아주... 다리만 뻗어도 박수가 터졌는데, 그것이 너무 희한했던 거다. 도무지 볼 것이라곤 딱히 없을 것 같은 동작 마저 '볼거리'로 만들어 버리시는 그 뛰어난 선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선이 예쁘지? 만에 하나 바뜨리마저 하셨더라면 관객들 심장은 터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마침 바뜨리가 없는 안무였던 거지만. 모든 선이 예뻤지만 2막에선 특히 점프도 높고 회전도 빠르고 선이 너무너무 예뻐서 계속 더 보고만 싶었다. 훌륭한 무용수로구나. 마린스키 수석의 위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김기민 알브레히트가 또한 특별했던 것은, 그 누구와도 다른 알브레히트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시원시원하다. 일행은 '젊은 알브레히트'라 표현했는데, 거침 없는 젊은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자란 쾌활하고 밝은 마음을 지닌 젊은 귀족 김기민 알브레히트는 그 무엇도 고민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힘들어했다. 보통 바틸드가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밝힐 때 알브레히트는 바틸드에게 '밝히지 않을 것'을 부탁하거나, 직후 지젤이 '아니죠?'라고 안기며 물을 때 '아니야'라며 거짓으로 고개를 젓곤 하는데, 김기민 알브레히트는 어떤 거짓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지젤을 있는 마음 그대로 좋아했고, 바틸드에겐 어쩔 수 없이 예를 다했으며, 정체가 드러나자 지젤의 원망을 그대로 다 받으며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지젤의 외면하며 버리는 오만하고 차가운 귀족도 아니고, 그저 숨기며 아닌 듯 넘어가려는 바람둥이도 아닌, 자신이 가진 마음의 그 무엇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적극적이고 목소리가 큰 젊은이였다. 그런 모습으로 2막에서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그리워했고, 다시 만나 반가워했고, 고마워했다. 눈치 보거나 머리 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시원시원하게 보여주고 표현하는 젊은 알브레히트. 참 즐거웠다. 다음에 언제 또 한국 오시나요. 공중에 매달린 그 깨끗한 점프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예카테리나 지젤은 키가 크셨는데, 한 마디로 청순했다. 청순하고 맑고 우아한 지젤. 모든 선이 수직, 45도, 90도 식이어서 깨끗한 선이 즐거웠고, 이 분도 공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사뿐사뿐 옷자락이 날리듯 몸이 가벼운 느낌. 2막에서 윌리 지젤은 정말... 굉장했는데, 문 단장님의 설명을 그대로 체화해 보여주셨다. '영혼이기에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동작'을 그대로 보여주셨다. 끝없이 우아하게 움직이는 선이 확실히 1막의 육체를 입은 지젤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1막의 지젤도 가벼웠는데, 2막의 윌리 지젤은 무게가 없는 듯 보였다. 끝없이 늘어나는 팔과 다리, 허리를 표현하신 것도 놀라웠고. 다만... 2막 알브레히트와의 파 드 되 중 알브레히트가 들고서 허공으로 옮기는 안무가 있는데, 그 부분과 또 알브레히트의 서포트와 함께 하늘로 솟아 오르는 부분은 한국인 여성 무용수분들에 비해 표현법이 좀 달랐다. 그런 부분에서 한국 여성 무용수분들의 가벼움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희한하게 남성 무용수의 서포트를 받는 부분에선 무게감이 좀 느껴졌으나, 오히려 혼자서 추시는 부분에선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 역일 것 같은데 말이지. 전체적으로 선이 너무 예뻐서 황홀한 지젤이었다. 같은 마린스키에 계셔선지 김기민 님과의 호흡도 훌륭했고.
그런데 공연 때마다 무용수분들의 안무가 조금씩 다르다. 오늘 예카테리나는 바틸드와 이야기할 때 '천이 고와서요' 부분에서 파트리스 바르 버전의 안무를 사용했다. 그 뿐 아니라, 광기 부분에서 알브레히트를 스치는 장면도 빠졌고, 그 외 여기저기 안무가 조금씩 달랐다. 그처럼 다른 안무를 찾는 것 또한 보는 재미 중 하나가 된다.
이동탁 힐라리온은 연기력이...! 지젤 광기 부분과 죽었을 때 알브레히트와 싸우는 부분에서 두 분 정말...;; 진짜 싸우시는 것 같았지 뭔가. 이동탁 힐라리온은 머리와 가슴을 뜯으며 괴로워하다 막이 다 내려가는 순간까지 땅을 치며 오열하고. 무슨 연기대상 보는 줄.;; 너무나 절절한 연기에 내 가슴이 다 아팠다. 그리고 이동탁 님의 선은 남성적이다. 동작이 유연하시지만 곧고 선이 굵다. 그래서 남성적인 선을 보는 쾌감이 있다. 이동탁 님이 연기하시는 <스파르타쿠스>는 어떠할까 문득 궁금해지네.
미르타는 차가운 카리스마가 굉장하셨고. 또한 미르타도, 두 윌리도, 아 참, 1막의 페전트 커플들도 모두 선이 참 좋았다. 막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선의 향연'이었다 하겠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지젤>의 주인공인 코르 드 발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첫공 때부터 코르 드 발레는 완벽에 가까웠지만, 막공 때는 눈물이 날 뻔 했다. 이 아름답고 공이 든 발레를 올해는 더 볼 수 없다니...! 소름끼치도록 멋진 아라베스크 열 이동, 윌리 군무. 어떤 박수를 보낸다 해도 충분치 않다. 유니버설의 코르 드 발레는 최강이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