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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더블: 달콤한 악몽 Double - 혼란스러운, 그러나 납득이 가는 ★ 6/10

by Vanodif 2014. 9. 30.






















사랑하는 그녀 앞에 또 다른 내가 나타났다!
빛나는 밤, 찬란하게 재현되는 미드나잇 삼각 로맨스!

숫기 없고 요령 없는 존재감 제로 사이먼(제시 아이젠버그).
회사의 상사, 동료, 심지어 가족에게까지도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사이먼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꿈의 이상형 한나(미아 바시코브스카)를 만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제대로 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먼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완벽하게 같은 모습을 한 '분신' 제임스(제시 아이젠버그)가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자신감 넘치는 성격과 섹시한 매력을 가진 제임스는 순식간에 회사의 인기남이 되고 사이먼의 멘토를 자청하며 그를 돕지만, 이내 사이먼의 삶까지 파고 들며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같지만 서로 다른 사이먼과 제임스, 그리고 한나. '사랑' 이라는 달콤한 악몽에 빠져버린 이들의 운명은 점차 복잡해져 가는데...



↑는 네이버 검색 결과













93분짜리여선가, 심야영화를 보아도 많이 늦지 않게 들어올 수 있어 좋네.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분신』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 하여서 부랴부랴 보았다.

영화가 끝난 순간, '허어... 책을 읽고 보아도 당황스러운데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영화를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던.

아니나 다를까, 끝나자마자 마녀는 내게, '책 설명 해 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결과 책을 읽지 않은 마녀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었던.


물론 원작을 완전히 그대로 영상화한 것은 아니다. 앞뒤로 이런저런 다른 장치들을 넣었고

또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그렇게까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짝사랑' 자체를 메인 모티프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고.

또한 끝까지 직접적인 단어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는 원작에 반해

이 작품에선 끝에 명확한 이미지로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조직사회 속 소외된 개인>


도끼의 『분신』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관등'이 관료주의 사회를 비판한 것이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조직화/기계화된 사회 속 개인의 말살을 다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데, 조직 안에서 등급에 따른 차별도 물론 제시하고 있다.

'대령'의 존재가 그러할 텐데, 그 '대령'의 존재는 마치 한국영화 <설국열차>에서 말하는

맨 앞 엔진칸의 윌포드와 흡사한 존재로서,존재는 하지만 일반 직원으로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다.

회사의 모든 것을 계획, 조직하고 다스리지만 사진으로 존재하는 인물.

아마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지만?

'삼성맨'이라 해서 이건희 회장을 만난 것은 아니지 않아?ㅡ그런.

TV에서 신문에서 수없이 볼 수 있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회장'이지만 일반사원으로서는 

무슨 수를 쓴다 해도 만날 수 없고, 설사 만난다 한 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 만무한.

그런 이건희 회장은 그렇다면 일반인에게 있어 실존하는 것일까 아닐까?

존재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직접 보고 만지고 소통할 수 없는 존재라면

존재성을 증명할 수 없기에 존재가 부정되는 신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 자신의 감각 보단 타인의 판단이나 기계를 더 신뢰하는 것인가?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새었는데...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_+)


영화에서는 직원 한 명 한 명의 공간이 폐쇄적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철저하게 존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토록 철저하게 존중된 개인주의야 말로

개인의 소외를 야기하는 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옆 사람과 이야기하려면 문을 열고 나가야 하며, 의도하기만 한다면 종일 아무와도 이야기 않고

멀쩡하게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한 구조 속에서 인간의 고립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한국사회가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존중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간섭이 심하다는 점이 불만인데,

이 영화를 보니 바로 그렇게 간섭이 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소외는 그나마 덜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무엇이건 장단점이 있는데, 어느쪽의 장점이 더 큰 걸까.







<외로움>


'외로움'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 핵심요인, 일 것이다.

외로움으로 인해 초반의 자살자는 죽었고

주인공 사이먼도, 그의 짝사랑을 받는 한나도 모두 외로운 인간들이다.






<자아분열> 스포일링 심각!


분열된 자아가 등장하는 이유가 무얼까?

『분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소심한 자기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픈 욕구, 가 아닐까 한다.

사이먼이 대령에게 무리해서 자신의 다른 모습에의 가능성(This is not me, sir!!!)

에 대해 절규힌 직후 제임스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작은 골랴드낀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갇혀있는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실체화된 것이 제임스라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녀는 처음에는 사이먼(원 주인공)이 죽고, 제임스(분신)이 사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제임스가 아닌 사이먼이 침대에 묶여 죽게되는 인물이라면

분신인 제임스로서는 자신이 등장하기 전, 자살자 사건에서 형사가 한 이야기ㅡ천막 위 지점에서 떨어진다면

몸이 튕겼다가 다시 옆의 바닥으로 떨어지므로 병원에서 치료만 한다면 반신불구로라도 살아날 확률은 있다ㅡ

를 적용해 보호그물 위로 떨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갇혀있는 자아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 자아분열은, 

자신에게 그동안 큰 스트레스가 되었던 어머니의 장례식 현장에서

제임스가 사이먼의 '분신'임을 처음 깨닫게 됨으로 '해결'로의 물꼬를 트게 된다.

하여, 사이먼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제임스의 목을 확인한 후, 그가 움직이거나 치료받을 수 없도록 

침대에 손을 수갑채우고는 뛰어내리기 직전 자신의 얼굴을 그어, 잠든 제임스를 깨운다.

그리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향으로 뛰어내리는데, 그리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제임스(분신)을 죽이게 된다.

이것은 지나친 외로움으로 인해 시작된 정신분열로부터 사이먼이 벗어나게 됨을 의미하는데,

물론 그 원인은 사랑에의 가능성일 것이다.


아, 말이 꼬이는데...;;


그러니까 『분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제임스는 사이먼이 되고 싶었던, 그러나 결코 흉내낼 수 없었던

내적 욕망의 구현체였지만, 작품 내도록 제임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과 똑같은 어떤 인물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껴 기뻐했을 것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신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자,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 절망은 바로, 동경의 대상이자 원수인 그 분신이 바로 자기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제임스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제임스를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제임스는 결국 자신이었으므로, 이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자신이 동경했던 제임스의 특성을

자신의 것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될 테지.

문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살아난다 하더라도 반신불구가 아닌 온전한 모습일 수 있느냐, 일 것인데

감독은 그것에 대해서는 결말을 열어두고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문제라 하여도, 그 문제의 '실체'를 낱낱이 알 수 있게 된다면 해결은 찾을 수 있겠지.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다...

『분신』감상 마저 써야 하는데... ㅜㅠ






감독은 처음 보는 감독입니다.

배우들도 처음 보는 배우입니다.

주인공ㅡ누구요?ㅡ제시 아이젠버그는 상당히 괜찮은 마스크를 지녔는데

그의 마스크 덕분에 영화가 그나마 덜 지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분신』에서의 골랴드낀은 참 보잘 것 없는 외모를 지닌 사람이거든.


제시 아이젠버그의 1인2역 연기력은 일품이다.

찌질한 사이먼을 연기할 때는 정말이지 애처로워 한숨이 나올 정도로 찌질한데,

쾌활하고 사교적인 바람둥이 제임스 역을 할 때는 너무나 매력적인 남성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사이먼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지만,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하나의 맛이다.


여주인공ㅡ누구요?ㅡ미아 와시코브스카는 호주 출신 배우라는데, 다른 사진을 보니 그저 그렇더라,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귀네스 팰트로우를 연상시켰다. 금발이 썩 잘 어울리는데?

건조한 마스크를 좋아하는 편이어서는.

남녀 주인공 모두 눈이 즐거웠다.


작품 속 음악이 참 독특했는데...


아니, 이 작품 자체가 다국적이랄까.


러시아 작가의 원작에, 영국인 감독, 미국인 남주와 호주인 여주.

레스토랑에선 중국복장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흘러나오는 음악은 일본음악.

그리고 엔딩노래는 심지어 한국노래다?


참...*


그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알고 싶어서 서서 음악을 계속 들었는데

듣다 보니 내 취향이 전혀 아니어서 그냥 나왔다.

보통은 엔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음악을 감상하는 편인데

아...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마녀를 위해

ㅡ이기도 하고 나도 피곤.






"이 영화 꼭 오늘 밤에 봐야 해!"라 말했을 때 내일 출근 때문에 투덜대던 마녀는

헤어지면서 "참 괜찮은 영화를 덕분에 보았네.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래, 이런 영화라면 돈쟁이 센트럴시티 메가박스는 금세 내릴 것이니

오늘 밤 당장 보는 것이 맞았네"라고.


혼란스러운데도 시시하지 않은 영화.

괜찮은 영화를 보았다.







<자신 안에 갇힌 자에게 있어 어쩌면 유일한 구원, 자아분열>

ㅡ 지금 든 생각인데 에너지 고갈. ㅜㅠ





※ 후첨 : <더블>에서의 '대령' 이미지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가난한 사람들』에 나오는 '각하'와 연결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읽고 난 뒤, 이 영화는 『분신』에 『가난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결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