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천재 푸네스
나는 손에 거무스레한 시계풀을 들고 있는 그를 기억한다. (내게는 이 성스러운 동사를 말할 자격이 없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그럴 자격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죽었다.) 그는 한평색 내내 황혼에서 여명까지 그 꽃을 바라보았지만,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 꽃을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담배 연기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던 원주민의 모습을 한, 과묵하고 매우 '아득하게' 느껴지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나는 가죽 꼬는 사람의 손처럼 가냘픈 그의 손을 기억한다, 혹은 생각한다.(생각한다). 또한 손 가까이에 놓여 있던 우루과이의 문장이 새겨진 마테 찻잔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집 창문에 드리운, 호반 풍경이 희미하게 그려진 노란 짚으로 마든 블라인드를 기억한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뚜렷이 기억한다. 그 목소리는 요즘 이탈리아 사람들의 바람 새는 소리가 섞이지 않은, 옛날 불량배들의 느리면서도 성마른 콧소리였다. 나는 그를 단지 세 번 만났을 뿐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887년이었다....... 나는 그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이 그에 관한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에 몹시 행복하다. 내 증언은 아마 그중 가장 간결하며 틀림없이 가장 빈약한 것일 테지만 당신들이 출판할 책 가운데 가장 편파적인 축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아르헨티나 사람이기 때문에, 우루과이 사람을 주제로 삼을 때 우루과이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장르인 디티람보에 경도되지는 않을 것이다. 푸네스는 나를 향해 '배운 놈', '겉멋 든 놈', '도회지 놈'과 같은 모욕적인 언사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내가 그에게 충분히 그런 재수 없는 부류로 보였으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루과이의 시인인 페드로 레안드로 이푸체는 푸네스가 초인간들의 선구자였으며 "독자적이며 토착적인 차 라투스트라"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점에 관해 토론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또한 어느 정도 고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프라이 벤토스의 거친 길거리 사나이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푸네스의 첫인상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1884년 2월, 혹은 3월의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를 만났다. 그해에 우리 아버지는 나와 함께 프라이 벤토스로 휴가를 보내러 왔다. 나는 사촌인 베르나르도 아에도와 함께 산 프란시스코 농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있었다. 말을 탔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즐거워한 것은 아니었다. 무더운 한낮 더위가 지나자, 청회색의 커다란 폭풍이 이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남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이미 나무들은 미친 듯이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이 황량한 벌판에서 폭우가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아니면 희망)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폭풍과 경주를 벌이듯이 뛰어갔다. 우리는 좁은 거리로 들어갔다. 그 좁은 거리는 깊은 하천 바닥 같았는데 그것은 길 양쪽으로 벽돌이 깔린 아주 높은 두 개의 보도가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내 위쪽으로 재빠르고 거의 비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들었고, 좁고 부서진 담벼락 위리ㅡㄹ 달리듯이 좁고 부서진 복도를 뛰어가던 한 소년을 보았다. 나는 가우초들이 입는 헐렁한 바지와 샌들을 떠올리고, 그떄는 벌써 끝없이 펼쳐 있던 먹구름 속에서 그의 과묵한 얼굴에 몰려 있던 담배를 떠올린다. 뜻밖에도 베르나르도는 그에게 "이레네오, 몇 시야?"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는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은 채, "베르나르도 후안 프란시스코 청년, 8시 사 분 전이야."라고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비웃는 듯했다.
나는 주의력이 산만해서 내 사촌이 환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언급했던 그들의 대화는 내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내 사촌이 자기가 살고 있던 지역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느끼면서, 상대방이 자기 이름을 셋으로 구분해 대답한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애써 보여 주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에게 좁은 도로에서 만난 그 아이는 아무와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으며 항상 시계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알고 있고 몇몇 기괴한 행동으로 익히 알려진 이레네오 푸네스라는 소년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 소년은 마을에서 다림질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마리아 클레멘티나 푸네스의 아들인데, 어떤 사람은 그의 아버지가 염장 공장의 의사인 영국인 오코너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살토 지방에서 일하는 조련사나 마부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푸네스는 라우렐레스 가족의 별장 모퉁이에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1885년과 1886년에 우리는 몸테비데오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그래서 188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프라이 벤토스로 다시 돌아왔다. 당연히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부를 물은 다음, 마지막으로 '정밀 시계와 같은 푸네스'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가 산 프란시스코 농장에서 야생마가 그를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전신 마비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나을 가망성이 전혀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내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마술과 같은 인상을 받은 것이 떠오른다. 나는 그를 단 한 번 보았고, 당시 우리는 말을 타고 있었으며, 그는 높은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내 사촌 베르나르도가 』전해 준 바에 따르면, 그 사고는 기존의 여러 요소들로 만든 꿈같은 구석이 상당히 많았다. 또한 나는 푸네스가 간이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으면서 항상 뒤뜰에 있는 무화과나무나 거미줄을 주시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해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에 오히려 행운이라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두 번에 걸쳐 쇠창살 문 뒤에 있는 그를 보았는데, 그것은 영원한 죄수 신세가 되어버린 그의 처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 번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으며, 또 한 번은 역시 움직이지 않은 채 향기로운 산토닌 나뭇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약간 잘난 체하면서 라틴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 여행 가방 안에는 르몽의 『로마의 유명 인사들』과 퀴셰라의 『지식의 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논평서들과 나의 보잘 것 없는 라틴어 실력으로는 힘에 겨운 (갈수록 버거워져가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1권이 들어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는 모든 소문이 금방 돌기 마련이다. 변두리 오두막집에 있던 이레네오도 이러한 외국 서적들이 도착했다는 것을 얼마 안 있어 알게 되었다. 그는 화려하면서도 거창한 문체로 편지 한 통을 내게 보냈는데, 거기에서 1884년 2월 7일에 유감스럽게도 몹시 짧았던 우리의 만남을 회상했으며, 또한 같은 해 돌아가신 작은아버지 그레고리오 아에도가 "이투사잉고의 용감한 전투에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위해 바친" 혁혁한 공로에 대해 짧으면서도 슬픈 어조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라틴어를 모르니 원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전과 함께 가지고 있는 라틴어 책들 중에서 아무것이나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그 책들을 원래의 상태로 거의 즉시 되돌려 줄 것을 약속했다. 그의 필체는 완벽했으며 보기 드물 정도로 가지런했고, 철자법은 유명한 언어학자 안드레스 베요가 권장하고 있는 것처럼 y 대신 i를, g 대신 j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 나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내 사촌들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며, 그것은 이레네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그 힘든 라틴어를 배우는 데 사전 이외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 없다는 그의 생각이 뻔뻔스러운 자부심 때문인지, 아니면 무식하거나 바보 같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어리석음을 완전히 깨우쳐 주기 위해 퀴셰라의 『시작법을 위한 발걸음』과 플리니우스의 작품을 보내주었다.
2월 14일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버지의 상태가 "전혀 좋지 않으니" 급히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위급한 전보의 수신인이 되었다는 특권과 프라이 벤토스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의 부정적인 내용과 다급하다는 부사 사이의 모순을 전하겠다는 욕심, 그리고 사내답게 고통을 참아내는 듯이 위장하면서 나의 고통을 극적으로 만들겠다는 유혹 때문에, 아마도 내가 진정한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행 가방을 꾸리면서 나는 『사직법을 위한 발걸음』과 『박물지』 1권이 없음을 꺠달았다. 사투르노 호는 다음 날 아침에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날 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푸네스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저녁 날씨도 낮의 더위처럼 후덥지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푸네스의 어머니가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레네오는 뒷방에 있으며, 그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레네오는 촛불을 켜지 않고도 시간을 보낼 줄 안다고 덧붙였다. 나는 타일이 깔린 앞뜰과 조그마한 복도를 지나 중간 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포도 덩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칠흑같은 어둠처럼 보였다. 그 떄 갑자기 이레네오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라틴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연설문이나 기도문, 혹은 주문 같은 것을 섬뜩할 정도로 천천히 음미하면서 낭송하는 중이었다. 흙이 깔린 뜰에 로마의 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그 말은 이해 불가능하고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다음 그날 밤 긴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 말들이 『박물지』의 7편 24장에 나오는 첫구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장의 주제는 기억이었으며, 마지막 말은 "한 번 들었던 말을 정확하게 반복할 수는 없다"였다.
목소리의 억양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이레네오는 나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는 간이침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여명이 비칠 때까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불현듯 빨갛게 타들어 간 담배를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방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눅눅한 냄새가 났다. 나는 앉아서 전보의 내용과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 다시 그에게 말했다.
이제 나는 내 이야기의 가장 어려운 부분에 이르렀다. 독자가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이것은 이미 반세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의 줄거리에 불과하다. 나는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그의 말을 그대로 재생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이레네오가 내게 말했던 많은 것들을 충실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간접 화법은 거리감이 있고 어조가 약하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그날 밤 나를 간헐적으로 압도했던 그 시간들을 상상으로 채워주기 바란다.
이레네오는 라틴어와 스페인어로 『박물지』에 기록된 경이적인 기억력의 사라ㅖ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를 테면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자기 부대에 있는 모든 병사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으며, 미트리다테스 에우파토르는 자기 제국에서 사용하는 스물 두 개의 언어로 법을 집행했고, 시모니데스는 기억술의 창안자이며, 메트로도루스는 단 한 번만 들은 것을 정확히 반복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그는 이러한 예들이 경이롭다는 사실에 솔직하게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 푸른색 얼룩무늬의 말에서, 떨어진 비 내리던 저녁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기도 장님이며 귀머거리였고 얼간이였으며 건망증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시간을 정확히 감지하고, 사람 이름을 기억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했지만, 그는 내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십구 년 동안 그는 꿈을 꾸듯 살아왔다는 것이다. 즉, 보지 못한 채 보았으며, 듣지 못한 채 들었으며, 모든 것,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상태였다고 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그는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 현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굉장히 풍요로웠고 굉장히 선명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기억도 명확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음을 알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없게된 것은 최소한의 대가라고 합리화헀다. 아니, 그렇게 느꼈다. 이제 그의 지각력과 기억력은 완전해져 있었다.
우리는 한 눈에 탁자 위에 있는 세 개의 컵을 감지하지만, 푸네스는 포도 덩굴에 달린 모든 포도알과 포도줄기, 그리고 덩굴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1882년 4월 20일 동틀 무렵 남쪽 하늘의 구름 모양을 알고 있었으며, 기억 속의 구름과 딱 한 번 보았을 뿐인 어느 책의 가죽장정줄무늬, 혹은 케브라초 전투 전야의 네그로 강에서 어떤 노가 일으킨 물보라를 비교할 수 있었다. 그런 기억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시각적 이미지는 근육 감각이나 체온 감각 등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꿈이나 선잠을 자면서 본 모든 것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두세 번에 걸쳐 그는 하루 전체를 완전히 재구성했다. 전혀 머뭇거림이 없이 진행된 이런 재구성에는 꼬박 하루가 걸리곤 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 지니고 있는 기억이 이 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인간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억보다 더 많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꿈은 당신들이 깨어 있는 상태와 같지요." 또한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에는 "내 기억은 쓰레기 더미와도 같지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칠판에 그린 원주와 직삼각형, 마름모꼴, 이런 것들은 우리가 완벽하게 인지할 수 있는 형태들이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이레네오에게는 어느 망아지의 헝클어진 갈기, 어느 산등성이에 있는 조그만 가축 떼, 너울거리는 불길과 그 불길의 셀 수 없이 무수한 재, 장례식장에서의 기나긴 밤 동안 수없이 바뀌는 죽은 사람의 얼굴 등에서 나타난다. 나는 그가 하늘에서 얼마나 많은 별들을 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그런 사실을 내게 말해 주었고, 그 당시에나 그 후에나 난 그것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촬영기사나 축음기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지 아무도 푸네스와 같은 실험을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같으며 믿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룰 수 있는 모든 것을ㅇ 뒤로 미루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죽지 않을 것이며, 조만간 모든 인간들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될 것이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푸네스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말을 이었다.
그는 1886년경에 독창적인 숫자체계를 고안했으며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숫자가 이만 사천 개를 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적어놓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한 모든 것, 심지어 딱 한 번만 생각한 것이라도 그의 기억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이런 숫자체계를 고안하도록 가장 먼저 자극한 것은 서른세 명의 우루과이 독립투사들을 칭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단어와 하나의 기호 대신에 두 개의 기호와 세 개의 단어가 필요하다는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7013 대신에 (가령 예를 들자면) '막시모 페레스'라고 했고, 7014 대신에 '철도'라고 했으며, 다른 숫자들은 '루이스 멜리안 라피누르', '올리마르', '유황', '카드', '고래', '가스', '냄비', '나폴레옹', '아구스틴 데 베디아' 등이라고 했다. 그는 500 대신에 '아홉'이라고 말했다. 각 단어는 특별한 숫자, 바로 일종의 부호를 갖는데, 따라서 마지막 단어들의 부호는 극도로 복잡했다....... 나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단어들의 광식곡은 숫자 체계와 정반대에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365라고 말하는 것은 세 개의 100과 여섯 개의 10, 다섯 개의 1을 말하는 것이며, '흑인 티모테오'나 '퉁퉁한 살' 같은 '숫자'에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분석적 성격이 있다고 지적했다. 푸네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17세기에 로크는 각각의 사물, 즉, 각각의 돌, 각각의 새와 각각의 나뭇가지가 고유한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불가능한 언어를 제안했다(그러고는 그 생각을 폐기했다_. 푸네스는 한 때 이와 유사한 언어를 계획했지만, 그 언어가 너무도 개략적이고 모호해서 그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사실 푸네스는 각 산에 있는 각각의 나무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지각하거나 상상했던 때 느낀 각 순간의 인상마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살았던 과거의 하루하루를 칠만여 개의 기억으로 축소시킨 다음, 숫자로 규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끝이 없으며 쓸모없을 것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단념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유년 시적의 모든 기억을 분류하는 작업조차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지적한 두 가지 계획(자연수를 지칭하기 위한 무한한 어휘집과 기억의 모든 이미지에 대한 무의미한 정신적 목록)은 어리석기 짝이 없고 심지어는 황당한 짓이지만, 동시에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푸네스의 놀라운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엿보거나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에게는 일밙거인 사고, 즉 플라톤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라는 속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했다. 또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손을 보고 매번 놀라기도 했다. 스위프트는 소인국 릴리푸트의 황제가 시계의 분침운동을 분간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푸네스는 소리 없이 곪아가는 잇몸과 충치와 피로를 계속해서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진행되거나 습기가 차오르는 과정도 관찰했다. 그는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순간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세계를 지켜봅는 외롭고도 명민한 관객이었다. 바빌로니아, 런던 그리고 뉴욕은 잔혹한 광채로 인간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다. 그런 도시의 혼잡한 고층 빌딩과 분주한 거리에서는 그 누구도 남아메리카의 가난한 변두리에서 불쌍한 이레네오에게 밤낮으로 집중되고 있던 지칠 줄 모르는 현실의 열기나 압력 같은 것들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잠을 자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푸네스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어둠 속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는 바로 그 집들의 장식 쇠시리와 벽의 균열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가장 하찮은 것도 우리가 지각하는 육체적 희열이나 육체적 고통보다 더 상세하고 생생했다). 동쪽으로 앚기 구획정리가 되지 않은 지역에 푸네스가 알지 못하던 새집들이 있었다. 그는 그 집들이 동일한 어둠으로 만들어져 있고, 검은새이며, 뺵빽하게 모여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그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 잠을 자곤 했다. 또한 물살에 의해 흔들렸다가 잠잠해지는 강바닥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라틴어를 배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사고하는 데는 그리 훌륭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본다. 사고라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푸네스의 비옥한 세계에는 상세한 것들, 즉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세세한 것만 존재했다.
새벽빛이 조심스럽게 흙으로 뒤덮인 정원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때 밤새도록 내게 이야기했던 목소리의 얼굴을 보았다. 1868년에 태어난 이레네오는 열아홉 살이었지만, 내게는 이집트보다 더 오래되고 예언서 피라미드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동상처럼 근엄해 보였다. 나는 내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 (나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의 무자비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쓸데없는 몸짓들을 증식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레네오 푸네스는 1889년에 폐울혈로 세상을 떠났다.
194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