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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Book Review

알렉산드르 푸슈킨, 『예브게니 오네긴』

by Vanodif 2017. 11. 23.

알렉산드르 오네긴, 『예브게니 오네긴』, 을유문화사, 김진영 옮김




줄거리: 모스크바 댄디 한량인 예브게니 오네긴과 시골의 순수한 아가씨 타티아나의 타이밍이 어긋난 사랑 이야기




아래 내용에는 심각한 스포일링이 있으니 책을 읽을 사람은 읽지 않으시기를 권합니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귀족이자 댄디 한량인 예브게니 오네긴은 사교계의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던 중 시인이자 미남인 청년 블라디미르 렌스키와 함께 시골로 간다. 렌스키는 시골집 이웃의 아름다운 아가씨 올가와 사랑에 빠지고, 오네긴은 올가의 언니 타티아나에게 흥미를 느낀다. 미인이 아니지만 여성들의 흔한 관심사인 사교계나 연애, 수다에 관심이 없고 홀로 독서를 즐기는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밤새 연애편지를 써서 그에게 보낸다. 순수한 타티아나의 열정적인 고백을 받은 오네긴은 마음 속 열정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지만, 결혼할 생각 없이 자유를 누리고픈 마음에 타티아나를 찾아가 거절한다. 타티아나의 명명일 파티가 다가왔고, 오네긴은 렌스키의 종용에 못이겨 파티에 참석한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불편한 표정에 마음이 상한 오네긴은 렌스키가 사랑하는 올가를 붙잡고는 중요한 춤곡 모두 춤을 춘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렌스키가 다음날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결투 중 렌스키는 사망한다. 이 일에 스스로 충격을 받은 오네긴은 그곳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여행하게 된다. 연인의 죽음을 슬퍼하던 올가는 새로운 사랑을 고백한 청년과 결혼을 하고,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잊지 못해 모든 청혼을 거절한다. 그녀를 걱정한 어머니가 모스크바 사교계로 타티아나를 데려오고, 모스크바 사교계의 화려하고 세련된 여성들과는 너무나 다른 매력을 지닌 타티아나는 그녀에게 반한 상이용사이자 신분 높은 귀족과 결혼한다. 2년이 지나 방황도 지겨워진 오네긴이 모스크바로 돌아와 사교계를 방문한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 여성이자 자신 친구의 아내가 바로 타티아나임을 발견한 오네긴은 비로소 타티아나를 향한 열렬한 사랑을 느낀다. 오네긴은 열정적인 사랑의 편지를 써서 타티아나에게 보내지만 그녀는 냉담하다. 결국 참다 못한 오네긴이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 자신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 흘리는 타티아나를 보게 된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내 남편을 떠나지 않겠으니 당신이 나를 떠나라' 말하며 뒤돌아 나간다. 타티아나의 남편이 방에 들어오고 글은 끝난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오네긴> 공연을 위해 이 책을 사서 읽었다. 푸슈킨은 시 두어 점 읽었을 뿐 찾아 읽은 적이 없는데,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독일의 괴테, 이탈리아의 단테에 비유되는 러시아의 작가란 설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톨스토이나 도스또예프스끼보다 더욱 인정받는 작가였단 말인가 싶고. 덕분에 읽은 책은 꽤 재미있었다.


이 글은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과 발레 <오네긴>으로 재창작되었는데, 아무래도 공연예술의 제약이 있는 만큼 공연의 내용은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사랑이야기로 국한될 수 밖에 없지만, 책 속에는 철학, 예술, 정치, 역사 등 다양한 것들이 녹아 있어 풍성하게 읽을 수 있다. 역자 김진영 님에 따르면 <오네긴 사전>이 있다 할 정도로 수많은 예술가, 철학가, 사상가들의 이름과 책 이름이 나열된 이 책은 적지 않은 양의 주석이 달려 있으며, 특히 을유문화사의 책에는 푸슈킨 본인이 수정하기 전에 썼던 내용이 주석에 실려 있어, 생략된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 본인이 삭제한 부분은 읽지 않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여 읽지 않았지만.


러시아 문학은 열린책들이 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 어지간하면 열린책들 버전으로 사려고 했으나, 내가 다니는 반디 센트럴시티점에는 열린책들 버전이 없었다. 해서 을유문화사의 책 앞의 두어 장을 읽었더니 번역이 맘에 들어서 구입했는데, 다 읽고 나니 상당히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산문 소설'이라 자부했던 푸슈킨 본인의 말대로 산문, 즉 '시'로 만들어진 소설이기에 일반 소설과는 문장과 표현이 다를 수밖에 없었겠는데,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해서 소리를 내어 읽었더니 꽤나 읽는 맛이 돌도록 맛깔나게 번역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음보를 조금 더 맞춰 주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더랬는데, 아니나다를까 역자의 후기에 그것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운율과 각운에 충실하려니 원작의 명쾌함과 경쾌함이 살지 않아 포기하셨다는 말씀. 확실히 이 번역이 무겁거나 고답적이지 않으며 쉽고 예쁘게 읽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번역하셨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도 러시아 문학에서 '김진영'이란 번역가의 이름을 대하게 된다면 다시 한 번 들어댜 보게 될 것 같다. 러시아어 쪽으론 꽂히는 번역가를 찾지 못했더랬는데, 모처럼 맘에 드는 번역가를 알게 되어 몹시 기쁘다. 번역가 본인께서 쓰셨듯 이 번역은 간결하다. 그리고 내가 읽기엔 명징성이 돋보이는 번역이기도 하다. 적확한 어휘를 고른 명징성이 돋보이는 것이고, 또한 조사와 동사를 적절히 생략하여 압축성과 간결성이라는 시 특유의 극장점이 부각되었다. 거기다 운율을 포기했다셨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리드미컬해서는 소리내어 읽기에 즐거운 번역이었다.


번역에 대한 글을 길게 쓰진 않는데, 맘에 꼭 드는 번역가를 만나는 일이 너무나 드문 일이다 보니 흥분하게 되었다. 프랑스문학 이세욱, 일본문학 김난주, 양억관 님에 러시아문학 김진영 님이 추가되었다. 고맙고 기쁜 일입니다.



저녁때면 가끔씩

마음 좋은 이웃들.

적의 없는 친구들

모여들어 이것저것 개탄하고,

험담하고, 웃어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올가에겐 차 준비 시키고,

저녁 먹고, 취참할 시간 되고,

그러면 손님들은 돌아갔다. (p74)



입에 짝짝 붙는 번역. 그리고 다음은 마음을 두드린 작품 속 구절 몇 개를 싣는다.



하지만 난 행복을 위해 태어나지 못했으니 

내 영혼은 행복이 낯설기만 할 뿐이오. (p120)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에서였던가, '행복에도 불안을 느끼는 겁쟁이'라 말한 적이 있지. 행복이 낯설고 두려운 종족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할 일 없어' 친구가 되기도 한다. (p60)



그래. 좋다. 친구처럼 헤어지자.

내 날렵한 청춘이여!

네가 준 기쁨들과

슬픔과 기분 좋은 고통들과

소음과 폭풍과 술자리들.

그 모든 것. 네가 내게 준 모든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감사한다.

불안한 가운데도 고요한 가운데도

나는 너를 즐겼었다... 부족함 업이.

그러면 됐다! 맑은 마음으로

이제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

예전의 삶에서 휴식을 취하련다. (p206)



그러나 우리에게 젊음은

헛되이 주어졌음을.

우리는 언제나 젊음을 배반하고

젊음은 우리를 기만했음을.

최상의 욕망들과 신선했던 꿈들이

비 내리는 가을날 낙엽처럼

하나하나 순서대로 썩어 갔음을

생각하면 슬프도다.

우리 앞엔 똑같은 식사의

기나긴 행렬만 남아 있고,

인생을 의례로 간주하여

견해도 열정도 공유하지 않으면서

격식 차린 군중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건

견디기가 어렵도다. (p254)



※ 한 군데, 215쪽 12번 '올가'가 '올랴'로 오타되어 있습니다.








김진영 님은 이 작품을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글'이라 여긴다고 쓰셨는데, 그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내게는 '어긋난 타이밍'이 무엇보다 크게 인식되었다. 제아무리 큰 사랑을 두 사람이 동일한 양으로 서로를 향해 갖고 있다 하더라도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면 관계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크다면 그 큰 마음으로 몸 편하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와 맞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데 그 큰 마음의 에너지를 써야만 비로소 관계가 연결되는 것인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원한다면서 이 점을 간과하여 사랑을 놓치는 것을 보아왔다. 몇 년 전 그 '타이밍'에 관해 나와 다른 견해를 지닌 이가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그의 '타이밍을 넘어서는 마음의 강렬함'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는 바로 그 어긋난 타이밍으로 인해 결국 연결될 수 없었던 사랑이 다루어져 있어, 나로서는 읽고 나서 묘한 상념에 빠져드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발레 <오네긴>을 보면서 다시금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리게 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