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Bednye Liudi
************ 다음의 줄거리는 개인의 기억저장을 위해 기록한 것으로, 지나친 스포일링이 있으니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은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
<줄거리>
가난하고 나이 많은 하급관리 마까르 제부쉬낀(알렉세예비치)는 옆건물에 사는, 젊고 가난하고 병약한 아가씨 바르바라 도브로셀로바(알렉세예브나)(바렌까)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을 걱정하고 아끼며 돌본다. 가난한 바르바라를 위해 자신의 옷과 물건들을 팔아가며 그녀에게 돈과 설탕을 보낼 뿐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책까지 선물하는 마까르를 바르바라는 늘 걱정하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 돈을 써가면서 결국 마까르는 파산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무렵 바르바라도 금전적으로 몹시 힘들게 되는데, 이런 악재 속에 두 사람에 대한 적절하지 않은 소문이 돌면서 둘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런 고통의 나락 속에 마까르는 술에 손을 대어 더욱 사람들의 멸시를 받게 된다. 그러다 그의 직업인 정서하는 일에 큰 실수를 하게 되어 각하에게 불려갔는데, 그의 지나치게 낡은 옷과 비참한 복장을 보고 각하는 마까르에게 큰 돈을 주며 격려를 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마까르의 잃어버린 자존감이 회복되며 점차 많은 일이 들어오게 된다. 바르바라에겐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을 때 병약한 어머니와 바르바라를 돌보는 척 괴롭혔던 먼 친척 안나 표도로브나의 집에 산 적이 있었다. 괴롭힘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아마도 경박한 시골 지주 비꼬프에게 바르바라를 팔아 넘기려 했던 것 같다. 해서, 바르바라에겐 그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데, 바로 이 시점에 비꼬프가 바르바라를 찾아와 청혼을 한다. 비꼬프는 결혼을 해야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기에 바르바라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라면서, 그녀가 자신과 결혼을 한다면 큰 금액을 지금껏 그녀를 돌보아주었던 마까르에게 지불할 것이며, 또한 평생 자기 옆에서 부유하게 살게 될 것이지만, 그녀가 그 청혼을 거절한다면 자신은 다른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고민하던 바르바라는, 때마침 마까르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청혼을 승낙한다. 그러나 결혼준비를 하는 과정에 지주 비꼬프는 바르바라가 자신의 돈을 너무 많이 축낸다며 그녀에게 계속 화를 낸다. 결혼식 직전이 되어서야 마까르는 부랴부랴 바르바라를 말리고, 결혼식 당일에 바르바라가 보낸 작별의 편지에 대해 마까르가 끝까지 마음을 돌리기를 권고하는 편지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작품에 대한 객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해석은 책 뒤에 실려 있는 번역가 석영중 님의 분석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도끼 씨 책을 읽었지만 아직 미숙하기도 했고, 작가나 작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추천도서'란 이유로 읽었던 것이기 때문에, 명작이라 불리우는 도끼 씨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기는 커녕, 책장을 간신히 따라가기도 벅차했었던 기억이다. 해서, 나는 도끼 씨 작품을 두어 점 읽었으나 읽은 것은 단순히 행위의 기록에 지나지 않을 뿐, 작품에 대한 이해는 전무한 상태일 뿐 아니라, '몹시 지루하고 난해한 작가'라는 편견이 박혀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도록 도끼 씨 만큼은 다시 잡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거더라. 어린 시절의 뾰족한 혈기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기성세대의 많은 불합리한 점들을 납득하게 되는 것. 물론 납득한다 해서 꼭 채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어 극심한 이질감과 괴리감에 고통스러워했던 많은 것들로부터 이제는 좀 자유로워졌달까. '나라면 이 선택을 결국 하지는 않겠지마는, 그들은 어쩔 수 없을 수 있었겠구나' 이런.
또 시작부터 쓸 데 없는 말을 했네. -_-; 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명작'이란 타이틀이, 시간이 흐르고 사람과 삶을 경험할 수록 납득이 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해서 이제는, 과거 내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명작'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세월이 지나 한 번 정도는 다시 진지하게 읽어 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 를 체득했달까. 해서 늘 도끼 씨 작품은 다시 읽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 자꾸 책 내용과 관련 없는 이야기만... 오늘 글이 왜 이래.
이 책은 발표 직후 당시 대평론가 V.G. 벨린스끼의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새로운 고골'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을 정도로 이 작품은 널리 인정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도끼 씨는 자만과 허영에 부풀게 된다. 나는 고골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도끼 씨 작품을 읽다 보니 고골 씨의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좋았겠다ㅡ싶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고골의 「외투」에서 지독하게 가난한 하급관료, 라는 모티프를 따왔고, 『분신』은 고골의 「코」에서 분신의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한다. 차이점이라면, 고골 씨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하층민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희극적이고 환상적인 그로테스크문학을 창조한 것이라면, 도끼 씨의 경우 하층민의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자연주의적 테마를 심리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는 것이 석영중 님의 견해다. 아직은... 두 권 만으로는 그렇게까지 깊은 심리적 장치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나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같은 다른 자연주의 작품들과는 차이가 나기는 한다. 좀 더 읽어보면 확연히 알게 되겠지.
『분신』과 달리 이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읽고 나서 별로 의문점이 들지 않는다. 해석이나 분석이 어렵진 않아. 해서 마지막 문장을 읽은 직후, '이 작품이 그토록 엄청난 찬사를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가 의아했었는데, 이후 석영중 님의 글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읽고는 이해가 되었다. 밑바닥을 치는 가난 속에서도 상대에 대한 연민과 사랑, 걱정과 지적 욕구, 품위와 인간애를 잃지 않는 휴머니즘이 주는 감동, 이라나. 음... 나는 자연주의 작품을 굉장히 힘들어하는 유형이어서는, 읽는 중에는 답답한 마음이 더 많았었지만, 확실히 책을 덮은 후 답답함과 비참한 기분 중에도 뭔가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자연주의 작품들과는 다르긴 해. 그것이 '감동'이겠지.
『분신』을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이『가난한 사람들』에서도 『분신』과의 연결점을 느낄 수 있었는데, 7월 28일과 8월 3일 바르바라에게 보내는 마까르의 글에 등장하는 예멜리얀 이바노비치라는 인물이 『분신』의 골랴드낀을 연상시켰다. 7월 28일에서 예멜리얀을 처음 만난 것에 대한 묘사는 마치 큰 골랴드낀이 작은 골랴드낀을 처음 만난 장면과 흡사하며, 8월 3일자 편지에서는 아예 제 2의 예멜리얀 이바노비치가 등장한다. 어쩌면 『분신』에서는 이 작품에서 음영처럼 잠시 언급하고 넘어갔던 예멜리얀 이바노비치의 동명이인 모티프를 '분신'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 또한 재미난 한 가지는, 『분신』을 영화화한 작품이라 하는 영화 <더블: 달콤한 악몽 The Double>은 어쩌면 『분신』에 『가난한 사람들』을 접목시킨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각하'가 바로 <더블>에 등장하는 '대령'과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의 주인공 마까르는 『분신』에서 골랴드낀으로 연결되는 인상을 받았는데, 『분신』에서 처음에 어째서 골랴드낀이 많은 돈을 가진 것으로 시작하는지가 읽으면서 궁금했었다. 많은 돈을 갑자기 가지게 되었지만(그렇게 된 경위에 대한 묘사는 없이) 그는 원래 하인을 두거나 마차를 타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하급관리로서, 부유한 자라면 당연시할 만한 것들에 대해 모르거나 서툴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가난한 사람들』 끝부분의 마까르가 마침내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상황을 연결시켜 본다면, 그렇게 해서 돈을 번 상태로 골랴드낀이 등장했는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이 작품 끝에 마까르가 바르바라가 살았던 집으로 이사할 뿐 아니라, 바르바라의 동거인이었던 표도라를 자신의 하인으로 두게 될 것이라 말하는데, 『분신』에서는 다름 아닌 하인 뻬뜨루쉬까를 고용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두 작품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마까르가 사회와 타자로부터 고립되는 이유는 풀리는 것 없는 비참한 운명과 지독한 가난,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한 고립을 막아주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바르바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바르바라가 지주와 결혼하여 그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마까르는 더 이상 사회로부터의 고립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 마까르가 『분신』에 이르러서는 이미 고립이 되어버린 골랴드낀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연결을 짓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에서 예멜리안 이바노비치의 등장 때 설핏 비친 자아분열의 현상이『분신』에선 사회/타자로부터의 완전한 소외와 고립으로 인해 가속화된 결과,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분신』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지만,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았고 시간이 이미 지나 버렸으므로, 그냥 다음 책으로 달리게 될 것 같다. 아쉽네...* 내게는 『분신』이 더 재미나다.
※ 후첨: 도스또예프스끼는 평생을 간질로 고통받았으며, 이 작품을 발표할 즈음 가벼운 간질증세가 시작되었다 한다. 텍스트주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작품과 작가의 삶을 굳이 연결시키는 것이 탐탁지는 않지만, 그래도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또 없지 않을까ㅡ싶고. 무슨 말이냐 하면, 마까르와 골랴드낀에서 표현되는 소외와 단절의 이미지는 어쩌면 도끼 씨 본인의 간질증세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뜻이다. 간질을 앓는 동안 환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과 사회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되지 않겠나. 그런 의식이 작품 속에 이렇게 녹아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