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30, 2015
나르킷수스와 에코
ㅡ 천병희 선생님 번역
(신들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표시하는 등, 조금의 수정을 가했다.)
아오니아의 도시들에 널리 소문이 퍼진 티레시아스는 물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아무도 흠잡을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맨 먼저 그의 예언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시험해 본 것은 검푸른 물의 요정 리리오페였다. 그녀를 전에 하신 케피소스가 굽이치는 흐름으로 껴안아 자신의 물속에서 겁탈한 적이 있었다. 달이 차자 더없이 아름다운 요정은 태어날 때부터 벌써 사랑 받을 수 있는 아이를 낳아 나르킷수스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가 티레시아스에게 이 아이가 원숙한 노령이 될 때까지 살겠느냐고 묻자 운명을 알려주는 예언자는 말했다. "그럴 것이오. 그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오(If he never knows himself)." 오랫동안 점쟁이의 말은 헛소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즉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가 죽은 방법과, 그의 이상한 광기에 의해 진실임이 입증되었다.
케피소스의 아들은 열하고도 여섯 살이 되자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했다. 많은 젊은이들과 많은 소녀들이 그를 열망했으나 그의 부드러운 외모 속에는 강한 자존심이 들어 있어 어떤 젊은이도, 어떤 소녀도 그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한번은 그가 겁먹은 사슴을 그물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데 이상한 목소리를 가진 요정이 그를 보았다. 이 요정은 남이 말하면 말해야 하고 남이 말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되울리는 에코였다. 그때까지 에코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육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록 수다스럽기는 해도 그때에도 목소리를 지금과 다르게 사용할 수는 없었으니, 그녀는 많은 말들 중 마지막 말만 되풀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헤라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헤라는 요정들이 산기슭에서 자기 남편 제우스와 누워 있는 것을 가끔 덮칠 시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그사이 요정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에코가 일부러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여신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크로노스의 딸이 이를 알아차리고 말했다. "나를 속인 너의 혀는 능력이 줄어들어 네 목소리는 가장 짧은 말밖에 할 수 없으리라!" 여신은 실제로 자신의 위협을 행동으로 옮겼다. 에코는 말의 끝부분만 되풀이하며 자기가 들은 말에 대꾸했던 것이다.
에코는 나르킷수스가 외딴 들판을 헤매는 것을 보고는 사랑에 달아올라 몰래 그의 발자국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따라다닐수록 더 가까워진 불에 더욱더 달아올랐으니, 그 모습은 횃불의 끝에다 칠해놓은, 불이 잘 붙는 유황에 다른 불을 갖다대면 금세 불이 옮겨 붙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오오, 얼마나 자주 그녀는 달콤한 말을 하며 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간청하고 싶었던가! 하나 본성이 그러지 못하게 막았으니, 그것은 그녀가 먼저 말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허용된 대로, 그녀는 자신의 말로 대꾸할 수 있는 소리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마침 소년은 성실한 친구들의 무리와 헤어지며 "여기 누구 있니?"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에코가 "있니?" 하고 대꾸했다. 그가 어리둥절해져 사방을 둘러보며 "이리 와!"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그가 자기를 부르는 대로 그를 불렀다. 그는 뒤돌아보다가 아무도 오지 않자 "왜 너는 나를 피하지?"하고 다시 외쳤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대답으로 돌려받았다. 그는 멈춰 서서 대꾸하는 목소리에 속아 "여기서 우리 만나자" 하고 소리쳤다. 에코는 이보다 더 기꺼이 대꾸하고 싶은 소리는 없었던지라 "우리 만나자" 라고 대꾸하고는 제 말을 좇아 몸소 숲에서 나오더니 달려가 고대하던 그의 목을 두 팔로 껴안았다. 하나 그는 도망쳤고, 도망치며 말했다. "손 치워, 껴안지 말고! 그 전에 내가 죽는 게 낫지. 나에 대한 권리를 너에게 넘기느니!" 그녀는 "나에 대한 권리를 너에게 넘기느니"라고만 대꾸했다. 퇴짜를 맞은 뒤 그녀는 숲 속에 숨어 부끄러운 얼굴을 나뭇잎으로 가렸고, 그 후로는 동굴에서 살았다. 하지만 사랑은 그의 가슴에 단단히 박힌 채 실연의 고통과 더불어 자라났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근심으로 그녀의 몸은 비참하게 말라갔다. 그녀는 여위어가며 살갗이 오그라들었고, 몸속의 진액이 모두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목소리와 뼈만 남았다. 그러다가 목소리만 남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뼈는 돌로 변했다고 한다. 그 뒤로 숲 속에 숨어 어떤 산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그녀를 들을 수 있으니, 그녀 속에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목소리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르킷수스는 에코를, 다른 물의 요정들과 산의 요정들을, 그리고 그 전에 남자 친구들을 농락했다. 그래서 멸시당한 무리들 가운데 한 명이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자 네메시스가 그 정당한 기도를 들어주었다.
은빛 물이 반짝이는 맑은 샘이 하나 있었는데, 그 샘은 목자들도, 산에서 풀을 뜯는 염소 떼도, 그 밖에 다른 가축 떼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 또한 어떤 새도, 어떤 짐승도, 나무에서 떨어진 어떤 가지도 이 샘의 평온을 깨뜨린 적이 없었다. 그 주위에는 빙 돌아가며 가까이 있는 샘물을 먹고 자란 풀이 나 있고, 또 나무들이 나 있어 태양이 그곳을 데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소년은 사냥에 대한 열성과 더위에 지쳐 이곳에 누워 있었으니, 그곳의 생김새와 샘에 끌렸던 것이다.
그는 갈증을 식히려다가 그사이에 또 다른 갈증을 느꼈다. 물을 마시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것에 끌려 실체 없는 희망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실체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보며 찬탄했고, 파로스 산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쌍둥이별자리와도 같은 제 눈들과, 디오니소스나 아폴론에게나 어울릴 제 머리털과,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턱과, 상아 같은 목과, 우아한 얼굴과, 눈처럼 흰 색조와 어울린 홍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찬탄의 대상으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을 찬탄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열망했으니, 칭찬하면서 스스로 칭찬받고, 바라면서 바람의 대상이고, 태우면서 동시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을 속이는 샘물에다 입맞춘 것이 그 몇 번이었으며, 눈에 보이는 목을 끌어안으려고 물속에 두 팔을 담갔다가 거기서 자기 자신을 껴안지 못한 것이 그 몇 번이었던가!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이 그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의 눈을 속인 바로 그 착각이 눈을 흥분시켰다. 잘 믿는 자여, 왜 그대는 달아나는 허상을 헛되이 붙잡으려 하시오?그대가 좇고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소. 돌아서 보시라. 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것도 없어질 것이오. 그대가 보고 있는 그것은 반사된 모습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소. 그것은 그대와 함께 오고 그대와 함께 머물러 있으니, 그대와 함께 떠날 것이오, 그대가 떠날 수 있다면.
음식 생각도, 잠 생각도 그를 그곳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그늘진 풀 속에 길게 엎드려 거짓 형상을 물릴 줄 모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제 눈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주위에 서 있는 숲들을 향하여 팔을 뻗으며 말했다. "오오! 숲들이여, 사랑의 고통을 일찍이 나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본 자가 있는가? 너희들은 많은 애인들에게 편리한 은신처였으니 잘 알리라. 너희들은 그토록 여러 세기를 살았거늘, 기나긴 세월 동안 이처럼 초췌해진 자를 본 기억이 있는가? 나는 사랑하여 바라보지만, 내가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구나. 나는 사랑으로 인해 그만큼 큰 혼란에 빠져 있구나. 그리고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대해도, 길도, 산도, 성문 닫힌 성벽도 아니라는 것이다. 약간의 물이 우리를 떼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도 안기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맑은 물을 향하여 입술을 내밀 때마다 그도 얼굴을 위로 한 채 나를 향하여 입술을 내미니까 말이야. 그대는 내가 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겠지 사랑하는 자들을 갈라놓는 것은 하찮은 것이니까. (※ 여기서 그대와 그는 누구??) 그대가 뉘시든 이리 나오시오. 비길 데 없는 소년이여, 왜 나를 속이며, 좇는 나를 피해 어디로 가는 거요? 확실히 내 외모나 나이 떄문에 그대가 나를 피하는 것은 아닐 것이오. 요정들도 나를 사랑했으니까. 그대는 상냥한 얼굴 표정으로 내게 뭔가 희망 같은 것을 약속하고 있소. 내가 그대에게 팔을 내밀면 그대도 내밀고, 내가 웃으면 그대도 따라 웃고, 내가 울 때면 그대의 볼에서도 가끔 눈물이 비쳤소. 신호를 보내면 그대도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오. 그리고 그대의 아름다운 입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그대는 내 말에 대답하는데도 그 대답은 내 귀에까지 닿지 못하는구려.
그는 바로 나야. 이제야 알겠어. 내 모습이 나를 속이지는 못하지.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거야. 내가 불을 지르고는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어떡하지? 구혼 받아? 구혼해? 한데 구혼은 왜 해? 내가 바라는 것이 내게 있는데. 풍요가 나를 가난하게 만든 거야. 아아, 내가 내 몸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랑하는 자의 기도치고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내게 없었으면 좋겠어. 벌써 괴로움이 내게서 힘을 앗아가니, 내 인생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는 초년에 요절하고 마는구나. 내게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아. 죽게 되면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될 테니까. 나는 사랑 받는 그가 더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이 하나의 숨이 끊어지면 우리는 둘 다 함께 죽게 되겠지."
이렇게 말한 그는 다시 심란하게 같은 얼굴 쪽으로 돌아섰다. 그의 눈물로 수면에 잔물결이 일자 물의 움직임으로 인해 그 모습이 흐려졌다.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자 그는 소리쳤다. "어디로 도망치는 게요? 그대를 사랑하는 자를 버리지 말고 예서 머무르시오, 잔인한 자여! 만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내게 그대를 바라볼 수는 있게 해주고, 바라봄으로써 내 비참한 망상에 영양분을 대줄 수 있게 해주시오!"게 슬퍼하며 그는 상의의 윗부분을 찢고는 대리석처럼 창백한 두 손으로 드러난 가슴을 쳤다. 그러자 얻어맞은 가슴이 장미처럼 붉은빛을 띠었으니, 그 모습은 사과가 한쪽은 희지만 다른 한쪽은 발개지거나, 또는 아직 덜 익은 포도송이가 색깔이 바뀌며 점점 자줏빛을 띠기 시작하는 모습과 같았다. 다시 맑아진 물에서 이 모든 것을 보게 되자 그는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마치 노란 밀랍이 약한 불에 녹아내리듯, 아침 서리가 따뜻한 햇볕에 녹아내리듯 그렇게 그는 사랑에 물러져 시들어갔고 그것이 숨어 있는 불에 차츰차츰 소진되어갔다. 어느새 그에게서는 붉은색과 어우러진 하얀 피부색이 사라졌고, 원기도, 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는 눈을 즐겁게 해주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의 육신에는 전에 에코가 사랑했던 모습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코는 에코는 여전히 그때 일에 화를 내며 잊지 않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가련한 소년이 "아아, 슬프도다!" 라고 말할 때마다 그녀도 되울리는 목소리로 "아아, 슬프도다!" 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그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칠 때에도 그녀는 그가 치는 소리를 똑같은 소리로 돌려보냈다. 그는 친숙한 물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아, 헛되이 사랑 받은 소년이여!" 그러자 그 장소가 그의 말을 돌려보냈다. 그가 "잘 있어!" 하고 말하자, 에코도 "잘 있어!" 하고 말했다. 그는 지친 머리를 푸른 풀 위로 숙였다. 그러자 죽음이 주인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던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는 저승의 거처에 받아들여진 뒤에도 스튁스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누이들인 물의 요정들은 애도의 표시로 머리털을 잘라 오라비에게 바쳤다. 나무의 요정들도 애도했고, 에코 역시 애도하는 그들에게 대꾸하며 함께 애도했다. 그들은 벌써 화장용 장작더미와 휘둘리는 횃불들과 관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시신 대신 노란 중심부가 하얀 꽃잎들에 둘러싸여 있는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하신과 물의 요정 사이에서 난 나르킷수스도 불멸은 아니네...?
죽기를 결정하면 죽을 수 있는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