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 다각적인 구성력에 감탄을.
내용 : 여행작가 강영호는 죽기 직전 여행지 소개 책자를 내기 위한 메모를 남기는데, 천산수도원이라고 산 위에 고립된 한 수도원의 지하 벽에 성경의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이 소개되어 있다. 강영호의 동생 강상호가 형의 뒤를 이어 이곳을 조사하고 그렇게 천산수도원은 극소수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 천산수도원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몇 사람이 등장하지만, 메인은 후, 라는 청소년에서 시작한다. 후에게는 부모가 죽은 후 같이 사는 사촌누나 연희가 있는데, 마을의 군대에서 복무하는 부잣집 도련님 박 중위가 연희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마을 모두가 알도록 사랑을 고백하지만 연희는 냉담하다. 그런 연희를 갖기 위해서 박 중위는...
노 스포일링.
후의 이야기가 메인이지만 동시에 한정효라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여겨지는 대통령의 오른팔인 사람이 어떻게 천산수도원에 감금되는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후도... 노 스포일링.
스포일러가 염려된다기 보단 자세한 줄거리를 쓰는 것이 귀찮다. 검색하면 대충의 줄거리는 많이 나올 것 같은데.
※ 주의: 이후의 내용에는 스포일링 있음.
압살롬
압살롬
[ Absalom ]
다윗의 3남. 헤브론의 통치시대에 태어났다. 『구약성서』의 『사무엘하』에 의하면 그는 이복 형이었던 장남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능욕하고 버린 것에 분노해서 그를 죽였다. 따라서 모친의 고국으로 추방되었는데, 후에 용서받아서 귀국했다. 그 수년 후에 다윗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다윗은 한때 예루살렘에서 도피했고 반란이 패배의 분위기로 기울었을 때, 다윗의 의향을 무시한 군의 수장 요압에 의해서 살해되었는데 그 보고를 받은 부친 다윗의 한탄은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압살롬 [Absalom]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압살롬에 대한 후의 해석이 재미났다. 압살롬은 다윗왕의 꽃미남 아들로, 훗날 아버지에게 반역하여 공격하게 된다. 그동안 여러 번 읽었던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어째서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곤 하는 그 다윗왕을, 그것도 본인의 친아버지를 죽이려고 그토록 열을 내었던 걸까. 그저 자신의 외모와 젊음에 도취한 패륜아 정도로 생각했을 뿐, 그가 그렇게 패륜적 행위를 했었던 이유를 깊이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문제아에겐 문제부모가 있다고 상담학교 시간에 배웠다. 아무리 다윗이 역사상 위대한 왕이었다 해도, 자녀로서 부모에게 받아 마땅한 어떤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 혹은 덜 받음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패륜이라는 극악의 반응까지 보였던 것일 게다.
후의 눈을 통하여 이승우 교수님은 그것을 '아버지의 외면' 때문이라 해석한다. 다윗에겐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고 그 왕비들로부터의 자녀들도 많았다. 그들 중 압살롬과 다말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온전한 남매'였고, 암논은 다윗의 장남으로 이복형제였었다. 압살롬이 꽃미남이라 묘사되었던 것으로 보아 다말의 미모 또한 굉장하였으리라. 그 다말에게 이복오빠인 암논이 반했다. 그리고 꾀를 부리고 육체적 힘을 행사하여 다말을 꺾었다. 꺾은 직후 가차없이 버렸다. 이 모욕을 참지 못한 다말은 재를 뒤집어쓰고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런 다말을 압살롬이 거두어 돌보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이자 왕인 다윗은 암논의 죄와 다말의 억울함을 위한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그 2년 동안 압살롬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리고 마침내 암논을 죽였다.
혹자는 다말의 일에 대한 압살롬의 분노가 '자신의 가문에 대한 모욕'에서 기인했다고 해석한 것을 보았다. 아비가 같고 어미가 다른 자식들이 많은 상황이라면, 그들 사이에서의 신분적 차이는 어미의 가문에서 비롯될 것이다. 하여, 한 어미의 자녀들이 왕족 내에서 또 다른 한 가문을 이루는 양상이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 사이에서만 보자면 암논은 압살롬과 다말의 가문 자체, 즉 압살롬과 그 어미까지 욕보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피의 복수 또한 당연했으리라.
이승우 작가는 그러나 '가문의식'이라기보단 좀 더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즉, 압살롬 본인이 다말을 동생 이상의 의미로 내심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여동생을 여성으로 똑같이 품었으나 결코 가질 수는 없는 자신에 반해, 암논은 다말을 힘으로라도 취하였다, 그리고 버렸다. 그것에서 압살롬은 분노와 질투를 함께 느낀 것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압살롬이 자신의 딸 이름을 다말이라 지었다고. 이 부분은 좀 이상했는데... 비동양권 문화에서는 가족의 이름을 자녀에게 내리 짓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성경 속의 족보에 보아도 같은 이름들이 세대를 걸쳐 나열되는 경우도 있고.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딸에게 여동생의 이름을 충분히 붙일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의 이 추측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동의하고 않고와 상관 없이 그러한 추측은 충분히 짜릿하고 매력적인 해석이며, 그것으로 가치를 지닌다.
이때 다윗의 비겁하고도 매몰찬 대응으로 인해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 대한 복수심을 키우게 되었고,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다윗이 마침내 내치자 압살롬은 배신감에 다윗을 향하여 칼을 들게 된다는 해석을 보았는데, 이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으로 보자면... 아... 더 쓰다간 그냥 성경분석이 되어 버리겠네. 여기서 그만.
가면
본문에는 가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젯밤에는, 심지어, 네가, 네 가면을 쓴 남자가 내 몸 위로 올라와서 내 몸을 누르고, 가만 있으라고 위협하며 내 몸을 열었는데, 그런데 그 목소리가 삼촌 같기도 하고, 그 군인 같기도 하고....." (p274)
그(후)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큰 가면이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공포를 느꼈는데, 어느 순간 자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떤 여자로, 어떤 여자를 향해 다가가는 큰 가면을 쓴 사람이 자기로 바뀌었으며, 그와 동시에 처음 공포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전환되는 걸 느꼈다. 가면 속에 얼굴을 감춘 그는 안도감을 느꼈고....(중략)....사모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중략)... 그 여자가 사모님이 아니라 연희 누나라는 걸 알았고... (중략)... 그런데도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므로 안도했다. (p278)
물론 가면은 페르소나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연희가 박 중위에게 저항을 멈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박중위의 얼굴에서 삼촌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즉, 연희에게 있어 삼촌, 박 중위, 그리고 후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모두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입은 자들일 뿐 자신을 향한 본질적 모습은 한 사람이란 뜻이다. 마을에서 드물도록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연희로서는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 가면은 후에게로 옮겨가면 조금 더 복잡하게 분열되는데, 먼저 가면을 자신이 그동안 속으로만 몰래 감추었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 경우, 자신이 사회에 보이기를 원하는 가면을 벗기 위한 도구로서 또 다른 가면을 쓴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후는 자신이 가면을 쓴 것에서 나중에는 상대에게 가면을 씌운다. 상상 속에서 사모님에게 연희의 가면을 씌운 채 관계를 맺는 것이 그것이다.
일그러진 남녀 관계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녀의 모든 관계는 일그러져 있다.
암몬과 다말에서부터 시작하여 박 중위와 연희, 연희와 후, 삼촌과 연희, 한 정효와 아내, 후와 사모님. 이 모두는 서로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거나 희생시키는 관계임이 드러날 뿐이다. 이 글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후와 한 정효는 여성들과 있을 땐 이처럼 소통의 부재 또는 어긋난 소통을 하다가 남성들만의 모임인 천산수도원에서야 비로소 참된 소통과 안정을 얻는다. 이 둘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된다.
길
작품 속에는 길지 않지만 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걷는 것이었다. (p284)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걸었으므로 걷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했고, 아무것도 아닌 그 일을 통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벗어났다....(중략)... 익숙한 것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낯선 세계를 향해 걸어 나가는 모험임을...(중략)... 낯선 세계가 목표여서가 아니라 그 세계를 통과해 도달할 회복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p285-286)
이 길은 어렵지 않게 '삶'을 연상시킨다. 본문의 '길'에 '삶'을 넣어서 읽어 본다면 처연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삶이라는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고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나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떄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 뿐이다. 그리고 낯선 삶의 길을 끝없이 걸어만 가는 것에서 생각이 끝난다면 지치고 허무할 것이나, 작가는 친절하고 다정하게도 그렇게라도 살아 도달하는 것을 보여준다. 회복, 이라는 것. 무엇으로부터의 회복인 걸까. 한 정효와 후의 경우 길을 걸어 도달한 곳은 천산수도원이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수도원은 두 사람에게 진정한 회복의 공간이며, 그 회복은 자신의 죄와 죄의식, 상처로부터의 회복임과 동시에 한 정효의 경우, 자신으로 인해 파괴된 공동체를 수습하고 완성하지 못한 임무를 완성하여 온전한 회복을 이루게 되는 공간이다. 어쩌면 한 정효와 후가 천산수도원에서 이룬 가장 마지막의 회복은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회복을 이룬 후 마침내 도달하게 된 죽음이야 말로 이 삶의 길 전체에 대한 온전한 회복일지도.
폭력
한 정효의 삶은 폭력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 폭력의 결과는 아내의 죽음과 허무감이었으며 그것을 극복한 유일한 길은 천산수도원에서의 공동체 생활이었다. 암논이 다말에게 행사한 것은 좀 더 개인적인 육체적 폭력이었다. 그 결과는 암논 자신의 사망이었다. 박 중위가 연희에게 가한 것도 같은 육체적 폭력이었으며 그 결과 박 중위는 거의 죽음에 이르는 중상이었다. 후가 박 중위에게 가한 육체적 폭력의 결과는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었으며, 삼촌이 연희에게 가한 정신적 폭력(일종의 폭력이라고 나는 인식하는 바지만)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처럼 작가는 몇 가지 폭력들을 등장시키고 그 폭력의 결과는 하나같이 죽음과 단절이라 말하고 있다.
종교를 모티프로 한 소설은 많다. 그리고 그러한 소설들은 대개 종교 혹은 종교인의 외적 행태나 상황들을 다룬다. 특히 그리스도교를 모티프로 한 책에는 이단이 자주 다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도 그런 쪽일까 하고 염려했었다. 염려, 라 한 것은 하도 많이 접한 부류여서 또 그렇고 그런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해서였고. '이 문열 님의 『사람의 아들』과 비슷한 내용일 수도 있겠네, 선입견을 가졌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이 원색적인 배경은 아니다. 작품 전체의 밑바닥에 천산수도원에 관한 궁금증이 계속 흐르긴 하지만, 작품이 적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주인공들이 자신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과 후회, 자책, 죄의식을 통과하여 회복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들이 이르게 되는 회복을 딱히 그리스도교적 구원이라 보기는 어렵다. 단지 인물 배경의 설정이 그리스도교였을 뿐, 특정 종교와 상관없는 개인적 회복에 이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회복이 개인적인 회복임은, 그 회복으로 인해 타인의 상처를 해결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생각해 보면 상처에 있어 한 인간이 타인의 상처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가, 싶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고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닌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근원적인 회복은 줄 수 없으리라. 가해자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겠지만 그것이 불가한 상황이라면, 본인의 상처로부터의 회복은 스스로가 노력하여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승우 님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후기의 평에도 적혀있듯 소설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했다. 아마도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에 대해 반복적으로 글을 씀으로써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읽으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아주 해박하고 깊은 지식에 깜짝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학생 출신이시라고.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이런 글도 가능했으리라. 이 승우님의 아주 특별한 강점이라 하겠다.
또 한 가지 장점은 구성력인데, 음... 치밀한 복선으로 뒤에 가서 반전이 기가 막히다거나 하는 추리소설식의 구성력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런 자극적인 구성력이 아니라, 뭐라 설명하지... 다각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후와 한 정효와 차동연과 장은 각각의 에피소드 만으로도 하나의 책을 엮어낼 수 있을 인물들이다. 그런데 후의 이야기를 메인으로 하지만 전혀 덜 중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나머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작품 도중도중에 등장하여 자신의 몫을 채워나간다. 마치 각각 독자적인 이야기로 서로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이들의 이야기가 '천산 수도원'이라는 주요 모티프로 수렴된다는 점.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덮고 나니 '어라? 어, 어???' 하며 각각 인물들이 천산 수도원이라는 한 점으로 모여드는 구불구불 붉은 끈이 가느다랗게 드러나는 기분이랄까. 뇌를 강타하는 번개같은 충격은 아니지만 마음 속에 묘한 감동이 강하지 않은 전류처럼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읽으면서는 내내 투덜투덜대었던 점이었는데(그래서 책에 불평을 많이도 써두었고 +_+), 부연설명이 지나치게 잦고 많다. 아... 나중에는 질려버렸달까.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바지에 피가 묻어났지만 손의 피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왼쪽 소매에, 왼손을 오른쪽 소매에 문질렀다. 소매에 피가 묻어났지만 손의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가슴과 배에 손바닥과 손등을 여러 번 문질렀다. 셔츠에 피가 묻어났지만 손바닥과 손등의 피는 없어지지 않았다. 온몸에 손을 문질러 피를 닦아 냈지만 피는 없어지지 않았고, 그 대신 온몸이 피로 덮였다. 피는 닦아도 나왔다. 닦을수록 나왔다. 닦으면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피를 지우기 위해 닦아야 해는데, 그러나 닦으면 기다렸다는 듯 피가 나오는 것이 확실했으므로 피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닦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닦지 않으면 피가 그대로 있으므로, 눈에 보이는 피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둘 수는 없으므로 닦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피를 보았다. 그는 손을 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피만 보였다. 손바닥 모양의 피. 그는 손바닥 모양의 피를 보지 않기 위해 피 모양의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갔다. 손바닥 모양의 피가 얼굴에 덮였다... (p91)
피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_- 이 부분은 나중에도 다시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이 부분 말고도 작품 전체를 통해 심지어 말장난인가? 싶을 정도로 표현이 반복되는 부분이 잦다. 읽다가 지칠 정도로. 시도 아닌 소설인데 굳이 압축된 표현을 골라 쓸 필요는 없다. 이야기를 얼마든지 길게 펼쳐쓸 수 있는 것이 소설의 장점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모르겠다. 나의 인내심이 부족한 것일수도 있겠다. 나 자신이 반복을 하는 편이어서 더욱 그러할 것이고. 줄여야겠다는 반성을 덕분에 했다.
읽는 중에는 이 반복설명이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보니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메세지나 구성력 자체가 좋고,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그렇다 하여 피해 여성들에 대해 동정심이 넘쳐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딱히 가해자만도 아니고 피해자만도 아닌. 동정만 받을 수도 없고 비난만 받을 수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 후와 한 정효의 모습을 통해 비겁함과 약점을 지녔으나 분명 위로와 회복이 필요한 절대 다수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여겨져서, 나 또한 그 절대 다수 중 한 사람으로서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아 참, 동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해.
켈스의 책 Book of Kells, Le Livre de Kells
이건 초반에 천산수도원의 벽서를 비교하면서 소개된 것인데, 흥미로워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모양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켈스의 책. 아일랜드의 보배로 서기 800년경에 라틴어로 제작되었다. 지금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소장되어 일부 권만 일반에게 공개된다고 한다.
이 사진에 대한 해석이 있는데... 마태복음 첫부분으로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X(카이), P(로), I(이오타)가 있고 하단에 h. generatio(태어났다, 라틴어)라 적혀있는 것이라고. 당시에는 라틴어 본문이지만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쓰는 것이 관례였다 한다. (조선일보,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화면 위와 P 위에는 예수로 보이는 금발청년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X 위에는 알겠는데 P 위에선... 무슨 매직아이도 아니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든 작품인 만큼 상상력을 동원해야 보이는 것 같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