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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미술 전시] 마크 로스코전 @ 예술의 전당

by Vanodif 2015. 6. 5.













예당에서 진행 중인 마크 로스코 전시회.

6월 28일까지인데 꽤나 유명한 작가인 만큼 주말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가급적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가거나, 평일을 이용하기를 권한다.

전시 작품 수는 많지 않은데 실내에 작품 앞에서 앉아서 감상할 수 있도록 벤치가 꽤 많이 마련되어 있다.

아무래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이 영적체험을 하기를 원했던 로스코였던 만큼

한 작품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작품 속에 젖어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

덕분에 몸이 피곤하지 않게 충분히 명상도 하고 감상도 할 수 있어서 나는 참 좋았는데,

덕분에 주말이나 휴일에 가면 사람들이 설 공간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의자가 없다면, 특히나 한 작품 당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기엔 많이 불편할 것 같고.

나는 뭐, 다시 가더라도 평일에 갈 계획이어서.

내가 갔을 때는 평일 저녁이었는데, 관객 수가 비교적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해가 되더라.

오픈 시간, 아무도 없을 때 오롯이 홀로 로스코의 작품 속에 잠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디오 가이드는 이번에는 유지태 님의 음성으로 녹음이 되었다.

지난 번,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 전시회에서 뜬금 없이 송승헌 님의 녹음이 떠서 좀 의아했더랬는데,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아는 사람의 목소리는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달콤하긴 했지만.

그런데 이번 유지태 님의 녹음은 참으로 적절했다고 본다.

그것은 작품 해설의 방식이 독특했기 때문인데, 

로스코가 직접 했던 말들을 작품 앞에서 읽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배우'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꼬마야. 넌 아직 더 많은 걸 배워야 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아하, 이래서 배우가 녹음을 했어야 했구나!'했다.

영리한 장치였던.


그런데 엔딩의 음악은 너무 길었습니다.

미술관 내부에서도 음악이 나오는데, 음악이 겹쳐져서 힘들었어요.

어떤 의도로 그렇게 긴 음악을 넣으셨을까.

로스코에 대한 여운을 남기기엔 좋았으나, 전시 자체의 음악과 충돌하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셨을지.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은 좋았다.

감상하기에 난해하다면 난해하달 수 있는 로스코의 작품에 다가갈 수 있도록

간결하지만 친절한 안내를 해준 것으로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로스코의 작품은ㅡ잠시 스쳤던 도슨트 분의 말씀대로ㅡ도슨트의 해설도, 오디오 가이드도,

심지어 벽면의 설명 조차 다 잊은 채 그저 작품 자체로만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작품이 내게 말을 걸도록, 말이다.









전시장에는 내내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흘렀다.

그리고 로스코채플 부근 부터는 성가가 흘렀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방해가 많이 되었지.


특이하게 전시장에 음악이 크게 흐르도록 한 것은 로스코 자신이

감상 중 다른 사람의 목소리 때문에 방해받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여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해 낸 방식이라는 설명이 벽에 적혀 있었다.


확실히...

감상 도중 한 커플의 남성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굉장히 성가셨다. 

딱 그 순간에는 음악이 크게 나오니 그나마 조금은 감상에 도움이 되더라.


로스코 전시에서는 제발 말을 하지 말아주세요.

오죽하면 도슨트 본인께서 '이렇게 해설하는 것이 옳지 않다 생각하여 처음엔 도슨트 제의를 거절했다'

고 하실 정도겠습니까.

전시회에 갈 때 마다 내게 물음표를 날리는 작품들 앞에 서서

낯선 감상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소통하는 것을 즐기는 나도

로스코 작품 앞에서는 입을 열 수가 없더라.

이전, 리움 미술관의 <교감전>에서도 그랬다.

로스코의 작품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언어가 상실되었어.


대화는 나중에 전시장을 나선 후에 나누어 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나로 말하자면, 비록 목소리의 소음 앞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음악이 거슬렸다.

나는 무언가에 집중할 때 음악을 없애는 습성이 있기 때문인데

작품에 빠져들 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운율과 첼로 음색에 신경이 가서 힘들었거든.

음악이 없어도 나는, 작품과 내게필요한 교감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음악이 방해가 많이 되었습니다.









도록. 아... -_-

가격을 맞춰 보시죠.

5만원입니다.

도록이 5만원. -_-

빨강이 1권, 파랑이 2권, 그리고 검정은 두 권을 담는 케이스.

이 도록을 사면 포스터 한 점을 주는데, 포스터 주지 말고 가격을 내리는 것이 좋았을 듯.


빨간 책에는 앞뒤로 1/4이 넘는 부분이 인삿말이다, 로스코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이다...;;

왜, 왜 그런 짓을;;

난 도록에 인삿말 실리는 것을 참 좋아하지 않아서는.

그냥 주최측 만의 기념 아니야?

그런 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록에서는 좀 빼주었으면 좋겠다.

간단한 작품 해설이야 환영이지만.


내가, 좀 일찍 나왔더라면,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소도록을 샀... 그래도 대도록을 사려고 했겠지는.

아니다. 이 도록의 내용을 충분히 볼 수 있었더라면 소도록을 샀을 것 같다ㅡ는 소도록은 볼 생각도 않아서는.

접때 소도록을 한 번 샀다가, 원했던 작품이 실려 있지 않아서 멘붕에 빠진 이후로 소도록은 가급적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도록은 말이야, 이번 전시에 온 작품은 저 빨간책에 다 실리고도 자리가 남더란 말이지.

파란책은... 그냥 로스코 전기입니다.

아니, 왜, 전기를 도록에 끼워서 파는 거지????

그런 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사람이 사서 읽거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구하는 것 아닌가?

왜 원하지도 않는 전기를, '도록'의 이름으로 강제로 사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아니면 한 권만 구입할 수 있게 하거나.


많지도 않은 작품을 가지고 5만원짜리 도록을 만들어 팔아 먹는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불쾌했다.

도록은 어지간하면 2만원 초중반을 넘지 않도록 합시다, 좀.


최근 두세 번의 도록 구입이 대실패하면서 나는 이제 도록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냥 사지 않으면 되는 일이잖아?

그런데... 작품명이 온통 No.7, Untitled 투성인 로스코의 작품을, 도록 없이 어떻게 다시 찾아서 후기를 쓴단 말이냐.

그것을 이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지금 문득 드네.


아, 모르겠다. 도록을 꼭 사야만 하는가, 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야겠다.



작품 수가 많지 않다. 그런데 딱 좋다.

로스코의 작품이 더 많이 왔더라면 감당하기 힘들었지 않을까.

이 정도 작품을 꼬박 보는 데도 3시간 반의 시간이 모자랐는데, 더 왔더라면 대체 몇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거냔 말이지.

시간도 부족했지만, 에너지가 엄청나게 빨려서는.

로스코 채플 공간에서는 6작품 중 3작품 앞에서 그냥 넉다운되어 버렸다.

기어 나올 뻔 했던.


작품 수도 괜찮고, 선생님께선 조명이 좀 불만스러웠다 말씀하셨는데,

내게는 몇몇 작품의 조명이 좀 많이 거슬렸을 뿐,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나야 뭐, 선생님의 세련된 안목엔 따라갈 엄두도 안 나는 막눈이니깐.

그런데 작품과 관객의 거리, 에 대해선 나도 불만이더라.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45cm라면서요. 맞춘 것 같긴 한데, 

어떤 작품들 앞에선 그 작품이 나의 전체를 감싸 안을 수 있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거리가 충분히 가깝지 않아 그것이 불가했어서 좀 아쉬웠다.

또한 높이가... 남성의 눈높이에 맞춘 것인지, 키가 작은 편인 내게는 좀 높았는데, 10cm 굽을 신어야 할까나.


아니, 무슨 수다가 또 이리 길어, 그래.

이래서 내가 로스코전은 후기 쓰는 것이 두렵다 한 거다.

작품에선 수다를 좀 줄여야겠다.


전시회 전반에 대한 개인적 소감은 참 좋았다.

그래도 로스코의 작품을 이렇게 풍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어딘가.

그동안 한두 작품으로 감질나게 대하다가, 이번에 신이 났다.

명상과 사색, 치유의 공간이 되어 버린 전시장.


애플과 삼성의 유일한 교집합, 이라고 이전에 도슨트 분께서 말씀하셨는데,

스티브 잡스의 명성이 아니더라도, 원작 특유의 아우라를 넘어서는,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고 흔드는 로스코의 작품은, 정말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아 쫌 수다 쫌 그만. -_ㅜ


아 참, 관람료는 성인 15,000원이다.

내 티켓의 금액은 예당회원할인 금액이 찍힌 것이고.














 Age of Myth 






Untitled

1937-1938

Oil on Canvas



이 작품을 보면 딱히 로스코 작품인지 모를 것 같다. 구상 예술에 가까운 초기 작품입니다.






Underground Fantasy

1940

Oil on Canvas



도록의 설명을 적어 보자.

"로스코는 30대 중반부터 지하철 풍경을 자신의 테마로 삼고 시리즈를 이루는 그림들을 그렸다. <지하철 판타지>가 대쵸적인 예다. 그런데 그 작품은 지하철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 아니었다. 로스코는 지하철 시리즈를 통해 도시 생활의 익명성과 수동성, 그리고 고립된 삶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의 다른 그림에서도 인물들이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사람은 분명 아니다. 이러한 그의 상징적 회화 방법은 당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뉴욕으로 피신해 온 뒤 미국 미술에 큰 영향을 준 파리의 아방가르드 운동인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ㅡ 대도록 1권.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구획으로 나뉘어진 칸 속에 들어 있는 개인들이 고립된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번 전시는 시기별로 나뉘었는데, 초기인 <신화의 시대>에 속하는 작품으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하던 시기의 작품이다. 사람을 무슨 선처럼 그려놓은 것이, 비교적 깔끔하고 단순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전성기와 후기 작품으로 연결되었을 테지.







Antigone

1939-1941

Oil and Charcoal on Canvas




위대한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3대 비극이 있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안티고네』. 그 중 『안티고네』는 가장 먼저 씌여졌으나, 내용 상으로는 앞의 두 작품 이후의 이야기에 해당한다. 오이디푸스 왕... 의 내용까지 말을 해야 하나. ㅡㅜ 간단하게만.;; 


오이디푸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왕인 부모가 그래서 아이를 죽이려 하는데, 차마 죽이지 못하고 목동에게 아이를 죽이라 명한다. 그런데 목동도 죽이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왕에게 주는데, 오이디푸스가 자라나면서 그 예언을 알게 되고, 자신의 양부모를 친부모라 생각한 그는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부모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길을 떠나다가 자신의 생부인 왕을 만나는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바람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줄 모르고 상대를 살해한다. 그리고는 사람을 죽이는 괴물 스핑크스를 퇴치하러 가서는 문제의 답을 내어 그를 퇴치한 후에 테베의 왕이 되어, 남편이 죽어 홀로 된 친어머니인 왕비 이오카스타와 결혼해 아들 둘 딸 둘을 낳는다.그런데 알지 못한 중에 저지른 그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 신들이 나라에 재앙을 내리고, 결국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토록 피하려고 애썼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그는 멀쩡히 떠있으면서도 진실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는,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이오카스타의 동생인 크레온에게 부탁하고 길을 떠난다. 여기까지가 『오이디푸스 왕』. 헉헉.


크레온이 테베를 다스리는데,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가 왕권을 두고 다툰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가서 그곳의 공주와 결혼한 후 아르고스 군대를 이끌고 테베를 치고, 에테오클레스는 테베를 방어하여 전투를 벌인다. 그러다 전장에서 둘이 서로를 찔러 둘 다 죽게 되는데, 크레온은 테베를 지킨 에테오클레스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지만, 테베의 적이었던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엄하게 금지시키고, 그의 시체를 들개와 독수리의 먹이로 줄 것을 명령한다. 이스메네는 이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안티고네는 항명하며 오빠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안티고네』는, 국가의 법을 중시한 크레온과 신의 법(혈육의 도리)을 중시한 안티고네 사이의 대립으로 시작한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어서 맺어야.;;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과 약혼을 한 상태인데, 왕인 크레온의 명을 거역한 죄로 동굴에 갇혀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 주어지는 형벌을 받는다. 약혼녀를 위한 하이몬과 크레온 사이에 논쟁이 있고. 안티고네는 동굴 속에서 죽는다. 안티고네가 죽자 하이몬도 자살한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하이몬의 어머니 에우리디케도 자살한다. 부인과 아들을 잃은 후에야 크레온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작품을 크게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로스코의 작품 <안티고네>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남성 둘, 여성 둘.

왼쪽의 곱슬머리 남성은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고, 그 옆의 곱슬수염 남성은 크레온이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다. 그 옆의, 마찬가지로 분노한 여성은 강한 신념의 여성, 안티고네이며, 맨 오른쪽의 슬픈 표정으로 노란 액체(눈물?)을 흘리는 여성은 이스메네다. 이스메네는 안티고네에게 크레온의 명을 거역하지 않기를 권고하는데, 그래서 흘리는 눈물일지, 아니면 사랑하는 오빠의 장례를 치룰 수 없게 되어 흘리는 눈물일지는 모르겠다. 안티고네는 뻗은 팔을 아래로 향한 채 주먹을 쥐고 있다(→ 두 번째 가서 보니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리고 왼쪽의 엉킨 팔 하나는 앞을 가리키고, 나머지 하나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작품을 꼼꼼하게 읽으면 알 수 있으려나. 붉은 얼굴은 분노를 나타낸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은 그들의 반목하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관계를 암시한다고 한다. http://drawing100.wikispaces.com/Mark+Rothko 에 있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내가 궁금한 것은 아래 네모 안의 물체들인데, 짐승의 발 같은데, 중간의 동그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집승의 발인 것은, 들개에게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뜯어 먹히도록 한 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 문제 위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대립하고 있는 모습인 듯 하다. 이 <안티고네>는 로스코가 신화시리즈 중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이라고. 연결된 얼굴들의 모습과, 알아보기 쉽지 않은 모호한 형체들이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The Omen of the Eagle

1942

Oil and Mixed Media on Canvas



이 작품 또한 <안티고네>의 내용이라고. 여기에도 네 명의 얼굴이 겹쳐서 등장하는데, 하이몬, 이스메네, 안티고네, 크레온의 모습이다. 이 작품에서 아래의 발은 사람 발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폴리네이케스의 발인지도 모른다. 독수리의 불길한 징조, 라는 것은, 독수리에게 시체를 뜯기도록 한 것 때문이 아닐까. 즉, '폴리케이네스의 시체를 독수리에게 뜯으라고 준 왕의 명령으로 인해 촉발된 네 사람 사이의 갈등과 비극'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지. 위의 작품과 같은 내용으로 나는 보았다. 


흐음... 하지만 또 다른 검색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와 관련이 있다고도 하고. -_- 갑자기 혼란스럽네. 오레스테이아는 읽어보지 않아서. 


신화의 시기에 대한 도록의 설명을 첨부한다.


"신화와 관련된 그림들을 전시하면서 로스코는 자신을 '신화제작자 mythmakers 라 칭하기 시작한다. 그는 왜 신화를 그렸을까? 그것은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허위의식을 부수고 세계의 비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아이들의 악몽과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화가 그들의 비참과 두려움의 표현이었다면, 그보다 더 잔혹하고 비극적인 상황(2차 세계대전과 현실의 폭력성, 인간의 나약함)에서 어떻게 예술가가 현대적 신화를 담아내는 그림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ㅡ대도록 중.








Untitled

1941-1942

Oil on Canvas




음. 이 작품은... 해설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해석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오디오 가이드의 도움을 많이 받은 작품인데, 일단 제목이 Untitled이니 뭐. 로스코의 전성기ㅡ후기작에서 자주 보이는 No.x 시리즈나 Untitled 작품들은, 작품들을 검색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딱히 제목이 중요하진 않다. 그러나 초기작들은 아직 특정한 '형태'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해석의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신화의 시대'가 아닌가. 어마어마한 스토리들이 별처럼 박혀 있는 신화를 표현한 시기. 그러니 더욱 이런 Untitled라는 제목이 낯설고 당혹스럽다. 초기작들은 그나마 이런 형태와 제목 덕분에 해석이나 이해가 좀 용이한 면이 있는 건데 말이지. 제목이 불친절한 작품이다. 다만, 이 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중반 정도까지 로스코는 비슷한 형태와 구조와 신화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 시기별 작품활동의 특징을 고려하여 이런 작품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인물들은 앞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인물들과 다소 비슷한 느낌을 주긴 하지. 물결 같은 머리와 곱슬곱슬 수염이라든가. 동물의 다리라든가. 이 작품 앞에서 나온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였다. 그 가이드를 듣지 않았더라면 난 결코 연결시킬 수 없었으리라. 뭐... 왼쪽 인물의 포도송이 같은 수염을 통해 디오니소스를 떠올릴 수 있었으려나...? 아니, 힘들었을 걸. 무튼. 어떻게 이 작품이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로 해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가이드에선 뜬금 없이 그 두 신이 나왔고, 나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해설을 따라가기에 바빴으므로), 그렇게 놓고 보면 뭔가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이 시기의 몇 작품을 자세히 보다 보니, 이 때 로스코 작품에는 레지스터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 든다. 이것은 이집트 미술사 특강 때 들은 것으로, register, 는 일종의 영역이랄까, 경계랄까, 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집트 미술에서 배운 레지스터는 (세로도 있던가;;) 주로 작품의 중간 중간에 가로로 선이 그어저 영역이 구분되는데, 각각의 레지스터는 각각의 세계와 차원을 나타낸다고 한다. 로스코의 이 작품에서는 대략 세 개의 레지스터가 보이는데, 첫 번째는 감상자의 시선을 한 눈에 끄는, 해체된 동시에 연결된 얼굴 부분이 있고, 두 번째는 팔들이 엉켜있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탁자인지 뭔지 아래의 다리가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잠시 수요 선생님께 배운 바를 언급하자면,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들 중에서 토착신이 아닌, 외국에서 유입된, 비교적 젊은 두 신으로, 나중에 흘러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토착신들의 속성을 하나하나 흡수함으로 그 세력을 키워가는, 중요한 신들이다. 특히 이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신들로서, 아폴로는 이성과 질서와 빛, 디오니소스는 어... 감성이랄까 본능이랄까, 비이성과 혼돈과 어둠을 상징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대조하지만 기실 니체는 디오니소스에 열광하였으며, 로스코 또한 디오니소스에 탐닉한 것으로 안다. 디오니소스는... 로마 이름으로는 박쿠스라 불리우며, 광기, 술(포도주)의 신이고, 또한 비극, 연극의 신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 표현된 맨 아래 레지스터? 의 짐승의 다리는 그렇다면, 디오니소스를 따라다녔던 사튀로스를 표현한 것이려나. 사튀로스는 염소의 뿔과 귀, 다리를 지니고 말의 꼬리를 가진 반인반수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폴로 쪽(오른쪽) 아래의 다리는 무슨 다리란 말인가. 아폴로의 상징 동물은 독수리와... 사자...?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는 그리스 신들이 이집트로 도망갔을 때, 아폴로는 까마귀로 변했다고 나오는데, 까마귀 다리는 아니... 잖아??; 멘붕.


하지만 이런 해석의 노력들이 그다지 심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 이것은 초현실주의적 작품이 아닌가. 신화와 현실, 무의식과 의식을 따로 나누지 않고 합병하는데, '낯설게 하기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해석이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던져 봅니다아.







Phalanx of the Mind

1945

Oil on Canvas



팔랑크스. 아직... 초기 작품인데도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쓰다니. orz 전성기, 말기에는 수다를 대폭 줄여야겠지는.;; 초기작은 제목이 있고 형태가 있어서 확실히 이해가 용이하고(그만큰 잘못 해석할 위험도 높고), 분석의 열의를 불러 일으킨다ㅡ 지만 팔랑크스라니. 아... ㅜㅠ 오디오 가이드에선 다루지 않은 작품이다. 다만 '팔랑크스'라는 단어 때문에 이렇게 맴맴거리고 있지. 이 또한 수요 인문학 고전 선생님께 배운 것을 다시 복습한 것이다.


팔랑크스 Phalanx는 고대 그리스시대의 전법에서 쓰인 진형, 즉 전투대형이었다. 에또...

 

→ 이렇게 생겼습니다? 

 

 

는 ↑게 생겼고.

팔랑크스, 팔랑스는 중장보병으로 오른손에는 '사리사 sarissa' 라고 하는 2.5미터 창을 들고, 왼손에는 '호플론 hoplon'이라는 커다란 둥근 방패를 들고 싸운다. 호플론을 들고 싸운다 하여, 이 중장보병으로 싸우는 병사를 홉라이트 hoplite 라고 합니다. 나는 영화 <300>을 안 보았는데, 그 영화에 이 홉라이트들이 등장하는 거라면서? 전쟁 영화 별로 안 좋아해서 안 보고 버틴 것이었는데, <300>을 보아야 하려나... -_-;


팔랑크스는 보병들이 딱 달라붙은 밀집대형으로 구성되어 근접전에 압박을 가하는 전술인데, 그렇게 한 걸음씩 전진하기 때문에 방어에는 용이하나 기동성이 아주 떨어진다. 전면공격에는 탁월하지만, 측변이나 후방 공격에는 취약하기 때문에, 이후에 기병을 보완한 경장보병으로 기동력과 측면의 약점을 커버한 진형이 마케도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아, 거기까진.;; 


내가 이 팔랑크스라는 이름에서 주목하는 한 가지는, 이 진형은 밀집대형이므로, 자신 뿐 아니라 옆 병사의 방어까지 가능하게 하는 탁월한 진형이지만, 역으로 한 쪽에서 대열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리고 그 때 공격을 받게 된다면, 대형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팔랑크스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엄격한 규율을 토대로 아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고. 이 작품의 제목이 <마음의 팔랑크스>가 아니겠는가. 커다란 방패와 길다란 창으로, 흐트러짐 없는 대열을 갖춘 채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자 하는 바람이 표현된 건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다. 팔랑크스라는 것 자체가 전투의 대열이니 만큼, 2차대전으로 인한 폭력성과, 그로 인한 기존가치의 붕괴 속에서, 정신을 지키는 방법으로서 팔랑크스를 떠올린 건지도. 혹자는 우리의 정신이 운명의 부조리와 그 자체 내의 모순에 대항해 싸우는 데 있어, 투쟁과 폭력이라는 것이 필요한 하나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 해석은 http://vidal.genevieve.pagesperso-orange.fr/rothko/eng/cnt_6.htm 를 참고하세요.  


작품 왼쪽의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마름모는 병사를,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큰 방패를 나타내고, 그 방패 속 그림에서는 또한 이 병사를 형상화한 듯 한 어떤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에서 뻗어나온 창 사리사 위로 원반이 날개 돋힌 듯 흔들리고 있다. 각자가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고유한 해석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







Untitled

1945

Oil on Canvas




이 작품에 대해선 별다른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생각나서.

엄마를 존경하는 이유들 중 하나인데, 꽤 괜찮은 화가이지만 몸이 불편하시고 가난하여 유학을 다녀올 수 없었던

미술 선생님의 작품을 엄마께서 당시 가격으론 아주 비싸게 구입하셨다. 

덕분에 본가엔 선생님의 작품이 많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오셔서 엄마께서 작품을 걸어두신 높이나 각도에 대해

칭찬도 하시고 또 몇 작품은 위치를 직접 잡아 걸어주셨던.

그리고는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오신 후 이름도 좀 알려졌고 개인전도 여러 번 열곤 하셨다.

물고기 같은 형상은 없었지만, 선생님의 그림은 항상 검은색과 회색이 가득했었다.

그러던 것이, 유학을 다녀오시고는 밝고 가벼운 색상과 형태로 바뀌었지.

중학교 때 미술실에 걸려 있는 선생님의 작품들을 볼 때면 기분이 우울해지곤 했는데,

나중에 작품의 분위기가 바뀌어 나도 따라 기분이 좋아지던.

그 중 몇몇은 심지어 익살스럽네? 느꼈던 것도 있고.

예술가가 몰아의 경지로 빨려 들어간 모습을 내가 처음으로 눈 앞에서 목격한 분이 미술 선생님이셨다.

생각이 나서.















 Age of Col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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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부터는 사진만 참고하기를 권한다. 

이전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시기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현대 미술, 특히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개인이 느끼고 깨닫고 명상하는 그것이 바로 개인의 정답이 되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감상자에게 전달되어 느껴졌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고 로스코가 말했던 만큼,

그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답이니, 

타인의 정답이 아닌 자신 만의 정답을 찾아 보는 것이야 말로

로스코의 작품을 제대로 대하는 자세일 것이다.


아직 전시회에 다녀오기 전이라면 여기서부터의 글은 읽지 않기를 강력히 권하며,

전시를 다녀온 분들 중, 다른 사람은 자신과 어떻게 다른 감상을 했는지가 궁금한 분들만

'아 이 사람은 이렇게 느꼈구나'를 보고 넘어가는 정도로 가볍게 읽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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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8

1946

Oil on Canvas




작품들 찾는 것이 힘들어서 도록을 스캔했지만, 참... 그렇다. 색감을 이렇게 밖에 뽑을 수 없었을까? 아니면 전시장 조명의 힘이었을까. 도슨트께서 '로스코의 작품은 사진이나 인터넷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이 굉장히 다르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러하다. 원작이라는 것이 뿜어내는 특유의 아우라, 라는 것이 있지만, 로스코 작품의 사진에는 아우라는 고사하고, 색감의 표현이 지나치다 싶으리 만치 부족하다. 


색감의 시대. 멀티폼 시기라고도 불리우는 이 시기에 로스코는 형태로부터의 자유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No. x 시리즈와 Untitled 라는 제목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이는 딱, 나와 같은 감상자들 때문인 거지. 제목과 형태를 통해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달려드는 사람들. 머리로 작품을 감상하려고 하는 나와 같은 감상자들을, 언어와 형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위한 장치로 그는 제목을 없애버리고, 서사, 즉 언어를 소환하게 만드는 특정한 형태들도 포기한다. 참 똑똑하지 않아? 그가 새로운 예술의 형태와 예술의 핵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작품을 그렸는지, 그의 작풍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제목과 형태로부터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야기 구조, 즉 언어를 제거한 채, 색에 색을 겹쳐 표현한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색깔들이 캔버스 위를 부유하며 색 그 자체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시도 또한 눈여겨 볼 만 하다. 이 작품은 실제로 보면 붉은 색이 훨씬 강렬하며, 가만히 오래 보다 보면 마치 색이 움직이는 것 같더라. 에너지와 율동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


어떤 그림은 음악성을 띄는 것이 있는데, 후쿠오카 미술관에 그런 작품이 하나 있었지. 현대 화가의 작품이었는데 이름을 잊어 버린. -_- 그 작품 앞에 서니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떠날 수가 없었던. 이 작품도 그러하다. 교향곡 같달까. 위에서 호른과 트럼본이 부우ㅡ하고 소리를 내면, 오른쪽에선 첼로의 선율이, 왼쪽의 바이올린 소리, 여기저기 심벌즈, 팀파니, 트라이앵글 등이 들린다. 이 멀티폼 시기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미술관을 흐르던 바흐의 곡에 가장 많은 방해를 받았다. 마음껏 감상할 수가 없어 슬펐어.







Untitled (Multiform)

1947

Oil on Canvas




색감이 잘 표현되지 않아 속상하네...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색입니다.

드럼 소리의 느낌이 많지?









No. 10

1948

Oil on Canvas




이 작품 옆에 형태에 관한 로스코의 짤막한 말이 적혀 있었는데.

참 재미있지 않아? 앞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형태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한 다음 이 작품을 대하면

뭐랄까, 로스코의 농담 같달까.

색깔을 그냥 배치한 것 뿐인데 형태가 드러나 버렸지.

나는 체 게바라가 떠오르더라. 혁명이여!







No. 9

1948

Oil and Mixed Media on Canvas




이 작품은 두 번째 갔을 때 깜짝 놀라 한참을 보았던 작품이었는데, 집에 이 작품이 걸려 있다면 참 기분 좋겠구나, 싶었지. 사진으로 보아도 예쁜 색의 향연인데, 실제로 보면 아주아주 예쁘다. 색의 투명성을 추구하던 로스코는 바탕의 색에 다른 색을 겹쳐 칠함으로써, 아래의 색이 비쳐 보이는 효과를 냈는데, 그것이 색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하나 색이 몹시 예뻐. 회색 위로 스며 올라오는 보라라던가, 흰색 위를 올라오는 분홍, 에또... 거 봐. 사진은 그 많은 색들의 결합을 도저히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지. ㅜㅠ; 속상하다. 이 작품 앞에서 색과 색이 몸을 섞으며 어떻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지, 자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상대를 비추어 내는지, 또는 새로운 색상을 자식으로 잉태해 내는지를 감상해 보면,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난 몹시 즐거웠어요.















 Golden Age 







골든 에이지, 로스코의 황금기. 로스코의 걸작과 인기작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다. 이 시기에 전시된 작품들에서는, 멀티폼시대의 몽환적인 형태마저 벗어버린 채, 사각으로 형태를 통일한 상태에서 이리저리 색들을 배치하고, 또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지키면서도 허물어 버리려는 그의 노력이 느껴진다. 이 시기부터는 '느끼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할 수 밖에 없겠지는. 느껴지기 위한 그림들이니 말이다.


로스코의 작품은 언뜻 보면 몹시 단순해 보인다. '아니, 저런 그림 나도 그리겠다!' 싶겠지.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저 단순해 보이는 작품 속에 수없이 많은 색의 물감들이 겹쳐지고 또 겹쳐져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렇게 많은 물감을 겹쳐 칠했으면서도 어째서 탁한 느낌이 나지 않는가에 대해 또 감탄하게 되지. 언어와 형태를 마침내 벗어버린 색감이, 알몸 그 자체로 당신에게 다가와 어떤 느낌으로 소통을 걸어오는가를 시간을 들여 느껴본다면, 이야기를 드러내는 형태를 지닌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느끼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로스코의 작품 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감상의 시간.







Untitled 

1949

Oil on Canvas





익숙한 작품이다. 티켓과 바깥의 큰 현수막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로스코전에서는 두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작품이다. 음... 나는 작품의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이런 파격적인ㅡ한국에서 열린 대규모 전시로는 거의 전대미문의 혁명이 아니야???ㅡ배려를 해준 주최측에 감동을 해버렸지. 로스코의 작품을 진심으로 아끼고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며. 그런데... 음... 뭐랄까... 음... 그것이... 하필 로스코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음... 나중에 로스코 채플 부분에 가서 다시 말하겠다. 개인적으로 고맙고 감동했던 그 배려에 대해 아쉬운 말을 쓰려니 차마 입이, 아니, 손가락이 떨어지질 않네. -_ㅜ


이 작품 앞에서는 시간을 좀 보내기를 권한다ㅡ는 로스코의 모든 작품은 시간을 요구하긴 하지만. 처음엔 검정이 둥ㅡ하고 중앙을 떡 버티며 차지하는 것에 음... 싶은데, 그 위로 자주색과 붉은색이 잔ㅡ하며 펼쳐진다. 그리곤 밑에서 오렌지를 뱉어내는 초록이 위아래로 살짝 흔들흔들거리지.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보면, 색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러다 나중엔 전체 사각형이 통째로 노랑 바탕 위를 둥둥 떠있는 느낌이 난다. 아마도 위의 붉은색과 자주색이 오른쪽 아래로 기울어져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나는 게 아닐까 싶은데. 








Untitled 

1951

Oil on Canvas





로스코전에 처음 갔을 땐 높지 않은 운동화를 신고 갔었다. 그런데 큰 작품이 많은 만큼 높이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달까. 로스코의 작품은 개인별로 자신의 키높이에 맞추어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뭐, 그만큼 가능한 충만하게 감상하고 싶다는 바람인 겁니다. 해서, 두 번째 갔을 땐 신고 갔던 운동화를 굳이 한가람 미술관 입구에서 9cm 힐로 갈아신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편리한 점이지. 더군다나 로스코전은 군데군데 의자가 배치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란 말인가. 무튼, 그렇게 거의 6-7cm에 달하는 높이의 상승이 있자? 확실히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을 내는 작품들이 꽤 많이 있었거든. 대개는 이전보다 좋아진 거였고. 


그런데 이 작품. 이 작품은 유일하게 낮은 높이가 낫더라. 키가 큰 사람은 이 작품 앞에서 무릎을 구부려 보세요. 키 큰 남성분들은 아주 많이 구부려야 할 걸. 한 160cm 수준으로 낮추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지. 이렇게 사진으로는 전ㅡ혀 알 수 없는 그 무엇.

ㅡ은... 어엇... 혹시 180cm의 높이에선 또 다른 무언가가 출몰하는 거 아니야? +_+;


160-163cm 정도의 높이에서 보았을 때, 아래의 노란 색감 위로 옅은 레몬색 물감이 반짝반짝 흩뿌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반짝이는 어떤 물감이 아니라, 물감의... 음... 물론 색도 있겠지만, 질감과 조명의 상호작용이 아주 잘 맞아서 나는 효과인 것 같은데, 이 작품에서의 조명에 대해 나는 박수를 치고 싶었지는. 처음 갔을 땐 그것이 조명의 힘인 줄 몰랐다. 그냥 반짝이는 건 줄 알았어. 그런데 두 번째 갔을 때 높아진 키로 보니까, 어라? 이 작품, 반짝이가 어디 갔지? 하곤 당황. 무릎을 구부려 보니 이전의 그 반짝임이 숨겨진 금화인 양 드러나는 것을 보곤 감탄을 했지! 조명에 신경을 아주 많이 썼다 하는 주최측에서는 이것을 의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대단합니다. 그런데ㅡ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ㅡ의도하지 않았는데 이런 근사한 효과가 난 것이라면, 그것은 천재성인 겁니다! 의도하지 않은 채 모르고 만들었는데 어마어마한 결과를 내는 것이 바로 천재라 해요.










Untitled 

1953

Oil on Canvas





팜플렛에 인쇄된 작품이다. 참 아름다운데, 처음 갔을 때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갔을 때 대단했었지. 아주 반해 버렸던. 일단 오렌지 바탕을 뒤덮고 있는 검정의 저 투명함을 보라. 그리고 마찬가지 오렌지를 덮고 있는 분홍과 회색 테두리도. 오렌지색도 한 가지만 쓰인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오렌지가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분홍의 아름다움과 그 베일 뒤 아가씨의 자태인 양 드러나는 오렌지. 그리고 경계를 흐물흐물 침범하는 회색과 아래쪽 오렌지, 검정 등 이 모든 색들의 유희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 검정을 뚫고 올라오는 오렌지에서 어떤 형태가 보여...? 여러가지가 보였는데, 어떤 것이었더라. 처음에는 왼쪽으로 나무 한 그루가 스며나오더니, 곧 나무가 지워지고 나르킷소스가 한쪽 팔꿈치를 비스듬히 바닥에 기댄 채 앉아 다른 팔을 뻗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가 지워진 자리에 노인 한 명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고, 오른쪽에 제자 두 명이 그를 바라보며 무릎을 세워 바닥에 앉아 있었지. 스승의 이름은 소크라테스라 나는 부르기로. 뭐, 이런. 작품 앞에서 각자가 느끼는 바를 확인해 보면, 현재 자신의 상태나 관심사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


음. 그런데 또한 이 작품을 보며 선생님께서 '조명이 아쉽다'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달까. 그러니까 레일조명을 사용함으로써 벽의 측면에 걸려 있는 작품들의 경우는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빛을 비스듬하게 비추게 되는 구조인 건데, 그 때문에 빛을 골고루 받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지. 나는 그런 것에 크게 방해를 받을 만큼 안목이 높진 않지만, 수준 높고 예민한 안목을 지닌 감상자들에게는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Untitled 

1956

Oil on Canvas






 에서  까지 세 작품은 같은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1953 분홍+검정 작품이 왼쪽, 이 1956 검정+하양이 중앙, 그리고 아래의 1956 초록+ 빨강이 오른쪽.


이 작품은 좀 뭐랄까, 재미난 작품이었는데. 처음 보았을 땐 그다지 느낌이 없었다. 두 번째 보았을 때도 처음엔 그냥 그랬어. 그런데 이 구역의 작품들을 보고 난 뒤 다시 돌아 보았을 때, 뭔가 자꾸 신경이 쓰이더란 거다. 두 번째 갔을 땐ㅡ어떤 작품들이 왔는지 이미 한 번 확인을 했으니ㅡ비교적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였는지, 한 구역의 작품들을 감상한 후에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그 구역의 작품들을 휘 둘러 보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나라면 이 중에 어떤 작품을 내 공간에 걸어 놓고 싶을까' 하며. 그렇게 둘러 보면서 배치된 작품들 사이의 조화도 감상하고, 또 다른 위치에서의 조명도 다시 확인하고 등등.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이 작품이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 보았을 땐 단연코 밑의 흰색이 눈에 띈다. 확연하게 둥둥 떠있지 않은가? 뒷면의 비쳐 보이는 바탕의 붉음이 흰색을 뚫고 아른거리는 것이, 시야가 간지럽도록 흔들거린단 말이지. 그런데 그에 비해 위쪽의 검정은 아... 사진으로서는 정말 매력 없는 검정으로 밖에 안 나온 건데. -_ㅜ 실제로 가서 보세요. 그냥 그런 검정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튼, 하지만 특별한 검정임에도 불구하고 바탕의 붉음과 아래의 흰색이 워낙 화려한 것에 비하면 밋밋해 보였지. 그런데도 작품의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


그런데 의자 뒤로 물러서서 다시 둘러 보는데, 검정에 이상한 색이 비쳤다. 초록... 이 비쳐? 그러더니 또 한참을 왔다갔다하며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핑크가 투명하게 비친다. 이 부분에서 이 구역의 작품 배치에 감탄을 한 것이다. 초록은 오른쪽, 즉 아래 작품의 초록이 비친 것이었고, 핑크는 왼쪽, 즉 윗작품의 핑크가 비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엔 액자가 없었지. 작품과 작품이 상호소통하도록 만드는 작품의 배치. 그것이 특히 초록과 분홍, 이었기에 나의 감동은 더욱 컸다. 해서, 감상 후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려던 나는, 다시 이 작품 앞으로 끌려 갔다.


그 때, 검정이 낯설지 않은 어떤 존재로 다가오더라. 죽음. 그리고 그에 대조된 붉음은 절실한 생명, 으로. 그리고 흰색은 생명과는 분리된 의미로서의 삶. 이렇게 색채가 다가왔을 때, 안정적이고 단호한 죽음과 유동적이고 불안한 삶이 참 대조되었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두 색의 배경에 깔려 있는 '생명'이었다. 작품들 앞에서 스쳐간 생각들과 그 생각들의 전개를 다 적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지만, 그것까진 하지 않으려고. 이미 이 정도 만으로도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리라 싶으니. 


그렇게 다른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는데 도슨트 시간이 되었다, 해서 갔는데. 도슨트께서 안 그래도 그 점을 말씀하셔서 역시, 싶었던. "로스코의 작품에서 검정은 죽음을, 빨강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로스코는 '언젠가 검정이 빨강을 완전히 덮어 버리게 될까봐 두렵다'고 말했어요" 라고.


그리고는 다시 개인 감상을 이어갔는데, 로스코 채플에서 다른 작품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흰색에 대한 의문이 생겨 버렸다. 그러자 생각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답답해져, 화급히 일어나 다시 이 작품 앞으로 돌아왔다. 흰색, 너는 무엇이니. 다시 작품 앞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겼는데, 간신... 히 내가 구한 답이 나오긴 했다, 그런데 뭐가 개운하지 않은 거지. 그래서 이 작품의 흰색에 대한 명상은 다음 번 감상의 숙제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 날은 이미 채플까지 갔었으니 남은 에너지가 바닥을 긁고 있었거든.


다시 한 번, 이 세 작품의 배치를 생각하신 기획자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








Untitled 

1956

Oil and Acrylic on Canvas








아... 이 작품. ㅜㅠ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이 작품이 왜 이렇게 표현되는 거지... orz ㅡ는 로스코의 거의 모든 작품이 사진으로 담으면 그 빛을 잃어버리긴 하지만서도. 자, 사진으로 보니 매력에 막 끌리십니까? 끌린다면 부러운 일입니다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뭐, 현장에서도 이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긴 했는데. 나는 처음 갔을 때도, 두 번째에도, 이 작품에 완전 홀렸어서는.


붉음이 그냥 붉음이 아닙니다. 화려한 붉음이지.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붉음은 내게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한 눈에 '불안'으로 다가왔거든. 그것도 '매혹적인 불안'으로. 아마도 초록과의 배치 때문에 그렇게 다가온 것일 텐데, 조명의 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붉음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작품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단순한 붉음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보는 작품에는 다양한 붉음으로 느껴지던. 가장자리와 아래쪽은 훨씬 짙은 붉음으로 보이던 것을 생각하니 역시 조명의 힘이었으려나. 중앙의 붉음은 마치, 생명이 고동치는 신선한 피가 태양 아래 반짝이듯 빛나 보였다. 그리고는, 벗어날 수 없는, 벗어나고 싶지 않은 불안.


감상자를 빨아들이는 이 선명한 붉음과는 반대로, 그 붉음을 누르고 있는 저 단단한 초록은 어쩌면 그리 무미건조한 것인지. 모래를 씹듯 매력 없는 느낌이어서 보는 눈이 깔깔했을 정도ㅡ는 붉음과의 훌륭한 대조의 효과였으리라.


매혹적인 불안과 매력 없는 안정.

살아있는 불안과 죽어있는 안정.


나의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 

너무 쉬운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매혹적인 가난과 매력 없는 부.

매혹적인 계약직과 매력 없는 정규직.


등등.




이 초록이 유독 텁텁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로스코의 다른 색과 다르게 뒷면의 색을 비추어내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다른 색을 비추어 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붓터치가 주는 어떤 감상조차 주지 못했다. 그래서 시시해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니 어떤 것이 눈에 잡혔지. 뭐라 그럴까... 캔버스의 자국? 의도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색채 뒤 캔버스의 갈라져 보이는 자국이 마치, 남성의 팔뚝에 불거져 나오는 혈관같이 느껴져서 우아아ㅡ했었지는. 감상할 수 있는 매력이란 건 참 다양하기도 하구나ㅡ감탄하며 또 다시 작품 앞으로 끌려갔다.


뒤에... 음... 어떤 작품이더라. 찾고 싶지도 않은데. 무튼, 로스코 채플로 이동하기 직전에 걸려 있던, 이것과 반대로 초록 바탕에 붉음이 걸려 있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 작품에서의 붉음은 죽어버린 느낌이었다. 덕분에 이 작품에서의 붉음이 더욱 인상적이었던. 


온통 붉음붉음거리는군

ㅡ은 오늘이 불금이어서?


......


미, 미안. +_+;









Orange and Tan 

1954

Oil on Canvas






이 작품도 색감이 잘 표현되지 않았다. 두 번째 감상 때 도슨트께서 이 작품 앞에서 무엇을 느끼느냐고 내게 물으셨다. 나의 대답은 '소녀에서 처녀 사이의 느낌 같다'였고. 내 답을 이해하신 것 같아 보이진 않던. 개인의 감상인 만큼, '음. 그렇군'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지, 딱히 이해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나 또한 나의 고유한 느낌이었으니 이해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윗부분 색이 오렌지로 나왔는데, 작품의 색은 핑크가 감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좀 더 연한 색이고. 몹시 아름다운데, 마치 볼이 복숭아빛으로 물든 것처럼 발그레한 느낌이 나서는. 그런데 윗부분의 붓터치가 떨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했지. 그래서 그렇게 느꼈다. 사춘기의 끝자락. 소녀에서 처녀로 가는 불안, 그 설렘.









No. 5

1958

Oil and Acrylic on Canvas






이 작품. 할 말이 많다. 처음 갔을 때와 두 번째 갔을 때, 두 번 다 똑같은 것을 느꼈던. 일단 이 작품 또한 색감표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실제의 붉음은 오렌지가 아닌 핏빛이며. 위의 저 튀튀한 색은, 실제로는 보랏빛과 회색빛이 감도는 분홍으로, 넋을 빼앗기도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이다. 


이 작품이 몹시 속상한 이유는 첫째, 표구 때문이다. 이번에 온 대부분의 작품은 표구를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몇 작품은 표구를 했던 걸까. 그리고 표구한 다른 작품들은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의 표구는 아주 당황스러웠어. 액자의 색은 괜찮았다. 깔끔한 하얀색이 작품의 느낌을 크게 방해하진 않았는데, 그런데... 속상한 이유 둘째, 조명. 하필 이 작품 앞에 섰을 때 조명이 지나치게 방해가 많이 되었다. 가보시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관람선 바로 앞에 서서 보세요. 한여름 오후 1시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자도 없이 서있는 느낌이었달까. 오죽했으면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서 작품의 색감을 감상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윗부분은 감상할 수가 없다, 눈이 부셔서. 나는 가운데의 회색빛 나는 핑크가 너무 우아해서 좀 더 감상하고 싶었는데, 따가운 태양?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더란 거다. 처음엔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잔뜩 인상을 찡그리다 그냥 돌아서 버렸었다. 그런데 다시 끌려왔지. 그러다 눈부심으로 인해 다시 쫓겨났다. 작품은 너무나 매력적인데 액자와 조명이 짜증나서 이런 짓을 반복하게 되었지는. 그런데 그런 눈부심 때문에 포기하기엔 색이 너무 신비로웠다. 그래서 앞에 서서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 보기로 했지. 그랬더니... 어라? 액자에 비치는 조명 아래 내 모습이 비친다? 더군다나 관람선 가까이까지 가서 보았기 때문에 내 모습이 꽤나 자세히 보이던. 그래서 생각의 방향을 틀기로 했다, 어차피 작품을 즐기러 온 것이었으니. 하여 나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버린 나 자신을 상상한 것이지. 꽤나 짜릿하던. 맘에 들지 않던 액자와 조명 덕분에 내가 로스코의 작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것도 내 방에 걸어두고 싶다, 고 느꼈던 이 작품 속에. 


액자와 조명을 통해 작품 속으로 들어간 나는 뭔가 익숙한 듯 낯설어 보였다. 거울에서 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반영이었는데, 그 느낌이 독특했단. 로스코의 신비로운 색감과 더불어 나자신의 모습도 안개에 싸인 듯 몽환적으로 보였고. 마치 꿈에 잠겨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았지. 음. 이것을 쓰면서 생각난 건데, 다음에 가게 되면 이 작품 앞에서 나르킷소스 놀이를 해야겠다. 재미날 것 같은데.


이렇게 간신히 엉뚱한 방향으로 작품을 감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액자와 조명이 내게는 방해가 되었다. 굳이 이런 환경을 마련한 것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려나.









Untitled 

1957

Oil on Canvas






이 작품 앞에서였던 것 같은데. 오디오 가이드 속의 유지태님이 "좀 더 가까이 와 봐. 더 가까이. 좀 더. 그래, 45cm. 적정의 거리. 자, 무엇이 보이나?"란 멘트를 하셨던 것이. 맞나? -_-a 그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이 보이나?'란 질문을 듣자마자 '우주'라는 답이 내 입에서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아니... 하늘. 그리고 숲.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밤하늘. 저 높은 하늘의 중앙에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창백한 달. 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침옆수림이고,이곳은 스웨덴의 깊고 깊은 겨울밤. 낮도 어둡고 밤은 더욱 어두운 숲의 한가운데이다. 검은빛이 나는 진초록과 진청의 하늘이 만나는 곳에선 온갖 요정들과 마법이 깨어나지. 차가운 공기. 강하진 않지만 대기를 감싸는 나무의 청량한 향기.


그러다


아니. 열대우림으로 할까. 우거지고 우거진 열대우림 한가운데. 숲속 바닥에 누운 내 위로 나무들이 쏟아질 듯 머리를 맞대며 하늘을 좁히고. 그러나 결코 나로부터 얼굴을 숨기지 않는 하늘이, 나의 우주가, 별을 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더위. 벌레소리. 저 아래 폭포소리. 현기증 나도록 향이 진한 나무와 풀, 흙내의 공격을 받은 나는 그대로 잠의 주술에 빠져든다. 온몸의 세포는 나른하게 녹아나고, 그렇게 나는 밤의 세포가 된다.


가만ㅡ히 들여다 보기를. 한 중간을 보다 보면 중앙에서 아주 살짝 비켜간 부분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하얀 달의 그림자가 보입니다ㅡ는 내 키에서 보이는 것일지도.





이 작품 옆 공간에 한 벽을 다 채우는 아주 큰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작품 앞 바닥에 깔려 있는 방석에 앉아 한참을 명상에 잠겼더랬다. 그 작품은... 깜빡 있고 스캔을 하지 않았는데, 그냥 귀찮아서. 길쭉한 작품이었는데, 검은색에 가까운 고동색이었다. 그 작품에서 내가 찾은 단어는 '구원'이었지.










앞부분에서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타이밍을 놓친 말들이 있다.


우선, 색감의 시대, 혹은 멀티폼시대부터의 작품들. 

중세 이탈리아 신학자 다미아니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말한 바 있지만, 옛날, 회화는 언어의 시녀였다. 그림은 생각과 사상을 담아내기 위한 하나의 그릇이자 장치로서, 화가가 하고 싶었던 말, 혹은 의뢰인의 뜻을 담아내는 기능을 했다. 해서, 형태와 색감은 수없이 많은 언어를, 즉 스토리를 함축하고 있었고, 감상자는 그들의 작품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의미들을 밝혀내어 읽어내는 것을 유희인 양 즐기곤 했다. 작품에 담긴 신화들. 역사들. 사회적 사건들. 혹은 생활상의 보고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은 그렇게 언어로 소통하던 생각들을 그림으로 녹여내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리는 시 처럼.


그런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닌 회화들을 볼 때면, 몇몇 상징들을 주워 들어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 형태와 색채로 암호화된 메세지를 어떻게든 언어로 해독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바니타스 정물화에서는 아름답지만 시든 꽃, 해골, 벌레 먹은 과일과 악보 등이 등장하며, 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궁경인 죽음을 나타낸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란 의미로 그런 상징들을 사용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ㅡ라는 기초적인 지식이라든가. 나 역시 이런 몇 가지 알량한 지식들을 부실하게나마 갖고 있기 때문에, 목동이 손에 황금사과를 들고 있으면 이는 파리스 왕자가 아니냐느니, 귀족 여성이 머리에 꽃을 꽃은 채 솦 속 물가에 위태롭게 있으면 오필리어일 것이라느니, 등등의 해석을 향해 나도 모르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해서, 나와 같은 덜 떨어진 감상자가 로스코의 이 시기 작품을 만났을 때, 머리가 뚫리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


'또 머리 굴리고 있지? 언어로 풀어내려고, 언어 속에 내 형태와 색채를 가두어 버리려고, 가진 지식과 언어를 총동원해서 이 작품을 해석하려고 하고 있지? 그러는 감상자, 그대야 말로 언어의 노예인 것이니, 내가 해방시켜 주겠다. 언어로부터 그대를, 내, 구원해 주도록 하지. 자, 제목을 보고 언어로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니, 제목을 지운다. Untitled. 그리고 형태를 통해 디오니소스니, 아폴론이니 언어로 풀어내고 있지? 형태도 지워 주지. 이제 그대 눈 앞의 형태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언어는 없어. 그럼 이제 그대는 어떻게 내 작품을 감상할 텐가? 느낌. 느낌인 거야. 뇌를 닫고, 눈을 열고, 좀 더 크게 열고, 귀를 열고, 코를, 그리고 촉각을 열어 봐.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내 작품이 그대의 마음을 두드릴 거야. 이성으로 해석해 낼 수 없고, 언어로 풀어낼 수 없는 그 어떤 느낌과 감정, 감동으로, 모호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어떤 존재감으로 마음을 똑똑. 그렇게 마음을 열고 나면 그 다음엔 정신으로. 영혼으로. 그대가 원하고 찾는, 그러나 그대 안 깊숙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찾아낼 수 없었던 그 해답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영적 교감과 깨달음을 이끌어내게 될 거야.'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에서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만 감탄하는 사람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느꼈던 영적체험을, 감상자 또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중에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했고.

 

The people who weep before my pictures are having the same religious experience I had when I painted them. And if you, as you say, are moved only by their color relationships, then you miss the point!" ㅡ Mark Rothko

 

작품을 통해 감상자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 말로 로스코가 진정으로 원했던 감상법이었다고 나는 생각해. 근데 지금 나는 무엇에 홀린 것일까. -_- 이런 수다 삼매경에 또 빠져 버렸고.




후적박발厚積薄發. 선생님께서 누누히 강조하시는 그 말씀의 미술적 형태가 로스코의 황금기 시기의 작품들이었다 할까. 같아 보이지만 다른, 많은 색채를 칠하고 또 칠하지만, 그 위를 큰 어떤 색으로 단순하게 덮어 버리는 것. 그러나 완벽히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속의 색과 질감을 언뜻언뜻 비추어 보이는 것. 글을 쓸 때 수많은 말들을 안으로 두텁게 쌓고, 표현하는 것은 최소함의 간결함으로 하라, 는 말씀의 정확한 예라고 할까. 로스코의 작품들 앞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고는 이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Mural Age 


생략 





벽화의 시대는 생략한다. 여기 왔을 즈음에는 에너지가 바닥나서 딱히 감상을 할 수가 없었던. 다시 간다 해도 뭐.














 Rothko Chapel 







 

 

 

 

실제 로스코 채플의 내부 모습입니다. 한가람 미술관에는 이 채플을 재현하려 한 공간이 따로 있다.

벽에 걸려 있는 검은 작품들은 로스코의 작품들이고.

로스코의 후기, 거의 말기작들인데, 보다시피 거의가 회색이고 검은색이다.

도슨트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꼬마 감상자가 "이런 건 저도 그리겠어요"라고 했다고.

확실히 그럴 것 같지?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런 '나라도 그릴 것 같은' 작품들을 볼 때 내가 사용하는 두 가지 감상법이 있다.

우선은 바로  그 생각, '나라도 그리겠네'을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는 극도로 단순화된 색채와 형태의 이면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녹여낸 무수한 말들을 찾아내는 것이지

ㅡ어쩔 수 없이 언어화 작업이 진행되고. ㅡㅜ

가장 단순한 작품들이 가장 많은 언어를 길어낸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작품이 단순화될 수록 그 작품과 소통하기 위해 감상자는, 자신의 내면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게 된다.

로스코의 이 일련의 작품들은, 로스코가 내게 거는 말을 내가 듣게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작품을 거울 삼아 나 자신과의 대화를 유도하는 장치다.

그러므로 '이 작품 앞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느냐'에 집중하는 거이 나의 첫번째 감상법이다.

 

두 번째 감상법은 로스코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로스코 전체 작품의 흐름 속에 이 작품군이 차지하는 의미와 독특함에 집중한다.

자, 다시 화면을 올려, 지극히 주관적 취향에 따라 발췌한 것이나마 내가 올린 로스코 작품의 시기별 변화를 다시금 확인해 보라.

그리고 그의 죽음에 가까웠던 이 시기에 그린 이 작품들을 보는 것이지.

 

로스코의 작품은 확실히 갈수록 단순화된다.

형태와 색채로 말하는 직업을 지닌 화가가, 이토록 모든 언어와, 형태와, 심지어 색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지워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과정을 통과하고 있기에, 이런 작품들을 이 시기에 이렇게 쏟아내었을까.

단지 채플에 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를 넘어, 다가오는 죽음의 숨결을 감지한 그를 둘러싸는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Untitled 

1969

Acrylic on Canvas




로스코는 자신의 검정이 빛을 내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 말이 무슨 말일까? 한참을 고민하고 살폈던.

이 작품은 별로 많이 감상하지 못했다. 검정 작품들에 넋을 잃는 바람에.

 







No. 7

1964

Mixed Media on Canvas





 

아까 언급했던 아쉬운 점을 미리 말하겠다. 원작을 사진에 담을 수 있게 해주신 그 감동적인 배려에... 본의 아니게 아쉬움을 느꼈던 건 이 작품 앞, 그리고 로스코 채플의 공간에서였다. 성가가 울려 퍼지는 것까진 괜찮았어ㅡ는 잠깐만. 아니다. 그리스도교 배경을 지닌 내게는 그 성가가꽤 괜찮은 분위기를 마련해 주었다. 명상에 도움이 되었어. 그런데 말이지, 만약 성가 대신 목탁소리나 다른 종교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찔*했지. 난 아마 명상에 몰두하기 힘들었을 걸. 안 그래도 전시회의 음악소리에 방해를 받고 있던 차에, 낯선 소리가 이 명상에 집중해야 하는 공간을 울려 퍼진다면. 생각이 이에 이르자, 내게는 도움이 되던 그 성가가 부당하다, 싶었다. 비종교인 혹은 타종교인에게 있어선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불편한 장치가 될 수도 있지 않았겠나. 모르지. 실제 로스코 채플에서도 그 성가가 울리고 있다면야... 그렇다면 가급적 정확한 재현을 위해 꼭 필요한 장치였을 게다. 하지만 실제 로스코 채플에서도 음악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아, 이게 아닌데. 원래 말하려던 아쉬움은 음. 사진촬영이었지. 성가가 울려 퍼지는 고요함 속에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자꾸 생각이 방해를 받더란 거다. 누구? 하며 고개를 휘휘. 그런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어, 찰칵, 찰칵. 아마도 로스코 채플 벽의 뒷면이 마지막 작품이 걸려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았다. 그 작품 앞에선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카메라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문제는 이곳은 명상을 위한 채플 공간이었단 것. 아주 많은 방해가 되었다. 하필 로스코의 작품이고, 하필 채플이었기 때문에 방해가 된 것이지. 해서, 주최측이 마련한 그 멋진 배려가 큰 아쉬움으로 여겨져 버려 나도 속이 상했던.






이 작품. 처음 갔을 때 이 작품과 옆의 작품 No.6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두 작품은 말하자면 반대의 느낌이었는데, No.6는 진한 검정 바탕에 조금 덜 진한 검정이 중앙을 차지한다면, 이 No.7은 중앙이 더 진한 검정이었다. 참, 앞에 방석이 놓여 있는 로스코의 작품은 방석에 앉아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No.6 앞에서 많은 명상을 했더랬는데, 이 No.7 을 대하고 나오니 6에 대한 명상은 다 지워져 버리던. 그만큼 7은 내게 강렬한 명상을 유도해 내었다. 


방석에 앉아 시선을 압도하는 저 검정을 대했을 때, 그리고 검정 만을 존재 가득 담고서 오랜 시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노라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나의 경우는 당연히 죽음, 이었다. 메멘토 모리를 그냥 색 자체로 텅! 하고 제시 받았던. 로스코의 말대로 검정 속에서 어떤 빛을 발견하고자 애를 써 보았다. 그런데 시각으로는 그다지 확연하게 확인할 수 없었어. 그리하여 시선은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 


죽음은 산 자들에게 있어 일종의 금기, 로 다루어지는 듯 하다. 이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응이다. 나는 그것이 참 궁금했어. 어째서 죽음은 금기시되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이 죽음을 터부시하는 이유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산 자에게 있어 죽음은 공포다. 그리고 공포인 이유는 첫째, 알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 극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어 본 산 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생명인 이상 죽음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었다 깨어났다고 주장하는 산 자들의 증언은 가사상태의 경험인 것이지, 실제 '죽음'을 겪은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이란 '생명의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일컫는 단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돌이킬 수 없는' 종말, 을 두고 우리는 '죽음'이라 부른다. 돌이킬 수 있었던 어떤 것은 죽음이 아니지. 삶이 그 유한성으로 인해 지극한 가치를 지니는 만큼이나, 죽음은 그 불가해성와 불가피함으로 인해 지극한 가치를 지닌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다시 검정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죽음을.


죽음이 불가해한 것은, 죽은 후의 세계나 우리의 상태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 혹은 윤회사상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이자 믿음, 인 것이지, 나 자신의 실제 경험, 은 아니지 않나. 이론과 실전의 차이는 뚜렷한 것이니. 그러니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죽음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일 게다. 무지는 두려움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


그런데 말이다, 죽음 후의 존재가 죽음 후의 상태로 또 새로운 어떤 활동을 영위하게 된다면 어떨까. 천국, 지옥, 윤회, 어쩌고, 그런 거 아니더라도, 지금의 이 삶이 하나의 단계이듯, 죽음의 상태도 하나의 단계라면. 그리고 또 다른 단계가 있을 수도, 아니면 없을 수도 있겠지. 즉, 죽음이란 것은 지금의 이 삶과 형태나 모양, 성질은 다를 지라도 결국 같은 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천국과 지옥에서 사는 것일 수도 있겠고, 이 생의 육체를 다른 육체로 바꾸어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고, 그도 아니면 완전히 다른, 아직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이 삶에 처음 태어났을 때,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죽음 후엔 또 그 '죽음을 살아낼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없다면 또 어쩌겠는가. 완전히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라면, 그 소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이 주어질 테지. 


결국 죽음은 이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생에 처음 뛰어든 갓난아이는 이 삶을 살아내기에 부족하고 서툰 점 투성이지만, 점점 살아가면서 삶에 익숙해지고 원숙해지듯이, 또 결국 살아내듯이, 죽음에 또한 처음엔 서툴더라도 결국엔 익숙해지게 될 터. 음... 문장이 잘 풀리지 않네. 내가 명상한 바로 그것, 은 이 문장들이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언어로 통역해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죽음이란. 

 








No. 8

1969

Oil, Acrylic and Mixed Media on Canvas






그리고 작품 No.7 옆의 벽에 있는 No.8.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몹시 유쾌해졌었다. 전체가 다 검정인 이 작품에서는 붓의 터치가 느껴졌는데, 아 뭐였더라... 잊어버렸. -_-; 무튼, 일종의 익살이 잠깐 스쳤어서는 혼자 피식. 그리고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계속 이으려 했지만, 앞의 작품에서 너무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어서, 이미 거의 기어나오다시피 한 상태가 되었어서는.


두 번째 방문 때는 아래의 작품에 정신을 빼앗겼었다. 그리고는 잠시 앞의 다른 작품을 보고 돌아와 위의 No.7 앞에 앉았는데...*



훌쩍, 

훌쩍. 훎쩍, 

훌쩍.



옆의 이 작품 앞에 앉은 한 여성이 계속 우는 것이었다. 아...!

순간 카메라 소리도, 성가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흐느낌만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우던 느낌. 그리고 그 흐느낌은, 그 어떤 배경음악 보다도 강렬한 느낌을 주었지. 그 자리에 무엇보다도 잘 어울렸던.


걱정이 되었다. 나도 아래의 작품 앞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았더랬지만, 그것은 한참의 명상을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거의 앉자마자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나와 같이 로스코를 생각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은, 최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 만일 그것이 맞다면, Understandable.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것이 맞았다면 그것은 로스코 작품의 빛나는 치유 능력일 것이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로스코의 승리가 되는 것이지. 사람은 아픔에 잠긴 사람을 위로할 때 언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확실히 언어는 인간이 지닌, 단연코 절대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소통 수단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쉬이 언어의 힘을 무시하곤 하지만, 언어의 능력은 가히 가공할 만 하다. 언어에는 발화자의 존재가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렇게 가장 많은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담아내는 언어가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있다. 


자주 드는 예이지만.


출산과 낙태를 거쳐 유산을 경험한 직후,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워 울고 있는 여성에게, 낙태나 유산은 커녕 출산조차 경험한 적 없는 여성이 해줄 수 있는 위로란 없다. 하지만 언어에 길들여진 사회의 인간인지라 무언가 말은 건네야겠는데, 싶어 그 어떤 멋진 문장을 진심을 다해 정성스레 빚어낸다 할 지라도, 그 아픔 앞에 그 마음을 다한 문장은 빛바랜 사진 마냥 아득할 뿐이다. 울고 있는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출산과 낙태와 유산을 경험한 다른 한 여성의 존재일 뿐. 아무런 언어가 없다 해도, 그런 여성이 앞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울고 있는 여성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로스코의 이 작품이, 눈물을 그치지 못하던 그녀에게 그런 위로가 되었지 않았을까, 바란다. 죽음의 날 선 공격을 받아 난도질 당한 심장을 가지고 온 이에게, 죽음을 몸 전체로 표현한 이 작품이, 이 작품 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었으리라. 그랬기를 바란다. 아픈 그녀에게 위로와 치유가 있기를.


그녀가 떠난 다음에 이 작품 앞에 앉으려 했으나, 도저히 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떠났지만, 눈물이 아직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서. 그래서 다시 아래의 작품 앞으로 가서 앉았다.










Untitled 

1969

Acrylic on Canvas







두 번째 갔을 때 이 작품 앞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회색. 저 회색이 눈에 자꾸 밟혔는데. 음... 이 작품은 바깥 테두리가 하얀 색이 아니었나?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이 작품을 보다가 갑자기 하얀색에 대한 사고가 꼬여서, 아까 말한 Untitled 1956 앞으로 돌아갔다. 애쓴 끝에 간신히 답을 얻어내긴 했지만 만족스럽진 못하던. 그리고는 이 작품의 회색, 저 불안한. 작품의 시기를 보면 아래의 마지막 작품을 그리기 전 해에 만든 작품이다. 나는 이 당시 이미 로스코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해. '검정이 붉음을 완전히 덮는 것이 두렵다'고 한 그가, 어째서 이렇게 검정과 회색 투성이인 그림들을 대거 쏟아냈을까. 


이 회색은 두려움, 으로 다가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 로스코의 작품활동을 죽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작품의 진정성이랄까, 핵, 을 향한 그의 눈물겹도록 절실한 추구. 그리고 그런 로스코를 괴롭히던 우울증 앞에,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작품들을 만들었을까. 아랫부분의 경계를 파르르 떨리는 회색에서, 죽음에 대한 의심과 공포에 대한 떨칠 수 없는 고뇌가 느껴졌다. 그래.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면, 그랬다면. 정말 두려웠겠구나. 나라 해도.
















 Age of Resurrection 







Untitled 

1970

Acrylic on Canvas

   




지난 번 리움의 ㅡ교감전>에서 로스코의 죽기 전 말기작을 보았는데, 그 작품에도 검정색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다. 에또...






Untitled 

1962



ㅡ였는데. 음. 그렇다 해도 1962면 임종 직전의 작품은 아니군. 하지만 검정이 붉음을 다 덮는 것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 있겠네. 음. 다시 마지막 작품으로 돌아가서.










Untitled 

1970

Acrylic on Canvas

   

자살 직전,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하듯 검정과 회색에 탐닉했던 로스코가, 마지막 작품으로 어째서 이런 샛빨간ㅡ붉음을 쏟아 놓고는 스스로의 생명을 끊었던 걸까. 그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조수의 증언에 따르면, 새빨간 작품 아래 새빨간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던 로스코. 그 장면을 상상하면 심장이 울컥* 하며 피가 솟구친다. 


내가 로스코였다면, 계속하여 죽음을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는 것은, 죽음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극복해 보려던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죽음과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면. 그 뿐 아니라 영혼을 갉아먹는 우울증의 공격에 더는 버텨낼 정신이 거의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되었다면, 나의 선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살'이라는 그의 선택에 나는 마음 다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살이란 최상의 금기이지만, 사실 왜 금기인지 아직도 수긍이 잘 가진 않거든. 도저히 더는 빠져나갈 곳이 없는 삶의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최후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죽을 마음으로 살도록 해 보라, 는 명상 없고 배부른 소리를 애정 없이 내던지는 것은, 발화자 자신의 공포에 사로잡힌 배설에 다름 아니다.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인간에게, 최소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는 부여되어야 한다고 난 생각해. 두려움 때문에 죽지 못하는 건 비난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이성적인 판단 하에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을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라고. 이러면 또 반대 의견이 빗발치겠지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잉팁들에겐 익숙한 일이다ㅡ는 잉팁 물고 들어가기. 무튼, 로스코의 이 붉은 작품 아래서의 붉은 죽음은 정말이지 로스코답달까.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작품 전체를 완벽하게 완성하고야 말았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은, 마지막 작품으로 계획했을 이 작품의 마지막 붓터치는 어디였을까. 한참을 보고 또 보았지만 그런 것을 잡아낼 만한 안목은 내게 있지 않다. 그리하여 나라면. 나였다면 어디에 마지막 붓터치를 했을까, 상상을 했는데, 가운데 선 아래 어드메쯤 가로로, 그렇게 맺었을 것 같다.


그가 이루어낸 생명 가득한 죽음은 과연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이렇게 살아, 살아 남은 슬픈 자들을 위로하고, 또 더 깊은 명상으로 인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음에 관해 명상하다 든 생각인데,

삶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하지, 그런데

죽음 또한 삶을 두려워하진 않을까?


현자도, 우매한 자도, 선인도, 악인도, 끔찍한 연쇄살인마조차

죽음, 이란 이름으로 다 받아들여야만 하잖아. 

일종의 쓰레기 매립지 같은 생명 처리장인 셈인데.

그런 죽음, 은 얼마나 부당해할까

ㅡ는 허튼 소리로 거의 한 달에 걸친 로스코전 후기를 드디어 맺는다.


다시 방문하여 감상하게 되면 계속 '현재 등록'으로 수정이 있을 것이고,

아니더라도 워낙 수정을 많이 하는 습성이 있으니 만큼, 중간중간 수정을 가할 것이다.

일단은 끝이 났으니, (작성 중)을 지운다.

다음에 갈 땐 이전에 뵈었던 그 남성 도슨트 분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네.



기획자분들, 이 글을 보실 일은 없겠지만서도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