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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미술 전시] 키아전 @ 예술의 전당 Sandro Chia

by Vanodif 2015. 10. 2.











산드로 키아전. 그동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이 임박해서야 겨우 다녀왔다.

동시 진행 중인 <보테로전>이나 <모딜리아니전>에 비해 사람이 많이 적던 전시회.

덕분에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는 있었는데...

음...










10월 4일까지의 전시 마감이 다가와선지 반액이던가, 무튼 할인을 하던 도록.

그래, 할인을 하니까 비로소 도록을 살 만 하던.

그렇다고 매번 전시 끝 무렵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ㅜㅠ


이번 전시에 대한 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도슨트가 살린 전시'였다.

박선영 도슨트셨는데, 너무 설명을 잘 해주셨어서 명찰을 보고 굳이 이름을 외웠던.

그동안 무수히 전시를 다니면서 도슨트 설명을 들어왔지만

지난 번 <앵그르-칸딘스키> 때의 그 남자 도슨트분과 

박선영 도슨트분 만큼 알차게 설명해 주시는 분들이 없었다.

박선영 님은 아예 미술사를 훑어 주시던.

미술사조에 대해 전혀 몰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분하게 요점정리를 해주셨고,

그뿐 아니라 더 좋았던 것은,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주셨던 점이다.


이번 <키아전>은 오디오 가이드가 엉망인데, 도록을 사고 보니 도록이 있다면

오디오 가이드는 굳이 대여할 필요가 없었더라. 거의 똑같던.

문제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더란 거다.

동시 진행 중인 <모딜리아니전>도, <보테로전>도, 오디오 가이드가 훌륭했는데

아니 당최 이 <키아전>의 오디오 가이드=도록 안의 설명은

왜 이렇게 만든 걸까???

만든 사람 자신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서둘러 번역한 것이 아닐까ㅡ싶었을 정도였다.


처음 열 점 정도를 오디오 가이드로 들으며 보는 중에 마녀와 나는 화가 치밀었는데

마침 그때 박선영 도슨트께서 설명을 시작하셔서 오디오를 끄고 가서 들었다.

그랬더니 막힌 속이 뻥* 뚫리던.

어쩜 그렇게 차분하고 조리있게 말을 잘 하시는지.

덕분에 전시회에 대한 짜증이 눈 녹듯 녹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박선영 도슨트 님.


또 한 가지 불만은, 아무리 초기 작품이 세 점 밖에 안 왔다 하나, 

그래도 작품시기 순으로 배치를 해주었으면 좋았겠다ㅡ싶었다.

화가가 작품활동을 한 순서대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면, 그렇게 그림을 보는 순서 자체 만으로도

화가의 삶을 조금은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재에 책을 꽂을 때 작가의 시기 순으로 꽂으면 그 나라 문학사조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지

ㅡ는 이상적인 책꽂이인데, 정작 나는 그렇게 못 하고 있긴 하다.

그 많은 작가들의 생일은 언제 다 찾니, 그래. -_-;

하지만 한 작가의 책 내애서는 가급적 작품 발표 순서대로 꽂아 놓는다.


마크 로스코전이 그것을 참 잘 했지.

그래서 그 전시회에서 난 더욱 큰 감동을 했을 게다.

작가의 작품순서를 따라 작가의 생각의 흐름과 변화를 조금은 따라갈 수 있었으니까.










Sandro Chia

Cane e Padrone 

개와 주인

1983

Oil on canvas
180x160cm



3점 온 초기 작품 중 하나다. 우선 도록 설명을 적습니다.



키아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장점은 컬러의 다채로움이다. 이것은 70년대 개념미술 아티스트들이 흑백의 시대를 살아 온 이후 찾아 온 자유로운 생명의 불꽃과 같이 새롭고 강렬한 것이다. 이 작품 속 사람은 그의 왼쪽 팔을 들어 개에게 따라올 방향을 가리킨다. 주인공의 팔과 동물의 뒷모습의 프로파일을 따라 그려져 있는 동선이 작품에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키아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마스 만을 고려할 때 당신은 '개와 주인' 작품을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아래로 네 번째인 두 가지 키의 휘파람을 분다. 이것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심포니의 두 번째 무브먼트의 주요 멜로디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신으로부터의 산물은 언제나 동등하고, 음악에 민감하며, 예술의 숭고한 회상으로만 반응한다. 세상의 나머지 부분들로 하여금 하찮은 것과 저속한 계산들을 취하게 하라. 그의 두세 개의 반짝이는 앞니가 아침 태양 빛에 빛날 때 개와 주인은 지상 위의 하늘이다. 문학과 회화가 (이런 식으로) 개와 주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도록 밑에 첨부된 설명)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났다가,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키우던 사냥개 아르고스는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오디세우스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꼬리만 흔들다가 곧 죽고 말았다. 20년 동안 주인의 냄새를 기억하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주인을 알아보고 눈을 감은 것이다.



오디세우스 일화를 제외한 도록의 저 설명이 바로, 가장 처음에 배치되었던 이 작품에 대한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자아... 나와 마녀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던 걸까?


우선, '개념미술'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했다. '개념미술'이란 것은 신고전주의, 인상주의와 같이 잘 알려진 사조가 아니다. 심지어 그렇게 잘 알려진 사조라 해도, 그 사조의 배경이나 두드러진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진행시키는 것이, 비전공자 일반관객에 대한 매너다. 그런 배려가 없이 바로 '개념미술' 어쩌고. 심지어 키아는 개념미술을 반대하여 트랜스아방가르드를 주장한 화가가 아닌가. 여기서부터 짜증. 이 '개념미술'이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서만 나온다면 뭐, 그러려니 하겠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반복, 또 반복되더란 거다. 그렇게 중요한 단어를 간략한 설명도 없이 계속 사용하다니, 이런 비매너가 어디 있나. 도슨트 분께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어서 비로소 화가 풀렸던.


'개념미술'이라 함은 미니멀리즘 이후 나타난 미술사조로, 미술작품의 물질적 측면 보다는 비물질적, 즉 개념적 측면을 중요시한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물질로서의 작품 보다는 그 작품을 있게 한 미술가의 아이디어를 중시한 것이지. 대표적 작가로 마르셸 뒤샹이 있는데, 그처럼 작가가 직접 그 변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상한 작품의 물질적인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그 제작을 맡기는 것이다. 존 레논의 반려자로 유명한 오노 요코 님이 행위예술가이자 이 개념미술가이다. 오노 요코의 작품은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사진이나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더라.


아아 그런데... 도록의 이 설명은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키아 본인의 이야기가 난해하다. 그리고 이렇게 애써 어렵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 정말 똑똑한 사람은, 지극히 어려운 것을 지극히 단순하고 쉽게 풀어 이야기하는 사람이니까. 어려운 것을 어렵게 설명하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야 말로 정말 힘든 일인 법이다. 내게도 현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설프게 알고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더없이 확실하게 이해하고 소화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자유자재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무튼, 그래서 애써 어렵게 개념을 설명하고, 애써 어려워 보이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난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이 어려우면 어려운 만큼 '당신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생각이 들어.


키아는 물론, 많은 생각을 하고 또 자신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끝없이 강조하고 표현하려 애쓴 것 같다. 정말로 현학적인 말을 많이 하는데... 난 싫은 거지. 수요 선생님이 좋은 이유는, 어렵고 생소한 내용을 초보자도 이해하기 쉽도록 잘 설명해주시기 때문이다. 듣는 자가 이해하건 말건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소통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배설이니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키아는 내가 이해하기엔 역부족일 정도로 '유식한' 사람인 것은 아닐까. 확실히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작품 속에 그것이 드러나 있지. 그가 다루는 모든 작품을 다 읽고 들어 잘 알고 있는 감상자라면, 키아의 작품들을 소름끼치도록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작품이라면, 즉 많이 아는 자에게만 즐겁고, 적게 아는 자에게는 혼돈일 뿐인 작품이라면, 대중에겐 전시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만 즐기라 그래. 그들 만의 리그, 라는 거 부럽지 않으니까. 정말 위대한 작품은 말이다. 감상자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층이 보이며, 그리하여 각자의 수준에 맞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적게 아는 사람은 적게 아는 범위 내에서 그 작품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고,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이 아는 만큼 즐거워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정말 똑똑하고 위대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 결국 키아 디스를 하고 있네, 나는. -_- 뭐, 그렇게까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보면서 달려 들고픈 작품들도 꽤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너무 시끄러운 작품들이어서는... 그 소음공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도록을 다시 읽어 보니, 키아가 이 작품에서 의도한 바를 비로소 조금은 알겠다. 음... 난 청각 보다 시각이 조금 더 발달한 사람이어서는. +_+ 요는, 문학과 회화의 관계를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 작품에서. 오래 전부터 회화는 문학의 시녀 역할을 해왔다. 회화 뿐이겠는가. 음악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다만 회화는 노골적인 시녀 역할을 해왔던 건데, 이야기가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거나ㅡ그리스 신화를 표현한 그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성경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도 무수하다ㅡ, 작가가 의도한 어떤 언어적 메세지를 미술적 장치를 이용해 표현한 것 등의 예가 있다. 그림에 시든 꽃과 벌레 먹은 과일, 악보, 해골, 시계 등이 배치되어 있다면, 그것은 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메세지를 지닌 바니타스 정물화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메세지를 주려는 장치였다든가. 젊은 남자가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황금사과를 들고 있다면, 그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파리스 왕자라든가. 키아는 이 작품에서 문학과 회화가 이런 식으로 주종의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토마스 만의 <주인과 개>를 읽었더라면 이 작품이 더 재밌을 수 있었겠는데, 뭐, 별로 읽고 싶지 않다. 


※ '슈베르트의 미완성 심포니의 두 번째 무브먼트의 주요 멜로디' 라는 표현이 좀 어색한데,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 2악장의 주제'를 그렇게 번역한 것이었다. 










Sandro Chia

The Hand Game 

손 게임

1982

Oil on canvas
232x203cm



위 아래 작품과 함께 초기 세 작품인 이 작품들은 사이즈를 보면 알겠지만 아주 큰 작품들이다. <키아전>은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동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기 위해 도록의 설명을 가급적 많이 실을 예정이다. 물론 전부 다 실을 순 없지.



비가 내리듯 떨어지는 무거운 실린더들에 둘러싸인 건장한 남자는 키아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했고, 키아는 수년 동안 몇몇 새로운 작품들을 변화된 양상으로 재창작하였다. 1981년 키아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회화는, 하나의 이미지를 선택하고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의 작업이어야 한다."


이 문장은 작가의 작품 제작방식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미술사의 구체적인 지점과 새로운 연결을 시도했는데, 형태와 회화의 물질에 대한 것으로, 이 작품의 주제 표현에 있어서 드라마틱한 결과를 가능하게 했다. 더욱 개념화되고 비물질적이며 비현실화되고 냉정해지는 당대의 예술흐름에 관하여 산드로 키아는 '예술에 있어서 무엇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예술가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예술가들은 자율적이고 딱딱한 비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그들의 작품세계를 이끌어 갔다. 한편, 산드로 키아가 주된 역할을 했던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사조는 수작업과, 전통 회화 및 드로잉, 그리고 조각의 중요성을 재발견했다. 작품 속 인간의 형체를 통해 조각적인 물질성이 보이고, 추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린더들은 곧 쓰러지는 기둥 조각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키아의 표현 덕분에 갈수록 미미해지던 개념미술의 논리가 철저히 무시될 수 있었다.


(덧) 그리스 신화 <미다스 왕>에 따르면, 매우 탐욕스러운 미다스 왕은 더 많은 부귀를 얻기 위하여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닥치는대로 황금을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후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딸을 안았다가 딸 역시 금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비극을 맞는다. 결국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가서 원래대로 되돌려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었고, 강물에 목욕을 하면서 이전의 미다스로 회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의 뜻을, 미다스의 손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다.



역시 어렵지? 키아의 말도 어렵고 번역도 어렵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장에는 의역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번역체는 이해하기 더 어려워요. '추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린더들은 곧 쓰러지는 기둥 조각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키아의 표현 덕분에 갈수록 미미해지던 개념미술의 논리가 철저히 무시될 수 있었다.' 는 낯선 표현인데 예술적이지도, 가독성이 좋지도 않다. 그나저나 이 평은 누가 적은 거야? 도록 어디에 표시되어 있는지 찾을 수가 없네. 저 (덧) 부분은 많은 경우 오디오 가이드에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도록을 보니 작품에의 이해가 높아지긴 했는데, 이 (덧)은 다소 당황스럽지. 미다스왕의 일화가 대체, 왜??


ㅡ는 왜냐 하면 작품의 제목을 보면 된다. '손 게임'. 이 작품을 보면서 왜 제목이 '손 게임인가?' 하며 마녀에게 물었더랬는데, 그것에 대한 답을 이제야 알겠다. 역시 무엇이건 '아는 만큼 보인다'고, 모든 불만의 시작은 '개념미술'에 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슨트께서 이 작품을 무너지는 개념미술과, 그 뒤를 이을 트랜스아방가르드의 도래를 표현한 것이라 하셨는데, 이제 좀 알겠다...?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남성의 신체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연상시키며, 그의 오른손 앞에 있는 얼굴은 그의 전시대 화가인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의미한다고 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아! 모딜리아니의 그리스 조각상 얼굴!' 싶었다. 그런데 많고 많은 화가들 중 왜 하필 모딜리아니를 선택했는가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아시는 분 설명 좀 부탁합니다. +_+; 미다스 왕의 '손 게임'이 물질의 존재를 부각시키듯, 키아 자신도 이제부터 개념미술로 가득한 당대의 사조에 대항하여 회화의 물질성에 집중하는 트랜스아방가르드를 개척하겠다!는 결의를 표현한 그림이다.









Sandro Chia

Intercostal Crystal Pistol

늑골 사이의 크리스털 권총

1987

Oil on canvas
183x170cm



도록 설명 갑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화면구성 중심부에 배치되었다. 이는 풍성하고 변화될 수 있는 우주에서 탄생된 인간을 나타내는데, 우주는 하트 및 체크 모양으로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검정색, 오렌지색, 그리고 다른 여러 톤들로 표현되었다. 사람의 얼굴은 하트 모양으로 뚫린 마스크로 가려져 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연구를 선명히 떠올리게 하며, 아티스트와 세상 간의 논쟁적인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분쟁은 주인공의 손에 들린, 과거를 겨누듯 어깨에 기대어 있는 총을 통해 다시 강조된다. 트랜스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은 과거를 여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우선순위를 해체하는데, 마치 이 그림의 주인공이 반대로 총을 쏘는 것 같은 것이다. 키아는 대중적 사회와 소통하기를 잊지 않는다. 이미지의 생산과 재생산을 통해 보여지는 문화적인 아방가르드로부터 팝 컬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이미지에서는 항상 예의가 갖추어진 아이러니가 발견되는데, 이는 정중한 스타일의 폭로를 일삼는 것으로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더불어 즉흥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기법은 상징적인 표현을 할 때 나타나는 특성이기도 하다. 형태와 색채가 퍼즐 조각처럼 섞이고 교차한다. 그리고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국제적이거나 국내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팝 컬처인 많은 요소들을 제안하며, 동시에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공존하고 있다.



자아, 저 설명의 가독성은 몇 퍼센트인가?



The painting is built on human centrality immersed in a rich and changeable universe made of blue, yellow, red, black, orange and their shades. The man's face is covered by a mask which is also a heart, an explicit recall to Freud's researches and the problematic and conflictual relation between the artist(Ego) and his own irrational and passionate world (Es). The conflict is highlighted also by the gun in the man's hand, pointed towards his own shoulders as if the past were the target to be hit. On the other hand the Transavantgarde artists travel through the past, but they dismantle its hierarchies, just like the man who shoots backwards. Chia does not forget to live in a mass society, crossed by the production and reproduction of images and contaminates the various levels of culture, starting from the high one of the historical avant-gardes until popular culture. And you can always read a polite irony in his images, the cordial style of divulgation which makes the work accessible and immediate even when it presents a symbolic meaning.


이 작품 중심에 위치한 사람은 파랑, 노랑, 빨강, 검정, 주황 등의 색조로 표현된 풍성하고도 가변적인 우주 속에 잠겨 있다. 하트모양 가면을 쓴 남자의 얼굴은 명백히 프로이트 이론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예술가(Ego)와 그 자신의 비이성적이고도 열정적인 세계(Id)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를 나타낸다. 이 갈등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권총으로 또한 강조되는데, 권총이 자신의 어깨 뒤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과거를 쏘려는 것 같다. 한편 트랜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과거의 기법을 다루긴 하지만, 그들은 그림 속의 남자가 뒤를 향해 쏘는 것처럼 과거의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다. 키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이미지의 생산과 재생산이 교차하는 대중사회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역사적인 아방가르드에서 팝 컬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문화를 대상으로 물들이고 있다. 해서, 그의 작품에서는 이미지를 사용한 정중한 역설을 볼 수 있는데, 그처럼 우회적으로 폭로하는 방식을 통해 그의 작품이 즉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졸역이지만 '예의가 갖추어진 아이러니'와 '정중한 스타일의 폭로를 일삼는 것' 에서 물음표가 떠올라 다시 내 언어로 정리해 보았다. 번역 보단 낫지만 원문 자체가 난해한데, 기존지식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렇게 말을 하면 안 되지 않나. 도록에서는 괜찮다, 왜냐하면 앞의 서문들에서 기본 개념들을 설명한 후에 작품 설명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오디오 가이드에 사용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디오 가이드에선 앞서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충분히 해주지 않으니까. 


자, 문장 공부를 해보자. 색이 많으니 '풍성하다'이고, 색의 종류가 많으니 '가변적인'이다. 그리고 그 알록달록하면서 다양한 형태가 있으므로 그 배경은 다시 한 번 '가변적인'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뭐가 참 많고 또 쉽사리 휙휙 바뀐다는 뜻이다. 그 속에서 충동적이고도 변덕스러운 세계와 그 세계를 통제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자아는 대립하며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도슨트께서 이 작품 또한 개념미술과 키아의 대립을 나타낸다고 하셨는데, 아마 미술가의 아이디어라는 변덕이 주류를 이루던 당대의 미술계를 향해 키아 자신이 총을 빼들었다는 뜻인가 보다, 싶다. 혹은 비단 개념미술 뿐 아니더라도, 역사를 통틀어 미술계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돋 있겠다. 미술의 사조라는 것이 워낙 변덕스럽지 않은가.


키아가 속한 트랜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외치는 개념미술가들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구상미술, 표현미술로 회귀한다. 즉 그들은 과거를 여행하는 것인데, 그냥 단순히 미술작품의 물질성을 중시한 과거의 사조들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여 오늘날 산업사회, 대중사회 속의 다양한 문화계층을 물들인다, 즉 다양한 계층의 문화에 전통적인 구상/표현미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는 뜻으로 난 이해했다. 그가 개념미술, 혹은 개념미술 아니더라도 과거의 미술사조를 해체하여 표현할 때 슬쩍 역설적으로 묘사하는데, 역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작품에의 이해도를 높일 뿐 아니라, 여러 다양한 요소들을 그의 작품 속에 녹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좀 의아할 텐데, 키아의 작품을 보면 많은 화가들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건 뭐, 미술공부가 아니라 영어공부, 국어공부잖아. -_ㅜ 피곤해. 










Sandro Chia

Collaborazione

협동

2006

Oil on canvas
80x100cm



이 작품에 대해서는 도록, 오디오 가이드, 도슨트 설명의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다만 도슨트께서 '키아의 작품에서 글자나 숫자가 등장하는 것은, 소쉬르 기호학을 표현한 것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하셨다. 두 사람이 협동하여 글자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혼돈스러울 뿐이다. 개인적으로 적당히 좋은 소리가 났던 작품이다. 음악적이기도 하고, 슥슥, 쓰는 소리도 들리고. 그 중에 알파벳이 튀어 나오는 소리, 그리고 웅성웅성 혼돈의 소리도.









Sandro Chia

Cosmetic, Mimetic, Athletic

코스메틱, 미메틱, 애틀레틱

2002

Oil on canvas
220x200cm



이 작품은 아래의 <턱시도...>와 함께 연관지어 감상하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저 뒤의 <Pensiero 사유>라는 작품과도 연결이 된다. 남자의 손에 있는 동물이 Cosmetic, Mimetic, Athletic 이라 말하지만, 이 단어들에선 틱틱틱 소리가 난다. 아마 저 동물이 내는 소리가 틱틱틱 하게 들렸는지 모르지. 그리고 화가, 남자는 그 동물을 바라보지만 그 언어를 이해할 길은 없다. 그 뒤로 천사가 날아다닌다. 저 천사가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는데. 남자나 동물에 상관 없이 날아가는 모습으로 보아 나는, 동물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과, 인간과 소통하지 못하는 천사, 신, 혹은 어떤 다른 차원의 영혼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석연치 않다.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꼈던 작품인데 뭔가 닫ㅂ답해.










Sandro Chia

Tuxedo, Libido, Torpedo

턱시도, 리비도, 토르페도

2002

Oil on canvas
230x190cm





키아 작품의 특성은 바로 즉흥성이다. 이것은 대중들이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표현적인 양상임과 동시에 안정적 가치에 대한 명쾌한 예술적 표시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절충주의로 표현할 수 있다.

산드로 키아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묘사하였다.


"나는 내 작품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항상 변하기를 바란다.

감정은 지속적이고 형태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에 의해 변화한다.

나는 내가 조화를 느끼지 못할 때, 내가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는

이상적인 필요의 상태를 발견하지 못할 때 고통스럽다.

나는 내가 미션을 이루기 위한 항해를 할 때 기쁘고, 이것은 회화적 행위이며 내 스킬과는 관련이 없다.

나는 중요한 작품들은 충분한 영감의 흔적과, 절대적으로 무관한 형태적 열망과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 작품에서 나는 그 형체와 백그라운드의 기묘한 자연과의 관계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야망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유음과 리듬으로 구성된 작품 속 요소들 간의 대화는 현재 진행형이고, 멀리서 세상의 새벽 속 후광이 비추는 것을 볼 수 있다."



......

짜증나는 설명이다. -_- 모르겠다, 걍 해석 안 할래. 요는 키아 작품에선 즉흥성이 하나의 특징이다, 는 것. 아... 가독성이 형편 없는 번역이네, 증말. 이 '즉흥성'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작품에 대한 도슨트분의 설명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일단 제목에 나오는 Tuxedo, Libido, Torpedo는 말그대로 턱시도와 프로이트의 리비도, 그리고 토르페도라는 무슨 차 이름이라는데, 그런 단어들의 나열이다. 단어들 사이에는 관련이 없다고. 남자가 하는 말인데, 끝이 도도도거리지. 그리고 앞에 있는 돼지는 Palazzo, Terrazzo, Paparazzo라 하는데, 팔라조는 왕궁, 테라조는 테라스, 파파라조는 파파라치로, 이 또한 서로 연관이 없는 단어들이라 한다. 다만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를 이탈리아에선 쪼쪼라고 표현한다고. 위의 작품과 해석은 비슷하다. 돼지는 돼지의 언어로 말하고, 인간은 인간의 언어를 말하지만,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소쉬르의 기의-기표 관계를 연관지을 수 있다, 고. 또한 키아는 이탈리아에 성을 하나 구입해서ㅡ키아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ㅡ와인을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배경은 그 포도밭을 그린 경우가 많다고. 이 작품에서 또한 포도밭을 그린 것이라 한다.










Sandro Chia

Back to the Tree

다시 나무로

2005

Oil on canvas
70x60cm



아... 이 작품. 음. 조그만 작품인데 도록엔 크게 나왔네. 키아의 작품은 신기하게도 도록으로 보았을 때 더 나은 작품들이 꽤 많다? 그런 전시회는 처음 본 건데, 집에 와서 도록 보고는 다, 당황했어. +_+;; 이 작품에 대한 오디오 가이드를 듣다가 마녀가 이어폰을 집어 던져 버렸다. 물론 나도 진지하게 오디오 가이드 접어 버릴까, 생각했었고. 다행히 그 순간 도슨트께서 구원 처럼 나타나셨지. Tada-* 도록의 설명을 적을까 말까. 아... 읽는 것만으로도 무섭도록 에너지가 빨려 나가는 문장이라니. 문장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어! @ㅁ@;; 나만 에너지가 빨리는 건 억울하니, 눈 딱 감고? 한 번 타이핑 해 볼까, 으흐흐.



이 작품 속 생각에 잠겨 있는 주인공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 이 장면은 작가의 다른 작품의 다양한 배경색에서 볼 수 있는 변화성을 고려할 때 채도적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비가시성과 절대성을 표현하는 그만의 파란색으로 영원성을 반영하는 인간의 형체를 그렸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행위는 인간의 심리적 싸움과 두려움에 맞서는 것에 관한 주된 기능이다. 주인공의 팔꿈치와 구부러진 다리가 나뭇가지에 기울어져 있고 자연의 힘에 의존하는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주도권과 제한권을 가진 자로 여전히 나무 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과 새로운 발상만으로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키아는 자연이 생명에 필수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며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덧) 프로메테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신들보다 한 세대 앞서는 티탄족에 속하는 신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 선지자'라는 뜼을 지닌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인 이아페토스의 아드이며, 아틀라스, 에피메테우스, 메노이티오스, 헤스페로스 등의 형제이다.



저 생뚱맞은 덧글이라니. '생각'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연상된다는 거지? -_- 도슨트님의 말이 훨씬 이해가 쉽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포즈이다, 라고. 이 또한 Pensiero에 나오는 포즈랑 조금 비슷하다. 키아는 작품을 그리기 전에 수백 번의 드로잉 연습을 했다 하는데, 이렇게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슷비슷한 것 같다. 뭐, 당연한 이야기려나.










Sandro Chia

Strange Dance

기묘한 춤

2005

Oil on canvas
70x60cm




엇, 이 작품은... 도록의 설명과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이 조금 다르네. 오디오 가이드에서 '하늘은 지구의 색과 같다'라고 말해서 마녀랑 나랑 둘 다 뜨아아??? 했더랬는데, 책에는 그 부분이 없다. 그나저나 난 저렇게 페이지가 넘어가 그림이 분리되는 것이 참 싫더라. 가로로 넓은 그림이라면 차라리 페이지를 눕혀서 인쇄해 주었으면. 뭐, 자꾸 싫은 소리만 툴툴거리는데, 툴툴거리는 것 외에는 다 좋다는 겁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도록의 설명을 싣지 않는다. 번역된 설명이 많지도 않고.


처음 보았을 때 샤갈이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도슨트께서 샤갈을 언급해 주어서 기뻤다. 그러니까 중간에 있는 남자의 발이 샤갈 작품에 등장하는 모습 같았거든. 둥둥 떠있는 듯한 그런. 






이런 느낌?


키아의 작품에는 많은 화가들의 특징이 여기저기 스며 있는데, 마티스가 지배적인 것 같으나, 내게는 샤갈이 더 먼저 떠올랐다. 다만 샤갈의 작품이 훨씬 예쁘죠. 마티스, 샤갈, 피카소, 고흐, 심지어 르네 마그리트까지 휘리릭 느껴지더라. 뭐, 내가 그나마 알고 있는 몇몇 화가들이 떠올라 반갑긴 했지만서도... 좀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피곤했달까.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감각적으로 피곤을 유발하는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 예쁘지가 않아. 그리고 좀 고약하단 느낌이 들었다. 제목도 매력 없게 까칠하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미술에 대해 지식이 많이 부족한 한 일반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도슨트께서 이 작품에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언급해 주셔서 또한 기뻤다. 오른쪽서 팔을 치켜 든 남성은 확실히 나머지 두 명을 선동하는 자유의 여신을 상기시키니까.










Sandro Chia

Men Running

달리는 남자들

2005

Oil on canvas
100x70cm




이 작품은 딱히 말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뭔가 고구려고구려스러워서는? 왜 고구려란 단어가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 -_-a










Sandro Chia

Al Lavoro nella Natura delle Cose

자연 속 여러 작업들

2000

Oil on canvas
55x46cm




이 작품에 대한 도록의 설명은 좀 적는 것이 좋겠다, 싶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이 작품은 키아의 작품들 중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상들 중 하나로 회화와 언어 사이의 관계 즉, 이미지와 단어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중심부에 등장한 거구의 남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연상시키고 그의 주변에는 숫자와 글자들이 캐주얼하고 모호한 순서로 놓여 있다. 미스터리한 글자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하다. 작품의 구조를 보면, 한 남자가 작품의 중앙에 있는데 이는 마치 그가 천지창조 때 우주의 중심에 위치한 듯한 느낌이다. 초록색과 오렌지색의 빛줄기가 그를 감싸고 있어 마치 특별하고 신성한 존재로 느껴지고, 알 수 없는 언어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것처럼 표현했다. 이 시기 키아의 작품에서는 미스터리한 우아함과 자연스러움 속에서도 기대하지 못했던 단순함이 보여진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는 완전한 조화가 느껴지며 글자와 숫자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연결들이 감성적인 부분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아니 대체 왜 쉼표를 쓰지 않는 것일까? 내가 일부러 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쉼표가 너무 없는 번역이야. -_- '캐주얼하고 모호한 순서'라는 것과, '기대하지 못했던 단순함'이라든지, '완전한 조화가 느껴진다'는데 어째서, 어떤 어떤 부분의 어떤 표현을 통해 그것이 '완전한 조화'라는 어마어마한 표현을 이끌어내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등, 몇몇의 불만사항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훌륭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잘 분석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연상시키는 남성은 천지창조 때의 아담으로 연결되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일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속 여러 작업들'이란 제목도, 작품 속 남성이 나체인 것도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도 나체고,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이름을 붙이고 있었을 때는 아직 범죄하기 전이었으니 그 또한 나체였음에 틀림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사물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가 사용한 언어는 '완전한 언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즉, 기의와 기표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그것을 100% 정확하게 드러낸 언어였다는 것이지.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갈라지기 이전, 아담이 사용했던 언어는 오늘날의 것과 같지 않은, 신의 언어와 같은, 혹은 흡사한 어떤 언어였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빨리 죽어 버리고 싶었지. 죽게 되면 천국에 가서 그 완벽한 언어, 를 알게 되고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농담이 아닙니다. 한 때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온전한 언어, 에 대한 탐욕은 여전하다. 뭐, 성경 속의 내용을 생각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과학을 끌어오는 건 좀 유치한 일이고. 나야... 과학을 무한 불신하는 인간이긴 하지만서도. 으하하. +_=; 결론은, 아름답다고 할 순 없지만 훌륭한 해석이라는 것. 그리고 박수 짝짝짝!!!











Sandro Chia

Rescue Me

나를 구조해줘요

2005

Oil on canvas
130x160cm






이 작품은 키아의 어린 시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만든 것이라는데, 피렌체의 아르노 강에서 익사할 뻔한 경험을 연상한 것이라 한다. 아르노 강은 전혀 저렇게 파도치지 않지만, 키아의 당시 목숨이 오가던 입장에서는 저렇게 거센 파도가 치는 느낌이었을 거라고.  음... 도슨트분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살짝 의아했는데... 나 자신이 어렸을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더랬는데, 그렇지만 그 때의 바다는 내게 방울방울이 가득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바다로 인식되어 있다. 딱히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때나 지금이나 수영을 못하는데 허우적대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죽는구나 싶었고, 그 상태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해서, 잔잔한 강이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로 인상에 박혀있다는 말이 쉬이 이해가진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지. 


도슨트께선 이 작품을 보면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떠올렸다고 하셨다.





이 작품입니다. 극도로 단순화시켰다 할 수 있겠지만, 뗏목과 깃발, 난파당한 사람, 이란 점에서 연상이 되겠다. 


도록의 설명 일부를 발췌하여 적는다.



키아는 이 기적 같은 구출(아르노강 익사 사건)을 화가로서의 직업을 찾게 된 것으로 연결 짓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단지 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현재적 가능성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합이 인간으로 하여금 위험을 이겨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가 예술에 의해 자신의 삶이 구출되었다고 느끼는 것처럼, 회화는 같은 차원에서 내일의 희망으로 안내한다.











Sandro Chia

Inspiration

영감

2004

Oil on canvas
130x162cm




딱, 보아도 마그리트가 생각나지? 역시나 도록에서도 마그리트를 언급하고 있다. 도록의 설명.



이 작품은 벨기에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와 형이상학 회화의 아버지인 이탈리아 조지오 데 키리코를 연상시킨다. 몸의 반이 물고기인 이 인어공주는 거대한 손으로부터 커다란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 받는다. 그러나 그 꽃을 받기 보다는 스스로가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 이상하게 느낄 수도 있는 이 구성방법은 사실 그리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키아의 예술세계는 가시적인 세계와 상상만으로도 가능한 형이상학적인 셈계,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술은 그에게 완전한 형체인 것이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손은, 창의적인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연결매체로서의 역할을 주장한 미켈란젤로부터 안니발레 카라치까지 예술사 속 많은 화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예측 불가능한 인어공주에게 주어진 상황은 고립적이고 미스터리한 효과를 창출한다. 이처럼 키아의 생각은 항상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고, 그 세계는 과장되고 비현실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예술세계만큼은 완벽하게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덧) 장미의 탄생 배경에는 바로 영원한 아름다움과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탄생 이야기가 연관되어 있다. 아프로디테는 천공의 신 우라노스의 잘려진 성기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인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아프로디테가 태어날 때 바로 그 거품 속에서 장미꽃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장미가 붉게 물든 이유' 중에는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소년 아도니스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도니스는 산돼지 사냥을 나갔다가 산돼지의 이빨에 옆구리가 찔려 죽었는데, 이때 비너스가 아도니스를 살리려고 하다 장미 가시에 발을 찔렸다. 그떄 그녀의 발에서 나온 피가 백장미에 묻어 붉은 장미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장미의 적색은 열렬한 사랑을, 적황색은 불타는 사랑을 의미하게 되었다.



설명이 기네. 장미 부분, 아프로디테 부분은 생각지 못했는데 연관지으니 재미는 난다, 그런데... 음. 아프로디테가 생선꼬리? 조지오 데 키리코는 처음 들은 이름인데, 찾아 보니 마그리트랑 비슷하네.






이런 그림이라 한다. 아 왜 피곤하지. -_-; 작품에 대해 생각을 하고픈 마음이 없어졌다. 몸이 피곤해 그러나.










Sandro Chia

Solitano Femminino

고독한 여인

2006

Oil on canvas
80x100cm




도록의 설명.



이 작품은 키아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정확한 드로잉과 색상이 잘 어우러진 회화이다. 그림 속의 젊은 여성은 카드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그녀의 고독을 의미하는 이 게임은, 창작에 몰두하며 홀로 있는 작가의 고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해석하ㄴ 작가에게는 함께 의견을 나눌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캔버스 앞에 홀로 있으며, 물감과 붓만이 그의 유일한 친구이다. 이것은 마치 그림 속 여자가 홀로 카드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게임의 해답은 주인공 여자의 머릿속에서 나오거나 운을 통해 발견되기도 할 것이다. 작품의 탄생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에도 그 방향이 세상을 향한다. 회화의 주관성과 기쁨을 재발견하는 창작의 순간은 트랜스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트랜스아방가르드 양식은 작가들로 하여금 수년간 개념미술로 장악되었던 흐름에서부터 표현주의적인 성향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작은 작품인데, 맘에 들었다. 예쁘지 않은데 뭔가 묘하게 예뻤달까. 여성의 고독이 우아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했어. 도슨트께서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아! 싶었다.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입니다.










Sandro Chia

Perdurare della Sola Pittura

한 작품만을 추구하다

2002

Oil on canvas
70x50cm




이 작품은 해설이 없는 작품인데, 어째서 저런 제목을 붙였는지가 궁금했다.










Sandro Chia

Swinging the Cat

고양이를 흔들며

2005

Oil on canvas
162x130cm













Sandro Chia

Untitled

무제

2007

Mixed media on paper
29.7x21cm











Sandro Chia

Untitled

무제

2007

Mixed media on paper
29.7x21cm














Sandro Chia

Untitled

무제

2007

Mixed media on paper
29.7x21cm














Sandro Chia

See Through Trombone

트럼본 사이로 보면

2006

Oil on canvas
162x130cm













Sandro Chia

Pan Composing

팬의 작곡

2006

Oil on canvas
162x130cm













Sandro Chia

Close to the Ocean

바다 가까이에

2006

Oil on canvas
230x190cm













Sandro Chia

Leda and the Swan

레다와 백조

2006

Oil on canvas
230x190cm













Sandro Chia

Volti Antichi

고대의 얼굴

2006

Oil on canvas
70x50cm













Sandro Chia

Untitled

무제

2006

Mixed media on paper
106x76cm













Sandro Chia

Untitled

무제

2006

Mixed media on paper
106x76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43x37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53x44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42x39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30x41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38x34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50x39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50x43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54x46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47x38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54x44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44x44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47x38cm
















Sandro Chia

Frammenti Racconto Minore

단편소설의 부분

2009

Drawing, gouches and mixed media on paper
38x33m

















Sandro Chia

Amost A Kiss-1

키스

2009

Oil on canvas
50x60cm















Sandro Chia

Amost A Kiss-2

키스

2009

Oil on canvas
50x60cm













Sandro Chia

Amost A Kiss-3

키스

2009

Oil on canvas
50x60cm














Sandro Chia

Amost A Kiss-6

키스

2009

Oil on canvas
46x55cm













Sandro Chia

Amost A Kiss-8

키스

2009

Oil on canvas
50x60cm













Sandro Chia

Amost A Kiss-4

키스

2009

Oil on canvas
60x50cm













Sandro Chia

Amost A Kiss-7

키스

2009

Oil on canvas
60x50cm













Sandro Chia

Pensiero

사유

2011

Oil on canvas
60560cm













Sandro Chia

Untitled

무제

2009

Oil on canvas
180x100cm












Sandro Chia

Agguato

기습

2009

Oil on canvas
200x150cm













Sandro Chia

Guardidnga

신중하게

2009

Oil on canvas
180x155cm













Sandro Chia

P. for Painting

페인팅의 P

2003

Oil on canvas
200x220cm












Sandro Chia

The Acrobat

곡예사

2004

Oil on canvas
200x220cm




















Sandro Chia

Cane e Padrone 

개와 주인

1983

Oil on canvas
180x16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