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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미술 전시] 해석된 풍경 Korea Tomorrow 2017 @성곡미술관

by Vanodif 2017. 12. 8.






성곡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sungkokmuseum.org/main/


코리아 투모로우 2017 홈페이지: http://koreatomorrow.org/


큐레이터분의 전시 해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45





전시 검색하다 '강요배'란 이름에 두 번 생각 않고 티몬에서 표를 구매한 전시. 거기다 지난 달 마니프 MANIF에서 반한 이제훈 님의 작품도 온다 하니 더욱 기대에 찼다. 그리고 처음 방문한 성곡미술관은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가까운 곳, 사직단 근처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강 화백과 이 화백님의 작품만 보고 간단히 올 요량으로 마련한 두 시간으론 반 밖에 볼 수 없었던 전시.







해서 다시 구매해서 방문한 전시는 더욱 좋았다. 두 번째 방문에선 세 시간 반 동안 감상했는데도 지난 번 보았던 3관은 다시 들를 시간이 없었을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운 전시였다. 성곡미술관에는 1전시관 2전시관 두 건물 속 총 5관으로 나뉘어 현대미술가 27분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민중작가분들의 작품이 많지만 풍경화나 구상화, 추상화,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각 전시관마다 도슨트가 계셔서 작품 보다가 궁금한 점 질문하면 친절하고 풍성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적극 부탁드리도록 하자. 2관에는 두 번 다 외국인 도슨트께서 계셨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설명해주시니 걱정 말고 요청합시다.


도슨트분들의 풍성한 설명 덕분에 정말 많이 배우고 감상한 전시였는데, 문제는 나의 에너지다. 시간도 부족하고. 이 포스팅을 무사히 끝낼 자신은 어, 없지만 하는 데까지 해보자. 대부분 도슨트분들께 들은 내용이 될 것이고 사이사이 나의 감상이 들어갈 것이다. 적절히 걸러 읽읍시다. 그리고 워낙 많은 정보를 들었기에 모든 것을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전시회에 가서 도슨트분들로부터 더욱 풍성한 내용을 직접 들으시길 권한다. 아울러 잘 찍으려 애써도 좀처럼 발전이 없는 나의 아쉬운 사진기술에 대해선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








강요배

중양절 2

Acrylic on canvas

130x162cm

2015



중양절은 중국에서 유래한 절기로 이때 국화전을 부쳐 먹는 풍습이 있다 한다. 소박한 품새 때문인지 과연 국화꽃 향이 나는 것 같은 작품이었다.





강요배

노각성 조부졸

Acrylic on canvas

162x130cm

2015



가장 탐났던 작품 <노각성 조부졸>. 노각성 조부졸이란 위의 강 화백님 전체 설명에 있듯 '노각성 자부줄'이라고도 하는데, 어째서 작품 제목이 '조부졸'인지가 궁금하지만 답을 알 수가 없네. 지난 주 토요일에 있었던 작가와의 대화 때 갔을 걸. 12월은 토요일마다 공연이 빽빽하게 잡혀 있어서 아쉽게 놓쳐야 할 행사가 많다. 그런데 검색하니 나 외에도 이 '노각성 조부졸' 혹은 '노각성 자부줄'이란 말에 대해 궁금해 한 분이 있었다. 그 게시물의 좌표를 싣는다. 

http://blog.aladin.co.kr/763054172/9004977 


노각성 자부줄은 제주의 신화에 등장하는 줄로, '하늘을 오르내리는 데 사용하는 줄'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래동화로는 '햇님과 달님' 혹은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하늘로 타고 올라가는 그 동아줄이 이에 해당한다고 도슨트께서 설명해주셨다. 아직 구입하신 분이 없는 것 같았는데 누가 이 작품을 구입하실 지 몰라도 벌써부터 그 분이 부럽고 또 부럽습니다. 부디 구입하시더라도 전시에 많이 보여주셔요. 이런 작품이 집에 있다면 날마다 신화적인 꿈을 꿀 것 같다. 


열심히 담느라고 여러 위치에서 찍어 보았으나, 원작의 아우라는 담기지 않았다. 직접 보시는 것과 사진으로 보는 것의 느낌이 많이 다른 작품입니다ㅡ는 강 화백님의 작품이 거의 그러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사진을 찍어 버리니 뭔가 환하게 나왔지만, 육안으로 보면 사진보다 살짝 어두우며,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낸다. 마치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상의 거리와 높이에 따라 색다른 기분이 들어서 더욱 감상이 즐거웠던 작품이다.


일단 작품 정면에 서면 어둡고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진다. 중앙에는 작은곰자리가 수직으로 펼쳐져 있고, 그 작은곰자리의 알파별인 북극성으로부터 큰곰자리의 코인 오미크론별(ο)과 앞발인 이오타별(ι)로 이어지다 살쾡이자리 엉덩이에 해당하는 10Uma, 혹은 제타(ζ)별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 네이버에서 별자리 이름으로 검색하세요.






문제는 작품의 맨 위에 그려져 있는 별의 정체인데, 작품 앞에서 보았을 땐 언뜻, 마치 초신성폭발이 일어나는 현상 같아 보이기도 했던 것이, 그 별로부터 동심원의 별무리가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보니 동심원이 잘 보이지만, 실제 작품에서 보려면 오른쪽 대각선 뒤쪽으로 물러나면 잘 보입니다. 해서 위의 별자리 그림을 보며 유추해 보니, 작은곰자리의 감마별과 에타별 사이에서 연결되는 용자리의 NGC6543이 아닐까 싶다. 이 NGC6543은 용자리의 델타(δ)별과 제타(ζ)별 한가운데 있는 밝은 행성상성운으로 작은 망원경으로 흐리고 푸른 원반을 볼 수 있다 한다.





바로 이 별입니다. 아름답죠? 이 별도 좋긴 한데, 개인적으론 작은곰자리의 감마별에서 수평바깥쪽으로 가면 있는 용자리의 알파별 투반을 그리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흑심이 든다.


용 자리의 알파(α)별은 베타(β)별이나 감마(γ)별보다도 어두운 4등성으로서, 아라비아 어로 용을 뜻하는 투반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 이별이 현재의 북극성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집트에 있는 케오푸스 왕의 피라미드 밑에는 길이 100m가 넘는 터널이 이 별 방향으로 뚫려 있다고 한다. 아마 고대 이집트의 신관들이 당시 이곳에서 북극성을 쳐다보았던 것 같다. 뉴(ν)별은 쌍안경으로 볼 수 있는 백색의 이중성이고 프시(φ)별은 작은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연한 노란색의 이중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 자리 - 알파별 투반은 5천년 전의 북극성 (별자리 여행) 위의 NGC6543도 같은 페이지에서 데려왔습니다.


아니 근데 이집트에 케오푸스 왕이 있었나...? 아마도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투반을 그리셨다면, 고대의 북극성인 용자리의 알파별과 현대의 북극성인 작은곰자리의 알파별에 대한 연상이 연결되어 짜릿할 것 같은데.


아... 물론 강요배 화백께서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리셨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단순히 그냥 그리신 것일 지도. 작가와의 대화에 가지 않았던 것이 두고두고 아쉽네. ㅠ 이렇게 검색하고 노는 것은 나의 유희 중 하나이니 이거 뭐야 싶으신 분은 가뿐한 마음으로 건너 뛰도록 하자.


ㅡ인데, 젠장. 두 작품 쓰는 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이 일을 어찌 한다...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이 한 작품에서 이렇게 놀고 있다니. 아무래도 이 포스팅은 가다 중단될 수도 있겠다. 주말엔 가야 할 공연이 많아서 시간과 에너지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질 테니. 이 재미난 포스팅을 못 하다니. 안타깝도다. ㅜㅠ






군데군데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상의 별들이 사탕처럼 콕콕 박혀 있어서 보면 볼수록 예쁘장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 사시는 분 부럽습니다아. ㅠ






이 사진을 왜 찍었는고 하니, 작품 정면에 서서 보는 것과 이 위치에서 보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높이를 잘 보십시다. 내 키가 작긴 하지만 저 정도로 작은 건 아니구요? 쭈그려 앉아 찍은 것이다. 도슨트께서 이 작품을 천장에 걸어 두면 우주에 있는 기분이 들겠다고 하셨는데, 정면에서 보면 아름다운 밤하늘이던 이 작품이, 이 위치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보면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는 광활한 우주의 공간으로 확장될 뿐 아니라, 하늘로 이어지는 노각성 자부줄을 타고 쑤욱ㅡ하고 우주로 빨려 올라가는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어요. 다행히? 관람객이 아주 많은 전시는 아니니, 사람 없을 때 이렇게 앉아서 감상해 보시길 권한다. 도슨트께서 전시관을 로테이션하긴 하시지만, 이 1관에 주로 계실 예정이라 하시는 분께선 친절하고 다정하며 서로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데 많이 열려 있는, 작품을 정말 사랑하는 분이시니, 그런 모습을 본다 해도 기꺼이 눈감아 주시리라 확신한다. 설명과 감상을 다 나눈 후에는 혼자서 여유롭게 감상하라며 입구쪽으로 자리를 피해주실 정도로 사려 깊은 분이다. 물론 만에 하나 있을 민망함은 감상자의 몫이지 말입니다.





강요배

산정의 달

Acrylic on canvas

162x130cm

2015



<노각성 조부졸>이 워낙 눈에 띄어서인지 옆에 있던 이 작품은 처음에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이 작품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저 달 때문인데, 산꼭대기에 걸려 살짝 타원형으로 쏟아질 듯 빵빵한 저 보름달은 마치 호빵 같지 않은가? 어찌나 탐스러운지 손을 뻗어 '안에 뭐가 들었니' 콕 찔러 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나는 달을 볼 때마다 장막 너머에서 지상이 궁금해 빼꼼 내민 아기의 얼굴 같다는 생각을 늘 하는데, 이 달 역시 세상이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듯 산 정상을 붙들고서 얼굴이 찌그러지도록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아 혼자 피식 웃었다.






사진으로는 아무리 잘 담으려 해도 잘 담기지가 않는데, 그렇게 용을 쓰는 저 달의 머리를 푸른 하늘이 바람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달 위로 퍼지는 붓자국은 마치 부드럽고 다정한 바람결 같이 느껴졌는데, 물감의 마티에르를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저렇게 '바람의 결'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 참 신기하다. 자연을 품은 그림. 강요배 님의 그림은 역시나 탐이 나.






산꼭대기의 소나무를 표현한 저 붓터치라거나






푸른색으로 암벽을 표현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 것 같은데, 깎아지른 듯 가파른 암벽이 잘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두 작품이 나란히 걸린 것을 보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자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달의 느낌이 교차하면서 재미나고 신나는 기분이 된다.





강요배

파도와 총석

Acrylic on canvas

259x388cm

2014



강요배 화백은 광포한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본인 만의 독특한 '종이붓'을 사용하신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바위에 거세게 부딪혀 으르렁대며 부서지는 파도를 그리실 때도 그 종이붓을 사용하신 것 같다.






259x388cm 라는 크기에서 이미 압도되는 이 작품은 저 아래로 포효하는 파도의 포말과 찬 바람의 몸싸움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집에 이 그림이ㅡ내 공간엔 걸어둘 곳도 없겠지만ㅡ있다면, 그 앞에 소파 하나를 놓고 종일 쳐다 보아도 지겹지 않으리라.





강요배

적벽

Acrylic on canvas

162x130cm

2015



몇 년 전 강 화백님의 작품에 심취한 적이 있었는데, 순전히 강 화백님의 전시를 보려고 제주에 간 적이 있었다. 넓고 쾌적하고 사람 없는 제주의 미술관에서 여유롭게 대했던 강 화백님의 커다란 작품들에서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았던 그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보았던 작품이 바로 이 <적벽>이었는데, 음. 2015년작이었나? 그 전에 갔던 것 같은데. 무튼, 그때 보았던 이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다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덕분에 아름다운 제주가 다시 환기되었고.





강요배

노란 빛 속으로

Acrylic on canvas

162x130cm

2015



이 환하고 노란 빛은 어쩌면 제주의 유채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도슨트분의 감상이 있었는데, 과연 그러한 것 같다. 계속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뭔가 상상하지 못했던 태초의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강요배

연풍

Acrylic on canvas

97x162cm

2015



물 위에 떠있는 연꽃과 연잎을 바람이 와서 흔들흔들 만지고 간다.










손상기 화백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알게 된 분인데, 1관 도슨트분께서 아주 좋아하는 화가시라 한다. 39세에 요절하실 때까지 1500여 작품을 그리셨다는데, 그것은 밥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내내 치열하게 그림에만 매달려야 가능한 일이라 한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태어날 때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할 일과 그 일을 하는 데 배당되는 에너지를지고 태어나며, 그것을 다 사용하면 생명이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비과학적이며 철저히 주관적인 견해다. 나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손상기 화백은 그 에너지를 짧은 시간 몰아서 사용하심으로 더 일찍 이 삶을 떠날 수 있었다 하겠다. 재능과 열정으로 요절한 사람의 삶과 작품은 많은 상념을 불러 일으킨다.





손상기

공작도시-서울 1

Oil on canvas

97x130cm

1980



손 화백은 서울에 올라와 <공작도시> 연작을 그리셨는데, 그 시리즈가 이번에 전시되었다. 개인소장작이라는데 이렇게 전시해 주신 덕분에 귀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이 <공작도시-서울 1>은 보는 사람에 따라 우울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로 의견이 나뉘는 작품이라 한다.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손 화백의 장애에 대한 설명을 읽지 않은 상태였는데, 전체적으로 <공작도시> 시리즈가 많이 어둡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그다지 우울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어. 비 온 직후의 거리 같기도 하고 익숙한 도시의 표지판과 버스 때문인지 눈에 익숙하다 여겨졌다. 오히려 푸르스름한 배경에 곳곳에 있는 붉은색과 노란색이 예쁘다는 느낌이 들었더랬는데, 두 번째 갔을 때 육교를 오르는 여성이 목발을 짚고 있다는 도슨트분의 설명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하단 느낌은 내게는 없다.


지금 이 후기를 쓰면서 깨달았는데, 손상기 화백의 작품이 특별히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중학교 미술선생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미술부에 들어갔는데, 내가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하셔서는 졸업할 때까지 퇴원하지 못하셨던 분. 사모님과 두 따님과 함께 네 명의 식구가 단칸방에 사셨던 선생님의 어려운 형편을 안쓰러워한 엄마는 선생님의 작품들을 당시 많이 비싼 가격으로 여러 점 사셨고, 내가 고등학생 때 퇴원하신 선생님은 파리에 유학을 다녀오신 후 전시회를 여신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시는 분이었다.


중학교 미술실에 놓여 있던 선생님의 커다란 작품들은 하나같이 우울했다. 검정색 바닷가 모래 위에 놓여있는 빛바랜 조개껍데기. 차콜회색 배경의 형체를 알 수 없는 선들. 온통 검고 회색 투성이인 선생님의 우울한 그림들이 우리집 거실에, 방에 걸리게 되었고, 나는 그 작품들을 쳐다보는 것이 두려웠다. 뭔지 알 수 없는 추상화들이 난해하기도 했거니와, 보면 볼수록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의 바다로 빠져드는 것만 같아서.


그러던 선생님의 작품이 유학을 다녀오신 후 바뀌었다. 여전히 바다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었지만 가볍고 산뜻한 느낌이 감돌았고, 여기저기 알록달록한 색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환하고 예쁜 작품 하나를 투명 통유리 액자에 넣어 엄마께 감사 선물로 주셨고, 엄마는 그 작품을 한동안 내 방에 걸어 두셨다. 그때 알았다. 예술가의 삶이 작품 속에 이렇게 반영된다는 걸.


그 후 전시회를 여시면서 조금씩 명성을 얻어가기 시작하시던 선생님은 그리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파리 유학에서 돌아오시면서 내 선물로 사오신 유리뚜껑 속에 오르골처럼 돌아가는 시계를 엄마는 얼마 전 내 조카에게 주셨다. 당신의 작품을 직접 걸어주시기 위해 우리집에 오기도 하셨다는 선생님을 정작 나는 중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선생님의 그 작품들과 손 화백의 작품이 소재는 상당히 다르지만 어딘가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분명 우울해 보이는 손 화백의 작품들이 내게는 익숙해 보였던 것은. 고향집에 가게 되면 선생님의 작품 앞에 다시 서 보아야겠다.





손상기

공작도시-영원한 퇴원

Oil on canvas

112x145.5cm

1985



손 화백에 대한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이 작품을 보자마자 시선이 빨려들었다. 그리고는 제목을 보자 마음에 '텅!'하는 울림이 있었다. 누군가 피묻은 손톱으로 내 심장을 후두둑 뜯어내는 느낌. 그 제목 만으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데 울 수가 없었다. 그냥 멍ㅡ한 심정으로 작품 앞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어.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도슨트분께서 참 좋은 시각을 말씀해주셨다. "신부전증을 앓던 손 화백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중에 그린 이 작품을 두고 다들 죽음을 예견했다고들 평하지만, 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싶어요. 말 그대로 병에서 완쾌되어 건강한 몸으로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손 화백의 염원을 담은 작품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이런 감상을 나누어 주실 수 있는 도슨트가 계시는 전시회. 도슨트가 관람자들과 감상을 서로 주고 받는 전시회.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하고 풍성하여 아름다운 전시회인 것이다.


도슨트분의 그 설명 덕분에 작품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예술가라면 내 작품을 두고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오가는 것이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을 것 같다. 


작품 상단의 것은 링거를 표현한 것인데, 무슨 라벨 같은 걸 뜯어 붙이신 것 같아 보였다.





손상기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

Oil on canvas

130x161cm

1984



앞의 커다란 벽은 평창동이나 이태원에 있는 대저택들의 담 같아 보인다. 높고 단단하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그 위압감.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벽은 한 채의 집이다. 그리고 왼쪽 상단의 자투리 공간을 수십 개의 달동네 집들이 빼곡히 채우고 있다. 어쩌면 남산에 보이는 달동네처럼 오글오글 모여 있는 집들에선 상당히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 소리에는 한숨도 있겠고 웃음소리도 있겠지만 그것은 인간사의 다채로운 소리와 냄새와 온기와 눈물이 뒤섞인 어떤 것이다. 반면,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듯 비인간적이고 단단해 보이는 저택의 담 아래엔 누구도 침입할 수 없도록 날카로운 철망이 또 한 겹 둘러싸고 있다. 단단하고 매끈하며 비밀스럽고 냉정한 이 집 안에 사는 사람의 체온은 몇 도일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달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의 집값을 전부 합쳐도 부잣집 한 채값도 안 될 지도 모르지.





손상기

공작도시-아현동에서(귀가)

Oil on canvas

112x146cm

1985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달동네 주민의 모습을 담은 작품. 이 작품은 여러 위치에서 보면서 즐겼는데, 오른쪽에서 보는 것과 중앙, 그리고 왼쪽에서 보는 느낌이 각각 달랐다. 이는 조명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작품의 구도가 그렇게 의도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달동네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 같기도 하고,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이 사람이 멀리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고, 먼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몹시 고요한 이 작품 앞에 서면 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가 공포스럽기도 하여, 참 다양한 감상이 즐거웠던 작품이다.











위의 설명에 있듯 박생광 화백은 일찍이 그 재능을 인정받아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었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반일감정이 거세어져 당시 화단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셨다 한다. 그 후 박 화백님의 독특한 기법을 인정받아 유명해지셨다 하고. 무속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 부적 등을 주요 소재로 그리신 박 화백의 작품은 뚜렷한 오렌지색 경계선이 특징이었다고.





박생광

이브-2

Indian ink, color on paper

110x102.5cm

1976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는데, 보자마자 클림트의 <물뱀>이 떠올랐다.





Gustav Klimt

Water Snakes II

Oil on canvas

145 x 80 cm

1907

Private Collection



이런 작품을 개인소장하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ㅜㅠ






Gustav Klimt

Watersnakes

Watercolor on parchment

20 x 50 cm

1904 - 1907

Belvedere Museum, Vienna, Austria



혹은 다소 울퉁불퉁한 몸의 윤곽선은 클림트의 또 다른 그림을 연상시킨다.





Gustav Klimt

The Beethoven Frieze: The Longing for Happiness Finds Repose in Poetry. Right wall

1902

Belvedere Museum, Vienna, Austria



<베토벤 프리즈>의 남성 뒷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쩌면 상단의 저 금빛 감도는 부분에서 클림트의 금빛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작품 제목이 <이브-2>임을 주목하자. 여기에서 클림트의 <Judith I>, <Judith II>를 떠올리고야 마는 나는 클림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클림트의 <유디트> 중 두 번째 작품에는 '살로메'란 부제가 붙어 있는 만큼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 즉 이브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이 박생광 화백의 이브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머리를 묻은 채 엎드려 있고, 그 아래로 용의 비늘이 그려져 있다.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었던 뱀의 표현이리라. 이처럼 클림트가 연상되는 느낌과 한국 고유의 단청 안료의 조화가 썩 매력적이어서 묘한 흥미를 느꼈던 작품이다. 





박생광

여인

Indian ink, color on paper

45.5x37.9cm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Indian ink, color on paper

75.6x75.5cm

1980s



그 외 박생광 화백님의 작품은 다른 곳에서 잘 감상할 수 없다 하니 나머지 찍어둔 사진을 다 올린다.




박생광

세여인

Indian ink, color on paper

70x70cm

1980s






박생광

꽃가마

Indian ink, color on paper

140x79cm








이제 1관이 끝났다. 그나마도 나머지 한 분의 작품은 싣지도 않았는데 에너지는 바닥을 긁는다. 워낙 내 포스팅은 종잡을 수 없는 안드로메다로 종종 날아가곤 하지만서도, 얼만큼 더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그냥 전시 끝나기 전에 어서 가서 도슨트분들의 멋진 설명을 들으시길 권합니다.













복도를 지나 반 계단 오르면 연결되어 있는 2관의 입구 모습이다.




금민정

숲을 나오니 또 숲이 보이네 II

Video installation, iron, 32 inch monitor, mirror, wood

1 min 56 sec Loop

150x73x65cm

2017



이런 비디오 설치 작품은 결코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것이 화면이 계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움직임조차 예술가가 작품 속에 포함시키기로 의도한 부분이기에 이런 스틸컷으로는 그 느낌을 담을 수가 없다.





금민정

숲을 나오니 또 숲이 보이네 I

Video installation, iron, 32 inch monitor, mirror, wood

1 min 54 sec Loop

72x78x104cm

2017



위의 같은 제목인 작품과 비슷한 작품이다. 가평의 숲을 화면에 담으셨는데, 프레임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작품 자체의 프레임과 화면 속으로 늘어졌다 줄어드는 프레임, 아래 받침대의 프레임에 옆의 거울까지 더해져서 선명한 숲의 모습이 깨끗하면서도 동시에 몽롱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액자와 거울과 창문이 서로의 몸을 바꾸면서 계속해서 가평숲을 비추는 느낌이 들었는데, 집에 이 작품이 있다면 기분이 상쾌해질 것 같다.


음. 그런데 지금 이 작품을 보니 또 다른 생각이 든다. 작품 앞에 섰을 때 저 화분의 정체가 궁금했더랬다. 그리고는 화면 안에 저 화분을 두른 둥그런 쇠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늘어나고 줄어들기를 반복하다가 사라졌는데,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어쩌면 저 작품은 옆에 서 있는 화분에게 있어 마법의 거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화면 속에 등장하던 열린 고리는 저 나무의 목걸이?임을 보여주는 증표인지도.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즈우우이인니이임이시이입느이드아아아." 화면 속 숲을 나오니 숲의 축소판인 나무가 있네.





금민정

살아있는 시선

LED media wall(40 inch & 48 inch), wood

170x170x30cm

2015



이렇게 정보를 보니 꽤 키가 큰 작품이었네ㅡ는 내 키보다 훌쩍 크다. 각 층마다 지하철의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그리고 지면과 지상의 나무로 이미지가 나뉘면서도 연결되어 있다는 도슨트분의 설명. 문득 땅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두더쥐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언젠가 해저도시 내지는 공중도시가 생긴다면 그땐 생선과 비둘기가 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겠지. 인간들이 물 속으로, 공중으로 이동해 버린다면 지상의 나무들은 인간을 그리워할까. 그럴 리가 없겠지. 지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은 이미 지상은 생존이 힘들 정도로 파괴된 이후일 테니. 많이 나아졌다 싶었는데 이럴 때 보면 나는 여전히 인류혐오주의자다. 인류혐오는 내가 사용하는 단어로, 인간혐오μισανθρωπία와는 다릅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은 좋아하지만 전체로서의 인류를 싫어한다.





금민정

태엽 감는 새_여옥사

3 LED monitorsl(47 inch, 27 inch, 15 inch), wood

mixed media

15x150x65cm

2014



같은 건물이지만 자꾸 바뀌는 건물의 색상이나 배경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실제 서대문 형무소를 찍은 사진으로 작업한 작품이라 왼쪽의 날아가는 새는 '자유를 향한 감옥수들의 염원'으로 풀고 싶었는데, 그런 의미는 없을 거라는 도슨트분의 말씀. 새는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합니다.





금민정

다시 못 볼지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죠.

3 LED monitors(47 inch, 27 inch, 15 inch)

mixed media

70x130x90cm

2014



서대문 형무소 안쪽과 그 안에 있는 미루나무이다. 





금민정

통곡의 미루나무

Video sculpture

(wood, 5 LED monitors, video)

250x250x250cm

2014



금 작가님의 치수는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위의 작가설명에 있듯 나무에다 직접 모니터를 연결하여 작업하신 작품이다. 서대문 형무소 안에 서 있는 미루나무는 형무소 안의 죄수들과 그들의 수많은 이야기, 그리고 여러 장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존재이다.


















황용엽

옛 이야기

Oil on canvas

162.2x130.3cm

1995



황용엽 화백의 작품은 전쟁과 분단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신기하지? 이 그림과 이 제목에서 어째서 전쟁과 분단을 떠올릴 수 있을까.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은 남한과 북한을 상징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붉은 선은 3.8선을 의미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듯 외면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핏빛 나무 꼭대기 위로 노란 해가 오늘도 떠오르고, 또 다시 그런 상태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려는 듯 수탉이 울고 있다.





황용엽

금강산

Oil on canvas

162.2x130.3cm

1999



산을 연상시키는 사선은 그리운 금강산이다. 그리고 그 산과 나 사이에는 가시길이 박혀 있어 갈 수가 없다.





황용엽

인간

Oil on canvas

90.9x72.7cm

1999





황용엽

축제 이야기

Oil on canvas

181.8x227.3cm

1996



사각의 독특한 링 안에서 두 선수가 싸움을 하고 있다. 알록달록 예쁘게 채색된 링은 마치 유릿조각으로 나뭇가지의 형태를 만든 틀 처럼 군데군데 가시가 돋아 있다. 예쁜 프리즘 같은 링이지만 몸이 닿기라도 하면 살갗은 찢어질 것이다. 그 링은 대체 누가 설치한 것일까. 벌거벗은 몸에 샅바 하나만 걸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씨름선수인 모양이다. 그런데 씨름선수치고 너무 말랐다. 뼈대 앙상한 저 몸으로 어떻게 상대를 들고 던질 수 있을까. 잔뜩 팔을 부풀리며 서로에게 위협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으나, 정작 두 사람의 표정에는 그다지 싸움에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서로 다정한 오누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본다면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연인으로 볼 수도 있을 만한 표정이다. 호전적인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이 싸움의 링이 탐탁지는 않아 보인다. 


둘에게 있어선 싸움이지만, 이것을 '축제'로 만들어 버리는 타자가 링 밖에 있다. 핏빛 가득한 선과 함께 한 그 사람은 확실히 이 '경기'를 흥미로워하는 것 같다. 우리의 아픈 분단이 미국, 일본, 중국에게 있어선 축제의 한 행사에 지나지 않는 일, 혹은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 광대놀음 정도로 보이는 건 지도 모르겠다.












손장섭

설악산 적송

Acrylic on canvas

100x80cm

2008



손장섭 화백의 작품은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 1관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것도 있고, 아직 보아야 할 작품은 너무 많이 남아있고 해서. 그러다 도슨트분의 설명을 듣고는 다시 손 화백님의 작품 앞에 섰다. 금민정 작가의 메세지와도 연결되는 바이지만, 손 화백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와 장소들은 모두가 아픈 역사 속 현장에 서 있었던 나무들이라 한다. 역사적 사건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지상에서 사라졌지만, 그곳의 나무와 돌, 산은 아직도 남아 그 모든 것을 다 지켜 본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말씀. 나무나 바위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 나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눈이 예쁜 외국인 도슨트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그 이야기가 무서워져 둘은 소름끼쳐 했다. 앞에서 말했지만 한국말 잘 하시고 다정한 분이시니, 외국인이라고 어색해 마시고 설명을 부탁드리거나 질문하시면 풍성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게 될 겁니다. 참 즐거운 전시였다.





손장섭

산신목

Acrylic on canvas

112x162cm

2008






맘 같아선 이 나무들의 역사적 현장을 다 검색해 보고 싶지만 내게 그럴 에너지는 없다. 가능한 에너지를 보존해야만 조금이라도 더 후기를 쓸 수 있지 말입니다. ㅠ 그러한 사건들을 아시는 분들께서 이 작품들을 보신다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이 나무는 줄기와 밑둥의 무늬가 독특해서 확대해 찍었다. 멋드러지게 잘생긴 이 나무는 쩌억 하고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 밑둥과 굵은 가지에는 총알의 흔적인듯 상흔같은 무늬가 그 살갗에 알알이 박혀 있다.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얽힌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손 화백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흰색이 독특했는데, 그것이 손 화백님의 기법이라는 도슨트분의 설명이 있었다. 군데군데 흰색을 칠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카메라의 필터 기능처럼 뿌옇게 보이는 효과가 난다고 한다.





손장섭

인천 남동구 은행나무

Acrylic on canvas

130x162cm

2016





손장섭

거대한 반송

Acrylic on canvas

130x162cm

2009





손장섭

울릉도 도동항

Acrylic on canvas

97x162cm

2008-2014












유근택

실내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100x72cm

2017



유근택 님이 사용하신 재료를 살펴 보자. 검은 잉크, 흰 가루에 다빈치가 사용했던 템페라 물감을 한지에 칠했다? 덕분에 유화 같은데 묘하게 투명한 느낌이 난다. 누구나에게나 있을 법한 방의 실내 모습조차 이렇게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유근택 작가님은 '예술이란 대단하고 어려워 접근하기 힘든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친근한 일상 자체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다 한다. 덕분에 구상화인가 싶었던 것이 돌연 추상화로 변신했다. 우리의 일상에 어떤 꽃을 놓으면 이처럼 멋진 추상의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유근택

실내-이사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100x72cm

2017



언뜻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숨지 않은 숨은그림찾기 마냥 하나씩 그 형체를 드러내는 사물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침대와 박스처럼 쌓인 장, 전신거울, 액자, 벽시게, 캔버스가 얹힌 이젤, 스툴. 그런데 내가 정확하게 본 걸까? 확신할 순 없다. 뭐, 잘못 본 것이면 어떠랴. 실내인지 실외인지 구분되지 않는 창밖 잿빛 건물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청명하기만 하다. 그러니 실내의 이 알 수 없는 복잡함은 '이사'의 핑계 속에 모두 품어 안기로 하자.





유근택

실내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100x72cm

2017



한층 더 생뚱맞은 이 작품은 침대 위 허공에 버티고 있는 멋진 밤의 제왕 부엉이가 인상적이다.  저 부엉이에겐 내가 좋아하는 독실님이 좋아하는 '수리부엉이'의 정체성을 내 임의로 부여한다. 나의 꿈을 지켜줘, 정의의 수리수리부엉이!








유근택

산책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208x147cm

2016





유근택

산책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208x147cm

2016





유근택

산책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208x147cm

2016



소박한 일상의 단면을 포착하여 작품에 담으셨다 하는 유근택 님의 <산책> 시리즈 중 이 작품은 자꾸 다른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고약한 작품이었다. 작가의 작품세계를 잘 이해하시는 도슨트께서는 이 작품에 일상의 소소함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라 하셨지만, 어디 내가 '그렇다'하면 '그렇군요'하고 믿고 넘어가는 인간인가. 대개는 그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붙잡는 것이 있으면 기꺼이 그쪽으로 삐딱선을 타며 즐거워하는 부류여서는. 그래. 문제는 늘 나다.


그런데 정말로 이 작품이 '일상의 소소한 산책 만'을 담은 것으로 보여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난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볼 수가 없는데. 절단된 다리는 그래, 저 길을 수없이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보자. 끝없이 반복, 순환되듯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이어져 있는 붉은 사물 속에 있는 신생아와 해골, 그리고 핏자국을 어떻게 일상의 소소함으로 이해하는 거지? 내가 보기엔 저 산책길을 걷는 사람들의 상념 속에 등장하는 사물 혹은 개념들이 아닐까 싶다. 산책을 하면서 집 생각도 하고, 소주 술상 생각도 하고, 출산 생각, 그리고 죽음에 관한 생각 등. 그 많은 생각들이 녹아 있는 저 일상의 산책길. 그렇게 보니 결과적으로 일상을 담은 것이 맞군.





유근택

피는 실내

Black ink, white powder and tempera on Korean paper

134.6x134.6cm

2007



엉덩이에 뿔난 못된 망아지 모드는 잠시 더 유지하기로. 이 작품의 제목을 보라. 물론 Bloom의 '피다'를 의미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하필 국어의 '피'에는 다른 뜻이 있기 때문에 또 하필 그 피 색 꽃이 피어 있는 저 흑백 실내를 보면서 발칙한 생각에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성향이다. 참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일상이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으스스한 공포를 설정하며 혼자 오싹함을 즐기는 건, 공포스릴러물을 안 보는 내가 즐기는 공포입니다. 으흐흐흐, 무섭지...






한지 특유의 스며드는 이 느낌. 참 좋다. 으스스하고. 응?! 

아닙니다. 아련합니다.















송창

분단의 논

Oil on canvas

128x177cm

1986



갈 길이 먼데 하고픈 말은 자꾸 떠오르고. 이내 몸 괴롭다니. ㅠ


참여예술이라는 거. 예술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현실과 사실이 건드리지 못하는 개념과 감각이 고양된 세계. 그것이 내가 예술로부터 원하는 것이다. 미학 선생님께서 내게 '너는 사람이 야하지 못하서 작가가 될 수는 없어. 너는 고상하고 우아하니 예술비평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조언을 주셨더랬는데, 다정하신 선생님께선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말씀해 주셨지만, 그리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기쁘기만 하셨을 것 같진 않다. 다만 내 성향을 통찰하셨기에 그런 내게 최선의 맞춤 조언을 부드럽게 해주신 것이지만, 원색적으로 그 의미의 알맹이를 꺼내놓고 보면 현실도피적 성향의 나약한 인간이 남지 않겠는가. 아픈 땅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일신의 안위에 만족하며 사회의 고통으로부터 귀를 막는 것이 자랑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내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의견이기에 나는 이런 나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내가 불편한 나자신은 이것이다. 그런 '참여'가 붙은 예술과 종교를 불편해 한다는 것. 함께 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불편해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게는 '참여'와 '민중'이라는 단어 자체도 부담스럽다. 내 한 몸 이 삶에 적응시키는 것도 이렇게 힘겨운데, 어찌 사회와 역사까지 고려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메아리치는 이기심 때문이리라. 


좋아하는 '강요배'라는 이름 때문에 찾은 전시에서 그 '참여'와 '민중'이 내 앞에 존재를 드러내었다. 일찍이 제주의 4.3을 연작으로 다루신 바 있는 강 화백이심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강 화백님의 작품 중에 좋아하는 것은 제주의 풍광을 담은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들이 자꾸만 역사를 이야기하고 권력과 희생, 그리고 민중이라는 단어를 내게 드러낸다. 그리고 도슨트분들의 친절한 설명과 버무러지자, 그동안 불편해하던 형체와 색체들에 기꺼이 시선을 두게 되었다. 시선이 가는 곳에 이런 식으로 마음도 머물게 되겠지. 성장을 거부한 내 안의 어리고 유치한 부분이 반 뼘이나마 자라난 것이라면 좋겠다.


송창 화백은 전쟁과 분단, 고통과 죽음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셨는데, 이 작품에서는 논을 붉게 물들인 피와 총부리로 너무 직접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접근하셨다 한다.




송창

달맞이꽃

Oil on canvas

60.6x91cm

2007



고흐의 <아를의 별밤>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었으나, 앞의 작가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송창 화백님의 작품에 등장하는 꽃은 희생자의 죽음을 기리는 장치라 한다. 강에 흩뿌려진 희생자들의 넋이 반딧불이처럼 하나하나 피어나 꽃다발을 이룬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전시장의 모습. 이번 전시는 작품의 배치가 상당히 좋았는데, 하나하나 따로 보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들을 배치 순서대로 감상하면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한다는 점이 참 멋진 전시라 하겠다. 작품 감상 순서를 번호로 붙였습니다.





송창

권좌

Oil on canvas

132x132cm

1988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땐 멋진 소파 위의 한가로운 강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화롭고 안락한 실내를 그린 것일까 싶었는데, 이상하게 뭔가가 불편하다. 무엇이 불편한가 보았더니 오른쪽 상단 초상화 속 인물이 신경에 거슬리던 느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첫날은 이 작품을 지나갔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그 말씀을 도슨트께 드렸더니 "바로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죠!"라 하셨다. 감상 제대로 한 것이 맞다는 칭찬을 듣자 기분은 발그레 좋아졌고. 그러고는 <권좌>라는 제목을 보면 그것이 안온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의도한 작품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장소는 초상화 속 인물의 공간이다. 그는 권력자다. 전쟁을 결정하는 권력.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결정하는 그가 앉은 자리는 호화롭고 안락하고 안전한 곳이다. 전쟁을 결정한 본인이 정작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없다.





송창

매립지

Oil on canvas

112.1x145.5cm

1983



권력자가 결정한 전쟁에 원치 않는 참여를 하고 목숨을 잃게 된 수많은 민중의 모습이다. 희생된 그들의 시체는 매립지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우리 땅의 역사를 피로 물들이며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자신이 의도하지도, 결정하지도 않은 전쟁에서 생명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민중의 억울함과 희생이 작품 가득 더없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확성기에 대고 그들의 억울함을 소리지르는 작가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송창

욕망의 분수

Oil on canvas

125.5x212cm

1985



같은 내용이다. 권력자의 욕망에 희생되는 무고한 민중. 이렇게 보면 <권좌>라는 작품의 호화로운 의자 위에 앉아 팔자 좋게 발로 목을 긁고 있는 늑대 같이 생긴 개는, 민중의 희생을 빨아먹은 저 권좌의 주인을 묘사한 것일 테다. x같은 자식.


위의 4번에 해당하는 작품을 찍은 사진이 없네... 저 작품에 등장하는 진홍빛 진달래는 희생자들의 넋을 형상화한 것으로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는 작가의 마음이라 한다. 전쟁과 희생을 은유로 표현하신 작품이다.





송창

고요

Oil on canvas

130.3x162cm

2010





송창

경계

Oil on canvas

130.3x162cm

2015












황재형

양졸

Oil on canvas

112x194cm

2016



이 작품은 아름다웠다. 물감의 마티에르가 주는 느낌이 참 좋아서 눈밭에 선 소나무들 같기도 하고, 바람이 부는 들판 같기도 했다. 자연이 주는 청량함과 신선한 공기와 함께 고요한 이 작품을 두고 '코코아를 마시며 바라보면 참 좋을 것 같다' 하신 도슨트분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재형

이징가미

Oil on canvas

112.1x162.2cm

1996



그리고는 바로 옆에 배치된 작품. 왼쪽의 소나무 작품을 보다가 이 탄광촌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작품 가득 울리는 소음에 귀가 따가웠다. 쇠 부딪히는 소리, 기계 소리, 고함치는 소리, 신음 소리. 황재형 화백은 탄광촌의 현실을 그리기 위해 직접 태백 탄광에 가서 광부로서의 작업을 하셨는데, 그렇게 '직접 몸으로 그리는' 예술가 특유의 표현력이 있다. 강하고 묵직하고 군더더기 없고 직설적인.






이렇게 나란히 걸린 두 작품을 보며 감상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배치에 감탄했다.






에너지 고갈. 이 정도면 선방한 거 아니예요? 헉헉.






김지원

맨드라미

Oil on canvas

190x340cm

2017

















김지원

맨드라미

Oil on canvas

100x100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