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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라 좌상
Seated figure of Amun-Ra
이집트
제 26왕조, 기원전 664-525년
동
33.4x6.75cm
<고대 이집트의 신들>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하기 위해 수많은 신적 존재들과 공생했다. 신과 악마는 현세와 내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은총을 바라며 예배를 드리고 재물을 바치고, 의식을 준수했다. 이런 숭배의식은 주로 신전에서 치러졌는데, 이집트인들은 신전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이 사는 집으로 생각했다. 중요한 신전에는 신상을 모셔놓고 왕이나 사제들이 극진히 돌보며 정화의식을 치르거나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바쳤다. 이런 방식으로 '마트' 즉 신성한 우주의 질서는 옹호됐다. 이집트 신들은 인간과 비슷한 삶을 영위했지만, 모든 면에서 전지전능하고 불멸의 존재였다. 이집트 미술에서 신은 인간 혹은 동물의 형상으로 재현했는데, 동물의 머리와 인간의 몸이 결합된 존재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문-라 좌상>
본래 테베의 지역 신 아문(숨은 신)은 신왕국 시대(기원전 1550-1069년)에 이르러 이집트 최고신으로 등극한다. 가끔 숫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주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 작은 좌상의 주인공은 '아문-라'인데, 이는 '아문'과 태양신 '라'의 결합으로, '라' 신은 왕위와 직결되는 신이다. '아문-라' 신상은 전통적으로 이중 깃털 왕관에 원반 모양의 태양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록 p108)
아문
아문 | |||||
신들의 왕이자 바람의 신 | |||||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아문의 묘사. 머리에 두 개의 기둥 장식을 쓰고 있다.※ 기둥?? plume을 해석한 것 같은데, 기둥이 아니라 '깃털'이다. | |||||
이름의 신성문자 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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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중심지 | 테베 | ||||
상징 | 두 개의 기둥※ 깃털, 양머리 스핑크스 | ||||
성별 | 남신 | ||||
배우자 | 아무네트, 우스레트, 무트 | ||||
자식 | 콘수 |
아문 (Amun 또는 아몬 Amon, 암몬 Ammon, 아멘 Amen)은 고대 이집트 신화의 신의 이름으로서 "숨겨진"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문은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테베에서 숭배되던 바람과 공기의 신으로서 후에 태양신 라(레)와 합쳐진 후 아문-라 또는 아문-레로서 태양을 상징하는 신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기독교에서 기도가 끝나고 외치는 아멘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에 입성한 기원전 332년, 고대 이집트의 문명을 보고 스스로를 ‘아문의 아들’이라고 칭하였다. 아문은 주요 신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제우스, 로마인들은 주피터와 동일시하였다.
After the rebellion of Thebes against the Hyksos and with the rule of Ahmose I, Amun acquired national importance, expressed in his fusion with the Sun god, Ra, as Amun-Ra or Amun-Re.
Amun-Ra retained chief importance in the Egyptian pantheon throughout the New Kingdom (with the exception of the "Atenist heresy" under Akhenaten). Amun-Ra in this period (16th to 11th centuries BC) held the position of transcendental, self-created[2]creator deity "par excellence", he was the champion of the poor or troubled and central to personal piety.[3] His position as King of Gods developed to the point of virtual monotheism where other gods became manifestations of him. With Osiris, Amun-Ra is the most widely recorded of the Egyptian gods.[3] As the chief deity of the Egyptian Empire, Amun-Ra also came to be worshipped outside of Egypt, in Ancient Libya and Nubia, and as Zeus Ammon came to be identified with Zeus in Ancient Greece.
Early history
Amun and Amaunet are mentioned in the Old Egyptian Pyramid Texts.[4] Amun and Amaunet formed one quarter of the ancient Ogdoad of Hermopolis. The name Amun (written imn, pronounced Amana in ancient Egyptian [5]) meant something like"the hidden one" or "invisible".[6] It was thought that Amun created himself and then his surroundings.[7]
The other members of the Ogdoad are Nu and Naunet; Kuk and Kauket; and Huh and Hauhet.
Amun rose to the position of tutelary deity of Thebes after the end of the First Intermediate Period, under the 11th dynasty. As the patron of Thebes, his spouse was Mut. In Thebes, Amun as father, Mut as mother and the Moon god Khonsu formed a divine family or "Theban Triad".
New Kingdom
Further information: High Priests of Amun
Identification with Min and Ra
When the army of the founder of the Eighteenth dynasty expelled the Hyksos rulers from Egypt, the victor's city of origin, Thebes, became the most important city in Egypt, the capital of a new dynasty. The local patron deity of Thebes, Amun, therefore became nationally important. The pharaohs of that new dynasty attributed all their successful enterprises to Amun, and they lavished much of their wealth and captured spoil on the construction of temples dedicated to Amun.
The victory accomplished by pharaohs who worshipped Amun against the "foreign rulers", brought him to be seen as a champion of the less fortunate, upholding the rights of justice for the poor.[3] By aiding those who traveled in his name, he became the Protector of the road. Since he upheld Ma'at (truth, justice, and goodness),[3] those who prayed to Amun were required first to demonstrate that they were worthy by confessing their sins. Votive stelae from the artisans' village at Deir el-Medina record:
Subsequently, when Egypt conquered Kush, they identified the chief deity of the Kushites as Amun. This Kush deity was depicted as ram-headed, more specifically a woolly ram with curved horns. Amun thus became associated with the ram arising from the aged appearance of the Kush ram deity. A solar deity in the form of a ram can be traced to the pre-literate Kerma culture in Nubia, contemporary to the Old Kingdom of Egypt. The later (Meroitic period) name of Nubian Amun was Amani, attested in numerous personal names such as Tanwetamani, Arkamani, Amanitore, Amanishakheto, Natakamani. Since rams were considered a symbol of virility, Amun also became thought of as a fertility deity, and so started to absorb the identity of Min, becoming Amun-Min. This association with virility led to Amun-Min gaining the epithet Kamutef, meaning Bull of his mother,[10] in which form he was found depicted on the walls of Karnak, ithyphallic, and with a scourge, as Min was.
Amun-Ra in hieroglyph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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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of truth, father of the gods, maker of men, creator of all animals, Lord of things that are, creator of the staff of life."[11]As the cult of Amun grew in importance, Amun became identified with the chief deity who was worshipped in other areas during that period, the sun god Ra. This identification led to another merger of identities, with Amun becoming Amun-Ra. In the Hymn to Amun-Ra he is described as
"Lord of truth, father of the gods, maker of men, creator of all animals, Lord of things that are, creator of the staff of life."[11]
위키피디아에 나온 아문과 아문-라에 대한 설명이다. 신황국 시대에는 테베가 이집트의 수도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서 테베의 지역신이었던 아문이 이집트 전체의 최고신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에 있어 명실공히 최고신은 태양신 라였으므로, 아문은 라와 결합한 '아문-라'의 형태로 숭배되었다. 그러한 결합으로 인해 원래 바람신인 아문을 상징하는 두 개의 커다란 깃털과, 태양신 라를 상징하는 태양원반이 함께 아문-라의 왕관에 표시된다. 가끔 아문-라는 숫양의 머리를 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집트가 쿠쉬를 정복했을 때 쿠쉬의 주신이 숫양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합의 결과이다.
이 좌상에서 아문-라는 아마도 하이집트의 적관인 데슈레트처럼 보이는 왕관 위에 깃털과 태양원반이 결합된 관을 쓰고 있다. 턱에는 남신을 상징하는 턱수염이 붙어 있고, 의자에 앉아 있는 팔의 모양이 좀 어색한데, 위에 실은 위키피디아의 그림으로 유추하자면 아마도 왼손에는 왕의 상징인 와즈왕홀을, 오른손에는 '생명'이란 뜻의 앙크를 들고 있었을 것 같다. 내 추측입니다.
쪼그리고 앉은 마트 여신상
Squatting figure of the goddess Maat
이집트
후기왕조 기원전 664-343년
구리합금
11.5x3cm
대영박물관 자료 :
'마트'는 고대 이집트에서 우주 질서를 관장하는 최고 원리의 신이다. 모든 이집트인들은 진리와 정의를 포괄하는 '마트' 신의 이념에 따라 살 것을 요구받았다. 신화에서 마트는 태양신 '라'의 딸로 등장하며 흔히 머리에 타조깃털 상징을 단 여성으로 표현된다. 쪼그려 앉은 마트 신의 이미지는 왕이 제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p111)
마트 (이집트 신화)
마트 | |||||||||||||||||||||||||||||||
진실, 정의의 신 | |||||||||||||||||||||||||||||||
진실을 상징하는 타조 깃털을 꽂은 마트. 마트는 여신이면서 동시에 의인화된 정의이다. | |||||||||||||||||||||||||||||||
이름의 신성문자 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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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중심지 | 고대 이집트 전역 | ||||||||||||||||||||||||||||||
상징 | 타조 깃털 | ||||||||||||||||||||||||||||||
성별 | 여신 | ||||||||||||||||||||||||||||||
배우자 | 토트 | ||||||||||||||||||||||||||||||
부모 | 라 |
마트 (Ma'at, Maat, Mayet)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법과 정의, 조화, 진리, 지혜의 여신이다. 그녀의 머리 위에 꽂힌 깃털이 마트의 상징이다. 태양신 라의 딸로 나오며, 지식과 달의 신인 토트의 아내이다. 머리에 깃털장식을 한 모습이나 새의 날개를 양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집트 창조 신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신으로 법과 정의, 조화의 법칙 그 자체를 인격화한 존재로서, 이집트의 지상 신 파라오조차 그녀를 거스를 수 없었다[1]. 그래서 그녀는 고대 이집트 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이름[편집]
마트 혹은 마옛은 한때 무앗(Muʔʕat) 으로 발음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2]. 그녀는 고대 이집트 종교 초기에는 사회와 자연의 법칙으로써 고왕국때 숭배 되었는데, 신왕국에 들어서서 그녀는 태양신 라의 딸로써 그의 태양의 돛단배에 거주하며, 토트의 아내로서 진리와 지혜, 정의의 여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3][4].
신화[편집]
탄생[편집]
마트는 그의 아버지 태양신 라에게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태양신 라는 남신이지만 자웅동체여서 스스로 4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이 마트이다.
창조 신화[편집]
벤벤이라는 언덕이 최초 혼돈(아비스 혹은 누)로부터 솟아 오른 후, 그 언덕에서 최초의 신 아툼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는 가장 처음으로 빛을 창조하였는데, 이는 태양신 라가 되었다. 라는 스스로 우주의 창조 법칙의 여신인 마트를 낳았다. 그녀가 태어난 후로는 혼돈이 사라지고 조화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태양신 라와 창조신 아톤, 법과 조화의 여신 그녀 자신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우주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진다.
※ 아톤이 누구지? 태양의 빛살인 아텐을 의미하나?
이러한 조화의 여신으로서의 특징은 타 종교인 도교와 유교와 닮은점이 있다[5]. 또한 이 창조신화에서 나오는 삼위일체와 창조의 법칙은 후에 기독교교리에 영향을 주었다[6].
※ 난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미친 삼위일체론은 태양신이라 생각했는데. 세 가지 모습, 인격이자 하나의 존재인 '께뻬르-라-아툼' 말이다.
마트의 법[편집]
몇 개 남지 않은 고대 이집트 법의 자료에 의하면, 마트는 법의 세세한 설명보다 더 강력한 정의의 상징으로써 법관들에게 받아 들여졌다. 진실과 정의의 여신으로서 그녀의 정신은 고대 이집트 법이 제정될 때 기본적으로 참조되었다. 제 5왕조 이래로 파라오의 장관들은 마트의 성직자라 불린 정의에 책임을 져야했으며, 재판관들은 마트의 현신으로서 우대 받았다[7].
후에 고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파라오의 문서인 세바잇을 비롯, 지혜가 담긴 고문서들로부터 마트의 개념을 구체화 시켰다[8]. 이러한 문서들로부터 고대 이집트에서 공공 사회와 전문적인 상황들로부터 발생한 문제들을 마트의 정신속에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풀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또한 이 문서들의 해결 방법은 굉장히 실용적이고 고차원적이었으며, 그래서 몇몇 종류들의 타 지역의 고대 법들이 그들로부터 유래했음을 밝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법이 고대 이집트의 법과 같이 동등한 지위로 존재하였다. 고대 이집트법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하여 남녀평등을 이룬 법이었는데, 이는 당대의 남성주위적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도 영향을 끼쳤다[9]. 이집트가 로마 식민지가 되었을 때에는 로마 제국이 자국의 법을 이집트에도 강요하였다.
깃털은 《사자의 서》에 나온 심장 무게 달기 의식에서 사람이 죄를 지었는지 않지었는지 저울에 마트의 날개를 놓고 심장의 무게를 제어 판단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선의 무게를 상징한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죄를 많이 지었다는 뜻으로서, 죽은 자는 부활의 땅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마트의 깃털은 선과 양심을 의미하며, 이는 기독교와 같은 타 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하얀 깃털의 선하고 성스러운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고대 이집트 사법 제도[편집]
고대 이집트의 사법 제도는 현재 사법 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재판관, 검사, 서기관, 원고, 피고로 이루어진 고대 이집트의 사법 제도는 현재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사자의 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죽은 자는 피고로, 저승의 신 오시리스가 재판관의 역할을 하며, 토트가 서기관 등으로 나온다. 마트는 법정의 수호여신으로서 법과 정의를 감찰하고 재판관은 마트의 뜻을 받들어 최대한 정의롭게 판결을 내렸다. 마트의 법 자체가 신격화 되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왕이자 지상신으로 추앙된 파라오조차도 법원의 판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1].
위는 마아트 여신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이다. 한 마디로 질서와 정의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고대 이집트 세계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을 신격화한 것이다.
하토르 여신의 부적
Amulet depicting the goddess Hathor
테베 이집트
제18왕조, 기원전 1390-1325년
동
14.7x4.83cm
대영박물관 정보:
이 정교한 부조 양식의 부적은 하토르 여신을 세 부분으로 나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묘사했다. 맨 윗부분의 하토르는 옆얼굴인데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는 코브라들이 장식된 왕관을 썼다. 중간 몸체 부분은 정면을 쳐다보는 하토르의 모습인데 암소 귀가 눈에 띈다. 하단의 세 번째 이미지는 뿔 사이에 태양 원반을 이고 있는 암소로 원형 무늬 장식 안에 들어있다.
하토르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중적인 신 가운데 하나이며, 사랑과 아름다움, 음악, 모성, 기쁨의 원리를 관장하는 신으로 의인화돼있다. 이 특별한 부적은 하토르를 신봉하는 남녀 사제들이 착용했던 일종의 목걸이, 즉 '메나트'의 평형추처럼 생겼다. (p112)
하토르
하토르 | |||
사랑, 아름다움, 모성, 광업, 음악의 신 | |||
소뿔과 태양원반을 쓴 하토르. | |||
이름의 신성문자 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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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중심지 | 덴데라 | ||
상징 | 시스트럼 | ||
성별 | 여신 | ||
배우자 | 라, 호루스 | ||
부모 | 라 | ||
형제자매 | 세크메트, 바스테트, 슈, 테프누트, 세르케트 | ||
자식 | 이히, 호루스 |
하토르(Hathor)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며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호루스의 부인이다. 태양신 라의 딸이며, 하토르가 태양신 라의 벌을 행할 때에는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로 변한다고도 알려져있다. ※ 하토르와 세크메트는 좀 알아둡니다. 이번 <대영박물관전>에 하토르 모양 장신구와 세크메트 거대상이 왔으니.
같이보기[편집]
Hathor (/ˈhæθɔr/ or /ˈhæθər/;[2] Egyptian: ḥwt-ḥr; in Greek: Ἅθωρ, meaning "mansion of Horus")[1] is an Ancient Egyptian goddess who personified the principles of joy, feminine love, and motherhood.[3] She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and popular deities throughout the history of Ancient Egypt. Hathor was worshiped by royalty and common people alike in whose tombs she is depicted as "Mistress of the West"welcoming the dead into the next life.[4] In other roles she was a goddess of music, dance, foreign lands and fertility who helped women in childbirth,[4] as well as the patron goddess of miners.[5]
The cult of Hathor predates the historic period, and the roots of devotion to her are therefore difficult to trace, though it may be a development of predynastic cults which venerated fertility, and nature in general, represented by cows.[6]
Hathor is commonly depicted as a cow goddess with horns in which is set a sun disk with Uraeus. Twin feathers are also sometimes shown in later periods as well as a menat necklace.[6] Hathor may be the cow goddess who is depicted from an early date on the Narmer Palette and on a stone urn dating from the 1st dynasty that suggests a role as sky-goddess and a relationship to Horus who, as a sun god, is "housed" in her.[6]
The Ancient Egyptians viewed reality as multi-layered in which deities who merge for various reasons, while retaining divergent attributes and myths, were not seen as contradictory but complementary.[7] In a complicated relationship Hathor is at times the mother, daughter and wife of Ra and, like Isis, is at times described as the mother of Horus, and associated with Bast.[6]
The cult of Osiris promised eternal life to those deemed morally worthy. Originally the justified dead, male or female, became an Osiris but by early Roman times females became identified with Hathor and men with Osiris.[8]
The Ancient Greeks sometimes identified Hathor with the goddess Aphrodite, while in Roman mythology she corresponds to Venus.[9]
Early depictions
Hathor is ambiguously depicted until the 4th dynasty.[10] In the historical era Hathor is shown using the imagery of a cow deity. Artifacts from pre-dynastic times depict cow deities using the same symbolism as used in later times for Hathor and Egyptologists speculate that these deities may be one and the same or precursors to Hathor.[11]
A cow deity appears on the belt of the King on the Narmer Palette dated to the pre-dynastic era, and this may be Hathor or, in another guise, the goddess Bat with whom she is linked and later supplanted. At tim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the same goddess, though likely having separate origins, and reflections of the same divine concept. The evidence pointing to the deity being Hathor in particular is based on a passage from the Pyramid texts which states that the King's apron comes from Hathor.[12]
A stone urn recovered from Hierakonpolis and dated to the first dynasty has on its rim the face of a cow deity with stars on its ears and horns that may relate to Hathor's, or Bat's, role as a sky-goddess.[6] Another artifact from the 1st dynasty shows a cow lying down on an ivory engraving with the inscription "Hathor in the Marshes" indicating her association with vegetation and the papyrus marsh in particular. From the Old Kingdom she was also called Lady of the Sycamore in her capacity as a tree deity.[6]
Relationships, associations, images, and symbols
Hathor had a complex relationship with Ra. At times she is the eye of Ra and considered his daughter, but she is also considered Ra's mother. She absorbed this role from another cow goddess 'Mht wrt' ("Great flood") who was the mother of Ra in a creation myth and carried him between her horns. As a mother she gave birth to Ra each morning on the eastern horizon and as wife she conceives through union with him each day.[6]
Hathor, along with the goddess Nut, was associated with the Milky Way during the third millennium B.C. when, during the fall and spring equinoxes, it aligned over and touched the earth where the sun rose and fell.[13] The four legs of the celestial cow represented Nut or Hathor could, in one account, be seen as the pillars on which the sky was supported with the stars on their bellies constituting the Milky Way on which the solar barque of Ra, representing the sun, sailed.[14]
The Milky Way was seen as a waterway in the heavens, sailed upon by both the sun deity and the moon, leading the ancient Egyptians to describe it as The Nile in the Sky.[15] Due to this, and the name mehturt, she was identified as responsible for the yearly inundation of the Nile. Another consequence of this name is that she was seen as a herald of imminent birth, as when the amniotic sac breaks and floods its waters, it is a medical indicator that the child is due to be born extremely soon. Another interpretation of the Milky Way was that it was the primal snake, Wadjet, the protector of Egypt who was closely associated with Hathor and other early deities among the various aspects of the great mother goddess, including Mut and Naunet. Hathor also was favoured as a protector in desert regions (seeSerabit el-Khadim). As Serabit el-Khadim was where turquoise was mined, Hathor's titles included "Lady of Turquoise", "Mistress of Turquoise", and "Lady of Turquoise Country".[16]
Hathor's identity as a cow, perhaps depicted as such on the Narmer Palette, meant that she became identified with another ancient cow-goddess of fertility, Bat. It still remains an unanswered question amongst Egyptologists as to why Bat survived as an independent goddess for so long. Bat was, in some respects, connected to the Ba, an aspect of the soul, and so Hathor gained an association with the afterlife. It was said that, with her motherly character, Hathor greeted the souls of the dead in Duat, and proffered them with refreshments of food and drink. She also was described sometimes as mistress of the necropolis.
The assimilation of Bat, who was associated with the sistrum, a musical instrument, brought with it an association with music. In this later form, Hathor's cult became centred in Dendera in Upper Egypt and it was led by priestesses and priests who also were dancers, singers and other entertainers.
Hathor also became associated with the menat, the turquoise musical necklace often worn by women. A hymn to Hathor says:
- Thou art the Mistress of Jubilation, the Queen of the Dance, the Mistress of Music, the Queen of the Harp Playing, the Lady of the Choral Dance, the Queen of Wreath Weaving, the Mistress of Inebriety Without End.
Essentially, Hathor had become a goddess of joy, and so she was deeply loved by the general population, and truly revered by women, who aspired to embody her multifaceted role as wife, mother, and lover. In this capacity, she gained the titles of Lady of the House of Jubilation, and The One Who Fills the Sanctuary with Joy. The worship of Hathor was so popular that more festivals were dedicated to her honor than any other Egyptian deity, and more children were named after this goddess than any other deity. Even Hathor's priesthood was unusual, in that both women and men became her priests.
One of the most famous women named after the goddess was Princess Hathorhotep, daughter of King Amenemhat III.[17]
Temples
As Hathor's cult developed from prehistoric cow cults it is not possible to say conclusively where devotion to her first took place. Dendera in Upper Egypt was a significant early site where she was worshiped as "Mistress of Dendera". From the Old Kingdom era she had cult sites in Meir and Kusae with the Giza-Saqqara area perhaps being the centre of devotion. At the start of the first Intermediate period Dendera appears to have become the main cult site where she was considered to be the mother as well as the consort of"Horus of Edfu". Deir el-Bahri, on the west bank of Thebes, was also an important site of Hathor that developed from a pre-existing cow cult.[6]
Temples (and chapels) dedicated to Hathor:
- The Temple of Hathor and Ma'at at Deir el-Medina, West Bank, Luxor.
- The Temple of Hathor at Philae Island, Aswan.
- The Hathor Chapel at the Mortuary Temple of Queen Hatshepsut. West Bank, Luxor.
- The temple of Hathor at Timna valley, Israel
Bloodthirsty warrior
The Middle Kingdom was founded when Upper Egypt's pharaoh, Mentuhotep II, took control over Lower Egypt, which had become independent during the First Intermediate Period, by force. This unification had been achieved by a brutal war that was to last some twenty-eight years with many casualties, but when it ceased, calm returned, and the reign of the next pharaoh, Mentuhotep III, was peaceful, and Egypt once again became prosperous. A tale, (see "The Book of the Heavenly Cow"), from the perspective of Lower Egypt, developed around this experience of protracted war. In the tale following the war, Ra (representing the pharaoh of Upper Egypt) was no longer respected by the people (of Lower Egypt) and they ceased to obey his authority.
The myth states that Ra communicated through Hathor's third Eye (Maat) and told her that some people in the land were planning to assassinate him. Hathor was so angry that the people she had created would be audacious enough to plan that she became Sekhmet(war goddess of Upper Egypt) to destroy them. Hathor (as Sekhmet) became bloodthirsty and the slaughter was great because she could not be stopped. As the slaughter continued, Ra saw the chaos down below and decided to stop the blood-thirsty Sekhmet. So he poured huge quantities of blood-coloured beer on the ground to trick Sekhmet. She drank so much of it—thinking it to be blood—that she became drunk and returned to her former gentle self as Hathor.
하토르는 사랑과 풍요, 출생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보자면 아프로디테/비너스에 해당한다 하겠으나, 재미나게도 태양신에 의해 파괴의 여신인 세크메트로 변하기도 한다. 수메르 신화에서 이난나/이쉬타르는 사랑과 전쟁의 여신인데, 사랑과 전쟁이라는 상호모순적인 특성이 공존하는 이난나/이쉬타르가 이집트에선 사랑의 여신 하토르이자 동시에 파괴의 여신인 세크메트로 이중신격화되었고, 그것이 나중에 그리스에선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와 전쟁의 신인 아레스/마르스로 나뉘어지지 않았는가 싶다. 그리스신화에서 아레스는 아프로디테가 사랑하는 정부로 등장합니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문구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개념이라 볼 수 있겠지.
위키피디아에 묘사된 하토르 여신의 왕관을 보자. 태양신 라의 딸임을 상징하는 태양원반이 있고, 그 원반을 신과 파라오를 수호하는 뱀인 우라에우스가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모성애를 상징하는 암소의 뿔이 또한 그 원반을 감싸고 있다. 하토르는 암소로 상징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위에 실은 도록의 설명에도 있듯 이 유물에서 암소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음... 읽다보니 하토르가 꽤나 흥미롭단 생각이 든다. 그동안 강력한 이시스나 라, 오시리스에만 집중했지, 하토르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 그런데 위에 실은 위키피디아의 내용 및 몇 가지 다른 정보들을 검색해 보니, 하토르는 꽤나 재미나다. 이집트 신들이 워낙에 재미납니다. 권력의 교체에 따라 이 신 저 신과 결합하거든. 그래서 나중에는 모든 신이 모든 신 같달까, 그런 인상까지 받은 적이 있는데 물론 그건 과장된 느낌인 거고. 자, 하토르에 대한 내용정리를 간단하게나마 해봐야겠다. 위 유물에만 관심 있는 분들은 이 부분은 잠시 뛰어 넘으세요.
우선 하토르의 이름.
위키피디아에 표시된 이름은 네모 박스 안에 매가 들어가 있는 모습(오른쪽의 갈색으로 표시된 첫번째 히에로글리프)이다. 조금 더 자세히 쓰면 두 번째 히에로글리프 Hwt-Hr가 된다. 여기의 Hwt(후트)는 temple이란 뜻이고(네모 박스로 표시되었다), Hr(호르)는 호루스(상징물: 매, 태양)라는 뜻이다. 즉 호루스가 머무르는 신전/집이란 의미인 것이지. 그리고 세 번째 히에로글리프는 포크너 사전에 기재된 하토르의 이름이다. Hr는 의미상이라기 보단 음으로 표시한 것 같아 보이긴 하는데, 무튼.
하토르는 태양신 라의 딸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 어린 호루스를 기른 유모이기도 하고, 또 호루스의 아내이기도 하다. 이집트 신들의 가계도는 고대 신화 속 신들이 그러하듯 막장의 막장을 달립니다. 21세기 개념으로 촌수 따지면 진도 나갈 수 없어요. 호루스의 아내이기에 호루스가 머무르는 집이 되고, 또 호루스의 유모였으니 젖을 의미하는 암소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위의 위키피디아 설명에도 있듯 하토르는 고왕국시대 중에서도 초기왕조 때 숭배되었던 암소의 여신 바트와 동일시된다. 바트는 성격, 혹은 영혼으로 번역되곤 하는 고대 이집트어인 바 Ba 에 t를 붙인 여성형이라 볼 수 있는데, 별이 몸을 덮고 있는 하늘의 암소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영혼을 상징하는 바의 여성형이므로 바트 여신은 명계와 연결되어 있고, 이 바트와 동일시된 하토르는 그리하여 사자가 명계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명계의 여주인(Mistress of Necropolis)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먼 길을 왔을 사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해준다 합니다.
바트와 하토르는 둘 다 암소로 상징되지만, 살짝 다른 점이 있다. 오른쪽의 사진은 고왕국시대 4왕조 멘카우레 왕의 고부조? 인데, 가운데 멘카우레가 상이집트의 백관인 헤제트를 쓰고 있고, 그의 오른쪽엔 소뿔 가운데 태양원반이 있는 관을 쓴 하토르가, 그의 왼쪽엔 바트 여신이 서서 멘카우레의 왕권을 지지하고 있다. 자, 여기에서 하토르와 바트의 뿔을 봅시다. 하토르의 뿔은 바깥쪽으로 굽어져 있고, 바트의 뿔은 안쪽으로 굽어 있습니다. 이런 면으로 보자면, 저 위에 위키피디아의 정보에 실린 사진들 중 그 유명하고 중요한 <나르메르 팔레트>
의 상단에 표시된 소는 하토르라기 보단 바트쪽이 맞지 않나 싶다. 어차피 같은 여신으로 융합되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서도. 아니 그런데 사진배치가 왜 이리 어지러워.;; 바트 여신의 언급에 있어서 몸에 별이 그려진 하늘의 소로 표현된다 함을 잠시 기억에 저장해 둡시다.
다시 하토르로 돌아와서, 농경국가였던 이집트에서 소는 생산의 중요한 자원이었고, 농사의 풍요에 직접적인 혜택을 끼쳤던 비옥한 나일강과 연결된다. 나일강은 고대 이집트의 젖줄이자 하늘의 은하수로 인식되었으며, 나일강의 범람은 출산 직전 터지는 양수로 여겨졌다 한다. 그러니 나일과 연관되는 암소의 여신인 하토르는 출생/생산의 여신이며, 고대 이집트에서 저승은 영혼의 부활/재생과 연관되었으므로, 하토르는 명계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사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참 다채로운 신들이야, 이집트의 신들은.
이제 드디어 저 장식품을 살펴 보자.
대영박물관 홈피설명에 보면, 하토르의 가발 아래에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3세(제18왕조 9대 왕)의 이름인 '넵마아트레'가 카르투슈(신/왕/왕비의 이름을 둘러싸는 원) 안에 들어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입니다.
음. 그런데 도록에 나와있는 사진은
이것이다. 아마 앞-뒷면인 것 같은데, 똑같아 보이는가? 다릅니다. 이 면에는 가발 바로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것은 Mistress of the sycamore fig 뽕나무의 여왕? 이라는 뜻이라 한다. 으아아, 사진배치가 지저분하게 되어 버렸다. -_ㅜ
앗, 그런데 위의 넵마아트레라는 글자가 좀 이상하다? 왼쪽에 하토르가 있고 오른쪽이 넵마아트레라는 말인데... 넵마아트레는 의 왼쪽처럼 쓰거든. 여기서 위의 카르투슈 안에 있는 글자가 넵마아트레다. 그런데 여기서는 넵이 마아트 아래로 내려와 있네. '레'야 존칭어 위치 때문에 앞으로 왔다지만 음... 하긴 마아트도 존칭어니 앞으로 와야 하나? 모, 모르겠...;; 뒤의 둘 다 아멘호테프 3세의 이름입니다. 아, 그리고 보니 아멘호테프 이름도 좀 이상하네. 어째서 호텝아문이 아니냔 말이다. 난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지. -_ㅜ
이 하토르 장식에는 태양원반이 없다. 머리에는 신과 왕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뱀인 우라에우스가 여러 마리로... 왜 여러 마리로?? 무튼, 하토르의 신성을 상징하고 있다. 가발 아래의 이름과 별칭을 지나 내려오면 암소의 얼굴을 한 하토르가 있는데, 응? 위에 있는 뿔이 안쪽으로 향해 있네? 이것은 바트의 뿔 같은데, 18왕조 때 이미 하토르와 바트의 혼합이 이루어져 있었는가 보다. 암소 얼굴 아래로 성스러운 뱀들이 있고, 그 바깥쪽에도 있는데, 자, 바깥쪽의 뱀 두 마리가 쓴 왕관을 보자. 보는 쪽에서 왼쪽에는 하이집트의 적색관인 데슈레트를, 오른쪽의 뱀은 상이집트의 백색관인 헤제트를 쓰고 있다. 즉 상하이집트를 통일했다는 의미다. 하트셉수트와 이집트의 나폴레옹인 투트모세 3세가 있는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 때의 부적이다.
맨 아래를 보면 원 안에 하토르가 암소로 표현되어 있다. 몸에 반짝이는 별문양은 위에서 말했던 바트 여신과 하토르가 지니는 은하수/하늘의 암소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될 듯 하다. 여기서의 뿔은 바깥을 향해 있는 데다 안에 태양원반이 있으니 하토르가 맞지? 하늘의 암소가 배를 타고 여행하는 모습을 새겼다. 어... 하토르에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네.;;
타니트 여신의 석비
Stela with images of the goddess Tanit
카르타고, 튀니지
네오-퓨닉 시대 1-2세기
석회암
50x43.5cm
위대한 여신 타니트는 카르타고의 주신이다. 아프리카 북부해안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본래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다. 타니트 여신은 서부 지중해연안, 페니키아인들의 거주지에서 신봉하던 신인데, 가나안 지역에서 다산의 여신으로 선기던 아스타르테와 거의 동일시 된다. 아스타르테는 주로 레반트 지역의 해안도시에서 신봉하던 여신이었다.
이 화려한 묘비는 타니트 여신의 신전이 있던 카르타고 교구(토펫)에서 발굴됐다. 이 묘비에 타니트는자신의 상징인 초승달과 태양 원반을 머리에 이고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표현됐다. 두 개의 풍요의 뿔을 들었는데, 왼쪽 뿔에는 포도가 넘쳐흐르고 오른쪽 뿔에는 석류가 담겼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꽃 피는 나무에 손을 댄 채 서 있는데 로마의 여신 비너스로 보인다. 이 묘비는 카르타고 역사에서 네오-퓨닉 시대로 불리는 후기에 제작됐는데, 이 시기 카르타고는 로마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로 큰 번영을 누렸다. (p117)
페니키아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이집트 신화에서 초승달과 태양을 동시에 상징물로 가지는 신은 콘수인데... 아문과 무트의 아들로, 젊음과 달의 신이며, 또한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서로 멀지 않은 지역들이니 상호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같은 상징물을 사용하면서 성별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 사뭇 흥미롭다. 아니 그런데 비너스가 타니트의 아래에 있는 건 또 뭐지. 저 여인이 비너스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전쟁의 신 관우 모양의 기와
Roof tile in the form of Guandi, god of war
중국
명 왕조, 1490-1620
유약 칠을 한 도기
42.5x33cm
역사적으로 중국 문화는 세 개의 철학을 중심축으로 발전해 왔다. 유교와 도교, 불교가 그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신과 조상신, 문화적 영웅, 빼어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숭배를 중심으로 다양한 대중 종교가 이들 세 전통 철학과 공존했다. 그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이 전쟁의 신 관제다. 관제는 삼국시대에 유비를 주군으로 삼아 그를 도왔던 군사영웅 관우 장군을 신격화한 이름이다. 220년 생포돼 목숨을 잃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지금까지도 그는 변치 않는 충성심과 신뢰의 상징으로 추앙된다.
유약을 칠한 도기로 제작한 이 용마루 기와는 투구와 갑옷 차림에 천리마를 탄 천상의 전사 관우를 묘사했다. 이처럼 화려한 장식의 기와는 절이나 개인 저택의 지붕에 설치했는데, 악령을 쫓고 행운을 부르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런 관습은 명나라 말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화려한 장식의 건축 기와가 크게 유행했다. (p117)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관우다 보니 그냥 실었다. 그런데 내가 상상한 관우와 너무 다르게 생긴 모습에 좀 많이 실망. 예전에 중국의 황산에 갔었을 때,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마을을 지나면서 가이드가 마을에 있는 집들의 지붕 기와에 있는 말의 형상에 대해 설명해준 것이 떠오른다. 전쟁으로 떠난 남편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조각한 거라고 했는데? 어쨌거나 기와에 새긴 조각은 악을 물리치고 만사형통을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영혼의 보드
Spirit board
엘레마 족, 파푸아 뉴기니
19세기 말-20세기 초
나무, 안료
129x32cm
대영박물관 관련 페이지:
파푸아 뉴기니 남동 해안에 위치한 파푸아 만 주민들이 만든 인상적인 물건 중 하나가 일정한 양식의 인물을 얕은 부조로 새겨 넣은 보드처럼 생긴 조각품이다. '스피릿 보드'라고 알려진 이 조각은 보드에 새겨진 인물의 영혼이 사는 집으로 여겼다. 이 보드는 '호호아'라고 불렸는데, 오로콜로 베이의 긴 해변에 사는 엘레마 족 작품이다.
이 '스피릿 보드'의 인물은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데, 허리에 나무껍질로 만든 댄서 팬티를 입고 가슴에는 진주조개로 만든 초승달을 새겼다. 하얀 원으로 선명하게 표현된 배꼽은 영혼이 보드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생각했다. 인물의 전신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작품은 매우 드물다.
이런 보드는 보통 전통 의식을 치르는 성소에 보관했는데, 성인 남자들만 출입이 허용됐다. 이곳에서 보드에 깃든 영혼의 초자연적인 힘을 불러내 사냥이 잘 되고 공동체가 번영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보드에는 각각 이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숲의 정령이나 조상 가운데 중요 인물의 이름을 땄을 것이다. (p120)
우선 파푸아 뉴기니를 찾으니 호주 위에 있는 섬이네. 이 보드는 전시장에서 그냥 스윽 보고 지나갔던 건데, 그것은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예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인상에 깊게 남는 것이었지.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모양입니다. 물건에 새겨진 영혼이 깃든다는 생각은 고대 이집트의 것과 흡사하다. 뭐, 그런 거지. 사람이 인식하고 사고를 시작할 수 있는 대상이 주로 자연이다 보니, 비슷한 자연을 바라보며 사람이 할 수 있는 상상이란 비슷비슷할 것이다. 지리상으로 꽤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자연과 그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조건적 한계일 테지. 가슴의 초승달과 배꼽이 또한 인상적인데, 배꼽 옆의 두 하얀 점은 뭐죠?
아시리아 왕의 사자사냥 부조
Wall relief showing a royal lion hunt
님루드, 이라크 북부
신아시리아, 기원전 875-860년
98x139cm
대영박물관 관련 홈페이지 :
고대 세계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지는 가장 위대한 유물 중 하나가 아시리아 궁전을 장식하고 있던 석조 기념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장관인 것이 기원전 9-7세기, 이라크 북부 아시리아 왕국이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시기의 유물들이다.
이 벽면 부조는 칼루(지금의 님루드)에 있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북서 궁전에 있던 것으로, 왕의 사자 사냥을 묘사하고 있다. 마차에 두 사람이 타고 있는데, 한 사람은 세 마리의 말을 고삐와 채찍으로 다스리고, 또 한 사람은 시위를 당겨 활 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활을 당기고 있는 인물이 아슈르나시르팔 2세(기원전 883-859년 재위)일 수도 있다. 이미 화살을 세 대나 맞은 사자가 패잔병처럼 말발굽 밑에 쓰러져 있다.
사자 사냥은 왕족만의 특권이었다. 이처럼 서사가 담긴 장면은 왕을 나타내는 다른 상징물과 함께 님루드 궁전의 정면과 중요한 방들의 벽면을 줄지어 장식하고 있었다. 이 장면들은 왕실과 신하, 관리, 군인, 손님들에게 왕의 강력한 권력과 치적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부조 윗부분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명문은 왕의 업적을 설명하는 이른바 '표준 명문'의 일부였다. '표준 명문'이란 왕의 업적이나 가계, 왕국의 크기 등 비슷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명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p127)
아... 고민을 많이 했다. 이렇게 후기를 끌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 귀한 유물을 도록 설명만 얹고 넘어가자니 속상하고, 아직도 올리지 못한 유물은 많고. 정말... 모르겠다. 어쩌면 후기는 도중에 끊어야 할지도. 지금은 이 부조만 하고 끝내게 될 것 같은데. 도슨트께서 이번에 온 모든 유물들 중 가장 비싸다 하셨는데, 뭐였드라... 보험금만 5억이었나 5천만원이었나... 내가 숫자에 좀 많이 약합니다. 싫어하니 만큼 저장능력도 형편 없고. 무튼 가장 비싼 유물인 것만. 검색해 보니 아시리아 님루드 궁전의 벽에 새겨진 부조들이 굉장히 귀한 유물이라 하네. 난 아시리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서.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재위: 기원전 883년 - 기원전 859년)는 신 아시리아왕국 시대의 왕이다. 신도 카르프(님로드)을 건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카드어로는 아슈르 나시르 아플리(Ashur nasir apli)라 표기되며, "아슈르신은 후계자를 수호하시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투쿨티닌우르타 2세의 왕자로 태어났다. 부왕의 대에 강화되었던 아시리아를 다시 강대국화 하였다. 기원전 883년에 즉위한 후 17년간에 14회의 원정을 행하였다고 한다. 시리아 동부와、카르케미쉬에 진군한 것 외에도, 자그로스 산맥 방면에도 출병하였다. 그는 정복한 영토의 통치방법으로 현지의 왕에 공납을 부과하지 않고 아시리아인의 총독을 파견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고래부터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아슈르를 대신하는 신수도 카르프(님로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의 유적에서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아시리아식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한 셰두(사람 머리의 날개달릴 황소)의 조각상등을 설치했던 것으로 유명한 최고의 궁전이 포함되어있다. 이 궁정은 이후 사르곤 2세가 두르샤루킨에 천도하기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는 적이 얼마나 잔혹하였는가를 나타내는 문장과 부조를 남겼는데, 일설에는 다른 이들을 위압하기 위한 정치 선전이었다. 사후 왕자인 샬만에세르 3세가 왕위를 이었다. (출처: 위키백과 )
저 부조에서 누가 아슈르나시르팔 2세일까요? 앞면에서 활을 쏘는 사람이다. 고대의 유물에선 무조건 앞에 있고 큰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 보면 될 것이니.
아시리아의 전투에 대한 아주 좋은 자료가 있는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아래의 사진은 거의 다 그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내가 조금씩 발췌하여 싣는 것 보다 훨씬 유익한 정보가 많은 곳이니, 관심 있다면 참고하세요.
http://www.heritageinstitute.com/zoroastrianism/rawlinson/2assyria/r2d.htm#image-0025
자, 이제 아시리아의 전차에 대해 살펴 보자. 이제부턴 위의 부조와 설명 속의 그림을 잘 왔다갔다하며 봅니다.
전차 바퀴: 초기의 형태는 바퀴테가 3중으로 되어 있다. 바깥 바퀴테가 가장 넓고 중간테가 가장 얇은 형태이다. 또한 네 조각을 붙인 것도 있는데, 보자... 유믈에 있는 것은 네 조각이 되어 있네. 중기 때의 것은 테가 4중으로 되어 있죠. 세 번째의 넓은 테를 보호하기 위해 철로 한 겹 더 입힌 것이다. 중간의 바퀴테는 초기에는 6개, 나중에는 8개가 된다. 위의 그림에선 Fig. 1에 해당.
음. 이 바퀴채는 또한 아시리아 전차의 초기형태에 속하는데, 채의 앞머리가 아마도 거위? 인 것 같다.
전기의 전차 형태는 사람이 타는 몸통? 옆면에 화살통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이때 방패는 아마 뒷면에 세웠을 것이라 하고. 폴 앞머리의 거위는 쇠로 만든 것에 린넨천을 씌워서 장식했다 한다. 마차가 아주 화려해. 아래에 있는 후기 전차의 경우 바깥에 화살통이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 화살을 꽂았을 통이 있다 한다. 전기의 것 보다 훨씬 깔끔하고 단순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만히 보면 이번에 온 유물의 전차는 마지막의 과도기 기간의 전차와 가장 흡사한 것 같다.
전차는 몇 마리의 말이 끌며, 몇 명의 사람이 타는가? 보통 2-3마리의 말이 끌었다. 그런데 세 마리의 경우 한 마리는 전투 중 마차를 끌던 한 마리가 부상을 입었거나 죽었을 경우 대체하기 위한 용도였으리라 추측한다고. 그리고 위의 Fig.4에선 네 명의 사람이 탔는데, 두 명에서 네 명까지 탔다고 한다. 전쟁에서 왕은 포위공격 시 전차에서 내려 화살을 쏠 때를 제외하곤 거의 전차를 타고 싸웠다 한다. 그리고 높은 장군들도 그러했겠지. 그 다음 신분이 말을 탄 기사고, 가장 낮은 신분이 보병이었다. 이처럼 왕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은 전차에서 활을 쏘고, 그의 옆에 전차를 모는 사람이 섰다고 한다. 세 명이나 네 명일 경우 뒤에 있는 사람들은 가드로, 손에 들고 있는 방패로 왕과 높은 신분의 사람을 보호했다. 문제는 아시리아의 전차는 비교적 길이가 짧았다는 것인데, 그리하여 뒤에 섰던 가드들은 제대로 설 자리가 부족했을 것이며 꽤나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고. 유물의 전차에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 왕과 전차 모는 사람 두 사람이 타고 있다. 그리고 말은 세 마리가 끌고 있지.
이 그림은 왜 싣는고 하니, 이 그림에서의 Fig.1이 지금 다루고 있는 유물인 것 같아서다. 초기의 형태라고 나와 있지? 위의 그림은 말의 마구라든지 재갈이라든지 고삐, 가슴장식 등에 대한 예인 것인데, 뭐, 참고해 보세요.
위의 그림은 아시리아 왕들의 왕관과 악세서리들이다. Fig.1에서의 전기 시대 왕관을 보면, 높은 미트라 mitre 아래쪽에 밴드가 있다. 그리고 Fig.2로 가면 그 밴드(주로 이마에 닿는 부분이 넓게 디자인 되었고, 그 부분에 장미문양이 있는 경우가 많았음)가 따로이 이마에 매여 있는데, 바로 Fig.2가 이 유물에서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모습이다. 이 머리띠는 머리 뒤쪽으로 드리워져 팔꿈치 정도까지 닿았다 합니다. 발은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겠고.
그리고 왕의 전쟁 시 복장은 위의 Fig.4를 보면 된다. 길다란 옷의 허리춤에 띠를 두르고, 그 띠에 단도를 꽂았다. 그리고는 화려한 장식이 있는 앞치마를 앞 또는 뒤에 둘렀다. 윗팔뚝에는 양끝이 동물의 모양으로 되어 서로 겹쳐졌거나, 여러 겹으로 겹쳐진 팔밴드 Fig.1 를 했고, 손목에 또한 Fig. 3 에서 처럼 팔찌를 했다. 귀에는 귀고리를 했고. 전쟁 때 다른 악세서리는 다 빼고, 귀고리, 팔찌, 팔밴드는 하고 나갔다고(평소엔 더 많은 악세서리를 왕이 했다는 뜻이지).
자, 그러면 이제 다시 한 번 왕의 복장을 살펴 보자.
머리에 미트라를 벗고 띠를 둘렀다.
윗쪽 팔에 팔밴드를 둘렀다.
손목에 팔찌를 했다.
귀에 귀고리를 했다.
허리춤에 띠를 두르고 단도를 꽂았다.
뒤쪽에 앞치마를 둘렀다.
뒷쪽 허리춤에 칼집 속에 든 칼이 있다.
그 칼과 수직이 되도록 세워져 있는 것은, 칼을 가는 숫돌입니다.
전차의 옆면에 화살통이 있고 화살이 꽂혀 있다.
왕은 활을 당기고 있고, 그의 손에는 활에 꽂은 화살 외에 여분의 화살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니 팔의 근육까지 표현되어 있는 것이, 조각가의 솜씨가 좋다.
말은 세 마리가 끌고 있고.
아시리아에서 사자를 사냥하는 것은 왕 고유의 권한이었다 한다. 아시리아 사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프리카 사자 보다는 체구가 작았다는데, 그렇다 해도 가장 무섭고 강한 동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사자를 사냥하면서 왕은 왕권과 자신의 용맹함을 과시했겠지.
유물에 보면 사자는 이미 화살 세 개를 맞고 쓰러져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에는 다른 사자들이 좀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유물을 두고 두고두고 아쉬운 점 하나는, 내가 저... 수메르어, cuneiform 설형문자, 쐐기문자를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쉬워라... 이 유물에 적혀 있는 것은 상투적인 문구라곤 하는데, 그 상투적인 문구가 어떤 것이냐는 것이지. 수메르어는 이집트 상형문자와는 또 다른 맛이 있어서.
이런 것 좀 봐. 근사하잖아? 단순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는 문자다. 물론... 이집트 상형문자가 훨씬 예쁘긴 하지만. 언젠가는 수메르어를 공부할 기회가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