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 http://www.sac.or.kr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 http://www.britishmuseum.org/
대영박물관전 - 영원한 인간 @ 예술의 전당 ② → 클릭
대영박물관전 - 영원한 인간 @ 예술의 전당 ③ → 클릭
이번 <대영박물관전>에는 아래 설명에 있듯 176점의 유물이 왔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한 가지 칭찬을 하자. 모든 유물 앞에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나 도슨트 설명을 들으면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지만, 시간이 안 되는 분은 유물 앞에 있는 설명을 읽어도 된다. 그리고 도록 또한 박수를 짝짝짝. 전시회에 온 모든 유물의 사진 뿐 아니라 정보, 설명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 소장가치 100%. 물론 도록의 가치를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 추천합니다. 전체적으로 친절한 전시회이니 꼭 가보도록 합시다. 특히 1월 마지막 문화수요일의 할인혜택은 놓치지 않는 것이 이익이겠죠.
개인적으로야 이집트 상형문자가 좀 더 적혀있는... 보단 내가 그동안 공부했던 스텔라가 왔더라면 황홀했을 테지만, 뭐 이집트 비석에 관심 갖는 사람이 별로 많을 것 같진 않으니. ㅡㅜ 단순히 좀 더 많은 상형문자를 보고 싶었을 뿐이지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진과 사진 아래 작품의 정보에 대한 출처 :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아 왜 글이 사라졌지. -_- 작품의 정보는 대영박물관 홈피에서 긁어왔다. 홈피 주소는 위에 있고. 편리하긴 한데, 내용이 좀 길다. 적당히 줄이려니 귀찮아서. 작품의 설명 또한 편리하게도 <대영박물관전> 도록에서 데려오겠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예술작품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남성의 나신을 유례없이 신성시했다. 완벽한 비례와 건장한 육체를 영웅적 가치와 도덕적 우월성의 표현으로 생각했으며, 신과 신화 속 영웅, 인간을 묘사하는 데 그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이 남성의 몸에 대해 가졌던 이상을 고전적 스타일로 잘 표현한 조각상이다. 판(Pan)은 그리스 신화에서 섹스와 다산을 상징하는 목신으로 염소처럼 생긴 귀가 특징이다. 한 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둔 채 허리를 살짝 비틀고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전체적으로는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약간 기운 포즈다. 손에 든 작은 술통과 술잔은 주신 디오니소스와의 관계를 말해준다. 이 조각상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조각상 모두 나무 등걸에 제작자 마르쿠스 코수타우스 케르도의 이름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 조각가이자 미술이론가였던 폴리클레이토스(기원전 450-420년 활동)의 사상을 구체화한 것이다. 폴리클레이토스는 <카논(Kanon)>이라는 저서에서 이상적인 인체의 조건으로 균형과 대칭, 리듬, 비례를 강조했다. (p29)
그리스어로 이름이 적혀있다고? 어디에 있었으려나. 기억이 나지 않네. 작품 제목이 statues라고 되어 있는데, 양쪽에 두 개의 조각이 대칭으로 만들어져 있다. 뭐, 대칭인 듯 대칭 아닌 대칭 같은... 인 건데. 판과 사튀로스에 대해 검색을 했는데, 같은 대상의 로마와 그리스식 이름 차이라고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다른 종류라고도 하고. 원래 다른 종류였는데 같은 것으로 나중에 여겨지게 되었다라고도 하고, 또 어디에선 판이 사튀로스의 할아버지란 말도 있는데, 신화부분을 꼼꼼하게 읽지 않아 잘 모르겠다. 선생님께서 신화부분을 그렇게 열심히 해주셨는데도 아직 이렇게 띄엄띄엄 알고 있네, 그래. 무튼, 판은 초기에는 염소의 귀에 말의 꼬리를 지닌 나이든 남성으로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염소의 귀와 짐승의 다리를 지닌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판, 또는 사튀로스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로,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습성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디오니소스의 스승으로 실레노스라는 사튀로스가 있다고 하고. 나는 판이나 사튀로스라고 하면 애니매이션 <헤라클레스>에 나오는 '필'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 영화에서 필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스승이라며, 영웅들을 길러냈노라고 자랑을 하지 않나. 그 모습이 실레노스와 겹쳐 보인달까, 좀 다르긴 하지만. 패닉(Panic)이란 단어는 물론 이 '판'에서 유래했습니다. 숲속에 살면서 지나는 사람ㅡ특히 여성이었을 경우 더욱 그러했겠지, 술꾼이자 호색한이었으니까?ㅡ을 놀래켜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그런데 젊은 판을 조각한 이 석상을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나? 경박스레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는 커녕, 세상에 둘 도 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심오한 존재론적 고뇌에 빠져있을 것 같은... 이라거나, 현상을 넘어선 이데아를 명상하는 것 같은 표정이라거나...? 그리스 조각의 얼굴은 항상 저러하지. 눈동자가 없는 눈은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파란색 글자는 모두 <대영박물관전>의 도록 내용입니다.
평화로운 표정의 이 북아프리카 청년 조각상은 이집트와 헬레니즘 미술전통의 융합을 상징한다. 이 청년상은 한때 지중해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것으로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다. 그리스 양식이지만 재료나 제작기술 면에서는 완전히 이집트 것이다.
이상적인 청년의 얼굴 모습을 완벽한 솜씨로 재현했다. 풍성한 곱슬머리가 윤기 있는 피부와 대조를 이룬다. 아몬드 모양의 눈을 섬세하게 처리했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모종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관자놀이와 눈썹, 턱 또한 뚜렷하고 세련된 솜씨가 돋보인다. 단단한 돌로 제작하는 이집트 조각상의 전통은 기원전 3000년 중반부터 시작되는 고왕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리스 조각가 중 이 방식을 시도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조각상처럼 윤기 있는 작품을 얻으려면 고운 연마제를 사용해 수없이 문지르고 광택을 내는 오랜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p30)
유사, 토사, 세사(물에 쓸려와서 강어귀에 쌓이는 진흙, 모래 등)가 굳어져 생긴 실트암이라. 아직 이집트의 미술 쪽으론 공부를 안 했어서 모르겠다. 딱 보면 그냥 그리스 작품처럼 보이던데.
(↑ 전시에 없는 유물)
ㅡ는 아니다. 그렇다 볼 수 만은 없겠다. 위의 멘카우레 상을 보면 꽤 닮았거든. 저 멘카우레 씨는 훨씬 훨씬 오래된 분이고, 또 오래된 동상이니까, 이쪽과 닮았다고 보는 편이 낫겠다. 자그마치 BC 2500년 이상된 조각상입니다.
<청년의 두상>은 날렵한 콧대와 매끈한 피부표현이 어찌나 미려하신지. 가만히 보다 보면 '무슨 생각해요?' 라고 묻고 싶어지던.
이집트 고왕국 말기(기원전 2613-2160년)에는 부유한 개인이 사망할 경우, 무덤 속에 그의 육신을 대신할 목조 조각상을 집어넣는 것이 관례였다. '카(Ka)'라고 불리는 죽은 이의 영혼이 이 조각상에 들어가 산다고 생각했다. 받침대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체치(Tjetji)라는 이름의 이집트 고위 관리였다. 당시 무덤 속에 집어넣는 인물상은 대부분 죽은 이의 실물과 똑같이 만들지 않고 이상화한 모습으로 재현했다. 이집트 미술의 전통에 따르면, 가장 완벽한 형태의 인체를 묘사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왼발을 앞으로 내딛고 왼손으로 긴 지팡이를 짚었는데, 이는 이집트 인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인 포즈다. 오른손에 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권력의 상징인 지팡이는 사라지고 없다. 가늘고 긴 상반신은 이집트인의 정교한 조형 솜씨를 보여주는데, 본래는 인물상 전체가 채색돼 있었을 것이다. 얼굴의 디테일이 살아있고 눈에는 흰석회암과 흑요석을 감입했다. 이집트 미술에서 나신은 보기 힘든데 이 조각상의 경우는 사자의 부활과 갱생에 대한 희망이 강력히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200년이면 페피2세 정도려나...? 체치, 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귀에 익지? ㅡ 는 이상하다, <파라오의 역사>에서 본 건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보았지... 기억나면 나중에 덧붙이는 걸로.
엇... <도식적인 모양의 여인상> Schematic female figure 이라는 조각은 왜 대영박물관 홈피에 없지? 이 유물에서 삼천포 좀 탈 것 같았는데. 구글링을 해도 비슷한 것만 있지, 바로 그것을 찾을 수가 없네. 나중에 필 받으면 스캔해서 올리든가. 아니면 그냥 잊고 지나가든가.
할라프 신석기 여인상
Figurine of a woman
차가르 바자르, 시리아
할라프 문화, 기원전 5000년 경
구운 점토
17.5x4.5cm
이것도 대영박물관 홈피에 사진이 없다. 그래서 정보는 도록에 있는 것으로.
육감적인 곡선미와 독특한 색채 장식이 돋보이는 이 여인상은 할라프 신석기 문화(기원전 6000-5000년)의 특징이다. 두툼한 허벅지를 내민 채 풍만한 젖가슴을 두팔로 감싼 이 나신상은 머리가 사라지고 없다. 비슷한 모양의 다른 여인상을 보면 얼굴을 압착해 큰 코, 혹은 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몸과 팔다리의 검은 줄은 다른 종류의 장식이거나, 바디 페인트, 혹은 문신으로 보인다. 여성의 특징을 과장해 표현한 것은 이 여인상이 출산과 관련된 주술, 혹은 종교적 기능에 쓰였음을 암시한다.
이 작품을 보곤 괜히 반가웠지. 수요 수업에서 보았던 조각이 눈 앞에 있었으니, 이 아니 놀라울쏘냐! 선생님 말씀대로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빙하기를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능한 지방이 많이 축적된 체형을 지닌 여성이 더 유리했었을 것'이라시던 선생님의 말씀은 참 매혹적인 추론이다. 그리하여 저렇게 가슴과 엉덩이/자궁이 특별히 강조된 지모신상이 많았을 것이라고. 신석기 시대의 지모신상들을 보면 대개가 저렇게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여성의 생식기 모양 만을 강조한 채 그 외 얼굴이나 손, 발 등 나머지 부분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뚜렷한 특징이 없는 것이 많다.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아기의 생명을 유지시킬 젖이 나오는 가슴과 자궁이 있는 엉덩이가 튼튼한 여성이 더 유리했겠지. 또 그렇게 먹을 것이 귀했을 시기에 저런 체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먹이경쟁에 있어서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힘이나 권력이 있었다는 뜻이었을 테다.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인가.
* 사진출처 : https://www.pinterest.com/pin/419116309044640906/
아시리아 여인상
Female figurine
님루드, 북부 이라크
상아
10x4.5cm
이상적인 여성의 누드를 묘사한 이 정교한 조각상은 북부 이라크에 있던 고대 아시리아의 수도 님루드에서 대량 발굴된 상아 조각품 중 하나다. 다소 경직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나 어깨까지 내려온 완벽하게 정형화된 머리 스타일, 세줄 목걸이 등이 이집트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이집트화, 혹은 '국제화' 된 스타일은 이 여인상이 레반트 연안 페니키아의 중심부나 시리아에서 활동하던 페니키아 장인들의 솜씨임을 암시한다. 여성의 특징을 한껏 강조해 허리는 가늘고 배는 고톰하며, 젖가슴은 둥글고 풍만하다. 젖꼭지와 음모는 작은 구멍들로 표현했다. 이처럼 여성의 관능과 다산성을 강조해 표현한 것은 종교, 혹은 주술의 기능, 즉 상서로운 기운을 부르고 악귀를 쫓는 상징적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p45)
유물정보에서의 사이즈를 꼭 확인하도록 하자. 사진으로 보면서 사이즈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나처럼 직접 가서 보았다가 당황하게 된다. 선생님께서 누누이 사이즈를 강조해 말씀하셨는데도, 직접 보고는 놀랐거든. 이렇게 금방 실제로 보게 될 줄 알았나, 뭐. 앞의 신석기 시대 지모신상 피규린 이야깁니다. 이 유물도 많이 작다. 그래서 도록이 좋은 것이, 조그마한 유물의 경우 오히려 직접 보는 것보다 도록으로 보는 것이 더 선명하거나 감동적인 경우가 있다? 신기한 일이지. 진품의 아우라가 아니라, 사진의 아우라라는 건가.;
아시리아라면 수메르 문명의 후예라는 건데, 수메르 문명의 유물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 전시에 없는 유물)
* 사진출처 : http://arthistoryworlds.org/sculpture-from-sumer/
위의 아시리아 여인상은 설명에도 있듯 분명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눈동자 때문인지, 아래의 고대 수메르 조각과도 닮은 느낌이다. 저 눈을 수업시간에는 '공포'라 많이들 공감했더랬는데. 음. 아시리아 여인상의 경우 딱히 공포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초월한 듯한 표정을 한 이집트의 조각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런데 아시리아라면 기원전 650년대의 시기였을 텐데, 그때도 이집트화가 '국제화'였던 걸까. 확실히 이집트 예술은 독특하긴 하니까.
나무를 깎아 만든 이 나체 여인상은 거울 손잡이 장식품인 듯하다. 관능적인 몸매는 고대 이집트의 아름다움과 다산, 모성의 여신 하토르를 연상시킨다. 뒤집어쓰는 형태의 긴 가발을 착용하고 왼손에 새끼 고양이를 들었는데, 이런 모양의 가발이 이집트 제 18왕조 후반에 크게 유행했다. (p47)
고대 이집트 여성의 헤어스타일이라. 내가 알고 있는 건 남녀 모두 삭발을 했다는 것인데, 여성의 경우는 아주 짧은 길이로 잘랐다고. 그리고는 그 위에 가발을 썼는데, 그것은 위생과 더위 때문이었다 한다. 영드 <로마>를 보면 누구였더라, 무튼 로마 장군이 이집트 여성과 잠자리를 하고 일어나는데, 여성의 머리가 대머리였다. 또한 클레오파트라도 가발을 벗으면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스타일을 했었고. 물론 왕족이나 귀족일수록 길고 화려한 가발과 헤어장식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거울손잡이 장식품의 여성은 그런 높은 신분의 여성을 형상화한 것이었을 테고, 또 높은 신분의 여성이 사용했으리라 짐작한다. 가발의 재료는 린넨이나 종려나무를 사용했는데, 양모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어린 아이의 경우 남녀 모두 어린 시절에는 변발을 했습니다. 옆머리만 남긴 채 다 삭발하는 것이죠. 이것은 뒤의 세넨무트 방형상에서 다룰 것이었는데, 아... 이집트 유물은 나중에 따로 모아서 좀 더 자세히 하려고 한 건데. 손가락 수다가 시작되니 어쩔 수가 없네. -_ㅜ 가발은 초기에는 단발이었다가 후기로 갈수록 길어지고 풍성해진다 한다. 이집션 헤어스타일에 대한 많은 정보를
http://blog.naver.com/jennyact/120134321027
에서 얻었는데, 음. 이 정보에서 조금 이상한 것이 있다. 우라에우스 장식이 신왕국시대에 사용되었다고? 이건 정확히 모르겠는데. 선생님께 여쭈어보면 답해주시려나. 너무 자잘한 질문이 되려나. 안 그래도 별 것도 아닌 질문들로 선생님을 넘 귀찮게 해드리고 있어서는. orz 귀한 분인데 귀찮다며 도망이라도 가시면 어떡해. 엉엉.
http://blog.naver.com/ysunnylee/220177143298
위의 블로그에선 장신구의 상징에 대해 정리되어 있고, 또 사진이 많아 눈이 즐겁게 된다.
엇, 검색하다 보니 재미난 걸 찾았는데... 으... 맘 같아선 유툽 동영상을 여기에 올리고 싶지만, 어디까지나 <대영박물관전> 후기니 만큼, 그냥 좌표만 올린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5550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여성의 몸매 변천사를 담은 동영상입니다.
아무래도 가발이 눈에 띄는 유물이다 보니 가발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막상 그 풍성한 가발을 즐기려면 뒷모습이 더 좋다. 전시회에 이 유물 뒤에도 거울이 있던가? 그리스 암포라의 경우 뒷면도 볼 수 있도록 거울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두 번 갔는데도 이 유물은 기억이 안 나네. 도록에는 뒷면이 있다. 가발을 빼면 단순한 뒷모습이다. 뭐, 뒷모습은 딱히 볼 것?이 없잖아. 그래서 더 단아해 보이기도 하는 뒷모습입니다. 스캔해서 올리는 건 도무지 귀찮. 꼭 보고 싶으시면 직접 가서 보세요. 갔는데 거울 없으면 도록을 사시고. 이번 대영박물관전 도록은 소장가치 100%라니.
설명에 보면 여성이 손에 고양이를 들고 있다는데, 신의 시력을 지닌 분의 설명이었으려나. 아무리 가까이 보아도 고양이인 줄을 모르겠더라.
아... 이집트 유물은 이 포스팅에서는 대충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섬세하게 조각된 이 상반신의 조형물은 전신상의 일부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기원전 4세기 중반 프락시텔레스가 제작한 저 유명한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프락시텔레스의 아프로디테는 막 목욕을 앞둔 여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절묘하게 표현한 것으로 유명한데, 수학적 비율에 따른 이상적인 신체 비례가 돋보인다. 비록 원작은 사라지고 없지만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쳐 고대에 수많은 복제품과 아류들이 등장했다.
이 조각상이 정확히 어느 아프로디테 상을 재현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본래 모습은 한 손, 혹은 두 손으로 벗은 몸을 가리는 포즈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이 조각상이 처음 발견됐을 때 사람들은 완벽을 추구했던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취향에 따라 팔다리, 심지어 머리까지 복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어느 시점엔가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 전시에 없는 유물)
The Ludovisi (Ippolito Buzzi (1562—1634))
Cnidian Aphrodite
Roman marble copy (torso and thighs) with restored head, arms, legs and drapery support
위의 작품은 도록 설명에서 언급한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를 모방하여 복원한 또 다른 로마 작품이다.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는 사진인 건데, 검색하니 Ippolito Buzzi (1562—1634) 라는 조각가가 복원한 거라는데? 아마도 루도비씨 가문이 의뢰하여 소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상은 지금은 없다. 아마도 콘스탄티노플이나 화재 때문에 소실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되는 것 같고. 그런데 그 작품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모작들이 많았다 한다.
프락시텔레스는 코스 시민들의 의뢰를 받아 아프로디테 여신상을 제작하는데, 옷을 입은 버전과 나체 버전 두 가지로 제작했다. 그런데 여신의 누드를 보고 충격을 받은 시민들은 (여신상의 모델이 당시 고급 매춘부였다고?) 옷을 입은 버전으로 구입하고, 후에 한 사람이 이 누드 버전을 구매하여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신전에 전시하였다 한다. 그런데 옷 입은 버전은 소실되고 이 버전이 남아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졌다는 말이지. 이유는,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완벽하게 이상적인 여성의 나체였기 때문인데, 실제 크기로 너무나 생동감이 넘친 바람에, 한 청년이 밤에 신전을 침범해 이 동상과 관계를 가지려 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이건 뭐, 고대 오덕 스토린가ㅡ싶지만 음... 생각해 보면 오덕후 스토리라기 보단 정신질환자 이야기인 것 같다. 그 청년은 조각상 허벅지 뒤쪽에 있는 얼룩을 보고는 실제 여성일 것이라 여겼다 하니. 대리석을 보고 실제 여성이라 믿는 건 오덕후라기보단 정신질환 쪽의 문제 아니야? ㅡ 는 그냥 웃자고 이어진 전설일 가능성이 많겠지만. 무튼, 그 정도로 유명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모작들이 많았는데, 이 포르티 단치오의 작품 역시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를 모방한 작품이다. 음... 섹시함은 커녕 아무 느낌 안 드는 것은 내가 여성이라 그런 건가요, 아님 예술작품을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그도 아니면 얼굴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이 없기 때문인 걸까? 딱 이부분만 본다면야, 여성을 그저 가슴과 버자이너로만 인식해버리는 신석기시대의 지모신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의도치 않게 이렇게 된 것이겠지만, 말하자면 로마 지모신상인 셈이지. 남성분들은 단지 이 부분 만을 보아도 섹시하다고 느끼는 건가요??!??
이 접시는 고대 로마 동전이나 18세기 메달과 비슷하게 이상화한 여인의 옆얼굴을 담고 있다. 단단히 묶은 머리, 넓은 이마, 길고 하얀 목덜미가 르네상스 시대에 아상으로 여겼던 아름다움과 패션을 재현했다. 둥근 접시 주변에 '신성하고 아름다운 루치아'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고 이 그림이 특정 인물의 초상은 아닌 것 같다. 루치아란 이름의 여인에게 선물이나 기념품으로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류의 도기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대량으로 생산됐으며, 수집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접시는 특히 과감한 디자인과 선명한 색채로 눈길을 끈다. (p49)
음. 글쎄. 난 접시 쪽은 관심이 없어서. 물론 캔버스에 그린 것도 그림이고 접시에 그린 것도 그림이다. 다만 눈에 익지 않았다는 것 뿐. 화려하고 예쁜데, 도슨트께서 앞으로 데려가지 않으셨더라면 적당히 보고 지났을 유물이었다ㅡ아직은 작품을 보는 눈이 세련되지 못해서는. 다만 여성의 머리 둘레에 감긴 리본 문양의 DIVA LVCIA BELA는 읽었을지도.
인도인들은 신전을 하나의 우주로 인식했다. 그 중심에 신이 있었다. 중세 인도에서 신전은 신성한 수호 인물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이 네 개의 팔을 가진 여신도 그 중 하나로, 신전 외벽의 벽감에 있었을 것이다.
가는 허리와 풍만한 둔부, 높고 둥근 젖가슴을 가진 이 여신상은 사실상 재현이라기보다 신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상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것이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관능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산과 완벽을 상징하는 관습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기 전에 이 여신상은 제이코 엡스타인의 스튜디오에 있었다. 그는 1920년대에 큰 인기를 끌던 모더니즘 조각가로, 피카소를 비롯한 동시대 아티스트들과 같이 새로운 미의 전범을 확립하는 데 몰두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술에서 발견한 또 다른 이상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참 그러네. 얼굴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다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긴 한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니 당혹스럽다.
(↑ 전시에 없는 유물)
Standing Goddess Lakshmi
윗사진은 아마존에서 팔고 있는 청동상의 사진이다. 아마 원래는 이런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어 실었다. 그랬더니, 아... 아프로디테의 토르소. 그럴 수도 있겠네. -_- 어찌 이 작품은 얼굴이 있는 편이 훨씬 덜 섹시해 보이니 말이지? 너무 해맑게 웃고 있어 그러나. 거 왜일까... 위의 라자스탄 여신 입상을 보고는 인터넷 광고에 뜨는 게임 캐릭터의 몸 같단 생각을 했지. 특히 일본 애니매이션 속의? 혹은 남성작가가 그리는 일본 만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몸매가 다 저렇지 않나 왜. 가만히 보면 여성작가는 여성의 몸을 저런 식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징그럽기 때문이죠. 뭐, 이것은 여성 전체의 성향이라기 보단 담백한 외모를 좋아하는 나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는데, 무튼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몸을 저딴... 저런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음. 아무래도 난 신체가 잘린 것은 동상이라 해도 보는 것이 불편해서는. 그냥 넘어가자.
온몸에 검은 칠, 목에는 둥근 링 모양의 장신구, 잘 다듬은 머리. 이런 타입의 여성 입상은 시에라리온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인물상은 '쉐르브로 야세 집단'과 관련된 신령(민세레)을 재현한 것이다. 미래를 점치는 목적에 사용했다는 기술이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이 인물상을 수집한 경로와 맥락이 기록돼 있지 않아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박물관에 유사한 양식의 인물상이 서너 개 있기 때문에 추정은 가능한데, 모두 한 사람의 예술가, 혹은 특정 공방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크고 묵직한 인물상이 손으로 젖가슴을 받쳐 든 자세로 서 있다. 넓적한 얼굴과 원반 모양의 거대한 귀, 가운데로 몰린 눈, 그리고 섬세한 반원형 눈썹을 가졌다. 유럽 스타일의 부츠는 여인의 높은 신분과 권력을 보여준다.
시에라리온 최대 부족인 멘데 족의 여성 비밀결사 '샌디 소사이어티'는 이런 인물상을 병이나 악령을 쫓는 주술에 사용했다. 멘데 족이 이상으로 생각한 여성의 미와 도덕을 구현한 인물상으로, 성인식과 같은 의례가 있을 때는 공공장소에 전시하기도 했다. (p52)
* 사진출처 : https://www.pinterest.com/pin/290622982178347500/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야씨 소사이어티 사진이라 한다. 조각과 많이 닮았지? 야씨 소사이어티 Yassi society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위한 단체이지만, 마을사람 모두를 위해 치료행위를 하는 모양이다. 19세기 작품이긴 하지만, 위의 아프리카 여인상은 신석기시대 작품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현대적이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작품이다. 어깨의 각이라든가 허리와 골반으로 이어지는 선이 깔끔하다. 발만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뭐, 나름 독특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신기한 건 아코디언 같은 목인데, 막상 시에라리온의 여성들은 목을 늘이기 위한 장식을 하지 않았네? 왜,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유명했던 부족 있었지 않나. 조에족이었던가. 입이나 귀 등에 어마어마한 피어싱을 하던 부족. 어제 들은 지대녋얕의 이전 방송에서 그런 멘트를 하던데. 조에족들의 그런 피어싱을 통한 신체 과장이 언뜻 보기엔 끔찍해 보일 수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또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성형수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과연, 그렇게 연결시키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성형수술을 하듯 멋을 위해 신체를 왜곡했으리라.
'Lapsus Humani Generis' (The Fall of Mankind)
한스 발동은 이 판화에서 신의 뜻을 거역해 인간 세상에 죄와 고통을 안겨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의 성경 이야기를 묘사했다. 벌거벗은 이브가 유혹하는 눈길로 선악과 나무에서 딴 금단의 열매를 아담에게 건네주고 있다. 아담은 뒤에 바짝 붙어서 이브의 젖가슴을 애무하고 있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라틴어로 '인간의 타락'이라고 쓴 큼직한 명판이 눈에 띈다. 도발적인 구성을 통해 성욕이 인간 타락의 원인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강력히 표현한 작품이다. 이브의 아름다움은 곧 도덕적 타락을 가리킨다.
교육수준이 높고 부유한 슈트라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난 발동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제자였다. 명암을 극도로 대비시키는 방식의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목판화의 초창기 거장 중 한 사람이다. 독일 미술에 초자연적이고 에로틱한 주제를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p53)
사진이 어둡게 나왔는데, 발동의 또 다른 작품을 보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 전시에 없음)
이렇게 하면 잘 보이지? 왼쪽 아래엔 성적 방종을 상징하는 토끼들이 있고, 오른쪽엔 나무를 칭칭 감은 뱀이 둘을 보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명판 아래 아담은 이브의 가슴을 만지고 있고, 이브는 그런 아담에게 사과를 건네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회화방식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나란히 그리곤 했다. 그런데 여기, 한스 발동은 유혹의 눈길로 바라보는 이브를 아담의 앞에 배치시킴으로써, 여성의 아름다움과 유혹, 그리고 인간의 성욕이 타락의 원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스 발동의 스승이었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작품을 보면, 발동이 뒤러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음을 볼 수 있다.
(↑ 전시에 없음)
Albrecht Dürer
Adam and Eve
1504
아...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뒤러의 이 <아담과 이브>를 괜히 찾았어. 발동의 작품에 대한 참고 작품으로 검색한 건데, 이것에 빠져서 허우적.;; 따로 올릴까 여기에 올릴까 지금도 고민 중인데, 에이 모르겠다. 쓰는데까지 써보지 뭐.
한스 발동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제자다. 뒤러는 독일의 뉘렌베르크 태생으로, 뛰어난 화가이자 특히 판화가로는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딱 보아도 발동이 뒤러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은 것인지 알 수 있는데, 이브의 경우 상당히 흡사함을 볼 수 있다. 비엔나의 Academy of Fine Arts에는 머릿다발이 들어 있는 유리상자가 있다 하는데, 뒤러가 죽은 직후 장례를 치르기 전에 발동이 잘라서 보관한 것이었다 한다. 좀 으스스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만큼 발동은 뒤러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이리라.
헝가리인 세공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뒤러는 독일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의 작품에서 독일의 고유성을 표현하려 애썼다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당시 북유럽권 화가로선 흔치 않게 이탈리아에 다녀와,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르네상스 문화에 심취했는데,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배워온 르네상스를 독일에 소개하려 애썼다.
위의 <아담과 이브>는 참 재미난 작품인데, 왜냐하면 구석구석 상징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징이 있겠는가?
먼저, 아담과 이브 뒤에 있는 나무들을 보자. 둘은 다른 나무다. 왼쪽의 아담이 잡고 있는 나무는 마가목 Mountain Ash라고 하는데? 이상해. 아무리 검색해도 잎이 다르게 생겼다. 오히려 사과나무나 벚나무가 더 맞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것은 자료에마다 Mountain Ash라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마가목은 '생명나무'를 의미한다고 한다. 오른쪽, 이브의 뒤에 있는 나무는 무화과나무다. 잎을 보면 명확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지식의 나무, 즉 선악과를 의미한다. 뒤러는 선악과를 사과가 아닌 무화가로 본 모양이지. 저 뱀도 신기하게 생겼는데, 머리에 네 개의 뿔인지 왕관인지가 돋아나 있다. 그리고 그 꼬리는 나무의 밑둥 부분에 고정되어 있고. 어쩌면 신께서는 저 뱀을 애초부터 저 선악과 나무에 매달려 살도록만 만들어 두신 것일까. 어쩌면 뱀이 이브를 유혹한 것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일까. 즉 저 나무 앞을 지나갈 때마다 유혹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뱀은 왜 저 나무에 고정되어 있어야 했던 것일까. 신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존재가 이 뱀이었을까? 그 벌로 선악과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모두가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신께서 마련한 장치였을까? 물음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이브의 왼손을 보자. 선악과가 열매가 아닌 가지째 그녀의 손에 들려 있다. 어쩌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손목을 꺾어가며 뒤로 숨긴 것을 보면, 그랬던 것 같진 않다. 꺾은 것이라면, 나뭇가지째 꺾는다는 것은, 그녀의 손에 닿지 않는 열매를 가지려 했다는 의미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탐했음이 분명하다. 아담의 불안하고 편치 않은 표정에 비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브는 어쩌면 이미 선악과를 맛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이제 신께서 금지하신 그 선악과를, 뱀에게서 받아 자신의 짝인 아담에게 건네려 한다.
아직 선악과를 먹기 전인 아담은 오른 손으로 생명나무를 붙들고 있다. 그는 아직은 죄를 짓지 않았고, 아직은 에덴동산 주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다. 순결한 에덴동산에서 아직은 쥐와 고양이가 함께 살 수 있다. 바로 코앞에 쥐가 있어도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다. 이것은 아직은 에덴동산 안에서 모든 것이 균형 잡혀 있고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 균형과 통제 속엔 인간의 네 가지 기질이 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처음으로 말했고 훗날 로마의 갈렌이 성격해석으로까지 확대했던, 중세를 지배했던 의학적 지식으로, 흔히들 말하는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이 그것이다. 그 네 가지 체액 중 한 가지가 많아지면 그에 해당하는 성격이 된다는 것이지. 이 그림에서 토끼는 혈액이 많은 다혈질, 소는 점액이 많은 점액질, 엘크(큰 사슴)는 흑담즙이 많은 우울질, 그리고 고양이는 황담즙이 많은 담즙질을 상징한다. 타락 직전인 아직은 이 넷 모두 평화로운 균형의 상태에 있지만, 타락을 하게 되면 그 균형이 깨어져 인간성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암시한다.
저 오른쪽 위 낭떠러지 위에 위태롭게, 그런데 묘하게 균형을 잡고 서있는 염소가 보이는가? 저 염소는 성경 속 아브라함과 이삭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일화 속 염소는 믿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염소가 아담의 대각선에서 아담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식하자. 예수는 '두 번째 아담'을 의미한다. 아담이 타락하여 깨어버린 신과의 관계를 예수가 회복하게 되는 내용을 저렇게 둘러둘러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저 염소에 해당하는 카운터파트는 무엇일까? 그렇다. 왼쪽 생명나무에 앉아 있는 앵무새다. 회화에서 앵무새는 종종 성모를 상징한다. 그것은 앵무새의 소리가 'Ave-Eva(Eve)'라 들린다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것 외에도 재미난 일화가 있다. 악티움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돌아오자, 앵무새가 "Ave Caesar(Hail Caesar)"라고 말했다고. 그래서 앵무새는 예언의 상징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 Ave Caesar가 Ave Maria가 되었을 때, 구원자를 잉태하게 될 마리아에 대한 예언이 연관되었으며, 그리하여 앵무새는 성모 마리아님을 상징하는 새가 되었다 한다. 그리고 성모는 앞서 말했듯, 구원자를 잉태함으로 선악과의 죄를 씻을 수 있게 된 '두 번째 이브'이다. 그 성모를 상징하는 앵무새는 이브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현장에 있음으로 인해, 마치 타락의 순간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이 앵무새는 이브의 뒤에 있는 뱀과는 대조를 이룬다. 각각은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게 될 성모와, 인류를 타락으로 이끌게 될 사탄을 상징한다.
자, 이제 무엇이 남았나. 앵무새 아래의 글자를 보아야겠지.
[Albert Dvrer Noricvs Faciebat 1504 : “Albert Dürer of Nuremberg made this in 1504” :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4년에 만들었다.]
Noricus는 뉘렌베르크 Nuremberg의 라틴어 이름이다. 명판에 보면 Albert 뒤에 9가 있는데, 이 9는 당시 접미사 us의 약자였다. 그리고 1504 앞에 A 아래에 D 가 있는 뒤러의 사인을 이중으로 넣은 것이다. 이 문장은 뒤러가 사용했던 특이한 서명으로, '뉘렌베르크의 뒤러'는 독일인으로서의 자신감을 드러내는데, 그 문장을 이탈리아에서 사용했던 라틴어로 표현함으로써, 이 서명 안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독일성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호의를 모두 담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뒤러는 이탈리아의 지중해가 아닌 독일의 울창한 숲을 표현했다 한다.
같은 해에 남유럽, 즉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가 공개한 '다비드상'이 올누드의 당당함을 뽐낸다. 뒤러는 그런 르네상스의 개방성에 심취하였으나, 아직 북유럽에서는 그런 인체의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노출하고 감상하는 문화가 받아들여지기 버거움을 알았다. 하여, 나체의 아름다움을 신화의 틀 속에 넣어 표현하였다. 즉, 그가 이 작품에서 진정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배워온 비르투비우스의 비례를 이용한, 인체비례의 이상적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예술이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훗날 『인체비례론』을 썼다.
뒤러는 판화가로 특히 유명했다. 판화와 회화의 차이점은 다량생산에 있다. 고전적으로 회화는 한 사람의 후견인/주문인에게 한 점의 작품이 배당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화작품은 고가일 수 밖에 없었고, 일반 대중이 접하거나 소장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판화를 사용하면 똑같은 작품을 빠른 시간에 얼마든 재생산할 수 있게 되기에, 그 결과 작품은 좀 더 착한 가격으로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공급 가능하게 된다. 이런 기술을 통해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북유럽 국가들에 널리 알릴 수 있었고 명성을 얻었다.
......
이건 뭐, 배보다 큰 배꼽이라니. ㅜㅠ; 내용이 너무 길어지는데, 뒤러의 <아담과 이브>는 따로 떼어서 포스팅할까 어쩔까 고민 중이다.
이렇게 된 김에, 아예 뒤에 나오는 뒤러의 작품을 먼저 실어 버리자.
색분필과 목탄으로 그린 이 초상은 드로잉 전문가로서 뒤러의 대가다운 솜씨를 잘 보여준다. 초상의 주인공은 시선을 반쯤 옆으로 향하고 있는데, 깊숙이 들어간 턱 보조개와 한 올 한 올 가는 머리카락까지 그의 용모를 매우 섬세한 피리체로 기록했다. 날카로운 눈매, 깊이 파인 이마, 세련된 용모가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정작 초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불확실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 오르간 연주자였던 파울 호프하이머, 네덜란드 화가 얀 프로보스트, 뉘른베르크의회 관계자였던 라자루스 슈펭글러, 상인 오스발트크렐 등 여러 의견이 있다. (p74)
도슨트께서 소개해주셨던 작품인데 어... 도록 설명에 뒤러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되어 있네. ;; 직접 보면 몹시 세밀하고 자세하게 그렸음을 볼 수 있다.
마티스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여성의 몸이었다. 그는 특히 누드 표현에 집착해 60여 년 동안 줄곧 다양한 회화 형식과 매체를 동원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파리에서 니스로 이사한 뒤인 1924년 제작한 것이다. 마티스는 이 즈음 태양이 쏟아지는 지중해변에서 나른한 자태를 취한 여인들의 누드 연작에 착수했으며, 동양 하레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이국적인 옷차림의 여인들(오달리스크)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 속 아름다운 여인은 마티스가 이 시기 그림, 조각, 그래픽 작업에서 가장 사랑했던 모델 앙리엣 다리카레르다. 마티스는 이작품에서 보듯, 그녀의 타고난 우아함과 어떠한 포즈도 마다않는 열정을 무엇보다 높이 샀다. (p55)
'앙리 마티스'란 이름과 매치를 시키기 어려웠다. 흔히 알려져 있는 그의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과는 달랐으니까. 하지만 그도 분명 드로잉을 많이 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드로잉이 아니라 석판이다. 바로 눈 앞에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도록 드로잉 같아 보였어서 놀랐던 작품이다.
미인은 에도시대 (1600-1868년) 일본 우키요에 작가들의 핵심 주제였다. 기타가와 우타마로(1806년 사망) 같은 판화의 대가들은 매우 세련되고, 때론 관능적인 이미지의 여인들을 다양한 배경 속에서 사실적으로, 혹은 이상화한 형태로 묘사했다. 이런 그림을 '비진가'라고 불렀다. 이런 우키요에 전통은 또 한 사람의 목판화 대가 하시구치 고요에 의해 20세기 초 다시 한 번 활기를 되찾는다. 그는 일생동안 단 열세 점의 작품만을 남겼는데, 우키요에의 최고봉 중 하나로 꼽힌다.
화장하는 젊은 여인을 농밀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한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을 기초로 1918년 4월, 작가가 직접 감독을 맡아 판화를 제작했다. 작품 속 여인은 브러시와 거울을 들고 드러난 어깨에 화장을 하고 있는데 게이샤임이 분명하다.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운모가루로 처리한 세련된 배경, 정치하게 묘사한 머리와 거울, 흘치기염색을 한 의상 등 전통기법과 재료를 다루는 거장의 솜씨가 돋보인다. (p56)
위의 설명 덕분에 '정치하다(정교하고 치밀하다)'라는 단어를 배웠네. 그리고 운모가루라든가 흘치기염색이란 단어도 처음 듣는다. 흘치기염색이란 '광목천에 무늬를 넣기 위해 끈으로 묶어서 염색하는 방법'이라는데? 음... 그 설명과 저 옷감의 무늬는 매치시키기 힘들지만, 무튼. 두 번 간 동안 이 작품 앞에선 시간을 별로 보내지 못했다ㅡ는 거의 모든 작품들 앞에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다음에 가게 되면 이 작품을 좀 감상해야겠다 싶다. 일본 미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나 클림트에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참 가까운 나라인데, 참...
위의 작품은 색감이 압도적으로 곱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동양미인들은 비슷비슷했나봐.
Curator's comments
재미니 로이는 인도 전통회화와 20세기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화가로 유명하다. 캘커타 국립 미술학교를 다닌 로이는 초기 시도했던 서구스타일의 화법을 버리고 고향 뱅골의 민속미술과 공에에 영감 받은 서정적인 작품에 몰두했다. 그는 특히칼리가트 그림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 그림은 전통적으로 캘커타 칼리가트 사원에서 순례자들에게 팔았던 인기 있는 민속화다.
단순한 디자인과 편평하고 고른 붓질, 절제된 색채 등 전성기 로이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서부 뱅갈의 여러 부족 중 하나인 산탈 공동체의 세 여인을 묘사했다.
과감하고 두터운 선, 트레이드마크인 아몬드 모양의 눈 등 그림 속 인물들은 특정 개인이라기보다 뱅갈인들의 영원한 여인상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p57)
사리의 강렬한 파랑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인도, 뱅골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작품이라니 신기하고.
교활, 그 이상의 리차드 경
Richard worse-than-sly, exposing his wifes bottom;- O fye!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옷을 벗고 욕탕에 들어가고 있다. 이 모습을 한 남자가 다른 남자 어깨를 탄 채 창문을 통해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수잔나와 노인들> 일화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1782년 세간에 물의를 빚었던 세이무어 도로시 워슬리 부인과 리차드 위슬리 경의 이혼소송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워슬리 사건(Worsley Affair)>으로, 리차드 경이 아내와 간통한 혐의로 햄프셔 민병대의 동료장교 조지 모리스 비셋을 고소한 사건이다. 워슬리 부인은 귀족 출신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리차드 경은 이 소송에서 자신이 두 사람의 정사에 공모한 사실이 밝혀진다. 리차드 경이 비셋을 부추겨 아내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워슬리 부인 또한 이 관음증적인 행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법정 증ㄴ이 나왔다.
이 노골적으롱 표현한 풍자화 속에서 워슬리 부인은 목욕수건으로 자신의 알몸을 수줍은 듯 가리는 척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을 즐기고 있다. 순수한 수잔나와 달리, 미모와 성적 매력으로 남편과 연인을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팥탄에 이르게 한 팜므 파탈로 묘사했다. (p58)
확실히 스토리가 있으면 상상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크지 않은 작품입니다. 글자를 읽으려면 가까이 가야 해요.
영국 아티스트 크리스 오필리는 좁게는 자신의 나이지리아 전통, 넓게는 아프리카계 카리브 해 문화와 아프리카계 미국 문화에 기초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작품들로 유명하다. 힙합과 재즈, '블랙스플로이테이션 (Blaxploitation, 흑인 히어로가 등장하는 상업영화 장르로 1970년 큰 인기를 모음), 신석기시대 아프리카 예술형식의 영향을 받은 그는 뛰어난 독창성과 유머를 갖춘 회화와 판화를 통해 인종과 젠더에 대한 통념에 줄기차게 도전해왔다. 이 작품에서는 점으로 표현한 종려나무 잎 무늬를 배경으로 생동하는 색채를 사용해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이미지는 그가 1990년대에 다양한 매체를 동원해 제작한, '아프리카 중심주의'를 표방한 여성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p59)
딱 보아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작품인데, 이것도 자세히 감상하지 못했다. 다시 가게 되면 좀 더 감상하기 위해 실었다.
Curator's comments
마크 퀸은 인체가 지닌 물성 자체는 물론, 인체의 변형 가능성을 예술의 핵심주제로 삼고 있다. 그의 과감하고 도전적인 인물 조각상을 보면, 인체의 완벽성과 비완벽성,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수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순금 조각상을 위한 습작으로, 2008년 대영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했던 것이다.
요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작품 속 케이트 모스는 현대인들이 우상으로 받드는 여신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작가는 이 인물상이 그녀를 이상화해 표현한 것일 뿐, 실제 모습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작품은 케이트 모스 개인의 조각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케이트 모스에 대한 집단 환각, 문화적으로 규정된 환각을 표현한 조각일 뿐이다." (p60)
현대의 아프로디테라 여겨진다 하는 케이트 모스. 팬도 많고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곡도 있고 등등,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수퍼모델인데 글쎄, 내게는 별로 친숙하지 않아서.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기네스 펠트로와 닮은 모습인데, 그렇게 보자면 우아한 여신 스타일이라 하겠다. 근데 내 눈엔 기네스 펠트로가 나아서. 이 작품은 설명에 있듯 마크 퀸의 황금조각상 '사이렌'을 위한 드로잉이다.
(↑ 전시에 없음)
이것이 바로 그 조각상이고. 물론 저 드로잉보다 이 조각상이 왔더라면 아주 황홀했겠죠.
여신으로 여겨질 만큼 이상적인 여성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흔히들 상상할 수 있는 포즈는 확실히 아니다. 그녀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우아함이 저런 기이한 포즈로 표현된 것이 처음엔 낯설고 당혹스러웠는데, 또 가만히 보니 묘한 쾌감이 느껴진달까. 그녀의 아름다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불편해 보이는 포즈 속 기하학적 도형의 아름다움이 느껴져 즐거웠다. 분명 저 포즈가 만들어내는 선은 독특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맞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신기하지 뭔가. 소재인 여성도 아름답고 저 포즈의 형상도 아름다운 것인데, 어째서 나는 처음에 '기괴하다',' 이상하다'라 느꼈던 걸까. 그만큼 학습된 편견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여신이 취하는 전형적인 포즈'라는 것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어서,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이지. 덕분에 내 작은 틀 하나를 소심하게 벗어나는 기회가 되었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각상 '사이렌'을 직접 보고싶어졌다.
Curator's comments : On the basis of inscriptional as well as stylistic evidence, this statue has been identified as one of the earliest three-dimensional images of Senenmut. Senenmut appears alone, in the squatting position indissolubly linked with what is known to Egyptologists as the "block" statue; it is the only block statue of Senenmut in which he is not accompanied by the King's Daughter, Neferura, his royal charge.
The God's Wife title was favoured by Hatshepsut during the period immediately preceding the inception of the co-regency. Its appearance here, therefore, indicates that this statue was set up before Hatshepsut assumed the kingship.
한 남자가 무릎을 세운 채 웅크리고 앉아 있다. 무릎엔 옷이 감겨있다. 이런 자세는 이른바 '방형 인물상'의 전형적인 형태다. 좌대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통해 이 남자는 센넨무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집트 신왕국 시대 (기원전 1550-1070년)에 활동했던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이다. 비교적 신분이 낮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여성 파라오 하셉수트(기원전 1491-1479년 재위) 통치기간 중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하셉수트는 그를 매우 신임해 여러 직책에 중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태양신 아문을 모시는 집사 역이었다.
이 센넨무트 상은 이집트의 다른 인물상들과 마찬가지로 생전 모습을 충실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매우 표준화된 모습이다. 이집트인들은 인물에 주인공의 영혼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물상은 그 주인공이 무덤 속이나 신전에서 를 추모해 열리는 각종 제례에 참여하고 공물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방형 인물상은 말 그대로 직육면체 모양의 조각상을 가리키는데, 주로 왕 이외의 중요 인물에 적용했던 양식이다. 방형 인물상은 이집트 중왕조시대(기원전 2000년 경)에 처음 나타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기원전 200년 이후)까지 유행했다. (p65)
이 유물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내 관심을 많이 끌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형문자가 가장 많거든. 이 유물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설명을 더할 예정이다.
위의 인물상에 대한 추가설명과 내용 해석 : http://vanodif.tistory.com/850 → 클릭
아다운 젊은 여인이 정면을 바라봅고 있다. 머리는 살짝 돌려 얼굴의 4분의 3 만큼을 드러냈다. 갸름한 얼굴에 큼지막한 갈색 문, 도톰한 입술이 관능적이다. 왼쪽 어깨에 줄무늬 흔적이 남아있는 하얀 튜닉을 입었다. 핑크빛과 크림색 감도는 윤기 있는 피부가 화려한 황금 장신구, 우아하게 땋은 머리와 조화를 이룬다.
'미라 초상'으로 알려진 이런 그림은 그리스 로마와 이집트의 전통이 융합한 것이다. 미술 양식이나 테크닉은 로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미라를 장식하는 장례 초상으로서의 기능은 순전히 이집트적인 것이다.
이처럼 실물에 충실한 초상화는 1세기 중반에 시각돼 이후 200년가량 지속되었는데, 고대 고전주의 작품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최고의 작품 중 하나다. 당시 이런 그림들은 그리스 출신 이집트 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약간 변형을 가하기도 했지만 실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p67)
이 작품을 포스팅하는 것으로 왜 속죄하는 느낌이 들지. -_- 세넨무트 조각 바로 옆에 있는 유물인데, 이집트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심을 갖지 못했어서. 읽어보니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올려야 할 유물이 너무 많아서... 어지간한 건 그냥 뛰어 넘으려 한다.
작성하는데 스압이 너무 심해서... 별 것도 없는 이 후기를 ;; 나누어서 작성해야겠다. 1부는 여기서 마칩니다.
대영박물관전 - 영원한 인간 @ 예술의 전당 ② → 클릭
대영박물관전 - 영원한 인간 @ 예술의 전당 ③ →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