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 http://www.sac.or.kr
대영박물관 홈페이지 : http://www.britishmuseum.org/
대영박물관전 - 영원한 인간 @ 예술의 전당 ① → 클릭
대영박물관전 - 영원한 인간 @ 예술의 전당 ③ → 클릭
유학자의 초상
Portrait of a Confucian Scholar
말총으로 만든 갓과 흰 깃 달린 푸르스름한 의복으로 볼 때 초상화의 주인공은 엘리트층인 양반이 틀림없다. 이런 스타일의 갓과 의복은 조선시대(1392-1910) 유학자나 관리들이 착용했던 것이다. 갓 안으로 상투 앞에 풍잠이라 부르는 반원형 장식이 보이는데,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초상의 주인공이 특권층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풍잠은 갓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주로 마노나 거북 등껍질, 호박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었다. 얼굴의 미묘한 음영과 정치한 묘사가 의복의 길고 부드러운 선과 대비된다. 서구에서 수입한 화법을 차용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화법의 변화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시작됐다. 조선의 관료와 예술가들은 청나라에 사절로 파견돼 머무는 동안 베이징에서 제수이트 선교사들과 접촉해 서구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였다. 이 작품과 달리, 조선시대 초기 초상화는 실제 인물을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인물의 정신적 이상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그림 속 인물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작가 미상의 초상화 속 인물이 비슷한 것으로 볼 때 이 수염을 기른 인물은 강이오로 추정된다. 그는 저명한 학자이자 화가였던 강세황의 손자다. 그림을 그린 이는 이재관으로 보인다. (p78)
<대영박물관전>에서 우리나라 작품을 보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접때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였던가, 어떤 전시에서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왔을 땐 그저 반갑기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김화백의 작품을 돈을 주고 구입했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영박물관에서도 이 작품을 합당한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일까? 그랬다면 반가운 일이겠지만, 만일 다른 여타 이집트 등의 유물과 마찬가지로 그냥 가져간 것이라면... 그러면서 그 작품을 우리나라에 전시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돈을 받는 것이라면... 하면서 마음이 잠시 심란했었다.
그렇게 말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우리나라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싶다. 저 작품과 나의 연관성은 그저 '같은 나라'일 뿐이 아닌가. 내가 고흐나 클림트의 작품을 알듯이 저 작품이나 우리나라 작품을 아는 것도 아니고, 또 그만큼 좋아하고 감상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작품에도, 한국미술에도, 우리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그닥 관심 없는 주제에, '우리나라'라는 단어 하나로 알량한 소유욕에 억울함을 느끼는 나자신이 문득 한심하단 생각이 든다. 그런 소유욕을 느낀다면 한국미술에 관심이나 갖던가. 생각이 많아지는 <대영박물관전>이다.
참 눈에 익은 선이고, 인물이고, 표정이다. 그런데 작품 앞에 서니 뭔가 울림이 있더라. 단 한 점 온 우리나라 작품이어서였을까? 가늘고 미려한 선은 자로 대고 펜으로 그렸다 해도 믿겠을 정도로 깔끔했고, 작품 속 인물의 깐깐해 보이는 인상.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다정함이 느껴지던 표정을 보며, 안동 어디 즈음에 가면 볼 수 있을 어르신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막상 난 안동에 가본 적은 없...;; 외가가 안동 김씨인데, 아직도 안동 종갓집에 가면 유교적 예절?이 남아있다고 엄마께서 말씀하곤 하신다. 밤 12시에 80대 어르신께서 약주 하시고 귀가하시면, 잠들어 있던 60대 아드님이 벌떡 일어나서는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밖에 나와 '아버님. 다녀오셨습니까' 고개 숙여 인사하신다면서. 그런 집안의 어르신일 것 같다.
화가와 모델의 관계는 피카소가 50년 넘게 회화와 그래픽아트 등을 통해 꾸준히 추구했던 중요한 테마였다. 비록 형태는 다양했지만 피카소는 스튜디오를 자신의 이상대로 꾸며놓고 그 안이세 자신의 뮤즈를 바라보는 아티스트이자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작품 활동 말기에 이르러 이 테마로 다시 돌아갔는데, 특히 판화 작업에 집중했다. 이 아쿼틴트 동판화는 1963년 11월 프랑스 남부 칸 근처 무쟁의 자택에서 저명한 판화 제작자 크롬랑크 형제와 공동제작한 것이다. 이 판화에서 화가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한 청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이 청년의 옆얼굴이 화면 왼쪽끝에 보인다. 이 작업 장면을 나신의 여인이 왕좌에 앉은 여신을 연상시키는 포즈로 바라보고 있다. 화가와 모델의 관계라는 모티프는 창조의 과정을 보여주는 은유이자 성적 욕망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됐는데, 피카소는 19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모티프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p82)
누구나 한 눈에 알아 본다는 피카소의 작품. 도록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란 눈의 자화상, 1962-1973
Self-Portrait with Yellow Eyes, 1962-1973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꽃피었던 전위적 미술운동인 '아르테 포베라' (가난한 미술)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이 운동그룹의 기본 이념에 따라 조각과 초상, 설치-행위 미술 등을 통해 전통미술의 관습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피스톨레토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거울 그림'이다.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스테인리스스틸 윙 어떤 이미지, 주로 사람의 이미지를 표현한 연작인데, 1962년부터 시작해 지금도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화려한 모피 모자와 코트, 노란 테의 선글라스, 멋진 수염 등 패션에 민감한 유명 아티스트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이미지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형식과 스타일 면에서 르네상스의 바로크 시대 초상화 기법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작가는 거울이 관람자를 예술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표현수단'이라고 말한다.(p84)
음... 전시장에서는 재미난 작품으로 여겼었는데, 이렇게 설명을 다시 읽어보니 아르테 포베라 작가였구나. 아르테 포베라 Arte Povera는 '가난한 미술'이란 뜻으로,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적 미술운동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잘것 없는 재료(나뭇가지, 바위, 시멘트 등)를 통해 물질의 본성을 탐구하고 물질이 가지는 자연 그대로의 특성을 예술로 옮겨 담음으로써, 삶과 예술, 자연과 문명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선 '거울'이려나.
이 작품은 사진보다 실물로 보는 것이 훨씬 나은데, 난 이런 작품이 재밌더라. 소설에서 오픈엔딩으로 결말을 독자에게 상상하게 함으로써 독자를 작품의 완성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처럼, 거울에 감상자의 모습이 비쳐 보이게 함으로써 관람자를 예술작업에 적극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신났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작가의 사진 옆의 거울부분에 관람자인 내 모습이 비치는데, 내가 웃고 있으면 저 작가는 나와의 연인, 혹은 호의적인 관계를 묘사한 것이 되고, 내가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노려본다면 저 작가는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처럼 표정 없는 노란 작가의 모습을 해석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 관람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것은 예술을 좋아하지만 예술활동을 할 만한 재능이 안 되는 나같은 관람자에겐 더없이 친절한 작품이 되는 것이지. 작가가 그것을 의도했으니 반갑고 고마운 작품인 거다. 관람자에게 '소통'을 제안하는 이런 작품이라니. 하하. 아마 관람객이 나 혼자였더라면 이 작품 앞에서 웃어도 보고 찡그려도 보고 포즈도 취해보고 우스운 짓거리를 했을 듯.
마르타 / 지문
Martha / Fingerprint
미국 화가 척 클로스는 사람의 얼굴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 대형 초사오하로 유명하다. 주로 친구와 가족, 동료작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작업했다. 매우 실험적인 기법과 표현 매체, 스타일을 다양하게 시도했지만, 정면을 향한 얼굴과 머리, 어깨로 이루어진 이미지 구성방식은 모두 동일하다. 판화는 그가 오랫동안 애용해 온 표현 매체인데, 이 작품을 포함해 대부분이 사진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잉크 묻은 지문을 수없이 찍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이런 기법으로 아주 미묘한 색조의 변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극도의 사실적인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가가 찍은 지문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환영은 사라진다. 클로스는 이런 방식으로 리얼리즘과 추상주의, 지각과 진실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플로리다 탐파에있는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판화 전문가 델리 사실로토와 함께 작업한 것이다. 먼저 얇고 투명한 플라스틱 판지에 그림을 그린 뒤, 이 이미지를 사진작업을 통해 동판으로 옮겨 판화로 만들었다. (p85)
아주 큰 작품이다. 사이즈가 큰 작품은 감상에의 몰입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작품 앞에 서면, 수많은 지문들이 회오리치며 만들어낸 형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익숙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든다.
와해
Unravelling
이란의 여류작가 사미라 압바시의 작품은 개인사의 심연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문화적 박탈감과 자기 정체성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란 남서부 아와즈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에서 자라고 공부했으며, 1998년 뉴욕으로 이주해 미술 활동을 시작했다. 압바시는 자화상에 관심을 갖게된 동기에 대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환경에서 나 자신을 점검하고 규정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했다.
이 드로잉은 '케미칼 히스테리칼'이란 제목의 연작에 속한 것으로, 압바시 자신의 또 다른 모습, 혹은 '원형'을 상징하는 한 인물을 묘사했다. 자신의 실제모습을 객관적으로 기롷가힉 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정신적, 영적 상태'를 구현하기 위한 환상적인 존재를 보여준다.
주인공이 입은 드레스에 붓글씨체의 아랍어 텍스트가 장식돼 있는데, 아랍어권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이집트 가수 움 쿨툼의 노래와 음악에 관한 내용이다. (p86)
이 작품을 보자마자 프리다 칼로가 떠올랐다.
↑ 이번 전시에 없음
이런 작품이라거나. 뭐지. 화가의 자의식과잉이라거나, 하는 구절.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것 또한 비슷하고. 특히 얼굴의 눈이 겹친 부분이 몹시 몽환스러웠다.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좀 더 보고 싶었던 부분이었고. 그리고 의상에 적힌 아랍어는, 하나의 문양이라 하더라도 근사하도록 참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승리
The Triumph of Christ
Titan
1510-11
47x271cm
16세기 초 유럽에는 판화 제작 붐이 크게 일었다. 영향력 있는 예술가들이 전통적인 방법, 혹은 발전한 기술을 적용해 판화가 가진 잠재력을 적극 활용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혁신은 대형 목판의 도입니다. 여러 장의 종이에 인쇄를 한 다음 하나로 모아 붙여 큰 그림을 완성했다. 주로 종교 관련 주제나 일상의 테마를 묘사한 대형 이미지들을 사용했는데, 집안의 벽을 장식하거나 특별한 축제 혹은 행사를 위해 제작을 의뢰하곤 했다.
거의 벽화 크기만 한 인상적인 목판화들 중에는 베네치아 출신 화가 티치아노의 공방에서 제작한 것들이 많앗다. 이 대형 프리즈(띠 모양의 장식)는 티치아노 자신이 직접 감독하고 지휘해 만든 야심찬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이스라엘의 조상과 예언자, 사도, 성자, 기독교 교역자들이 그리스도를 받들고 승리의 행진을 하고 있는 광경이다. 승리의 지도자로 묘사된 그리스도는, 복음서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날개 달린 짐승들이 끄는 마차에 올라 둥근 물체 위에 앉아있다. 그리고 신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앞에서 행렬을 이끌고 있다.
고전에서 영감을 받은 이 행렬 장면은 르네상스 시대에 매우 인기 있는 주제였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만테냐의 <시저의 승리>다. 1485년과 1506년 사이에 그려진 이 작품은 현재 런던 힘튼코트 궁전에 소장돼 있다. (p94)
부분확대 모습이다. 왼쪽에 마차의 둥근 물체 위에 그리스도가 앉아 있고, 앞에 네 마리 날개달린 짐승들로 표현된 네 명이 사도가 보인다.
비슈누의 입상
Standing figure of Vishnu
Bengal, India
Pala dynasty, 12th century AD
Grey chlorite
164x78cm
비슈누는 오늘날 인도대륙을 지배하는 힌두교의 위대한 세 신 중 하나다. 전설에 따르면, 신은 인간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아홉 차례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신의 열 번째 현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호신 비슈누는 네 개의 팔을 가졌는데, 손에 각각의 상징을 들고 있다. 이 조각상은 '가다'(곤봉)와 '차크라'(원반 혹은 차륜)를 들었는데, 악을물리치는 무기를 상징한다. 나머지 두 손에는 연꽃과 고둥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우아한 옷차림과 화려한 장신구를 갖춘 비슈누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고, 양 옆에 대지와 행운을 뜻하는 부와 슈리두 여신을 거느리고 있다. 보석으로 장식한 높은 왕관은 비슈누의 고귀한 신분과 우주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런 형태의 조각상은 신전에 두고 참배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인데, 신전 외벽의 벽감 속에 있었을 것이다. (p96)
힌두교의 신화 이야기를 자세히 공부한 적은 없어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힌두교에는 3주신이 있다. 브라마, 비슈누, 시바인데, 브라마는 창조신으로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다고 한다. 비슈누는 세계를 유지시키고 보호하는 신이고,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이 세 신 중 브라마는 거의 추종자가 없고, 주로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위의 도록 설명을 보면, 보호의 신인 비슈누가 인간을 위해 아홉 번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하는데, 그 중 한 번은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다.
마누라고 하는 신성한 사람이 강에서 씻고 있었는데, 작은 물고기 하나가 다가와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삼키려 하니 도와달라'고 한다. 마누는 작은 물고기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어항에서 키운다. 물고기가 자라나면서 몸이 커지자 강물에 풀어주는데, 물고기가 '곧 대홍수가 나니 튼튼한 배를 준비하라'고 경고한다. 마누는 배를 준비했고, 대홍수가 났고, 마트스야, 혹은 마츠야라 하는 그 물고기가 다가와 배의 끈을 끌고 헤엄쳐가서는, 홍수가 끝날 때까지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 안전하게 배를 묶어 두었다 한다. 그 물고기가 바로 비슈누의 첫번째 현현이었다고. 그 외에도 크리슈나라는 신으로 나타났으며, 또한 붓다 역시 이 비슈누의 아홉 번째 모습이었다 한다. 비슈누는 검푸른 피부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미소년으로, 태양의 새라고 묘사되는 가루다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ㅡ는 대략적인 이야기다. 자세히 들어가면 다양한 버전이 있는 듯.
윗입상의 12세기 팔라왕조 작품인데, 양식화된 아치형 눈썹으로 하트 모양으로 표현된 얼굴, 길게 찢어지고 끝이 살짝 올라간 눈, 넓은 코, 입술을 오므린 미소가 그 특징이라 한다.
위의 마누와 비슈누 이야기를 보면, 어느 신화에서나 대홍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것 같다. 대홍수와 빙하기에 대해 검색을 하고 있는데, 명쾌한 자료를 구하지 못하고 있네.
힌두교의 신 파르바티는 '산의 딸'을 의미하는데, 강력한 시바 신의 배우자이자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사 신의 어머니다. 위대한 여신 데비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며, 여성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자비로운 신으로서 음식과 생명, 즉 풍요의 여신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파르바티 신의 특징은 뾰족한 계단 모양의 관이다. '세 굽이(triple-bend)'의 출렁이는 자세로 서있는 파르바티의 왼팔이 몸의 굴곡을 따라 곡선을 그리고 있다. 오른손은 이른바 '카타카 하스타' 자세인데, 보통 꽃봉오리나 활짝 핀 꽃을 쥐고 있다. 허리에 속이 비치는 천을 두르고, 보석으로 장식된 허리띠에는 팬던트 장식 때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남부 인도의 힌두교 신전에 있던 이 동상은 겅배와 헌신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주물 동상은 흔히 신전 축제 때 남자 신도들이 1인승 가마에 태워 신도들 앞을 행진하곤 했다. (p99)
그리스의 종교에 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 소스 중 하나가 도자기다. 신화 속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다양하게 장식돼 있기 때문이다. 이 정교한 암포라(술항아리)에는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수호여신 아테나와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새겨졌다. 헤라클레스는 12가지 과업 중 첫번째를 달성하면서 포획한, 자신의 상징이 된 사자 가죽 옷을 입었으며, 몽둥이와 활, 칼을 지녔다. 아테나는 높은 투구와 창, 방패로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방패가 그의 '이지스'(염소가죽 옷깃)를 가려 보호하고 있다. 항아리 뒷면에는 앞면과 무관한 장면을 묘사했는데,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그의 아내 아리아드네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테 미노스 왕의 딸이다. 디오니소스가 영원히 비지 않는 술잔 '칸타로스'를 아내를 향해 내밀고 있다. 그의 상징인 포도와 포도나무 가지, 담쟁이 넝쿨 화환이 보인다. 두 장면의 인물 양편에는 이오니아식 원주가 보이는데 꼭대기에 수탉이 앉았다.
이 암포라의 그림은 '검은 인물 양식'(black-figure style)에 정통했던 안티메네스 화가집단의 한 대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p102)
음...
우선 고대 그리스 도자기 종류부터 알아보자.
종류가 많은데, 대략 세 가지를 주목하면 된다. 암포라, 크라테르, 퀼릭스.
↑ 이번 전시에 없음
원래 암포라Amphora는 이런 모습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었던 와인이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와인 저장/발효와 수송을 위해 사용했던 항아리인데, 보다시피 두 개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끝이 뾰족하다. 이전에 읽었던 기억으로는 끝이 뾰족해서 저 아래로 와인찌꺼기가 모인다고 했더랬는데, 다시 검색했을 땐 그런 말을 읽을 수가 없네. 무튼, 끝이 뾰족해서 굴려서 옮기기에 편리했으나 세울 수가 없기에 모래나 저런 틀에 꽂아 보관했다. 이집트에서 와인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 마실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리스로 넘어가면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된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와인이란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었다. 그리스는 물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소독을 위해 와인을 타서 마셨다. 하여, 1:8에서 1:1에 이르기까지 와인과 물을 섞어 희석해 마셨다. 당시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였으며, 술취한 여성이나 하인은 끈을 매어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여 수치를 당하게 했을 정도로, 술을 희석하지 않고 마시는 것은 야만행위인 것으로 여겼다. 우리가 상상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아마 이렇게 물에 와인을 희석하여 밤새 마시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 이번 전시에 없음
그러다 보니 그 와인을 물과 희석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르 그때 사용했던 그릇이 위의 크라테르Krater다. 위의 크라테르는 red figure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대회를 준비하는 선수들을 묘사한 것이다.
↑ 이번 전시에 없음
그리곤 위의 도기가 크라테르에서 희석시킨 와인을 떠서 마시는 퀼릭스Kylix 이다. 그리스어 κύλιξ / Kylix에서 라틴어 Calix로, 그리고 영어 Chalice(성배)가 되었다. 위의 그림은 black figure 기법으로 만들어진 디오니소스 이야기다. 뱃사람들이 디오니소스를 노예로 팔아먹으려 하자, 디오니소스가 뱃사람들을 돌고래로 변신시켜버린 이야기다.
이제 그리스 도기의 그림 기법을 이야기해보자. 그 또한 말하자면 여러가지겠으나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우선 위에 실린 <헤라클레스와 아테나가 있는 암포라>에 쓰인 Black figure pottery가 있다. 가장 오래된 기법으로, 유약(glaze)으로 도자기를 굽기 전에 그림을 그리면, 그 부분이 검게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섬세한 표현은 가능하지만 겹쳐진 모습은 표현이 곤란하다는 약점이 있다고.
그 다음이 저 위의 크라테르에서 사용된 Red figure pottery인데, 이는 반대로 배경에 유약을 바르고, 인물은 붉은색 등 다른 색으로 표현하여 좀 더 섬세하고 입체감 있는 표현이 가능했다 한다.
그리고는 White ground technique 이 있는데, 하얀 배경에 다양한 색을 그림을 그린 것이다.
↑ 이번 전시에 없음
위의 것은 BC 440년 경에 제작된 레퀴토스 λήκυθος Lekythos로, 사르페돈을 데리고 가는 히프노스와 타나토스의 모습을 white ground technique으로 그린 것이다. 아... -_-; 레퀴토스는 죽은 청년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사용했던 손잡이 하나가 달린 항아리로, 주로 무덤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사르페돈은 제우스의 아들로, 트로이전쟁 때 트로이군으로 싸우다 그리스군 파트로클로스의 손에 죽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 제우스가 쌍둥이신인 잠의 신 히프노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로 하여금 사르페돈의 시체를 옮겨다가, 고향 리키아에 매장하게 했는데, 위 항아리 그림은 그 내용입니다. 이 white ground technique은 가장 화려하지만, 템페라를 재료로 사용했기에 보존이 어려워 제대로 남아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고 한다. 아, 템페라... 글이 자꾸 삼천포로 길어지고 있... -_ㅜ
템페라tempera 기법은 수요수업 선생님께 배운 것인데, 다 빈치가 주로 사용했던 기법으로, 당시 미켈란젤로 등이 널리 사용했던 프레스코화는 물감이 너무 빨리 마르기 때문에 단번에 휘릭휘릭 그려야 했으며, 비교적 보존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다빈치는 계란노른자를 섞어서 사용하는 템페라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그 기법을 사용하면 물감이 빨리 마르지 않아 오랜시간 섬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반면, 곰팡이가 피고 물감이 쉬이 벗겨셔서 보존이 너무나 힘들다 한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보존상태가 그렇게 엉망인 것도 다 그 템페라기법으로 그렸기 떄문이라고. 이제 더는 삼천포가 없겠... 지...?;;
헉헉헉 드디어 돌아온 우리의 주인공 <헤라클레스와 아테나가 있는 암포라>를 보면... 보면... 다시 실을까?;;
자, 블랙 피겨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 암포라에는 헤라클레스와 아테나가 등장한다. 헤라클레스는 열두 고역 중 첫번째였던 사자사냥에서 잡은 사자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 허리에는 활집을 차고 있고, 왼손에는 화살, 오른손에는 곤봉을 들고 있다.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답게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으며, 제우스로부터 받은 방패 아이기스 Aegis와 창을 들고 서있다. 아이기스에 메두사의 머리가 달려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페르세우스 사건 이전인 모양이다. 화면의 위에는 인동덩굴 문양이 있고, 두 사람의 바깥쪽에는 수탉이 앉아있는 기둥 두 개가 있다.
자, 이 기둥 두 개를 자세히 봅시다. 바로 위의 그림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면 스크롤업하여 위의 조금 더 큰 그림을 보는 겁니다. 그래도 안 보인다면? 어쩔 수가 없. =_= 전시회 가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세요. 두 개의 기둥이 다르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왼쪽은 도리스식, 오른쪽은 이오니아식. 그림으로 보여드리죠.
왼쪽이 도리스, 중앙이 이오니아, 오른쪽이 코린트식 기둥이다. 도리스식의 단순한 모양과 이오니아식의 양머리 기둥머리가 보이는가? 왜 두 개를 다르게 묘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지. 음. 도록의 내용 중 아테나의 외양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방패가 그의 '이지스'(염소가죽 옷깃)를 가려 보호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부분 설명해주실 분? +_+; 이 부분이 왜 이상하냐 하면, 아테나의 방패 이름이 아이기스 The Aegis, 즉 '이지스'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기스는 제우스를 길렀던 암염소의 가죽을 가지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것으로, 제우스가 딸인 아테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즉 방패가 이지스이고, 이지스가 염소가죽으로 만든 것인데, '방패가 이지스를 가려 보호하다'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아시는 분, 댓글 부탁합니다.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나, 헉헉.
이 그림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저 사슴이다. 사슴. hind. 암사슴. 사슴이라고.
헤라클레스의 열두 고역 중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애완동물인 사슴을 잡는 것이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그 사슴이 아르테미스의 동물인 줄 모르고 끝까지 쫓아가 잡았는데, 아르테미스가 격노했지.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몰랐다고 사정을 이야기했고, 아르테미스는 화를 풀었다ㅡ는 일화가 있다. 그것 외에 사슴이 등장하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왜 아르테미스가 아니라 아테나가 있는 거지? 굳이 해석해보자면... 아테나는 영웅들의 수호신이었고, 특히 헤라클레스를 보호하던 신이었다. 버려진 헤라클레스를 헤라에게 주어 젖을 먹이게 한 이도 아테나였고. 그래서 아테나를 등장시켰나? 그림에 보면 사슴은 헤라클레스를 올려다보고 있고, 헤라클레스와 아테나 둘 다 사슴을 쳐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사슴이 이 서사의 중심인물... 아니 동물이란 뜻인데. 모르겠다. 헤라클레스, 아테나, 사슴으로 떠오르거나 검색되는 다른 사건을 못 찾겠어. ㅜㅠ
드디어 뒷면으로 넘어가 볼까나. 전시장에선 뒷면에 거울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양쪽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이 서있고(응...? 양쪽 다 이오니아식이야?), 왼쪽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키톤과 히마티온을 입고, 머리엔 담쟁이관을 쓰고, 오른손엔 포도열매가 있는 포도나무가지를 들고서, 왼손의 칸타로스 Kantharos κάνθαρος 를 아내인 아리아드네에게 건네고 있다. 아 또 칸타로스는요...;;
↑ 이번 전시에 없음
이렇게 생긴 잔으로, 음료수 마실 때나 제의에서 와인을 담기 위해 사용한 잔이라 한다.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진 잔으로, 이교도의 컬트신앙에선 부활과 영생을 상징했다고? 잔 하나에 뭔... 다시 올라가서, 아리아드네는 미노스 왕의 딸로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제물로 들어갔던 테세우스 왕자에게 미궁을 나오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실타래를 주었던 '아리아드네의 실'의 바로 그 아리아드네가 맞다. 미궁에서 나오도록 도와줬더니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낙소스 섬에 두고 도망가 버렸고, 비탄에 잠겨 죽으려던 아리아드네를 디오니소스가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 어떤 버전에선 디오니소스가 테세우스에게 아리아드네를 떠나라! 고 요구했다 하기도 하고. 무튼, 이 암포라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그만.
이 멋진 두상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비중 있는 신 가운데 하나인 아폴로의 전신 석상에서 나온 것이다. 출렁이는 긴 머리, 뚜렷한 윤곽의 얼굴, 영웅다운 표정에서 그리스 후기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세련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벨베데레 아폴로>로 알려진 저 유명한 조각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벨베데레 아폴로>는 기원전 350-320년 그리스의 유명 조각가 레오카레스가 만든 청동조각을 본떠 로마시대에 제작한 것이다.
아폴로는 예언과 궁도, 음악, 태양의 신이다. 델로스 섬에서 처녀 사냥꾼 아르테미스와 쌍둥이로 태어났다. 델로스는 이 두 신의 탄생지로 신성시되는 섬이다. 아폴로는 인구에 회자되는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뱀 피톤을 죽인 것이다. 피톤은 고대 델피 신탁의 수호자다. 미술작품에서 아폴로는 주로 턱수염이 없고, 헝클어진 머리, 눈부신 외모의 청년으로 묘사된다. 때때로 활과 화살, 혹은 리라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p105)
따로 더 붙일 말은 없고.
↑ 이번 전시에 없음
Apollo Belvedere
Artist | after Leochares |
---|---|
Year | Circa 120–140; copy of bronze original of ca. 350–325 BC. |
Type | White marble |
Dimensions | 224 cm (88 in) |
Location | Vatican Museums, Vatican City |
도록 설명에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 콘트라포스토로 유명하다 하는 이 작품은 선이 깔끔하고 매끈매끈 아름답다. 그런데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얼굴 모양 자체는 이 아폴로 두상이 벨베데레 아폴로보다 더 내 개인 취향이네. 우수에 잠긴 듯한 눈매가 참 매력적이다.
위의 아폴로상 근처에 쌍둥이 여동생인 아르테미스 여신상(으로 추정된다고 함)이 함께 놓여있는데, 대영박물관 홈피에서도 다른데서도 사진을 구할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