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rformance

[연극] 메피스토 (영상회) @ 예술의 전당

by Vanodif 2015. 10. 3.



















예당은 정말 너무 좋다. 몇 달 전, 예당기획공연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연극 <메피스토>였다. 

무엇 때문에 못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튼 아쉬웠던.

최근엔 연극은 거의 보지 않으니까.

거의 전시회나 발레, 무용 쪽으로. 연주회도 별로 가지 않고 있고.

아마 발레 보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일 게다.


그러다 폰으로 띠링* 하고 예당에서 소식이 왔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문자가 오긴 하는데 그 문자 보고 갈 때도 있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주로 검색을 통해 가는 편이어서는.

그런데 문자로 '공연 영상회 초대' 소식이 떴다.

회원 대상 초대였다. 그리고 그 '회원'에는 인터넷 무료회원도 포함되는 듯.


글쎄, 무료회원도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내것을 포함하여 네 장의 초대권을 신청할 수 있다.

그동안 유료회원 대상인데다 특히 골드회원 대상 초대권 소식을 들은 적 있는데 

시간이 되지 않아 죄다 놓쳤더랬다, 그런데.


토요일 낮 3시에는 국립발레단의 <지젤> 상영회가 있었다.

실제로 예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었던 발레 <지젤>을 영상으로 찍어 상영해 주는 것인데,

<지젤>은 나도, 마녀도 보았던 작품이기 때문에 이 <메피스토>를 선택하기로.

이 또한 예당에서 했던 연극 <메피스토>를 영상으로 상영해 주는 것인데

0원, 이라 적혀 있듯 무료다ㅡ는 심지어 주차할인까지 받는다며.


예매를 하고서 예당으로 가는 길에 걱정이 앞섰다.

<메피스토>라 함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의미하는 것일 텐데,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나오는 공간들의 이동을 그 제한된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결코 과하지 않은, 제작자의 짧은 소개말이 있은 후 영상이 시작되고

우선 아래에 있는 세세한 자막을 주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감상에 방해된다, 싶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던.

모든 대사와 노래 가사 뿐 아니라(이 연극에는 노래가 꽤 등장한다.

하지만 '뮤지컬'이라 하기엔 좀 아쉬운 것이, 노래가 나와야 할 부분에서만 노래가 배경으로 나오지,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진 않기 때문이다), 배경 소리까지 상세하게 자막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음산한 음악소리♪'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어쩌면 이 상영회는 청각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했다.

원래 들을 수 있었지만 청각을 상실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그 자막을 보며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와 음향효과들을 상상하며 빠져들 수 있겠다, 싶었지.

그런 것도 참 좋았고.


파우스트 역을 맡으신 정동환 님은 티비에서 익히 보아 온 연기자시라 낯설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그 살인대사를 어떻게 그렇게 다 암기하시는지.

그 뿐 아니라 연기까지 근사하지 않은가.

티비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배우시구나' 싶었던.

파우스트의 고뇌와 욕망과 후회, 그리고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감정을 노련하고도 섬세하게 연기하셨다.

배역에 완전히 흡수되셨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그레첸 역을 맡으신 이진희 님은 영롱한 목소리로 신앙심 깊은 순수한 처녀의 연기를 잘 하셨고.

아무래도 제목이 <메피스토>이다 보니, 그레첸 배역에까지 한정된 시간을 풍부하게 배분할 수는 없었을 텐데,

아마 파멸의 과정을 그러첸의 시각으로 더 집중해서 그렸더라면

썩 훌륭한 연기를 해내셨을 것 같다.

파우스트나 메피스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배역이었음에도 '잘 하셨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리고 메피스토 역을 맡으신 전미도 님. 아...*

조그만 체구에서 무슨 카리스마가 그렇게나...

근사하고 멋진 연기에 반해 버렸다. 노래도 물론 잘 하시고.

엔딩 크레딧에서 나오던 인터뷰를 보니, 화장 지운 얼굴은 어리고 순하고 착하게만 보이시던데

극중에서는 어쩌면 그렇게 강렬한 성격 연기를 감쪽같이 하셨는지는.

제목이 <메피스토>이듯, 이 메피스토 배역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연극이었는데,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과정에서 그의 비위를 맞추고, 얼르고 달래다 화를 내고 무시하고 하는

그 다채로운 역할을, 매끈매끈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소화하셨다.

인터뷰 때 순한 목소리를 들으니, 아니, 연기할 때의 그 시종일관 나던 쇳소리 마저 연기였나? 싶어 깜놀.

마녀는 전미도 님께 반한 나머지, 그 분의 공연을 찾아서 보고 싶다는 말을.

'감쪽같은' 메피스토 연기가 돋보였다. 


초반에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기까지의 장면이 너무 상세하게 표현되어서 걱정했었다.

아니, 여기까지 내용이 이렇게 길면, 대체 이 뒤의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다 처리하려고?

그럼 서너 시간으로도 모자랄 텐데?

그런데 에피소드는 왕궁이니 헬레네니 다 빠지고 그레첸 내용으로만 이루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래, 나이 든 파우스트에게 있어 가장 갈한 것은 젊음일 테니

그것이 가장 임팩트가 큰 에피소드가 되는 것이지.


소설과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 하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공연예술이기에

선택과 집중은 그만큼 더 중요한 사항이 된다.

그리고 이 <메피스토>에서의 선택에 이은 집중, 은 농밀했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배우분들의 연기가 무슨 전쟁인 마냥? 불꽃을 튀겼고,

웅장한 음악과 노래와 음향까지 더해져서 온통 빠져들어 보게 되던.

단지 영상의 상영이 끝났는데,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눈 앞에 배우들도 없는데 말이지.

나도 쳤습니다, 박수. +_+

감동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니, 뭐.


이 작품을 보고 나오면서, 기대 이상의 공연이었어서, 이 공연을 놓쳤던 것을 더욱 후회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훌륭했다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파우스트>를 읽지 않은 마녀가


'내가 왜 지금껏 <파우스트>를 읽지 않았던 걸까! 난 참 오만했구나.

그래도 고전을 좀 읽었다고 우쭐대며 살아왔는데, 이렇게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 <파우스트>를 읽지 않았다니! 나 자신이 부끄럽다. 당장 읽어야겠어'


라고 한 것이다.

훌륭한 공연이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원작을 향한 갈망을 느끼게 만들지. 

잘 만든 연극이다.




그리고는 내 공간에 와서 책장을 훑어 보며 물었다.


"파우스트, 있어?"


나로 말하자면 고등학생 때 파우스트를 사서는 읽지 못하고 보관만 하다가

대학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에 읽었다.

읽지 못했던 이유는...

표지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표지에 파우스트와 악마의 사진이 있거든. -_ㅜ

그래서 오랫동안 책표지를 만들어서 씌워 보관했더랬는데,

이 공간으로 이사오면서 표지를 벗겨서 꽂아 두었다.

그런데 마녀가 책을 뽑아내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그 표지를 다시 보게 되어서는 비명을 비명을...

정말 너무 무섭단 말이다. ㅜㅠ;;

헌책방에서 샀던가, 옛날 책인데, 새로운 출판사의 것으로 다시 살까 어쩔까 싶다.

민음사면 될까?

아, 또 번역 비교하려니 머리부터 아프네.

걍 생각 없이 번역을 믿고 살 수 있는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메피스토>를 보면서 생각한 것 두 가지.

우선, 나이 든 파우스트가 '젊음'을 소원으로 제시한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수많은 지식이 있는 노학자에게 있어 젊음, 만큼 간절한 것이 많진 않겠지.

그런데 말이다,

세월을 거슬러 젊음을 소망하는 데에는 일종의 딜레마가 내장되어 있더라.


젊을 때는 젊을 때 사랑하는 연인을 소유하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은? 육체 보단 정신적 교감을 추구하는 것이 더 순수하고 온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연인을 놓치고, 그 젊은 시절의 연인은 '첫사랑'이라는 순결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일생 동안 심장에 박히고, 사람은 그 첫사랑을 그리워하게 된다.

사람에게 그 젊음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 첫사랑을 다시 만나 다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말이다, 그것을 '갈망'하는 자는 '젊은 자신'이 아닌, '나이 든 자신'이라는 점이 문제다.

젊었을 때의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까지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게 될 줄 몰랐었다, 그래서 놓쳤다.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그 순수와 열정이 무엇보다 그리운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젊음을, 젊은 자신과 젊었을 때의 그 연인을 갈망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모든 것이 완전히 똑같은 젊은 날의 자신, 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단지 시간 만을 되돌리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사람은 수없이 나의 과거를 되살고 또 되살아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다만 돌아갈 때는 지금의 기억도 다 잃어 버리기에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하여ㅡ당연한 말이지만ㅡ다시 젊음으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딱 한 가지 현재의 것을 간직할 것은

'기억'일 것이다.

즉, 현재의 기억과 정신과 마음을 간직한 채, 과거의 육체를 입고서 과거의 연인을 만나는 것.

그것이 현재의 사람이 바라는 것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현재의 자신을 유지한 채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리움이 충족되고 

후회 없는 낙원을 살게 되는 걸까?


과거의 연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은 것은, 육체적 교감 보다 정신적 교감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육체적 교감이 주는 쾌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더군다나 파우스트는 노학자이니 만큼, 더는 이전 같지 않은 자신의 육체에 젊음의 에너지를 다시 느껴보고 싶었을 테지.


'현재의 기억'에는 과거에 없었던 육체적 쾌락,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ㅡ비단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동안 경험한 수많은 것들로 인해 이제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상당히 많이 달라진, 그리고 다른 것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ㅡ,

현재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의 육체로 과거의 연인을 만나게 된다면

필히 그 연인과 육체의 관계를 가지고 싶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자신은 이미 변했으니까.


그렇게 과거와는 많이 변한, 쾌락에 대한 현재의 기대로 인해 과거의 순수는 파괴될 수 밖에 없고,

혹은 현재의 자신은 쾌락에 대하여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과거의 순수를 깨지 않는 경우, 그것으로도 충분한 만족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결국,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 보아야 자신의 현재성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는 파괴되며,

그 결과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순수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까지 파괴하게 되는 것이지.


무슨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_+

결론은,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것은 생산적이라기 보단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 보아야, 어차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ㅡ하면 이 모든 건 쓸 데 없는 짓거리.

ㅡ그리고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사색과 사고를 빼앗고, 대신 감각 만으로 무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생각 없이 감각과 본능으로만 이루어진 존재?

동물이겠죠

ㅡ는 또 할 말이 있겠지만, 아 그만 좀 하자. 졸리나... 왜 이러지. -_-;;;



두 번째 깨달은 바는 마녀가 나중에 말해서 깜짝 놀랐는데, 우린 같은 것을 느꼈던.

그러니까 예술의 효용, 이다.

책으로 읽어서 깨닫는 자도 있고, 훈계를 들어 깨닫는 자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잔소리'로 인식하고 귀를 닫아 버리곤 하지.

그런데 공연이나 영화 같은 예술은, 그것을 보는 동안 연기자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에 저항을 덜 받는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얻기가 용이해진다.


젊은 사람이 <메피스토>를 보고는 '나는 조심해서 살아야겠다. 선택을 신중히 해야겠구나'라 깨닫는다.

그는 미래를 미리 맛보고 사는 것이지.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이 나오는 공연을 보고는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젊은 날로 잠시나마 돌아간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여행, 은 순전히 사람의 뇌에서 발생하는 일이긴 하나

현실적으로 그것 만큼 확실한 감각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장치도 없다, 그러니


예술은

마약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환각 속에 살게 만들지.

쓰기에 따라 몹시 생산적인 환각이 되는 것이고.




아... 사설이 너무 길었네.


생각 보다 너무 좋은 공연이었어서, 마녀와 나 둘 다 흥분했다.

예당 회원은 반드시 가입합시다. 혜택이 너무 많아요.

세종회관도 그러려나? 안 해서 모르겠는데.

예당 만으로도 볼거리는 넘쳐나서.


예술의 전당 관계자 여러분, 이 글을 보실 일은 없겠지만

고맙습니다.












쓰고 보니 이 글은 후기라기 보단 일기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 삭제하거나 수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네.


오늘 토요일에는 마찬가지 회원초대행사로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상영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