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당 회원 이벤트에 응모하여 받은 초대권이다. 합창석에는 처음 앉아 보는데...
공연 전에 예당 콘서트홀의 합창석을 검색하고는 좀 걱정했더랬다. 소리가 울린다는데?
뭐, 내 귀가 그렇게 예민한 걸 감지할 정도로 민감한 건 아닌데,
그래도 콘서트홀은 바이올린이나 첼로 독주회를 하기엔 좀 소리가 퍼진다는 느낌이 있다.
바이올린/ 첼로 리사이틀의 경우 IBK챔버홀이 훨 듣기가 나았거든.
하지만 피아노는 소리가 충분히 울려서 콘서트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앉은 합창석 H블록의 좌석은 연주자의 등 뒤 왼쪽으로 45도 각도인 곳이었는데 소리가 괜찮던데?
피아니스트의 연주하는 손가락 보는 것을 좋아해서 피아노 연주회에 갈 때는 가급적 피아노 가까이 앉곤 하는데,
오른손은 피아노에 반사되는 모습으로만 보았어야 했지만, 왼손의 현란함은 충분히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쪽으론 뚜껑도 열려 있어서 여러모로 좋았는데,
2층석이나 어지간한 뒤쪽 1층석 보다도 좋은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발렌티나 리시차는 세 시간을 꼬박 지치지 않고 연주했다.
그리고는 앵콜곡도 두 곡을 망설임 없이 연주해 주셨는데, 뭐랄까, 참 실용적인 사람이다? 란 생각이 들었지.
관객과의 소통도 훌륭하게 할 줄 알고, 불필요한 겉치레는 신경쓰지 않는 묘한 세련됨이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리액션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중에는 친구집에 놀러가서 그 훌륭한 연주를 듣는 듯한 편안함이 다 들었지 뭔가.
첫 번째 바흐의 파르티타가 끝난 후 발렌티나는 일어나 인사하지 않았다.
그래선지 당황한 관객은 박수를 치지 못했고, 나 역시 '여섯 곡이 다 끝났는데? 왜 인사를 안 하지?' 하는 동안
객석에서 한국관객 특유의ㅡ라 생각한다. 정말 너무 심해, 이 현상. -_-ㅡ난 데 없는 재채기, 기침소리의 폭풍이 몰아쳤다.
순간 민망해진 비기침러들.;; 그런데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웠을 리시차가
갑자기ㅡ고의였음이 분명하도록ㅡ조그맣게 재채기를 하며 관객을 향해 씩 웃었다.
그러자 모든 관객이 한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 장면에서 생각했다. '스타로구나. 이 사람은 연예인이다' 라고.
센스 있고 세련된 반응으로 관객의 마음을 끌 줄 아는 스타.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는데,
첫곡이 끝난 후 일어나 인사를 하지 않은 탓에... 를 리시차의 탓이라 할 수 있을까.;; 곡을 생각지 않는 관객의 탓이겠지...
두 번째 곡부턴 한 곡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악장과 악장 사이에 리시차가 잠시 숨을 고르자,
일부 관객이 그냥 박수를 치는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 로스트로포비치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당황하면서 손을 내젓는 모습에 같은 관객으로서 너무 민망했더랬는데, 리시차는 그렇게 하진 않았고
대신 악장과 악장 사이를 거의 쉬지 않고 이어 버렸다. 아...
그 많고 많은 곡을 말이다. -_-
내가 가장 속상했던 것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였는데, 그 곡의 3악장 '스카르보'는
가장 어려운 피아노곡으로 악명이 높은 곡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곡을 연주했으면, 끝난 후 연주자가 몰입한 곡에서 빠져나올 여유를 좀 주었으면 좋았겠는데,
피아노에서 손가락을 미처 떼기도 전에 쏟아져 나오던 박수갈채. 아...
덕분에 리시차는 아직 채 끝나지도 않은 몰입에서 관객에 의해 폭력적으로 현실로 끌려나온 셈이 되었지.
속상했다.
리시차의 연주는 멋졌다.
'건반 위의 검투사' '피아노의 마녀'란 별명답게 쏟아지는 음표들을 휘몰아치듯 연주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으나.
슈만이나 쇼팽의 낭만적인 곡을 연주할 때는 마치 봄바람이 건반을 핥듯 몽환적이면서도 가벼운 연주가 펼쳐져,
건반 위의 마법사 같았다.
강한 곡은 강렬하게, 약한 곡은 아련하게 연주해 내는 솜씨가 빼어난 것이,
그 곡들을 얼마나 많이 연주했으면 그토록 매끈하고 자연스럽게 곡들을 이어나갈까 싶었다.
그리고 슈만, 쇼팽의 곡을 연주하실 땐 손동작이 어쩜 그토록 우아하신지.
유난히 손동작이 아름다운 연주자란 생각이 들었다.
연주 넘 좋고, 무대, 관객 매너까지 훌륭한 피아니스트.
거기다 한 번 공연에 이 많은 곡들을 줄기차게 연주해내는 에너지와 열정까지.
훌륭한 피아니스트의 멋진 공연 잘 보았습니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고 초대까지 해주신 오푸스와 예당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Bach, Partita No. 2 C-Minor BWV 826
1. Sinfonia
2. Allemande
3. Courante
4. Sarabande
5. Rondeaux
6. Capriccio
바흐의 곡인데 살짝 부드러운 것이, '바흐의 낭만'이 떠올랐다. 낭만의 바흐가 아니라, 바흐의 낭만 말이다.
모서리의 각이 살짝 둥글어진, 딱딱함만 없어진 정도의 느낌.
Haydn, Sonata E-Flat Major Hob. XVI:52
1. Allegro
2. Adagio
3. Finale. Presto
하이든의 곡은 왜 종달새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현악사중주 때문인가. 아닌데. 분위기 다른데.
Beethoven, Piano Sonata No. 14. Op.27 No.2 (Moonlight Sonata)
1. Adagio sostenuto
2. Allegretto
3. Presto agitato
그 유명한 월광소나타. 뭔가 어둡고 감감한 달빛의 느낌이었다.
그러다 3악장에 가서는 그 달빛이 띄운 전조의 결말 같은 격정적인 장면이 연상되었고.
3악장의 경우, 일반인으로서 가끔 피아니스트가ㅡ다른 연주가가 아닌 '피아니스트'가ㅡ몹시 부러워질 때가 있는데
이런 곡을 이런 식으로 연주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넘 부러워, 하는 식으로 연주를 해주셨어서
대리만족이려나, 속이 다 시원해졌다.
빠른 곡의 연주에 있어선 탁월하신 것 같다.
<첫 번째 인터미션 ㅡ 독주회에 인터미션이 무려 두 번이나.;;>
Schumann, Kreisleriana op. 16
1. Äußerst bewegt (Extremely animated)
2. Sehr inning und nicht zu rasch (Very inwardly and not too quickly)
3. Sehr aufgeregt (Very agitated)
4. Sehr langsam (Very slowly)
5. Sehr lebhaft (Very lively)
6. Sehr langsam (Very slowly)
7. Sehr rasch (Very fast)
8. Schnell und spielend (Fast and playful)
리시차의 연주 동영상은 없네... 근데 이 악보가 있는 동영상 참 좋다.
마치 악보를 넘기면서 음악 듣는 것 같아.
리시차의 연주는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
나비가 건반 위를 사뿐사뿐 앉았다 날았다 하는 느낌.
Chopin, Scherzo No.2 B-flat Minor op. 31
1. Presto
이것도 리시차의 동영상이 없네. 해서 구한 것이 무려 아르헤리치!!
<2nd Intermission>
Ravel, Garpard de la Nuit
1. Ondine. Lent
2. Le Gibet. Tres lent
3. Scarbo. Modere
[이 곡에 대한 팜플렛의 설명을 파란색으로 적는다.]
드뷔시와 더불어 20세기의 인상파 음악을 창조한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 Maurice Ravel은 오랜 친구인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 Ricardo Vines가 추천한 프랑스의 시인 알로이셔스 베르트랑 Aloysius Bertrand의 시 <밤의 가스파르>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에 착수하여 1908년 '온딘(물의 요정)', '교수대', '스카르보',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동명의 피아노 작품을 완성했다.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모습과 파도치는 잔잔한 물결이 피아노로 구현되는 첫 악장은 인간을 유혹하여 호수 아래 자신의 궁으로 데려가려 하는 물의 요정 온딘을 묘사한다. 《물의 희롱》이나 《거울》 모음곡의 <바다 위의 작은 배>와 같이, 여기에는 물속 세계의 암흑과 위험이 잘 표현되어 있다.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두 번째 곡 <교수대>는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시체의 흔들림을 불안정하고 고집스러운 느낌의 음악으로 표현한다. 세 번째 곡 <스카르보>는 사악한 요정의 모습을 과장된 기교로 묘사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반복되는 음은 스카르보의 흉악한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갑적스런 침묵의 불길함과 난해한 기교, 사악함을 표현하는 폭발적 화성은 그의 초자연적 능력을 암시한다. 이 곡은 시상의 분위기와 느낌을 고스란히 음악에 담은 작품으로, 라벨은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Islamey]보다 더 연주하기 어려운 작품을 작곡하고자 했고, 결국 그 염원은 이루어져, 연주자에게 초인적인 비르투오시티와 천재적인 상상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난곡 중의 난곡을오 손꼽힌다. 과시적인 비르투오소 자굼이라기보다는 참된 비르투오소를 필요로 하는 이 작품은, 정신과 기술을 최고의 경지엥서 결합한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들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곡이다. 아래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익히 아는 곡이고 워낙 좋아하는 곡이긴 한데,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이번 발렌티나의 공연 때문에 검색해서 들은 곡이었다.
그런데, '건반 위의 검투사'라는 별명의 그녀가, 이 아련한 물의 요정과 암울한 교수대, 그리고 그 현란하고 어렵다는
스카르보를 어떻게 표현해낼까, 그 모습은 어떨까, 직접 듣는 소리는 어떨까, 등이 몹시 궁금했었다.
그리고 직접 들은 소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련하고 암울하며 현란하고 기괴한 연주가 눈 앞에 해당 장면들을 고스란히 재현해주는 것 같았고,
이미 오랜 시간의 연주를 듣는 입장에서도 체력소모가 만만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피곤을 다 몰아내었을 정도로 개성있는 연주가 즐거웠다.
1악장에서의 영락없는 물의 요정. 내내 촉촉한 물기가 또르르 굴러가는 것 같았고, 후반부엔 그 물의 요정들이
사람들을 끌고 들어가 물결 속에 매몰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속에 끝없이 퍼지는 몽환적인 물방울들.
하프를 연주하듯,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부분도 참 좋았다.
2악장의 그 나른하고 암울하고 불길한 분위기. 교수대, 라는 제목처럼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체의 느낌이 음산했다.
3악장의 그 미친 음표들. 아...! 여기저기 변덕스런 악마 스카르보의 괴기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지고, 광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위 동영상을 보면 손동작이 정말... 막 아무 곳이나 정신 없이 꽝꽝 쳐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도 정확한 음이 난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다. 묘기에 가까운 연주. 보는 나의 넋이 나가는 것 같았어.
Mussorgsky, Pictures at an Exhibition
1. Promenade
2. The Gnome
3. Promenade (2nd)
4. The Old Castle
5. Promenade (3rd)
6. Tuileries (Children's Quarrel after Games)
7. Cattle
8. Promenade (4th)
9. Ballet of Unhatched Chicks
10. Samuel Goldenberg and Schmuyle
11. Promenade
12. Limoges. The Market (The Great News)
13. Catacombs (Roman Tomb)
14. The Hut on Hen's Legs (Baba Yaga)
15. The Bogatyr Gates (In the Capital in Kiev)
이것도 리시차 버전은 없네. 무스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정말 잘 만든 곡인 것 같다.
눈에 보이듯 아주 실감난 작곡이야.
원래 피아노곡으로 만들어진 이 곡은 라벨이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피아노 만으로도 충분히 장면들이 다 전달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
친구 하르트만의 사후 전시회의 작품들을 보고 작곡한 곡으로,
리시차의 연주는 개인적으로 Promenade(산책) 부분이 좀 빨랐다 싶었다.
회랑을 천천히 걸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급한 건지 너무 급하게 걷는 느낌이 들어서 당혹스러웠다.
카타콤에서의 발을 끌듯 한없이 무거운 연주, 참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키에프 게이트에서의 그 웅장한 종소리와 울려 퍼지는 환호, 폭죽 속에 당당하게 진행되는 Promenade는
과연 시작의 발걸음이 빛나는 미래와 새로운 희망에로 걸어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다.
장장 세 시간의 독주가 끝나고 밖에 나오니 사인회 줄이 구렁이처럼 늘어서 있었다.
난 두 개의 앨범과 하나의 팜플렛을 샀더랬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차마 사인회의 줄을 기다릴 수 없어, 두 눈 딱 감고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내내 아쉬웠다며.
재작년에는 사인회가 새벽 1시에 끝났다는 말을 들었어서 좀 무, 무, 무섭기도 했고.;;
시원시원하고 아련한 것이, 세 시간 동안 마법 속에 빠져 있다 나온 기분이 드는 공연이었다.
참 멋진 피아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