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예매 페이지:
https://www.sacticket.co.kr/SacHome/perform/detail?searchSeq=32267
국립 오페라단 홈페이지:
http://www.nationalopera.org/Pages/Main/Main.aspx
리골레토에 대한 이전 포스팅 : http://vanodif.tistory.com/883
작년에 가려고 정리했다가 hjng과의 피크닉 때문에 취소했던 <리골레토>를 1년 넘게 기다린 끝에 보게 되었다. 문화비가 너무 많이 나가서 가을에는 오페라 끊기로 했더랬는데 hy 씨의 권유 덕분에 결국. 재밌었다.
국립 오페라단의 작품이라 내심 무대장치를 기대했더랬다. 올봄 <보리스 고두노프> 때 전후좌우상하로 움직이던 무대에 충격을 받은 이후 국립의 작품을 볼 때마다 기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번 <리골레토>의 무대는 훌륭하긴 했으나 개인적 취향엔 맞지 않았다. 말하자면 퓨전인 건데... 지난 번 <파우스트>도 그러하고 나는 퓨전 무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사/가사와 내용의 시대성과 무대의 시대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비부인>처럼 서정성과 감정의 선이 극대화된 작품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리골레토>처럼 사건 위주로 진행되는 작품의 경우, 배우의 섬세한 감정 연기 보다는 전체 무대와 분위기를 동시에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더욱 무대와 내용의 시대적 괴리감이 크게 다가왔다. 다만 시작부분의 파티장면은 그야말로 화려함 자체로 몹시 신났다. 아 참, 파티 장면에서 여성이 헤엄치던 물이 담긴 유리볼을 몬테로네 백작을 빠뜨려 죽이는 장치로 사용한 것은 영리하다 싶었다.
조명은 두 부분에서 인상깊었다. 이 또한 백작이 죽을 때였나... 무대 천장에 유리볼 안의 물결이 비쳐서 음울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과 번쩍반쩍 번개.
코심의 연주는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어 예쁜 소리를 내었다. 다만 솔로나 듀엣의 하이라이트 고음 부분에선 살짝 소리를 줄여주시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가수 분들의 목소리가 안 들렸거든.
그란데 오페라 합창단은 그 많은 합창단원의 목소리가 마치 한 사람의 큰 목소리인 양 잘 모여 있어서 귀가 즐거웠다.
그리고 배우분들의 연기... 와 노래... 연기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외국배우분들의 연기가 조금 더 자연스러워 보였단 것 밖에는. 내가 본 목요일 공연에서 질다는 캐슬린 김, 만토바 공작은 정호윤, 리골레토는 데비드 체코니께서 열연하셨다. 만토바 공작의 경우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La Donna e Mobile인데, 아주 썩 맛깔나게 부르셔서 굉장한 브라보를 받으셨다. 특히 마지막에서 취하신 짱구의 액션가면 포즈는 그닥 새로울 것은 없는 포즈인데 왜 그렇게 인상 깊은지 모르겠다. <리골레토>의 현대화 작업 중 가장 빛나는 재치라 생각해.
개인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좀 더 느끼해주셨으면 좋겠다 싶었다. 명색이 만나는 여성마다 한 눈에 반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지고지순한 순정을 자극하는 치명적 바람둥이인데, 그 바람둥이답게? 여성의 성격에 따라 다른 공략법이나 자세 등을 보여주셨더라면 어떨까. 사교계에 능숙한 체프라노 백작부인에게는 느끼느끼 기름기 번드르르한 바람둥이로, 순수함 그 자체인 질다에게는 듬직하면서 부드럽고 자상한 낭만 매너남으로, 암살자인 스파라푸칠레와 함께 일을 도모하는 여성이자 이번 현대화된 <리골레토>에서는 펍에서 일하는 섹시한 여성으로 등장하는 막달레나에게는 그녀를 사로잡을 만큼 야성미 뿜뿜하는 마초남으로... 라는 것은 쓰고 보니 너무한 요구사항이긴 하네. 배우분이시긴 하지만 엄연히 성악가이신데. 테너의 높은 음색은 깨끗하고 좋았다.
리골레토 데비드 체코니는 여기저기서 많은 환호를 받으셨지만 난 잘 모르겠다. 내가 남성 목소리의 매력을 잘 몰라서. 몬테로네 백작이나 특히 스파라푸칠레의 바닥 모를 깊은 저음이 가슴을 두드렸다. 데비드 체코니의 리골레토는 바리톤의 특색이 그러한 걸까, 싶도록 무난하게 다른 영역의 소리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느김이었다. 다소 답답한 느낌이긴 했지만 몹시 따뜻하고 두툼한, 벨벳 담요나 갈색 카페트가 연상되는 음색이었다.
그리고 질다. 캐슬린 김. 나는 처음 보는 이름인데, 이분은 조그만 체구에 파워 음량을 지닌 분이셨다. 인터미션 때 객석에선 다들 질다 칭찬으로 웅성웅성. 다른 분 모두 솔로에서 아주 멋지게 노래해 주셨는데, 질다가 등장하면 순간 올킬되는 상황이 벌어졌달까. 성량과 음색이 남달랐다. 나는 '바람소리'라고 묘사하는데, 박진영 님께서 '목소리 반 공기 반'에서 '공기'로 묘사하시는 그 특성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순수한 소녀로 등장하는 처음 장면에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된 하얀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부엌이 떠올랐다. 없는 듯 깨끗하게 닦인 커다란 창 밖으로 파랗고 높은 하늘과 푸른 잔디가 보이는 깨끗한 주방. 그러다 바깥 문을 열고 나가면 펼쳐지는 넓은 마당. 빨랫줄에 걸려 있는 흰색 천들. 바람에 하얀 천이 날리고, 빨래에서 풍겨 나오는 햇볕 내음과 상쾌한 비누향이 대기를 채우는 느낌. 그러다 Caro Nomo가 시작되었는데... 바람에 펄럭이던 하얀 천이 순간 심쿵! 하더니 우유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하다가 이내 우유로 만든 떡처럼 쫀득쫀득해지다가 다시 우유로 흐르기를 반복하는데, 아, 심장 쫄깃해져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음량과 높낮이를 자유자재로 다루시면서 밀당도 밀당도 그런 밀당을, 싶도록 쫀득한 노래를 해주셨다. 그 노래 하나 듣는데 에너지가 주욱 빠져 버리던. 즐거운 에너지 소모였다.
평소 갈라 보단 전막을 좋아하는데 그 분명한 이유가 되어 주셨던 캐슬린 김의 노래에 몇 번이나 등골이 오싹했는지 모른다. 한 사람에게서 감정선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창법을 볼 수 있는 것이 전막 공연을 보는 큰 기쁨 중 하나일 텐데, 처음 아버지 리골레토와 등장하는 순수한 소녀에서는 바람소리가 많이 나는 깨끗하고 상쾌한 음색이었다면, 만토바 공작에게 당한 직후 절망에 빠져 리골레토에게 하소연하던 때는 바람소리가 없어지고 단단하게 응어리진 목소리로 이전에 없던 어둠과 음울함이 깃들었고, 리골레토에게서 진심어린 위로를 받은 후에는 다시 목소리가 깨끗해지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라다 마지막 죽음 직전에는 꺼질 듯 사라지는 목소리로 죽어가는 질다의 영혼을 잘 표현해 주셨다.
질다ㅡ리골레토ㅡ스파라푸칠레ㅡ막달레나의 사중창을 굉장히 기대했었는데, 그 부분에선 질다의 음색이 압도적인 경향이 있었다. 노래를 쉽게 하시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잘 하셨달까. 음량이 크시기도 하고 깨끗한 음색이 워낙 매혹적이어서, 조화를 이룬다기 보단 질다의 목소리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모르겠으나. 무튼 굉장히 인상적인 질다를 연기해주신 캐슬린 김이셨다.
아, 그런 질다역에도 불만은 있다. 처음 등장할 때의 의상. 어린 소녀의 순수함을 강조한 발랄한 의상 같은데, 정결한 음색에 어울리지 않는다. 순결하고 정숙한 처녀로 묘사하는 긴 치마를 입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 복장은 이런 가사와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는 거다. 드레스를 입혀 주세요. ㅠ
믿고 보는 국립 오페라단의 작품인 만큼 즐거웠다. 오페라의 대중화에 늘 앞장서는 예술의전당과 국립 오페라단 덕분에 이렇게 수준 높은 공연을 좋은 가격에 편안히 보았습니다. 기승전예당만세.
하얀 옷 오른쪽의 여성분이 질다 역의 캐슬린 킴. 캐슬린 킴의 노래가 자꾸 맴돌아서 오늘 토요일 공연을 부랴부랴 예매했다. 뜬금 없이 딱 두 자리가 있는 걸 보니 반환표인 듯 했다. 덕분에 좋은 자리에서 보았고. 오페라극장 3층 C블럭 1열 9-10은 생각보다 썩 괜찮았다. 물론 발레를 감상하기엔 군무가 망가지겠지만, 오페라는 군무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니 상관이 없겠다 싶었다. 그 좌석은 난간이 시야에 방해되지도 않으면서 무대에서는 꽤 가까운, 썩 괜찮은 자리였다. 다만... 모르겠다, 오케스트라가 원래 큰 것인지, 아니면 첼로/더블 베이스가 포진한 쪽인 C블럭이어서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2중창이나 3중창, 심지어 4중창 떄도 고음 부분에선 악기 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묻혔다. 하지만 그것은 몇 번 되지 않는 일이었고, 전체적으로 꽤 괜찮은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담번에도 오페라의 경우는 그 좌석 생각해 봐야겠다.
오늘 주요 배역분들의 막공연이어서인가 정말 좋았다. 리골레토의 전체를 포근히 아우르는 묵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은 한 명 한 명 칼칼하니 잘 벼려진 다른 가수분들의 목소리를 잘 감싸 안고선 중심을 든든히 잡아주었다. 만토바 공작은 목요일보다 목소리가 좀 더 또렷하게 잘 들렸고, 특히 La Donna e Mobile에서는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목요일 공연도 좋았지만 오늘 공연은 좀 더 여유롭게 들렸달까. 매력적이었다. 오늘 인상적이었던 분은 막달레나셨는데, 굵고 풍성한 음성이 농밀한 와인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부드럽게 바닥을 감싸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스파라푸칠리의 그 바닥 없는 우물 같은 목소리에 또 심장이 철렁.
한 분 한 분 너무나 훌륭하고 매력적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한 방 올킬을 해버리는 질다. 오늘 일행은 목요일에 함께 했던 이와 다른 사람이었는데, 역시 질다의 Caro Nome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작년에 내가 포기해야 했던 <리골레토>를 보았던 사람이라 오늘의 공연과 좀 더 분명한 비교가 되었나 보다. 공연이 끝난 후 "작년 공연보다 더 좋은 건 물론이고, 지금까지 본 오페라 중 최고였다"는 평을 해주어서 내가 다 기뻤다.
코심의 그 잘 다듬어진 소리와 그란데 오페라 합창단의 멋진 남성 합창은 다시 들어도 근사했고.
이렇게 멋진 공연을 볼 수 있게 해주신 예당과 국립오페라단, 또 모든 관계자분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