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관: 숨, 결로 비치다>
* 일시: 2018년 4월 12일 (목) - 5월 11일 (금)
* 장소: 갤러리 마크
서래마을에 이렇게 멋진 갤러리가 있는 줄 몰랐다. 서래마을 입구 육교 앞 넥스덴 치과 뒷 건물로 위치는 찾기 쉬운데 갤러리가 잘 눈에 띄지는 않는다. 아래 사진 속 건물의 지하 2층이다.
숨, 결로 비치다 ㅡ 고연수 (평론)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에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예민한 통점으로 느낀 시대적 아픔과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언어 대신 몸으로 표현하여 시대를 넘나들며 사랑받고 있는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 Charles Chaplin의 농축된 몇몇 촌철살인적 명언 중 하나이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합의된 우리의 상식에서 살짝 그 이하로 보이는 듯 한 몸짓은 편안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안의 내용은 우습지 않다.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좀처럼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점인 인간은 그 안에서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또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 실처럼 가느다란 선들의 에피소드들은 엄청난 입체적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선線, 평안, 균형, 무심 그리고 선禪
명확해 보이기도 미묘해 보이기도 한 색에 푹 담가 적신 듯, 혹은 처음부터 바탕이었던 색들이 말갛게 표면 위로 올라오는 듯 보이는 작가 법관의 작품들이 이러하다. 최대한 근접하여 자세히 봐야지만 식별이 가능한 세밀한 점點과 선線으로 구성이 된, 한 눈에 아우르기 위해 뒤로 물러서면 거대한 색면色面으롱 한 눈에 담기는 작품이다.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한 물리적 심리적 시공간의 반경이 이렇듯 한없이 깊고 넓혀지는 이유는 작가 법관의 수행적 행위의 연장선으로 찍히고 그려지는 점과 선이기 때문이다. 사이즈가 작지 않은 수많은 작품들이 심리적으로도 전혀 불편하거나 거슬림 없이 우리 눈에 들어와 마음에 스며드는 이유도 역시, 작가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자성自性을 붓끝으로 옮기는 행위의 과정이자 흔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영감을 직감적으로나 전략적으로 가시화하는 시각예술창작자의 예술적 행위 또는 이들에 의해 형성된 예술사조로서의 거대한ㅡ경향의ㅡ흐름, 혹은 예술의 시대적 실천 등과 같은 우리의 시각예술적 용어와 그 선상에서 단순 분류하기에는 적잖은 오류가 있어 보인다. 물론 동양적 사상에 기반한 볼프강 라이프 Wolfgang Laib의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자연 순환적 작품이나, 행위ㅡ과정ㅡ만을 남겨 평면회화로 가시화한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등과 같은 시각예술가들이 있다. 우리에게 명상적인 편안함으로 정신적 치유를 잘 전했고, 꺼내기 힘든 인간의 무의식을 캔버스에 낱낱이 민낯을 쏟아내는데도 성공했다. 그들의 바람대로, 예술의 역할대로.
작가 법관의 작품 속 끊이지 않는 선과 그 폭에 담겨지는 간헐적 점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질감 matière 으로 어우러져 있다. 자신만의 조형적 언어로 화폭을 구성하려는 지극히 평범한 시각예술가들의 행위와도 거리가 있는데, 스케치 없이 단숨에 하지만 지속적으로 꾸준히 그저 찍을 뿐이라고 작가가 언급한 부분은 이를 더욱 확실케 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가까이 보면 반듯하지 않고 꿈틀대는 점과 선들은 그들끼리 마찰 없이 평온하게 하지만 긴장감 있게 서로 엉키거나 뭉침없이 조화롭게 위치해 함께 녹아 있다. 반듯하고 정리된 채 즐비하게 나열, 중첩되어 있다.
"수행을 통해 얻은 마음의 평안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작품이 그러하겠지요." 작가 법관의 무심한 듯 한 고백은 그의 작품에서 더욱 평안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그의 작업은 추상 뿐 아니라 만물의 생명을 듬뿍 안은 구상회화의 형식으로도 생성되었다. 편안하고 어여쁘게 그려진 형상의 작품들은 보는 이들에게 재미와 기쁨을 선사했지만, 작가 입장에는 뚜렷한 형상이 그려진 작품들은 그 형상에 다시 시선과 마음이 잡히는 듯 하여 형식을 변화한 것이다. 시선과 마음이 잡혀 머무르지 않기 위해 오히려 형상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그린 행위는 어느덧 형상에서 벗어난 점과 선으로 귀결된 것이다.
붓끝으로 전달되는 자기성찰(맑게 보려는)적 태도는 현상, 상황, 대상에 대한 머무름이 없이 자신의 마음을 닦아 맑은 거울로 만들어 유지하려는 작가 법관의 평온함이 작품으로서 우리를 평안히 감싼다.
있지 않고 없는 것 그것조차 분별하지 않는 마음, 즉 치우침 없는 균형의 무심無心은 선線으로 스며들어가 선禪으로 또한 나온다. 작가 법관 작업에서의 균형은 중용으로서의 가운데가 아닌 통합을 의미한다. 서로 통해 있다는 것, 순회한다는 것은 정중앙이 아닌 때마다 달라지는 그때의 가장 최적의 흔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 법관에게 균형은 감각이 아닌 이치의 깨달음이다. 그러기에 그의 점과 선은 가까이에서 보면 바르지도 정형적일 수 없으나, 멀리서 보면 평안하고 바르다. 수천 번, 수만 번의 계산 없는 행우는 그의 무지, 무념, 무상, 무심에서 이치에 대한 감각으로 그려진다. 균형은 대상의 정중앙이 아닌 무게를 만들고 또 이겨내는 것이다. 작업과 하나가 된 작가 법관의 행위는 자유롭고, 가장 최상의 평온함과 숨으로 에너지를 담고 우리에게 스미고 있다. 일체만물을 보되 내 마음으로 가져오지 않는 일. 마음을 닦아 자신을 보는 일. 진리를 간구하는 일. 모든 생명을 섬기고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골몰하는 마음은 작업으로 옮겨지며 드러나듯 드러나지 않는 형식을 취한다.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물에 젖지 않는 연꽃과 같이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 가라"
ㅡ 「솟타니파타」, 석지현 옮김 ㅡ
작가 법관의 '무심의 숲'은 선禪으로 다시 돌아간다. 모든 관점을 자신에게 돌려놓고 붓끝으로 자신을 타진했던 행위는 붓을 통해 다시 선으로 작가에게 투영되어 돌아오고 우리는 작가 법관의 무심의 숨, 결을 보게 된다.
사족: 필자의 고백과 바람
익숙한 구체적 형상을 뭉개 직관력을 요구하는 추상회화의 경우 늘 그렇듯 경중을 막론하고 우리는 긴장감을 안고 작품을 마주한다. 예민한 식견을 장착하고 세심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시각적 식별력과 더불어 일렁일 수 있는 감수성 정도까지는 부담스럽지만 챙겨야 하는 지참물로 준비한 채 선보아야 하는 추상회화가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격 있는 고급스러움을오 숨막히게 그 자태를 뽐냈는지, 그 기세는 여전히 더욱 더 예술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업고 우리 앞에 평쳐질 전망이다. 그래서 사실은 좋은 작업과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것이 그 누구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저마다 색다르게 점, 선, 면을 다룬 작품들 홍수 속에서 신뢰할 만한 전문가의 확신에 찬 손가락 가리킴이 간절한 때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숨막히는 화이트 큐브 안에서 더욱 분명하고 강하게 가리킬수록 근사한 작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나마 숨통 트이는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라기 보다는 참 난감하고 민망한 이같은 상황에서 시각예술분야에 발들인 그 누구도 이 혐의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혼란의 중심에는 창작자가 태풍의 눈처럼 고요히 위치해 있다. 창작력, 매체를 다루는 능수능란한 기술력 등의 여하를 떠나 예술 앞에서의 진지한 태도, 자신의 작업에 대한 완벽한 책임감을 기품 있는 추상형식에 마음을 조금씩 놓아 헤이해진 작업들 역시 좋은 작품 만큼이나 많이 부유하고 있다는 현상도 완전히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끊임없니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맑은 거울처럼 닦아내는 수행으로서의 선禪한 숨이 스민 선線, 선과 점이 중첩되어 선한 무심한 결로 나오는 작가 법관의 작품에 조심스럽지만 과감히 필자는 손가락을 향했다. 무관심과 무책임이 아닌 작가 법관의 무심한 작품을 향해.
필자에게 스며나오는 고백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무지막지 행여 달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염려,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 다만 무심한 달이 그 빛을 수면 위로 포근히 덮을 때 빛에 반짝거리며 반응하는 물결 속에 조용하고 무심히 떠 있는 부표 정도의 표시였으면.
ㅡ 타이핑만 하는데 왜 힘이 들지.;; 문장들이 좀 어색해서 그런가. 도록에 있는 설명이다.
Reflecting by Breathing -- YeonSoo KO (Critic)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This is one of the famous enriched and pithy quotes by Charles Chaplin, an actor and director who is loved across time periods by expressing the pain of time felt by sensitive points and warm perspective toward humanity through body, instead of language. Although the gestures that seem slightly lower than our common sense agreed across all times and countries of the world draw comfortable smiles, but the contents inside are not funny. Human beings, the small dots that are not easily visible through the huge waves of history created by humans, are such weak and great beings. The episodes of lines that are thin as threads setup a gigantic 3-dimensional space.
Lines, Peace, Balance, Indifference, and Zen
Bup kwan's artworks seem to be fully soaked in a color that seems vivid and vague, and the colors that formed a background from the beginning seem to be clearly floating to the surface. They are artworks consisting of detailed dots and lines that are identifiable by look9ing at them as closely as possible and are seen at a glance as a large color side by taking a step backward to put them together at a sight. The radius of physical and psychological time and space to properly observe the 'artworks' endlessly broadens and deepens because of dots and lines that are marked and drawn as the extensions of Artist Bup kwan's act of practicing asceticism. The numerous artworks that are not small come into our eyes and permeate into our minds without any inconvenience of being unpleasant psychologically because they are the process and traces of an artist's act of putting the self-examination seen through the eyes of mind by brush tips. There seems to exist several errors if we are to simply classify such process and traces according to our visual artistic terms, such as an artist's practice of the time and artistic acts of visual artists who visualize their artistic inspirations intuitively or strategically or the flow of large tendency as an art trend formed by them. Of course, there are visual artists such as Wolfgang Laib who view the nature and human as one through nature-circulative artworks based on oriental thoughts, or Jackson Pollock who left only the process of an act and visualized it into a plane painting. They delivered mental healing to us very well through meditative comfort and succeeded in fully pouring out the unconsciousness of humans that is hard to pull out into a canvas. According to their desire, and according to the role of art. The endless lines and the sporadic dots in that width inside Bup kwan's artworks are almost mixed by invisible Matiere. While they are distanced from the act of very ordinary visual artists who try to create a canvas with their own formative language and the part mentioned by the artists as continuously putting just dots at once without a sketch is an element that confirms this. Thus, the dots and lines that wriggle instead of being straight when looked at closely are peaceful and tranquil without frictions with each other, but they are blended in together by staying harmoniously without entangling or crumpling tensely. They are placed and overlapped neatly and tidily.
"I'd like to deliver to people the peace of mind gained by practicing asceticism. That is what artworks do." Bup kwan's seemingly indifferent confession makes us feel more comfortable in his artworks. in fact, his works were also created not only in a design of painting that liberally embraces the life of all living things. Artworks drawn comfortably and beautifully present amusement and joy to viewers, but from the artist's stance, the artworks drawn with clear figures have changed the format as if capturing perspectives and mind again in that figure. The act of repeatedly drawing a shape so that perspective and mind are not captured and do not stay has rather resulted in dots and lines that escaped from the shape. The attitude of self-examination (to see clearly) delivered by the brush tip has no staying in a phenomenon, situation and object. Artist Bup kwan's tranquility to cultivate his mind and created and keep a clear mirror peacefully embrace us as an artwork.
The mind that does not even distinguish what does not exist, i. e., the indifference of balance without bias permeates into lines and comes out by Zen. The balance in Bup kwan's works means likeminded, not middle way as moderation. Being likeminded with each other and circumambulating is the most optional center of a point that charges every time, not the exact center, and such balance must always move. Since the time and space that put dots and lines change all the time, they are the optimum trace of that moment. In this sense, balance is not a sense but the realization of logic to Artist Bup kwan. Thus. his dots and lines cannot be right or formal when looked at closely but are right and peaceful when seen from far away. The thousands and tens of thousands of non-calculative acts are drawn by the sense of logic from his ignorance, freedom from all ideas and thoughts and indifference. Balance creates and overcomes the weight of an object, not its center. Bup kwan's act that has become one with his work permeate into us by holding energy with free and the best peace and breath. seeing all things and objects but not bringing them into my mind, cultivating my mind and looking at myself, pursuing truth, and the mind of respecting all living things and immersing into the restoration of human dignity are reflected on artworks and take a form that seems to be revealed but is not.
"Like a lion not trembling at noises, like the wind not caught in a net,
like a lotus not stained by water; let one wander alone like a rhinoceros."
-- <Sutta Nipata> Translated by Ji-hyun Seok --
Bup kwan's 'breath of indifference' goes back to Zen. All viewpoints are returned to him, and the act of tapping himself by brush tip returns to the artist as lines by projecting on him. We see Bup kwan's breath of indifference.
-- From the workbook
모든 작품의 제목은 <숨>이다.
위의 작품은 크기가 크며,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마치 로스코 채플의 로스코 작품들이 떠올랐다. 무수한 선과 점을 통한 선禪을 의도하셨다는 것은 김환기 화백 이후 수많은 한국 화가분들의 작업 과정이기도 한 만큼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으나, 나는 법관 작가의 작품에서 이상하게 21세기 마천루 가득한 도심 한복판에 있는 펜트하우스를 떠올렸지 뭔가. 밤거리를 빼곡히 수놓은 빌딩숲과 거리를 메운 차의 불빛을 보는 것 같았다. 위의 작품은 특히 중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두 개의 선이 배경의 선, 점과는 다르게 물감의 마티에르가 돋아나 반짝이는데, 그 무기질적인 매끈함이 마치 감추어진 평행우주를 드러내는 결계인 것만 같아 한참을 앞에서 감상했다. 언제나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내 감상이니 크게 신경쓰진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앞으로 보게 될 작품들에 대한 내 감상은 위의 훌륭한 비평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낮은 2층에 있는 작품들이다.
세 작품이 크기도, 제목도, 모양도, 색도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색이 꽤 다르다. 짙은 청색도 더욱 세분화되는 느낌이 신선했다. 과연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거니. 무릇 인생이건 그림이건 '작품'이라 생각되면 멀리서 적당히 웃으며 보고 넘길 것이 아니라 바짝 가까이 다가가 면밀히 보고 무수한 눈물과 피로 점철된 각 단계를 세밀히 즐길 일이다.
색이 다르지? 선도 다르고 점도 다르다.
대개의 작품에는 오렌지 점이 흰색 점 위에 찍혀 있었다.
언뜻 보면 세 작품이 똑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셋 중 한 작품에는 오렌지 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가운데였나 왼쪽이었나.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까묵.
둘 다 검정 같아 보이지만 한 작품은 청색 베이스다. 검은 빌딩숲을 수놓는 수많은 불빛들 사이 오렌지 점들은 어찌 보면 서울에 있는 교회의 십자가들인지도 모른다.
이 붉은 작품에는 오렌지 점이 없다. 대신 노란 점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 작품 앞에서 나의 고삐 풀린 상상의 유희는 기어이 선을 넘고 말았다. 내가 이 작품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을 것 같나? 네로! 도시를 태워라! 서울을, 뉴욕을, 파리를 태워라! 모두 불바다로 소멸시켜라! ㅡ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내린 지령인지도 모른다.
이 해석을 하고는 즐겁긴 했지만 동시에 괴롭기도 했다. 분명히 이 작품을 그리신 의도는 그것이 아닐 텐데... 위의 도록을 읽기 전이었지만, 법관 작가의 작품은 한 눈에 보아도 해석이 들어오지 않나. 한 점 한 점을 고국과 가족, 친구들을 생각하는 그리움으로 찍은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라거나, 박서보, 김태우 화백의 그 수행에 다름 아닌 선들. 현재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국 단색화가 외국인에게 주는 감동의 코드가 바로 그 '수행'에서 비롯된 '선禪', '비우기'인 만큼, 작품을 보자마자 '수행'과 '명상', '치유', '평화'라는 단어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네로를 떠올리며 불바다치는 서울의 광기에 심장이 뛰었던 나는, 이 작품에서 돌아서며 마치 작품을 못할 짓을 한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난 대체 왜 이런 해석을 하는 걸까ㅠ' 하며. 하지만 이게 나란 말이다, 젠장.
갤러리 초입에 걸려 있는 이 작품을 들어갈 때 보는 것과 나올 때 보는 마음이 달랐다. 들어갈 땐 우와... 멋지다...! 하며 보았는데, 나오면서 보니 저 세로선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베는 칼날만 같아서 아얏, 마음이 따가왔다. 제가 수행이 부족하여 그렇습니다. ㅠ 하지만 반성은 하지 않아요.
조용하고 넓고 시원한 갤러리 마크는 캉캉 음악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서도 작품을 감상하기에 참 좋은 공간이었다. 계신 분들도 친절하시고. 보물찾기를 하듯 발견한 보람이 있었던 단정한 갤러리. 내 이동반경에 있는 가까운 곳이니 다니다 종종 방문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