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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Book Review

최 훈,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by Vanodif 2013. 3. 18.

 

 

 

 

 

 

 

 

 

 

 

 

★ 5/10

매끈한 철학자가 말하는 윤리적 채식주의의 입맛 도는 당위성.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하는 책.

철학자의 관점에서 채식의 당위성을 논하는 책이다.

일반인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가급적 전문지식이나 용어를 나열하진 않겠다, 는 저자의 말대로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게 글을 썼다, 하지만 전문용어는 알게 모르게 꽤나 제공되고 있는데, 그 용어들도 쉽게 풀어주기 때문에 철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힘겨워할 이유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고른 것은 웹서핑 중 우연히 만나게 된 한 블로거의 후기 때문이었는데, 채식에 관한 관심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 후기가 썩 맘에 들었어서 읽기로 했다. 읽은 소감은? 잘 읽었단 생각이 든다, 몇 가지 공감할 수 없는 점들이 있긴 하지만서도.

 

이 책은 '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한, 아니... 뚜렷하다 못해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자가, 철저히 이성적인 관점에서 채식의 당위성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책이다. 보통 채식의 당위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먹히는 동물들이 '불쌍하잖아요' 식의 감정적 반응을 자주 보이는데, 저자는 그런 이유를ㅡ아닌 척 하지만ㅡ혐오하는 것 같다. 해서 자신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성을 토대로 한 논리에 의해 납득시킬 수 없는 '감정'의 이유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윤리적이며 철학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펼친다는 것이다. '윤리적 채식주의자'. 스스로를 저자는 그렇게 부른다.

 

자신은 논리를 따지는 철학자이며, 육식을 아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많고 확실한데, 육식을 해야만 하거나 채식을 하지 않아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채식을 하기로 선택, 결정했다는 이야기. 멋지게 들리기는 하는데, 또 철학자다운 말빨이 근사하긴 한데, 가만히 들어보면 자기 변명에 자기 말만 옳다, 식이어서 뒷부분에 가선 맘이 편치 않았다.

 

저자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즉 생선은 먹는, 아직은 준채식주의자이다. 물론 궁극 목표는 완전채식주의자인 것이며, 지금은 그 중간단게에 있는 것으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이 책에는 다른 채식에 관한 책 목록이 어마어마하게 등장한다. 하나씩 읽어봐야지.

 

 

 

 

 

몇 가지 재미난 주장이 있는데, 그 중 하나로는

육식은 종차별주의 Speciesism에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와 마찬가지다, 라는 주장이다.

종차별주의는 인간이란 종이 동물이란 종보다 절대로 우월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종을 먹어도 된다, 라는 것인데, 이 육식옹호주장을 뒤집으면서 저자는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절대기준 내지 특징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반문한다.

 

언어적 동물. 동물도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 꿀벌의 8자 댄스 언어는 유명하지 않은가. 돌고래들도, 그리고 고양이들도 그들 나름의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와 다르긴 하지만, 같은 인간 내에서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민족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도구적 동물. 침팬지? 제인 구달?

 

직립보행. 있지 않은가, 두 발로 걷는 동물도. 걔네들도 다 인간인 건가.

 

사회적 동물. 늑대, 돌고래 등의 사회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등등... 인간 '만의' 특징, 이라고 인간들이 주장하는 그 모든 특징들은 현존하는 다른 동물들의 특징으로 모조리 논파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가장자리 이론이라던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우위 능력, 을 논함에 있어 늘 걸림돌이 되는 '갓난아기와 중증장애인'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인간만의 특징으로 그 무엇을 제시한다 하여도 소용 없다는 것. 아... 이 부분에서 스스로를 종차별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내 경우는 엉뚱하게도 갓난아기와 중증장애인을 무의식 중에 '동물'의 카테고리에 넣고 있는 것 같다, 는 생각에 좌절을 느낀 것이었지만.

 

잠시... 삼천포로 빠져 볼까. 삼천포가 싫으면 이 부분 건너뛰시기를.

 

길을 가다 신체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구걸하고 있으면 마녀는 내 눈을 가리거나 비스듬히 앞서 걸어 시야를 가리곤 한다. 나는 그들을 볼 수 없기 떄문이다. 동전통이 앞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젊은 남자가 아닌 한 어지간하면 지갑을 꺼내는 편인데ㅡ이것도 마녀는 결사 반대하는 바이지만ㅡ온전하지 않은 신체를 드러내며 앉아있는 사람들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이런 나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절망스럽다. 그들을 볼 수 없단 사실이 너무 힘겨워서 오랫동안 '자비심'을 구했었는데, 딱히 자비심, 이 맞는 것인지 지금에 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어떤 마음을 구해야 그런 나를 고칠 수 있는 것일까?

 

아기를 동물로 분류한다, 는 좀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

 

나는 TV에 동물이나 아기가 나오면 식사를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곁에 실제 강아지나 아기가 있으면 상관 없다. 다만 TV에 등장하면 숟가락을 놓아 버리거나 시선을 돌린다. 왜 그런 걸까. 알 수 없다. 이런 증상?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선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으니. 해서 마녀는 식사 중 TV에 동물이나 아기가 나오면 슬쩍, 채널을 돌려주곤 한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면 말 못하는 나를 대신해, '다른 것 보고 싶어서'라며 자신이 책임을 덮어써주기까지 하니, 참 절실한 친구가 아닐 수 없다.

 

이 특징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결국 그나마 찾아낸 답은 '지나친 상상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상상력이 발휘된 바람에 보는 바를 '사실'로 느껴버리는 것이지. 이를 테면 밥 먹을 때 화면에 보이는 동물이나 아기를 지금 내가 먹고 있다, 는 식? -_- 모르겠다. 다른 이유를 아는 이가 있다면 제발 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여튼, 내가 견디지 못하는 '아기와 중증장애인'이 가장자리이론의 두 대상임을 알게되자, 난 너무나 놀라버린 것이다. 나는 끔찍한 종차별주의자인가 보구나. 게다가 인간임에 분명한 아기와 중증장애인을 동물의 카테고리에 배치해 버린... 실로 괴상한 사고를 지닌 비참한 인간이구나, 란 생각에 한 며칠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뭐, 지금은 책을 다 읽었고, 더 이상 가장자리 이론이니 무엇이니 해서 나를 괴롭히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으니 다시 '나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사고를 하는 정상적인 인간인 것이 맞지'라는 착각... 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아, 이렇게 쓰다 보니 또 우울해지네.

 

쓸 데 없는 사설이 길었다.

 

에또...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흑인은 노예로 부렸고, 여성은 절대적 차별을 당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납득되어선 안 되는 '잘못'인가 하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흑인이나 여성이 과거, 차별 받아도 마땅하다, 생각한 이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는가. 백인 남성에 비해 능력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 가 아니었는가? 백인 남성은 흑인보다도, 여성보다도 모든 것에 있어 절대적으로 능력이 뛰어나니,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차별해도 괜찮다는 논리.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런 '능력절대주의적' 관점이라면, 서울대 법대 졸업한 사람은 연대 법대 졸업한 사람을 노예로 부려먹어도 마땅하다, 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철학이야 뭐 생각놀음이고 말장난적인 면이 다분히 있으니 극단으로 치닫는 이런 상상도 가능하단 것이다. (아, 이 서울대ㅡ연대 부분은 내 이야기다. 저자는 좀 더 품위있는 예들을 사용해 주장을 떠받친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설사 그렇다고 억지로 가정해 본다 하더라도, 즉 남성이 여성보다, 백인이 황인이나 흑인보다 능력에 있어 절대우위를 차지하는 확실한 증거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성이나 흑인을 차별해도 된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냐를 다시 묻는다. 예스, 라 답한다면 서울대ㅡ연대, 에서도 예스, 가 나와야 할 테지. 하지만 그건 또 아니라 생각하지 않나?

 

저자는 이처럼 채식을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논파해 나가면서 주장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을 먹어선 안 되는 이유는, 동물도 고통을 느끼고 삶에의 희망을 갖고 있는데, 생명을 빼앗음으로 고통을 주고 삶에의 기대를 파괴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음... 난 다 건너뛰고 인상에 남는 몇 가지만을 가지고 말하니 뭔가 좀 '응?? '스럽게 들리긴 하는데;; 저자는 철학자요 교수님이시니 훨씬 납득이 가도록 친절히 설명해준다. 내가 또 엉뚱하게 뒤틀어 놓은 건 아닌지 몰라. +_+

 

 

 

 

 

저자의 관점 중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식물은 의식이 없다'라는 확언이다. 뭐, 토론에서 주장을 할 땐 확실한 사실만을 가지고 논지를 펼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난 그런 유형이 아니어서. 이래서 나는 토론을 해선 안 되는 거겠지. 비이성적인 인간? 부끄럽지 않다.

 

내 생각은 이러하다. 현재의 과학은 과연, '식물은 의식이 없다'를 증명할 만한 수준이 되는가? 하는 것.

 

과학적 진실이란 새로운 과학적 진실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진실이지 않은가.

커피는 몸에 나쁘다 했다가 커피는 치매예방에 좋다고 했다가.

물은 아무리 마셔도 몸에 부작용이 없다 했다가, 지나치게 마시면 물중독에 걸릴 뿐 아니라 사망에까지 이른 사례도 있고.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차기 과학이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어 앞의 과학을 뒤엎을 때까지만 사실인 '한시적 진리'.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과학이기 떄문에 나는 과학맹신론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 또 흥분을... -_ㅜ 쓸 데 없이 흥분하는 이 습관부터 어떻게 좀.

 

 

프룻테리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데... 또 흥분하게 될 것 같아서.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위해 이 책의 후기는 여기서 접어야겠다.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 이 책은 잘 쓴 책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깨알같은 변명들도 참고 읽을 만 할 정도로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쳐가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후 다른 채식에 관련된 책을 더 읽어볼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해서, 당장 구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