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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by Vanodif 2017. 7. 22.



이집트 초현실주의의 궤적


ㅡ 박주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예술이 자유가 될 때: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전은 격동의 근대기 이집트와 국제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해 본다. '또 다른 모더니티(the other modernity)'라는 전제 아래에서 중동은 현재 대한민국이나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함께 비서구권 국가로 분류된다는 데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그러나 우리는 왜 현재 시점에서 중동의 수많은 나라 중, 이집트를 조명해야 할까? 최근 중동에 대한 세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근대 중동 미술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그 출발선상에 서 있는 이집트를 만나게 된다. 우리 대부분의 기억 속에서 이집트는 3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서 고대 피라미드나 미라, 스핑크스와 같은 이미지로만 각인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이집트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위치에서 언제나 중동의 중심에 있었다. 새로운 문물들이 가장 먼저 이집트를 통해 중동으로 전해졌고, 이집트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여 각 지역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특히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수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이집트로 유입됨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는 새로운 이집트 근대사회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유럽 사회는 1914년의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러시아의 스탈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같은 지배자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권위로써 예술을 정치적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시 작가들의 예술 활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현실성 있으며 애국적이기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량학살의 비극을 겪은 몇몇 예술가들은 철저한 정신적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현실을 초월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의식에 기반을 둔 초현실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문학 운동에 근원을 두고 있는 초현실주의는 언어에 대한 탐구로 시작되었다. 드로잉, 회화 등과 같이 이미지로 구현되는 예술 작품들은 문학적 실험에 기반한 '구상적 그림 언어'로 등장하였고, 이에 초현실주의는 단순히 미술 양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적 강령으로서 사회 비판적이고 도발적인 제스처를 통해 새로운 표현 방법을 실험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당시 유럼 사회에서 이러한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앙드레 브르퉁과 주요 구성원들은 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저항하고자 '독립혁명미술국제연합'을 설립하였다. 이들은 '독립적인 혁명 예술은 힘을 모아 보수적 박해에 맞서 싸우고 마땅히 존재할 권리를 외쳐야 한다'라고 주장하였고, 그들의 외침은 '혁명을 명분으로 한 예술의 독립'과 '예술의 해방을 명분으로 한 혁명'이라는 간단명료한 논리로 귀결되었다. 이들의 선언은 여러 나라의 정기간행물들을 통해 퍼져 나갔고, 프랑스 파리를 비롯하여 영국의 런던, 벨기에의 브뤼셀, 미국의 뉴욕,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전해졌다. 이 도시들의 여러 작은 단체들은 독립혁명미술국제연합과 함께 할 뜻을 밝히고 자윫고 독립적인 창작 활동을 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러한 배경 안에서 이집트 초현실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맡았던 시인 조르주 헤네인은 이집트 외교관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 지식인이었다. 프랑스 유학 중에 만난 브르퉁과 긴밀한 교류를 맺고 이집트로 돌아온 그는 이집트 내의 프랑스어 구사자들로 이루어딘 문화단체인 '에세이스트'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38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가 이 단체의 강연에 초대받은 것을 계기로 헤네인은 람시스 유난, 카밀 알텔미사니, 안와 카밀 그리고 푸아드 카밀을 포함한 이집트 예술가들과 새로운 모임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헤네인은 마리네티가 무솔리니의 지배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그의 강연 행사가 파시즘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불건전한 행사라고 항의하였고, 이탈리아 식민지 전쟁과 파시스트 문학가들의 동조를 비난하며 에세이스트를 탈퇴하였다. 헤네인의 새로운 모임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안와 카밀은 1936년에 『외면받은 책』을 통하여 문화와 전통 규범이 개인의 기본 욕구를 지배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이러한 욕구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지만 현대 이집트 문학의 역사에서 보수적 중산층의 관념에 도전한 선구적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 (중략) ...


   1938년 12월, 헤네인은 카이로에서 '퇴폐미술이여 영원하라'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프랑스어와 아랍어로 발표하였다. 당시 이집트에 살고 있던 서른 한 명의 지식인들이 이 선언문에 서명하였는데, 그들은 선언문을 통해 "몇몇 사람들은 예술을 종교, 성별 혹은 출신 주에 대한 편협에 예속시키려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이 터무니 없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 선언문이 이목을 이끄는 것은 '퇴폐미술'이라는 단어 때문인데, 이는 1937년 7월에 독일 뮌혠에서 시작되어 이후 4년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13개 도시에서 약 325만 명의 방문객들을 불러 모았던 나치 정부의 <퇴폐미술>전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퇴폐미술>전은 전체주의 문화의 징표로서 나치 정부가 제도적으로 모더니스트들의 상상력을 박해하도록 하였고, 이를 통해 나치의 기준에서 생물학적으로 '퇴폐'한 존재들에 대한 조직적 폭행을 정당화하였다. 이 전시에 대하여 브르퉁은 생물학적, 정치적, 도덕적 열등함에 대한 국가적 정의가 창조적 아이디어, 이미지 그리고 예술의 가치를 측정하는데 사용되었고, 이는 일종의 검열장치로 작용하여 문화를 획일화하도록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 1938년의 선언문 <퇴폐미술이여 영원하라>는 헤네인을 비롯한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이 1939년 1월 9일에 예술과 자유 그룹을 설립하는 데 잇어 중요한 시작접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그들의 선언문을 읽은 사람들은 예술과 자유 그룹을 '퇴폐미술집단'이라고도 불렀다. 선언문을 통해 밝힌 예술과 자유 그룹의 목표는 아래와 같았다.


1. 예술과 문화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

2. 현대에 유망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용한 내용을 엮어 현대 출판물로 발간학 그에 대해 강연을 하는 것.

3. 이집트 청년들을 전세계의 사회, 예술, 문학 운동으로 교육하는 것.


...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