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년 11월 09일
<안소현 개인전 The warmth and fantasy of everyday>
* 일시: 2018. 11. 06(화) - 11. 11(일)
* 장소: 사이아트 도큐먼트
* 안소현 작가 홈페이지: http://www.sohyunart.com/
* 사이아트 갤러리 홈페이지: http://www.cyartgallery.com/
기다리고 있던 안소현 님의 개인전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간 전시회에는 K현대미술관의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전>에서 보았던 작품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분당 휴맥스 아트룸 공동전시전에서 보았던 최근 작품들과 더불어 처음 보는 작품들도 있어 더욱 반가웠다. 전에 보았던 작품들이 전시된 높이와 배치가 달라짐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주어서 그 또한 즐거웠다. 개인적으론 전시 기간이 짧아서 너무 아쉽다. 작년에 데뷔하신 이후 짧은 시간에 나를 비롯한 많은 팬들을 가지실 정도로 사랑 받는 분이신데, 좀 더 길고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호감으로 다가갈 그림일 텐데, 관심 있는 분께선 서둘러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안소현 님의 작품에 대한 이전 게시물은 다음을 참고하세요.
https://vanodif.tistory.com/1163
* https://vanodif.tistory.com/1184 (→ * 가 붙은 작품에 대한 감상은 이 포스트에 실려 있다.)
안국역에서 윤보선길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한 사이아트 도큐먼트. 갤러리는 살짝 독특한 구조로, 옥외전시부스에
이렇게 <PINK WALLl> 한 점이 전시되어 있고, 나머지는 건물 앞면의 지하 갤러리에 있다.
전시장 내 동영상을 올리고 싶었던 이유는 작품 배치가 독특했기 때문이다. 안 작가님 전시 파트로 들어서면 오른쪽 벽면에 <황혼> 작품이 등을 돌린 채 세워져 있다. 물리적으로 접하는 첫 작품이기 때문에 <황혼>이 시작인 줄 알았는데, 다음 작품들을 보니 분위기가 이상한 거다. 왜 이렇게 <황혼> 혼자 붕 뜬 것 같지. 나머지 작품들을 휙 둘러보고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작품목록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어디로 갈까>가 1번이었고, 전시장 내에 있는 작품들 중에서는 <황혼>이 제일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옥외전시부스에 홀로 걸려 있는 <PINK WALL>이 모든 전시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후 다시 작품들을 둘러 보다가 문득 마음이 울컥했다. 이 전시는 한바탕 삶이구나. 어느 누구의 하루, 또는 어떤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 보다가, 살다가 나가는 구조로구나. 이번 The warmth and fantasy of everyday는 접때 안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두랑고 Durango 시리즈인 것 같은데, 과연 자동차를 타고 구글맵의 두랑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네를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길에서 보는 그들 삶의 장면 장면들은 그대로 내 삶 속에 체화된다.
물리적으로 가장 앞쪽에ㅡ등을 돌린 채ㅡ위치했으나 사실은 가장 마지막에 감상하게 되는 작품인 <황혼>을 뛰어넘어 전시 내용상 첫번째 작품이 되는 <어디로 갈까>부터 감상하기로 한다.
안소현 Sohyun Ahn
어디로 갈까 (Where are you going)
Acrylic on canvas
65.5 x 45.5 cm
2018
그림 속 여성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녀는 어쩌면 집에 있기 싫어서, 햇살을 쬐고 싶어서 무작정 밖으로 나선 건지도 모른다. 햇살 한가득 내리쬐는 거리에 사람은 없고 다른 그 어떤 생명도 없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없다. 단지 '어두워지면 길을 밝혀 줄게'라는 듯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가로등 하나만 말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다. 오른쪽에는 무엇인지 알지 못할 건물 또는 구조물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다. 자칫 시간대를 잘못 맞추었다면 그녀는 미지의 그림자에 삼키웠을 지도 모른다. 삶에 우리가 태어났다. 어디로 갈까. 우리는 어떤 길을 걸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안소현 Sohyun Ahn
새벽의 또르띠야 (El amanecer tortilleria)
Acrylic on canvas
116.8 x 72.7 cm
2018
새벽이 되었다. 가도가도 사람을 볼 수 없을 것 같던 거리에 마침내 가게가 나타났다. 무겁지 않은 식사. 가볍게 요기라도 하라는 듯 또르띠야를 제공하는 가게다. 마치 '길을 가려면 든든히 먹어두는 게 좋을 거야' 라는 것처럼 . El amanecer는 스페인어로 여명, 동틀 녘을 의미한다. 안소현 님의 작품에는 늘 조금이라도 풀이나 자연이 등장하는데, 아무 것도 없던 <어디로 갈까>를 지나 <새벽의 또르띠야>에 이르자 드디어 식물, 즉 다른 생명이 등장했다.
별 것 아닐 것 같은 저 전봇대줄이 몹시 인상적이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어쩌면 이 작품의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길>의 전봇대선과 이미지가 연결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정신의 교감.
이 작품에서 Tortilleria EL AMANECER 1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여서 깜짝 놀랐다. 안소현 님 작품에는 외계어 추상적인 글자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틀 녘 amanecer'이 더 확실하게 인식된다.
그리고 이 선인장들은 내가 인식하는 안소현 님의 귀여운 유머다. 한조각 네모난 바닥의 흙에 심겨져 잘도 자라고 있는 이 명랑한 선인장들은 의외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왼쪽의 키 큰 선인장들은 담장을 훌쩍 넘어 담장 밖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그 옆의 삼지창 선인장은 키가 작아 그럴 수 없어 잔뜩 가시가 뿔로 돋아났다. 그림자를 보라. 속상해서 울끈불끈하는 것 같지 않은가? '뛰어 봐, 삼지창, 폴짝!' 안 작가님의 작품을 보다 보면 종종 작품 속 식물들이 인간들 혹은 감상자인 나를 구경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뻐기며 다른 모든 사물을 우리가 관찰하고 통제하는 대상으로 손쉽게 인식해 버리지만, 기실 이 세계에서 관찰을 당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 인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연극을 관람하듯 자연들이 인간을 보며 '매머드와 공룡들이 저러다 멸종했지, 그치?'하며 우리의 멸종을 두고 내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안소현 님 작품 속 자연들은 친인간적이며 다정합니다.
안소현 Sohyun Ahn
심심한 날 (Boring day) *
72.7 x 53 cm
Acrylic on canvas
2018
안소현 Sohyun Ahn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Something good happens) *
72.7 x 53 cm
Acrylic on canvas
2018
이 두 작품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전>에서는 위아래로 배치되었던 이 두 작품이 이번 전시에는 양 옆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서 또 다른 생각이 돋아났다.
이렇게 두고 보니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의 붉은 상의를 입은 남성이 <심심한 날> 소녀의 오빠인 것 같지 않아요? 발걸음도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걸어가는 오빠는 동생을 혼자 두고 친구 혹은 다른 어떤 재미난 일을 찾아 집을 나섰고, 유일하게 함께 놀아주는 오빠가 나가 버리자 홀로 남겨진 동생은 심심하기만 하다. 오른쪽 나무의 흐드러지게 쏟아진 그림자는 이렇게 다정하지만, 소녀는 나무의 그림자와 놀 마음이 없다.
어린 시절에는 하루가 참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어서 커서 어른이 되면 재미난 일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이 되면 앞길엔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희망에 부푼 푸른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안소현 Sohyun Ahn
바람의 방문 (A wind visit)
60.6 x 90.9 cm
Acrylic on canvas
2018
그런데 바람이 방문했다.
이 작품은 전에 분당 휴맥스 아트룸에서 보았다. 그때도 이 작품 앞에서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하지만 나의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털고 생각을 지웠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다시 보아도 그 생각은 더 깊고 강렬하게 나를 흔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따라가 보았다.
한 눈에 너무나 아름다운 이 작품은 실제로 바람이 스치는 느낌이 든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거리와 가게, 가게 앞의 한 줌 풀. 청량한 음료수를 파는 가게인 듯 문에는 쥬스가 그려져 있다. 사람이 없는데 커튼이 혼자 펄럭인 것으로 보아 바람이 커튼을 열고 가게로 들어간 모양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께엔 짐작하겠지만 당연히 내게는 죽음이 떠올랐다. 가게는 몹시 신선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게 내부는 어둡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저 가게는 예쁘고 친근하게 장식된 무덤인지도 모른다. 저렇게 정성스레 꾸민 것으로 보아 고인은 남겨진 살아있는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이런 묘지라면 슬프지 않은 그리움을 안고 언제건 편하게 방문할 수 있을 것 같다. 가게를 묘지로 해석했을 때 바람의 존재를 생각해 보자. 그 바람은 안에서 밖으로 나온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에 있는 바람, 즉 고인의 영혼이 밝은 우리 산 자들의 세계로 방문 나온 것인지도. 뭐, 지난 후기의 <Table>에서 떠올렸던 고대 이집트 연상과 연결되는 셈이다.
당연히 이것은 나의 비약된 상상이다. 이 작품이 내게는 이렇게 와닿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감상에는 나의 개인적 경험과 인상들이 녹아나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공감을 얻지 못할 감상임을 알고 있다. 밝고 맑게만 보자면 한없이 밝고 맑고 명랑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안소현 님의 작품이죠.
이번 전시를 '인생의 길'로 보았을 때, 나는 이 작품에서 생애 최초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것으로 이해했다. 심심했을지언정 희망으로 가득찼던 삶에 처음으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가 새겨진 것이다.
안소현 Sohyun Ahn
오늘 하루는 (Today is...) *
65.1 x 45.5 cm
Acrylic on canvas
2018
마음이 아픈 오늘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어 보아요. 그 어떤 고통도 녹여줄 맛이랍니다. 삶이란 찰나의 위로로 가려진 고통으로 점철된 것이니까요.
안소현 Sohyun Ahn
다 괜찮을꺼야! (No Problem!) *
130.3 x 80.3 cm
Acrylic on canvas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괜찮을 거니까. 도저히 다시는 일어서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계속된다. The show must go on.
안소현 Sohyun Ahn
엄마 손 잡고, 안녕 강아지야 (Mommy hand in hand. hi, dog) *
31.8 x 40.9 cm
Acrylic on canvas
2018
안소현 Sohyun Ahn
청소부 (Cleaner)
12 x 22.7 cm
Acrylic on canvas
2018
안소현 Sohyun Ahn
야자수 (Palm tree)
Acrylic on canvas
20.2 x 40.9 cm
2018
햇살이 짠한 거리. 파란 하늘. 커튼이 있는 창문. 그리고 감옥 창살 같은 1층 창문 앞을 야자수가 보초서고 있다. 야자수의 유쾌한 그림자가 창문과 벽을 긁어 내리고 있고, 하늘과 구분되지 않는 색의 담을 넘어 한 그루 나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야, 뭐해?"하며 야자수에게, 아니면 그들을 보고 있는 내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안소현 Sohyun Ahn
햇빛에 담긴 날 (A sunny day)
Acrylic on canvas
80 x 130 cm
2018
이 작품도 휴맥스 아트룸에서 본 기억인데 일행은 아니라 하네. <햇빛에 담긴 날>이 제목이다. 제목 그대로 작품 앞에 서면 피할 곳 없는 쨍한 햇볕이 따갑도록 따뜻하다. 작품에 놓여 있는 건물과 사람과 차는 그대로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 같다. 그들을 보고 있는 내 마음 역시 한낮의 빨래가 되어 뽀득뽀득 살균된다.
참 평범한 일상을 담은 것 같은데 역시 안소현 님의 작품에선 물음표가 빠지지 않는다. 저 뜬금없는 풀 한 포기는 대체 어째서? 자동차가 저 위치에 세워졌다면 모르긴 몰라도 풀 위를 지나쳤을 확률이 큰데, 생뚱맞은 저 풀은 저기서 뭘 하고 있는가? 그리고 바닥의 노란 봉투들은 담을 것도 없어 보이는데 왜 두 봉지 씩이나? 일행은 대뜸 '안 작가님이 빨래를 좋아한다고 했지? 청소도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깨끗하고 햇살의 청결함이 느껴지는 안 작가님의 그림은 그런 성향을 반영하고 있는 걸까 싶기도 하다만.
건물들과 자동차, 사람, 노란 봉투, 그리고 풀 한 포기.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그들은 제각각의 상념에 잠긴 듯 같은 공간에 공존한다. 어쩌면 내내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이 삶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있는 것일지도.
자세히 보면 묘하게 창백한 대문도 인상적이고
난간의 그림자도 예쁘다.
안소현 Sohyun Ahn
길 (Road)
Acrylic on canvas
260.6 x 80.3 cm
2018
<길>.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이번 전시의 히어로라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화면으로 보니 느낌이 전혀 안 사는데, 실제로 보면 크고 긴 작품이다. 그리고 화폭을 가로로 절반으로 나누어 아래는 핑크가, 위는 파랑이,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초록이 사이좋게 연결시키며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집으로 상징되는 인간과 하늘 사이를 자연이 연결시킨다면... 천지인인가?ㅡ는 무슨 헛소리;;. 마치 화폭 중앙 즈음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처럼 적절히 환하고 적절히 덜 환한 작품. 참 깔끔하고 단순해 보이는 이 작품은 굉장히 감상할 것이 많습니다. 아마 또 다시 본다면 또 다른 것을 한참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다. 이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이리 보고 저리 사진 찍고 동영상에까지 담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선은 참 따뜻하죠. 안 작가님 작품답게 노릇노릇 구김살 없는 햇볕의 온기를 한껏 느껴보시길 바란다.
안소현 님 작품의 감상 포인트로는 햇볕, 자연, 모호한 장소, 휴식, 미스테리 스릴러(는 내 개인적 취향), 그리움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림자' 역시 만만찮은 포인트다. 나는 안 작가님 작품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 참 좋다. 깨끗하고 선명하게 묘사된 사물들이 전달하는 명쾌한 사실적 느낌과 함께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지만 몽환적으로 표현된 사물의 그림자는, 냉정한 현실의 일상에서 상처받은 마음들을 위로하고자 내미는 작가의 보드라운 손길같다. 요란하지 않지만 들여다 보면 볼수록 재미나고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매력적인 그림자들. 그림자가 또 하나의 '치유'가 될 수 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에서 내게는 이 그림자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위의 짧은 영상을 따라 가보면 나무마다 가지고 있는 그림자가 제각각이다. 그리고 마치 그림자에서 쏴아ㅡ하는 바람 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다. 맨 오른쪽에는 실체(나무)가 없고 그림자만 등장한다. 덕분에 그림자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게 된다. 다른 나무들을 보면 그림자와 실체의 일부가 닿아 있는데, 이 그림자만 유독 실체가 빠졌다. 애초 나무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걸까? 처음부터 그림자만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졌다거나. 아... 이러다 또 음모론으로 빠지겠다. 그만 넘어가도록 하자.
나무들과 벽 사이의 거리가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키작은 나무의 그림자가 유독 몽환적이다. 마치 바람이 그 나무의 머리만 흔들어 쓰다듬고 간 것 같다. 막상 나무는 작지만 씩씩하게 서있는데 말이다. 이 그림자에 특별히 눈길이 간 것은 내가 만난 안 작가님의 이미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작고 가녀린 외모에 부서질 것 같던 마음을 애써 단단하게 모아 서서 삶을 살아가는 것 같던 느낌. 그녀의 곁을 지키는 강하고 믿음직한 분은 작은 나무 곁을 지키는 크고 든든한 나무 같다. 큰 나무가 있어 작은 나무는 푸르름을 마음껏 뽐내며 안정을 찾고, 그런 작은 나무를 보는 큰나무의 마음은 황금빛 기쁨이 반짝인다.
이런 충만한 느낌. 손을 내밀어 작은 나무를 따뜻하게 안아 쓰다듬어 주고 싶던 마음. 따뜻한 햇살 아래 나무가 행복했음 좋겠다.
그리고는 바로 옆의 이 그림자는 당혹스러웠는데, 마음이 아프면서도 뭔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우아하고 곱디 고운 나무의 그림자는 잘렸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면에서 보아 그저 막대기 같아 보이는 표지판이 그림자로 당당하게 자신을 알리고 있다. 실체보다 더 실제같은 그림자. 의외로 그림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은, 눈에 보이는 사실과 의식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보잘것 없는 실체 표지판에 비해 너무나 당당하고 명랑한 저 그림자에 반했다.
그림자를 보고 나서 나무들을 보았다. 한 그루 한 그루 같은 나무가 없다. 마치 세상에 같은 사람 없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이처럼 다채로운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삶이 나쁘지만은 않겠다. 지루하진 않을 테니까. 실제로 작품 보시면 나무들이 굉장히 잘생겼습니다? 어디, 나무들의 인물... 목물;;을 하나씩 볼까요?
벽이 끝나는 왼쪽 끝까지 뒤에서 감상자를 기웃거리는 나무들.
다시 보니 나무들이 그림의 주인공인 것 같다. 커튼콜 때 인사하며 환호받는 발레 무용수분들 같지 않아요?ㅡ는 뭐, 최근 본 발레의 감동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군. 쿨럭;;
이렇게 감상하면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감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감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했죠.
이 그물은 뭘까요? 그리고 저 원통뿔은 왜 저기 서있는 걸까? 일행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공사하는구먼'이라 답했다. 담 뒤쪽으로 공사를 하고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고 저렇게 해둔 거라고. 뭘 보고 공사를 한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내 N의 저항인 것 같다. 이상하다, 일행도 INTJ인데.
내가 아는 안 작가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베껴 그리는 분이 아니다. 안소현 님의 큰 재능 중 하나가 바로 '적절한 삭제'라고 늘 생각하는데, <알쓸신잡>에서 이영하 소설가께서 "작가에게는 '무엇을 쓰는가' 만큼 '무엇을 쓰지 않는가'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쓰지 않는 것이 정말 힘들다"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대해 극찬하신 바 있다. 내가 안소현 님의 작품에서 감탄하는 것도 풍경에서 필요 없다 여기는 부분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과감하게 삭제하고, 또 어떤 것은 외계적으로 이해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장치로 더해 넣는 점이다. 그런 특징을 알기 때문에 저 그물과 원뿔을 삭제하지 않고 남겼거나 더한 이유가 궁금했던 거다.
그리곤 저 붉은 그물까지 감상하며 시선을 들었는데 이 장면이 보였다. 처음엔 가만히 심장이 간지러웠다.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뭐지? 담을 보고 나무를 보아도 앞서 감상했던 호기심 가득 웅성이는 나무들 외에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어, 어라...? 딱 찾으셨나요? 실제 작품을 보더라도 자세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이 좋은 분들께는 금방 보이는 것이려나. 저와 마찬가지로 한눈에 찾지 못하신 분들은 다음 동영상을 따라오시죠.
처음에는 엇, 했다가 에이, 시작하곤 말겠지, 곧 없어지겠지 싶었다. 그렇게 따라간 가느다란 전선은 금방이라도 꺼질듯 희박하게 숨쉬는 말기환자마냥 간신히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며 하늘을 건넌다. 나뭇가지에서 전선이 사라지자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쳤다가, 나무를 지나 하늘에 대견하게 걸려있는 선을 보자 이유 모를 반가움이 차오른다. 또 다시 나무로 사라지는 선은 아니, 나와 밀당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고. 그러다 마지막 나무를 지나고 파란 하늘을 꿋꿋하게 걷는 선을 보자 왠지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응원하고 싶어진다. 조금만 더 힘을 내! 그러다 하늘 속으로 퍽, 사라져 버리는 선. 아...! ㅡ싶었는데 곧 짠, 하고 등장하더니 목표했던 맞은편 전봇대까지의 길을 완주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선들과 함께 최종 목적지인 창문 안으로 골인한다. 길은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의 길도 있었다.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은 결코 볼 수 없는 길. 물질적 세상에 함몰된 눈을 들어 아무 것 없이 공허할 것 같은 하늘을 보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자들이 있다. 혹자는 '땅을 보라'며, '땅의 삶을 살아야 한다'며, '환상의 세계를 벗고 물질의 세계에 순응하여 적응하라'며 다그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늘을 볼 줄 모르는 자의 주제 넘은 오지랖에 불과하다. 땅을 사는 자들은 그들에게 맞는 땅을 즐기면 되고, 하늘을 사는 자는 그들의 하늘을 즐기면 된다. 비록 하늘을 걷는 일이 땅을 걷는 대다수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 공허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볼 능력이 없다 하여 하늘의 길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하늘을 걷는 자들은 자신에게 맞는 세계를 사는 것이다. 선택은 철저히 개개인의 몫이고, 자신의 것과 다른 선택을 했다 하여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무식한 짓이다. 예술이야말로 다른 어떤 장르보다 하늘의 길을 걷는 자들의 마음과 손끝에서 빚어지는 작업이다. 하늘에서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저 선은, 기실 하늘의 빛 속에 빛나고 있어 땅 위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니.
이 작품의 제목이 <길 Road>임이 참 적절하지 않은가. 전시 전체의 구성에도 잘 어울리는 제목인 데다, '삶'을 '길'로 이해하는 것에도, 그리고 그 길에 지상 만이 아닌 하늘의, 물질이 아닌 비물질의 세계와 길도 있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보면 볼수록 크고 깊다.
전시장을 가로질러 맞은편 벽에 걸린 <새벽의 또르띠야>에서 아직 시작 단계인 삶의 불분명한 하늘을 복잡하게 펴져 나가던 전깃줄들이, 이 작품에선 방향을 결정한 하나의 선으로 뚝심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아마도 이 전시의 작품 속을 사는 누군가가 드디어 삶의 확고한 목표와 방향을 정했고, 그 길을 인내심 있게 걸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눈으로 더듬어 찾던 전깃줄의 완주를 확인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선을 그리면서 안 작가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사라질 듯 말 듯 위태롭지만 끝내 대견한 이 선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안 작가님의 맑고 투명한 땀방울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리고 햇살 아래 미소지으며 땀을 훔치는 안소현 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이 삶을 걷는 저를 발견하여 교감하시는 분, 계신가요?'
안소현 Sohyun Ahn
두 남자의 방문 (Visit of two men) *
145.5 x 89.4 cm
Acrylic on canvas
2018
지난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전>에서는 높이 걸려 있어 자세히 볼 수 없었던 이 작품이 내 눈높이에 맞게 걸려 있어 반가웠다. 그리고 다시 본 작품에선 음... 역시 미스테리 스릴러하다. 이렇게 뾰족하니 나온 철근들은 으스스하고?
가까이서 본 두 남자는 어... 얼굴이 없다!ㅡ'눈코입까지 그려 넣기엔 공간이 넘 작잖아'라고 따지고 싶겠지만 안 작가님은 몹시 가는 붓으로 작업을 많이 하신단 말입니다 흥.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내, 내가 무서워질 것 같으니 여기서 그만하기로 한다. 이 작품의 소소한 미스테리 스릴러물설은 핑크 별표에 연결된 이전 후기를 참고하세요.
안소현 Sohyun Ahn
조각연구소 (Sculpture Laboratory)
Acrylic on canvas
260.6 x 80.3 cm
2018
안소현 Sohyun Ahn
못다한 말 (Unfulfilled talk)
Acrylic on canvas
90.9 x 60.6 cm
2018
안소현 Sohyun Ahn
황혼 (Twilight)
Acrylic on canvas
45.5 x 65 cm
2018
안소현
PINK WALL *
193.3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