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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안소현 Sohyun Ahn

by Vanodif 2018. 8. 28.

* 1차 포스팅: 2018년 6월 14일 목요일

* 1차 수정: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 2차 수정: 2018년 8월 28일 화요일





이것은 공동 전시에서 본 안소현 작가님의 작품들을 따로 모아 정리한 포스팅이다. <안소현 개인전>에서 만난 작품들은 해당 포스팅을 연결해 둘 테니 그 포스팅을 참고하길 바란다. 이 포스팅은 새로운 작품을 볼 때마다 새로고침으로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 노란색 하이라이트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2018년 5월 <안소현 개인전: 휴식의 숨> @ 갤러리라이프

http://vanodif.tistory.com/1163?category=363389


* 2018년 11월 <안소현 개인전: The warmth and fantasy of everyday > @ 사이아트 도큐먼트

https://vanodif.tistory.com/1290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 Geek Zone @ K현대미술관>에서 본 작품들



"K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부스가 너무 좁아서 작품들이 심지어 3층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하지만 작품 수는 가장 많아요."


지난 5월에 만난 안소현 작가님은 이 말을 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벽 하나에 작품 하나를 주어야 할 안소현 님의 작품을 한 벽에 다닥다닥 걸어 두었단 말이지. 그것도 3층으로...?!@#$@? 하는 심정으로 찾은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 전시의 안소현 님 부스에 섰다. 처음 든 생각은 '그런데 왜 안 작가님의 작품이 이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 전시에 있는 거지? 하는 것이었다. 가장 정돈되고 차분한 작품들이 아닌가. 그러다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깨닫게 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괴짜>가 맞네, 하하.' 이 부스에서 두 번째 들었던 생각은 역시 아쉬움이었다. 아... 이 작품들을 이렇게 다닥다닥... 그리고는 사진을 찍으려 폰을 들자 또 한숨이 나왔다. 내 키로는 저 작품들이 담기지 않는다. 각도가 일그러져. 아쉬움에 한숨을 쉬고 또 쉬다가 그래도 이렇게ㅡ비교적ㅡ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어디냐며 위로를 삼았다. 그래, 작품 수 하나는 절대 강점이 맞다.


안 작가님의 설명을 듣지 못한 감상이라 마음껏 오해의 상상 가득한 소감을 쓸 예정이다. 후에 언젠가 안 작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그때 내용을 첨가하겠다.


이 전시에 걸린 작품들은 <안온한 시간들>이라는 주제를 갖고 있다 한다.





정면에서 찍은 사진은 조명 때문에 작품이 가린다. 해서 옆에서 찍은 사진도 싣는다.




안소현 

초대 

162.2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6


아름다운 작품이다. <텅 빈 대화>와 연결선상에 있는 듯한 분위기. 그런데 <텅 빈 대화>가 주는 평온하면서도 한적하고 서늘하며 명상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이 작품은 온기 감도는 축제의 느낌이다. 위의 열대나무에서 아래로 터지는 축하폭죽과 하얀 꽃, 하얀 천이 씌워진 의자 두 개로 보았을 때, 어쩌면 이곳은 결혼식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핑크빛 미래와 마음이 담긴 결혼식의 자리에 가장 함께 하고픈 세 사람이, 조촐하지만 따뜻하고 즐거움 충만한 자리로 초대 받았다. 조금은 삐딱하게 서로를 바라보듯 편안하게 배치된 의자들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신부가 머리에 썼거나 손에 들었을 것 같은 오른쪽 흰 의자에 놓인 과일 나뭇가지는 향긋하고 달콤한 열매가 사랑 가득 열리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인 걸까. 천을 씌우지 않은 저 의자 셋은 그들이 낳고픈 아이의 숫자일 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얼굴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도장 찍듯 서둘러 20분만에 허둥지둥 치르는 결혼식이 아니라, 정말 꼭 축복을 받고픈, 진심 다해 축복해 줄 사람 세 명과 함께 풍성하게 즐기는 결혼식을 표현한 것인 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아랫부분에만 둘러진 테이블보는 색상이 오묘한데, 무지개빛 감도는 하얀 실크인 듯 묘한 색감이 참 아름답다. 보고 있으면 식탁 주위로 흘러 나오는 따뜻한 대화와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덩달아 마음이 즐거워진다.




안소현 

기란 게스트 하우스

90.9 x 65.1 cm 

Acrylic on canvas 

2016


보라색이 실제 색감보다 좀 밝게 나온 것 같은데... 실제 작품의 보라색은 참 아름답다. 하늘의 파란색과 함께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참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 사진으로 올리고 보니 주황색 테두리도 눈에 띄네. 안소현 님 작품에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와 나무, 풀, 선인장 등 식물이 자주ㅡ는 거의ㅡ등장하는데, 또 한 가지,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로 향하는 듯한 문, 창문, 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액자 등도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그런 문이 없는 이 작품에서는 창문처럼 뚫린 저 벽이 그 역할을 하는데, 생뚱맞게 그곳에 간판이 걸려 있다. 'KIRAN' 말고는 제대로 읽을 수도 없는 간판이 말이다. 이 작품은 색감 말고는 딱히 해석할 만 한 것이 내게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또 한참 보면서 웃었다.




안소현 

pink wall 

193.3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7


아... 이렇게 사진으로 보아도 아름다울 텐데, 실제로 보면 이 작품의 핑크빛은 몹시 아름답다. 보는 내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 것만 같을 정도다. 이 장소는 어딜까? 알 수 없지. 어떤 건물 안이겠지. 어떤 건물인지 알 길은 없다. 그런데 깨끗한 바닥 위에 또 엉뚱하게 선인장이 놓여 있다. 선인장을 가만히 보자. 사진으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겠지만 끝에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저 선인장들만 가만히 보다 보면 마치 선인장 부분만 따로 떨어진 섬인 것만 같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만난 무인도 같지 않은가? 아래에 깔린 갈색 흙밭침은 섬의 흙이 되고, 회색 돌멩이는 점점 커져 바위가 된다. 그리고 초록 선인장은 섬에 우거진 숲이고, 붉은 열매는 화사하게 만개한 꽃이다. 


그러다 문득, 섬은 다시 줄어들며 선인장으로 변한다. 그러더니 이 작품에서 살아있는 유일한 것은 선인장 뿐임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저 커다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즐기는 이는 다름 아닌 선인장이다. 한가롭게 일광욕 중인 선인장. 저 공간의 주인은 선인장이다.


문제는 선인장 옆의 문이다. 손잡이가 없으니 문은 열린 걸 게다. 그런데 열린 문의 경첩이 없다. 그런 것 다 차치하고 문 너머를 보라. 무엇이 있나? 모른다. 뭔지 모를, 어딘지도 모를 어딘가가 펼쳐져 있다. 노을진 하늘이라기엔 왼쪽 창 밖의 하늘이 너무 푸르다. 그렇다면 문 너머의 공간은 대체 어디인 걸까? 바로 그것이 안소현 님 작품 감상의 또 한 가지 묘미다. 알 수 없는 공간, 신비가 존재하는 세계로 가는 비밀의 문. 달려가 저 문으로 뛰어 내리면 그대로 하늘을 날아 환상의 세계로 가 닿을 것 같다.


→ 엇 그런데 다시 보니 그림자가 있네. 그림자가 비친다는 것은 이곳이 벽이란 뜻인데, 그렇담 벽감이려나? 뚫린 문이 좀 더 상상하기 재미나긴 하지만, 그렇다면 신비의 거울이나 닫힌 창 정도로 하자. 벽감이라 하더라도 색감이 신비로운 건 여전하다.


아 참, 햇살과 그림자가 주는 온기와 서늘한 여유도 잊지 않고 감상합시다.




안소현 

푸른집 랑골리 

53 x 65.1 cm 

Acrylic on canvas 


너무 높아서 자세히 감상할 수 없었던 작품. 여기서부터 아래로 두 개까지 총 세 작품과 다른 쪽 벽에 걸린 작품들은 처음 보았을 때 안 작가님 작품인지 몰랐는데, 아마 초기 작품들인 것 같다. 지금의 반듯한 선이 편안한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이 때 역시 독특한 색감이나 기하학적 무늬, 햇살에 대한 감각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안소현 

< 내 모자야 >

53.0 x 72.7 cm 

Acrylic on canvas 

2016


평화롭고 화목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다.  바닥의 저 촛불 옆 그림들은 뭘까요?




안소현 

소녀의 불꽃 

53.0 x 65.1 cm 

Acrylic on canvas 

2016


햇살이 아니어도 불꽃의 빛과 온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더불어 소녀의 마음을 채우는 기대감과 행복감도 전해온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 작품.




안소현 

정류장

193.9 x 130.3 cm 


이 벽에 걸린 작품 네 점이 참 좋았는데, 난 왜 사진을 이 모양으로 찍었지.ㅠ 오른쪽 하단이 잘렸다. 찍으면서 조명 때문에 속상해서 서둘러 찍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좀 복잡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재미나다. 이 작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과 흡연구역 Smoking Booth. 재미난 건 흡연구역이다. 폐쇄된 이 공간은 바깥 문의 살에서 안쪽 벽에 비치는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온통 '감옥'인 것 같다. 좁고 어둡고 답답한 감옥 또는 벽장. 그런 분위기는 흡연구역 바로 앞을 막은 가로대로 더욱 강조되는데ㅡ이렇게 막으면 들어가지 말란 뜻이지ㅡ, 심지어 그 가로대는 '경고' 또는 '금지'의 의미를 담은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안소현 님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담배 피우면 죽어요."


죽음에 이르는 감옥 혹은 지옥과도 같은 흡연구역과 대조되는 버스정류장은 열린 공간에, 깨끗하게 정돈된 모든 것이 드러나 있는 천국을 연상시킨다. 버스가 올 때까지 앉아 쉴 수 있는 의자에는 화분도 놓여 있는데, 그곳에는 두 개, 혹은 두 줄기의 나무가 심겨져 있다. 두 나무의 붉은 그림자는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보일 정도로 이질적인데, 바로 옆의 네모난 창문처럼 생긴 포스터는 앞서 <pink wall>에서 보았던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연상시킨다. 혹은 백설공주의 마법 거울이라거나?


어디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인 걸까요.




안소현 

8.11.S.Z

193.9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7


일단 제목을 보자 <8.11.S.Z> 이게 뭐지? 싶지? 





이겁니다. 센스있는 작명이다. 왜 <8.11.S.Z>일까요? 알 수 없다. 어디서 보신 것을 이렇게 해석하신 걸 수도 있겠고, 아니면 작가분의 개인적 의미가 담긴 숫자와 알파벳일 수도 있다. 이 역시 높이 걸려 있어 자세히 즐길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가운데 열려 있는 공간 안의 둥그런 설치물이 자세히 보면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게 뭔가요?' 물어 보면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하며 쑥스럽게 웃지 않으실까 싶은데. 하하. 볼수록 예쁜 설치물이다. 


입구 양쪽에 있는 창은 역시나 내게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통로'로 인식된다. 그 창문 앞에 있는 주차공간을 원통뿔과 플라스틱 박스가 떡하니 막고 있다. 마치 '이곳에 들어서지 마시오'라는 듯 붉은색으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주차공간에서 <8.11.S.Z> 입구로 향하는 저 커플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자신들도 모른 채 끌려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저 건물 안에서는?






안소현 

Table 

193.9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7


이 작품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왜인지 모르게 이 날 전시에선 온통 고대 이집트적 상념이 회오리쳤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였다. 뜬금 없이 고대 이집트? 싶겠지만, 희한하게 그러했다. 해서 개인적으로 가장 즐겁게 감상한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적 상념 외에도 이 작품은 의외로 감상할 거리가 많았다.


먼저 장소를 보자. 여기는 어디일까? 레스토랑일까?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자. 레스토랑일까? 작은 사진으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저 식탁 뒤에 있는 문은 무엇일까? 설마 레스토랑 입구일까? 말이 안 된다. 분명히 문에 금색 손잡이 고리는 달려 있으나, 저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엔 앞에 있는 식탁의 모서리가 막힐 것이고, 바깥으로 열린다 해도 식탁에 앉은 사람이 방해를 받게 된다. 왼쪽에 자리도 남아 있는데 그렇게 배치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문은 그냥 창고문이든가 해서 사용하지 않는 문이 된다. 그렇다 해도 식사를 하기 위한 레스토랑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벽쪽에 있는 의자가 너무 벽쪽으로 붙어 있기 때문이며, 그 앞에 사람이 앉을 수 없도록 식탁이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 개의 의자를 놓고 등을 보이고 있는 세 명 밖에 앉을 수 없는 식탁을 놓은 레스토랑이 얼마나 될까. 또한 '일반 손님들이 식사하기 위한 테이블'이라 보기에는 카펫도 아니고 저 무대와도 같은 낮은 단상 위에 식탁이 놓여 있음이 석연찮다. 저것이 나무로 된 낮은 단상일 뿐인지, 아니면 나무 부분 아래의 하얀 가로선이 그어진 회색 부분까지 연결된 높은 단상인지 또한ㅡ하필 작품의 오른쪽 끝 부분이 교묘하게 잘려진 관계로(내가 자른 것이 아닙니다)ㅡ분명하지 않은데, 만약 높이가 있는 단상이라면 이 식탁 부분은 오히려 무대, 혹은 좀 더 생각을 확장하자면 의식을 행하기 위한 '제단'이 된다. 자, 이 부분에서 고대 이집트에의 어이없는 연결을 시작하겠습니다. 나의 몽상적 유희니 반쯤 정줄 푼 상태로 읽으시죠.


일반 레스토랑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이 셋팅을 '특별한 의식을 위한 제단'으로 본다면 오히려 많은 것이 풀린다? 저 길다란 식탁을 가로로 반 가르는 그림자가 보이는가. 그리고 그 그림자 안에 있는 쪽은 벽으로 밀려 있어 살아있는 사람이 앉을 수 없으며, 등을 보이는 밝은 쪽은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것도? 여기에서 잠시 고대 이집트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고대 이집트는 남북으로 긴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나뉘어져 있었다. 농사가 잘 되는 비옥한 동쪽은 농지와 주거지가 있는 곳으로 '산 자의 땅'이고, 사막이 펼쳐진 강 건너 서쪽은 왕실공동묘지인 왕가의 계곡과 피라미드가 있는 '죽은 자의 땅'이다. 산 사람은 동쪽에, 죽은 사람은 서쪽에 거했다. 삼팔선을 두고 마주한 남북정상회담과도 같은 이 식탁에서 햇살이 비추는 남쪽은 산 자의 자리, 그림자가 드리운 북쪽은 죽은 자의 자리가 된다. 그렇다면 왜 죽은 자의 자리 뒤에 있는 문이 열릴 수 없는 시스템인지도 납득이 간다. 영혼이 드나드는 문은 굳이 열릴 필요가 없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가짜문'을 그리거나 만들어 두기도 했었고. 또한 문 옆의 저ㅡ예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와 연결된 통로 같은ㅡ무엇인지 알 수 없는 주황색 창인지 액자인지 또한 죽음의 세계로 통하는 장치일지 모른다.


겨우 이 정도로 고대 이집트와 연결시키다니, 억지스러운가? 그렇다면 조금 더 억지 부려 보자.





식탁의 왼쪽 아래에 놓여 있는 저 나무 화분을 보라. 저것이 어떻느냐고? 바로 오시리스-소카르의 곡식관으로 연결되는 겁니다. 음하하!


.......


이 무슨 토끼풀 뜯는 소리야 싶을 텐데. 토끼풀 뜯는 소리 맞고요. 이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장례와 의식, 신화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다.




작년 국립박물관에서 있었던 브루클린박물관 고대 이집트 전시를 기억하는가? 그때 1관의 스텝이 짜증나게 해서 엄청나게 준비했던 후기를 쓰지 않았더랬는데, 바로 그 전시에 왔던 소카르 곡식관이다. 정확히는 Corn Mummy지만, 고대 이집트야 2천년 전에 멸망한 문명이니 정확한 명칭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고대 이집트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신은 태양신 '라(또는 레)'와 함께 '오시리스'다. 오시리스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태양신의 지위를 이어 받은 신으로 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와 함께 지상을 잘 다스리던 중, 자신을 질투한 남동생 '세트'에게 살해를 당하지만, 강력한 마법의 신인 아내 이시스에 의해 부활한다. 부활한 오시리스와의 사이에서 이시스는 아들 '호루스'를 잉태하지만, 오시리스는 지상을 떠나 명계의 신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이다. 물론 이 이집트 신화의 부활 개념이 그리스도교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집트학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영생이나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개념도 5천년 전 고대 이집트에 이미 있었던 개념이죠.


고대 이집트는 삶 보다는 죽음 후의 영원한 삶을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해서 그들에게 있어 죽은 후의 영원한 삶을 사는 데 절대적인 심판자가 되는 '오시리스'는 가장 중요한 신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천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 이집트의 신들은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정권 교체, 정복 등)로 인해 다른 신들과 결합을 거듭한 결과 나중에는 3천 명에 가까운 신들이 등장하는데, 하여 이 신이 저 신의 특질을 나누기도 하고 두 신의 이름과 정체성이 결합하기도 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위의 관은 신왕국 때 최고 신으로 등극하는 프타와 오시리스, 소카르가 연결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매년 오시리스를 기념하면서 오시리스의 형상을 본딴 관에다 나일의 흙을 부은 후, 보리, 또는 옥수수나 에머밀의 씨앗을 심어 물을 주던 의식이 있었다. 당연히 오시리스의 부활을 기념함으로써 자신들 역시 오시리스를 따라 죽은 후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기원하는 행위다. 그때 오시리스 외 이처럼 매의 형상을 한 소카르 신의 형상으로 관을 만들기도 했는데, 소카르(Seker) 신은 하이집트의 오시리스에 해당하는 명계의 신이다. 그러니 오시리스의 형상을 한 곡식관과 소카르 형상을 한 곡식관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 브루클린 박물관 관련 자료: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154356


* 책 Plants and People: Choices and Diversity through Time 관련 페이지: 

https://books.google.co.kr/books?id=R5f9AwAAQBAJ&pg=PA326&lpg=PA326&dq=seker+grain+coffin&source=bl&ots=EQuPT1XcsU&sig=JkLlDlEvB3_nmjxFcibQgtofU6s&hl=ko&sa=X&ved=0ahUKEwippviokNXbAhWGiLwKHYLKC3gQ6AEIXzAO#v=onepage&q=seker%20grain%20coffin&f=false


국가적인 행사 외에 이 관은 개인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죽은 자의 장례 후 곡식관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심어 물을 준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 싹이 트면 그것을 보고 산 자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무사히 명계에 이르렀구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식탁 옆의 저 싹이 튼 나무 화분은 바로 그 곡식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음하하! 죽은 이들의 부활과 안녕을 기원하는 이 관 역시 햇빛과 그림자에 반쯤 담겨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관이 식탁 그림자 자리에 앉은 죽은 자들을 상징한다면, 오른쪽 구석에 있는 초록 잎을 자랑하는 화분은 빛의 자리에 앉은 산 자들을 상징할 수 있겠다. 이 잎을 보다가





잎의 하트를 발견하고는 깨알같은 재미를 혼자 누린 건 안 비밀. 근데 이게 끝일까? 안소현 님 작품인데 그럴 리가요.





화분 위 벽과 천장이 닿는 부분에 까메오처럼 박혀 있는 이 그림은 안 작가님의 <기다림>에 깔린 발매트의 문양을 연상시킨다. "뭔가 이국적인 느낌을 내고 싶어 그렸어요"라 하셨던 무늬. 나는 이 '이국적인 느낌'에서 고대 이집트를 떠올린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게 무슨 말이야' 싶을 텐데, 당연히 안 작가께서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그리진 않으셨을 것이다ㅡ일 뿐 아니라 이 후기 보신다면 너무 놀라진 않으셨으면 해요.;; 아시다시피 제가 이러고 놉니다. 하하.;; 워낙 해석에의 자유를 허용하고 즐겨 주시는 작가분이라 저의 삼천포 해석이 날개를 달고서 마음껏 날고 있어요.


물론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하지만 그 감상은 안 작가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니 다음 작품의 감상에서ㅡ바라건대ㅡ다루겠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 생각만으로도 가슴 저리는 그 아득한 그리움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그리운 이를 불러내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 세 명의 자리로는 부족하지만 찰나라 하더라도 저런 순간이 허락된다면, 심장 깊이 박힌 이 가시들이 조금은 위로를 받게 되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 장면을 잠시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준 안소현 님의 이 <Table>은 내게 있어 오랜 시간 망각 속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다시 불러내어 닦아 들여다 보는 '휴식'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이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맙고 또 즐거웠던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려주어서 고마워요.♥



#.

8월 26일 일요일에 두 번째 가서 본 이 작품은 다소 달랐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장소였는데, 처음 보았을 땐 당연히 레스토랑 실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두 번째에 가서 보니 앞의 하얀 가로선이 실외 도로의 선으로 보이는 거였다. 즉 밖에서 매장 안을 들여다 볼 때 보이는 장면 같았는데, 그러하기엔 창문이 없다고 여길 만 하다. 그래서 작품의 신비감이 상승했다. 일행은 단 번에 하얀 선을 길거리의 선이라고 말했는데, 일행의 말인 즉 '안소현 님 작품에 등장하는 '길'에는 선이나 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로 예민한 관찰력이다.



안소현 

542 

193.3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17


이 작품... 에서 접때 후기를 쓰다 그만 두었지. 너무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서였는데. 담번에 꼭 다 쓰려고 했는데 지금도 에너지는 부족하다. 이러다 더 오래 밀릴 것 같아서 다음에 기회되면 반복하기로 하고 일단 쓰고자 했던 말을 간략하게나마 쓰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신비롭다. 깔끔하고 친숙한데 보면 볼수록 낯설다. 낯선데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쪽이다. 작품 속 공간이 실외 길거리에서 들여다 본 매장 안이란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문을 활짝 열었나? 했더니 일행이 침대 옆 협탁의 의자를 가리키는 거다.





바로 이 협탁의 왼쪽 뒷다리. 이것을 지적하며 '창문이 있다'라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창문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나머지 부분은 너무나 깔끔해서 바로 눈 앞에 있는 것 같다. 폭신하고 아늑한 침대에서는 햇살과 함께 청결하고 기분 좋은 향이 날 것이다. 침대 뒤쪽 어두운 공간에는 옷들이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고, 천장에는 조명들이 빛난다. 그리고 뒤쪽 벽에 있는 창문으로 안소현 님 작품의 특징인 자연ㅡ나무ㅡ이 어김없이 고개를 들이 밀고 있다. 나무들의 표정이 하도 특별해서 자꾸 보다 보면,  '보는' 행위의 주체가 이 작품을 보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는 저 나무들인 것 같다. 호기심을 참지 못해 창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나무 둘. 그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이 났다. 그래, 관객 보는 재미가 쏠쏠하니? ㅋㅋ 그 모습이 넘 귀여워서 손을 뻗어 나무들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안소현 님 작품은 귀엽다. 딱히 귀여우라 그리신 것 같진 않은데도 보면 볼수록 나도 모르게 웃게 되는 포인트가 있다.


그리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볼까.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접때 안소현 님의 그림에서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가 떠오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저 위에 링크한 갤러리 라이프에서 있었던 단독전시회 후기에 쓴 말이었다. 에드워드 호퍼가 떠오른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 데이빗 호크니 David Hockney도 소환할 수 있겠다. 특히 안소현 님 작품은 깔끔함과 정갈함이 돋보이는 만큼 호크니의 60년대 중반 이후 작품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데이빗 호크니의 작품들은 http://vanodif.tistory.com/1102?category=363389 에 많지 않지만 몇 점 실어 두었으니 참고하세요. 그 중 대표 작품을 하나 소개한다.




David Hockney

A Bigger Splash 

1967 

Acrylic on canvas 

©DAVID HOCKNEY/COLLECTION OF TATE, LONDON


그리하여 딱 보았을 때 호퍼, 좀 더 보았을 때 호크니가 떠올랐다. 그런데 말이다. 이 매장 시리즈랄까... 도 그러하고 작품들을 좀 더 보다 보면 또 다른 대가의 이름이 떠오르는 거다.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안소현 님 작품에서 어떻게 마네를 떠올리게 되었나?


에두아르 마네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물론 <올랭피아 Olympia>다. '음악과 발레에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와 바쯜라프 니진스키 Ва́цлав Фоми́ч Нижи́нский 의 <봄의 제전 Le Sacre du printemps (The Rite of Spring)>이 있다면, 미술계엔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Olympia>가 있다!' 의 바로 그 올랭피아 말이다. 전시하자마자 엄청난 혹평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굉장한 찬사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서양 미술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던 그 작품. 그 외에도 역시나 당대의 논란을 불러 일으킨 <풀밭 위의 점심식사 Luncheon on the Grass>도 있고, 또 인상적인 <피리 부는 소년 The Fife Player>도 있다. 


마네의 그 작품들이 불러 일으킨 악명 높은 사회적 반향 외에도 마네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바로 원근법과 명암법 때문이다. 원근법은 2차원 평면인 캔버스를 깊이가 있는 3차원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기법으로, 15세기 르네상스 때 처음 발견된 이후 오랜 기간 서양회화의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명암법 또한 2차원 그림으로 하여금 3차원의 실제 사물로 보이게 만드는 기법이다. 그런데 그 오랜 전통을 마네는 고의로 무시했다. 화폭에 소실점을 만들어 사물의 크기를 다르게 배치하는 원근법으로 깊이 있는 공간감을 의도하는 대신, 마네는 사물과 인물을 화면 앞쪽으로 바짝 당겨 놓은 것처럼 그림으로써 깊이감을 없애 버렸다. 또한 세밀한 그림자의 단계별 표현으로 인해 사물의 실제감을 높이는 명암법 대신, 빛과 어둠은 있으나 세밀한 명암은 환한 빛, 또는 검은 어둠 속으로 매몰시켜 버린 채, 사물을 빳빳하게 평면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 마네는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네들이 보고 있는 이 그림은 3차원의 광활한 들판이나 실제 거리가 아니라 평편한 2차원 캔버스에 불과해! 실제가 아니라 이건 그림이라고! 착각하지 마!"




Edouard Manet

A Bar at the Folies-Bergère (Un Bar aux Folies-Bergère)

1882

Courtauld Gallery, London


이 작품에서 종업원이 화면 바짝 앞으로 당겨져 있는 모습이라거나




Edouard Manet

In the Conservatory

1879

National Gallery, Berlin


동일한 답답함 유발자. 그리고 악명 높은 <올랭피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피리 부는 소년>에선 아예 그림자까지 거의 없애 버렸다. 마네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2차원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인 거요! 라고.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읽고 싶은 사람은 박정자 님의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을 읽으시길 권한다. 개인적으로 박정자 님의 책을 좋아하는데, 작품 해석이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 탁월하다.


뜬금포 마네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는데, 이처럼 마네가 작품에서 전통회화의 필수 조건이었던 원근법과 명암법을 무시한 채 ,작품 속 사물을 화면의 바로 앞으로 바짝 끌어 당겨 배치함으로써 평면성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그리고는 이 작품이나





이 작품들을 보자. 어떤가, 원근법과 명암법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가? 그림자를 그리시기는 했지만 안소현 님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자는 특별히 유심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이전 후기 때 썼던 점으로 그림자가 좀 묘한 경우가 많다. 원근법도 사용은 하셨으나 위의 작품들에선 두드러지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바짝 앞으로 당겨져 있는 느낌이다.


안소현 님 작품은 어떤 작품들보다 '사실적'이란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무기질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마치 '아주 사실적으로 보이시겠지만 이것은 저의 상상을 담은 그림이랍니다'라 말씀하시는 것 같아, 문득 뒤통수가 싸ㅡ해지는 동시에 나도 모를 미소가 새어 나온다. 이는 마네의 원색적이면서 경멸 어린 '정신 차려!' 와는 다르다. 안소현 님 작품에는 혁명이나 반감이 아니라 따스함과 조심스러움이 작품의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그림이에요. 저의 상상를 담은 것이죠. 부디 제가 그린 것들을 '실제 사물'로만 받아들이진 않으셨음 좋겠어요. 저의 상상의 세계로 초대할 테니 사실적 잣대를 잠시 내려 놓고 들어와 주세요. 그렇게 제가 만든 세계에서 함께 휴식하고 상상하고 호흡하며, 당신 안의 상상의 세계를 열어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안소현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조심스러우면서 엉뚱하고도 따뜻한 그림.




안소현 

사막의 밤 

72.7 x 90.9 cm 

Acrylic on canvas 

2015



이 작품을 보았을 때 2017년작인 <깊은 휴식>이 떠올랐던 것은 이것의 배경이 사막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 전시가 좋았던 것은 이렇게ㅡ비교적ㅡ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인데, 최근의 작품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감성은 같은 것 같다. 홀로 사색하며 꿈을 꾸고 치유한다, 라는. 사막 한 중간에 낙타 한 마리가 앉아 쉬고 있다. 안장이 얹혀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주인이 있는 낙타인데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일행은 아마 낙타 너머의 그늘에서 자고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안소현 

깊은 휴식 

100x65.1cm 

Acrylic on canvas 

2017 


이것이 <깊은 휴식>이다. 그런데 역시 궁금한 것이 있다. 2년의 시간을 두고 그리신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바닥에 둥근 무엇이 파묻혀 있다. <깊은 휴식>에서 질문했을 때 작가께선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는 감상의 폭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 하신 답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배려해 주셨으니 정말이지 저 동그란 것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겠다. 다양한 추측들이 있었으나, 지금 드는 생각은 다른 차원을 여는 버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낙타의 주인이 저 버튼을 누르자 머리 위로 무지개빛 유성이 떨어지고 외계로의 차원이 열린 거다. 모르지, 낙타가 저 버튼을 눌러 주인을 다른 세계로 보내 버린 건지도.




안소현 

Animal Tetris

Pencils on paper

2013


습작들인 것 같다. 처음 보았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두 번째 가서 다시 보니 세심하게 색채를 연구하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해서 안소현 님 작품의 색감이 유난히 조화롭고 특별한 것 같다.






















안소현 

두 남자의 방문

145.5 x 89.4 cm

Acrylic on canvas

2018


이 작품은 저 아래에 있는 <조각연구소>에 연결된 부분이다. 이 화면의 왼쪽 1/3 지점이 <조각연구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작품과 연결해서 보니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조각연구소>의 화면이 비치면 없었던 사물과 사람이 생겨나는 것 같다. 바닥의 -LE : GE가 무슨 뜻일까를 생각하는 건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온통 사막의 오렌지와 살구빛, 그리고 하늘이나 바다의 파랑으로 가득한 이 작품은 안소현 님 작품답게 통째로 뜨거운 햇볕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것 같다. 사각 캔버스는 사실상 오븐에 다름 아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것 같은 장면의 한 중앙에 두 명의 남성이 서 있다. 제목을 보니 '두 남자의 방문'이라 한다. 둘 중 한 명은 챙모자를 쓰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하늘과 같은 색의 양산ㅡ우산임에 틀림 없는ㅡ을 쓰고 있다. 흔한 모습일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양산을 쓰는 남성'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또 다시 뒤통수에서 땀이 난다. 바닥의 글자 근처를 보면 모래가 쌓여 있고 지붕 위에 철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도로나 집은 공사중인 것 같다. 사람의 흔적이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 곳에 두 사람은 어떤 목적으로 방문한 걸까? 복장이 선교사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경찰 같기도 하고. 경찰이라 놓고 해석하면 작품 해석은 또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튼다. 살인 사건! 


이곳은 멕시코의 두랑고 Durango라는 곳이다. 구글맵으로 외국 거리를 구경하는 중에 발견하신 곳이라고. 뜨거운 햇살이 내려쬐는 두랑고는 따뜻한 햇살을 좋아하는 안소현 작가의 취향에 잘 맞을 것 같다.




안소현 

오늘 하루는

65.1 x 45.5 cm 

Acrylic on canvas 

2018


이번에는 하양과 파랑과 초록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느낌으로는 여기와 아래의 장소들도 두랑고일 것 같다. 날은 덥고 위의 천막은 뜯어졌어도 오늘 하루는 괜찮았나보다. 아이스크림 수레를 끌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안소현 

다 괜찮을거야! 

130.3 x 80.3 cm 

Acrylic on canvas 

2018


매장에서 문을 다 없애 버리는 것은 안소현 작가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문이 없으니 감상자의 시선은 너무나 쉽게 실내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실내가 딱히 명확하지 않다. 입구 위 벽을 보면 INTERNET이라 써있다. 당황스럽다.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호화찬란한 PC방을 떠올리면 아무리 눈을 비벼도 저곳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PC방일 것 같지 않다. 창고겠지...! 그러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실내에 컴퓨터 책상이 보이긴 한다. 저 거무스름한 물체 두 개. 그것이 그래, 1인용 컴퓨터책상이다. 세상에나 저렇게 띄엄띄엄...! 피씨방에는 아이들과 대학생들이 바글바글한 건데, 저기엔 아이는 커녕 강아지도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아무 관심 없을 것 같은 할머니 두 분만 햇살 아래 자신의 일을 하거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안소현 님의 아이러니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데 보면 볼수록 물음표가 솟아난다. 그러한 점이 감상자로 하여금 현실의 찌든 때에서 벗어나 작가가 이끄는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든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매혹적인 초대다.




안소현 

두 사람

162.2 x 112.1 cm 

Acrylic on canvas 

2016


역시 길거리와 레스토랑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지나가다가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바로 레스토랑 안이다.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것은 작품 감상에의 무한한 자유를 허용한다. 야외에 나와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의자들이 햇살에 구워지는 마쉬멜로우인 양 당당하게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그늘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는 남성이야 그렇다 치지만, 안내데스크에 서있는 저 여성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영수증을 들여다 보고 있을까, 아니면 뭔가를 먹고 있을까? 나는 후자로 보았는데, 그렇게 보니 해석이 안 되는 거다. 어째서 저기에 서서 저렇게 음식을...? 오른쪽 벽에 그림자인 척 조용히 서있는 파란색 일간지 배치대는 꼭 한국 같다.




안소현 

엄마 손 잡고, 안녕 강아지

31.8 x 40.9 cm 

Acrylic on canvas 

2018


이 또한 두랑고일 것 같은 작품. 엄마는 아기를 바라보고, 아기는 강아지를 쳐다보고, 강아지는 그들을 보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안소현

심심한 날

72.7 x 53 cm

Acrylic on canvas

2018


이 작품을 6월에 처음 갔을 땐 왜 못 보았을까. 아래 작품과 함께 놓쳤던 작품들이다. 마지막 날에 한 번 더 보아야겠다 생각해서 순전히 안소현 님 작품들을 한 번 더 보려고 3만원을 주고 들어간 보람을 이 두 작품으로 찾았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화면 아래쪽이 길거리라 생각했다. 나무의 그림자가 유난히 아름다운 작품. 그런데 심심한 꼬마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수도 때문에 물음표가 떴다. 작품을 자세히 확대해 보면 왼쪽 벽과 바닥이 만나는 선을 따라 파란 물호스가 연결되어 있다. 그때 일행이 말했다. '이 아이가 있는 곳이 집 안인 거 아닐까?' 그러면 호스가 연결되어 나가는 저 문 너머가 길거리인 거다. 와... 마당 넓은 집이로구나...!! 그렇게 하니 수도꼭지와 호스 연결은 납득이 되었는데, 그렇다 해도 화면 아래쪽이 바깥 길거리 같아 보이지 않아요? 나만 그렇게 보이나. 아이와 놀아주고 싶은 나무가 잔뜩 몸을 기울여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붉은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심심하다. 혼자 수도꼭지를 틀었다 잠그며 놀고 있다. 아이의 저런 고독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기에 저렇게 실감나게 표현한 것일 테다. 요란하게 떼를 쓰지 않는 아이는 가만히 혼자 놀거리를 찾는다. 졸라 보아야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어쩌면 아이는 저곳의 유일한 '생존자'인지도. 아... 그렇게 해석하면 너무 섬뜩해지나...;;;




안소현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72.7 x 53 cm

Acrylic on canvas

2018


역시 참 색감이 좋은 이 작품에서 걷는 저 남성의 뒷모습에서 휘파람이 들리는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제목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다. 편안하고 조화로운 색감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남성의 저 가벼운 발걸음에서 상쾌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역시나... 왼쪽 아래 쇠봉 위에 놓인 저 검은 물체는 무엇일까? 언뜻 보기엔 집 입구 차양 아래에 부착된 전등인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왜 저곳에???





일행의 말인 즉 안소현 님 작품은 모아서 보았을 때 더욱 깔끔하고 색의 조화가 강조된다 했다. 일행을 데려가길 정말 잘했지 뭔가. 혼자 보았을 땐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점이다. 그저 안 작가님의 작품은 한 벽에 한 작품이나 두어 작품만 내 눈 높이에서 충분히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전시에서는 불만이 가득했더랬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다. 한 벽에 걸린 작품들이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마치 이 벽 자체가 캔버스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두랑고 시리즈인 것 같고.





이건 거리 시리즈 내지는 매장 시리즈 정도 되겠다.





함께ㅡ그것도 감상하기 불편하게 위 아래로ㅡ전시된 이 두 작품은 정말 센스 있게 배치되었다. 윗작품 속 소녀의 붉은 원피스와 아래 청년의 붉은 티셔츠가 비교되고, 소녀의 심심한 마음과 청년의 들뜬 마음이 대조된다. 두 작품 다 색감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햇살이 가득 느껴지는 맑은 느낌이다. 참 색이 곱다.


이번 전시에서 큰 수확은 안 작가의 초기 작품들을 보았다는 점일 텐데, 꼼꼼하고 세밀하게 색을 연구하신 결과가 이렇게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으로 나타났음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다. 이렇게 모아서 감상하는 것도 나름 재밌지만, 그래도 나는 한 작품 한 작품을 내 높이에서 조용하고 깊게 감상하고 싶다.


안소현 님 작품들을 보고 나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내 마음의 곰팡이도 작품 속 햇살에 노릇노릇 살균되는 것 같다. 언제 또 전시회 하시나요.


2018. 08. 28.






<디자인아트페어 Design Art Fair @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본 작품들 2018. 05. 21




안소현 

텅 빈 대화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 

2016






↑ 안소현 작가의 어머니께서 생전에 안소현 님께 주셨던 편지.





위의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이고 아래의 사진은 일행이 찍은 것이다. 일행과 나의 키 차이는 거의 15cm에 달하는 관계로 미세하게 시선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내가 찍은 사진이 더 실제 색감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일행의 높이에선 이렇게 보이는 걸까나.


이 날의 전시는 안 작가님께 받은 초대권으로 간 것이었지만, 진즉에 티몬에서 할인 티켓을 구매해 두었더랬다. 이유는 안 작가님의 바로 이 작품 하나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직접 보고 싶어서 티켓을 샀다. 그리고 직접 본 작품은... 비록 부스가 좁아 갤러리에서처럼 여유롭게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끌려 들어가게 되는 작품. 이 작품이 내뿜는 아우라는 대단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작품을 시작하려 결심하고는 그리신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배경의 바탕색을 칠하는 데만도 자그마치 1년이 걸린 작품이다. 이유인 즉 작가께서 의도하신 '바로 그 파란색'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리고는 저 테이블 하나를 완성하는 데 또 다시 한 달이 꼬박 걸렸다고. 그만큼 많은 정성과 고민이 들어 있는 작품이고, 그런 정성과 시간과 고민과 두려움과 기대는 그대로 작품 속에 녹아나 내면의 빛으로 맺혀 있다. 이 작품에 얽힌 배경 이야기는 위의 파란 종이에 안 작가께서 손글씨로 써서 붙여 두셨다. 너무 질문을 많이 받으셨기 때문에 글로 써서 붙여 두셨다고. 차분하게 잘 정리하신 글이니 찬찬히 읽어 보면 좋다. 


쨍한 블루, 저 바다는 그 푸름 만큼이나 농밀한 감정을 품고 있다.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저 푸른색은 그래, 바다일 수도 있겠고 하늘일 수도 있겠고 무한한 우주일 수도 있겠다. 그도 아니면 피안의 세계일 수도 있겠고 그리움의 호수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이건 저 파란색을 마주하는 마음에선 알 수 없는 일렁임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 '정성스러운 파랑'. 그리고 땀방울 서려 있는 그라데이션. 그 색 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뭉클하다. 


테이블이 마련되었고 정갈한 테이블보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마주 보는 의자 두 개. 안 작가님의 심정으로는 한 의자에는 어머니를, 다른 의자에는 안 작가님 자신을 앉히고 싶으셨을 것 같다. 음식도, 음료수도, 꽃도 없이 그저 바다와 하늘과 대화 만으로 마음을 채우며 도란도란 끝없이 다정한 수다를 어머니와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함께 계실 때는 힘든 적도 많았겠지만, 엄마란 존재가 그렇다. 가까움과는 별개로 의외로 깊은 속마음을 터놓기 쉽지 않은 대상. 그것은 '엄마'와 '딸'이라는 위치 때문이다. 어른이 된 이제, '엄마'와 '딸'이라는 특수 수직관계가 아니라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 대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그 어떤 전제 조건도 필요하지 않은 평등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진심과 진심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은,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 꿈꿀 만한 일일 것이다. 나라면 무슨 대화를 나눌까. 이런 곳에 엄마와 둘이 나란히 앉는다면, 길고 긴 시간 동안 둘이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을까. 비어 있는 두 의자에서 이 삶을 살아간 수많은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들의 소소한 담소가 도란도란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 테이블을 드리우는 그림자와 비추는 햇살을 잊지 말고 감상하도록 하자. 아랫부분에 살짝 접힌 테이블보를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내게는 위트로 인식되는 안 작가님의 사랑스러운 특징이다. 


이제 이들 위를 드리우는 그늘의 주인공을 보자. 비치 파라솔이 아니다. 텐트 위에 치는 타프tarp도 아니다. 놀랍게도 회전목마의 지붕입니다. 클로즈업 사진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면 저 타원형 속에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사람 형상도 있고 꽃 형상도 있고. 정작 안소현 님은 '뭔지 정확히 의도하고 그린 건 없어요. 그래서 뭉그러진 느낌이 나기도 하죠'하며 웃는다. 무엇이라도 편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한 감상자를 위한 작가의 배려다. 저 회전목마 지붕 가의 타원을 둘러싼 점도 어찌나 공들여 찍으셨는지, 가만히 보다 보면 그 점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다. 또한 회전목마 지붕의 끝은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어 화려함과 환상을 더한다. 


이 작품을 구상화가 아닌 초현실적 작품으로 만드는 힘은 바로 이 지붕에 있다. 허공에 떠있는 자체로 이미 마법이라도 시작하려는 듯 몽환적인 지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그 무엇이라도 일어날 수 있게 한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보면 이 회전목마 지붕이 서서히 돌아가면서 아련한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는 떠오르는 어린 시절 즐겼던 회전목마의 기억. 그 기억에는 반드시 부모님이 계실 것이다. 나는 말을 탈 거야, 나는 마차를 탈 거야, 하며 아빠 엄마와 함께 말을 타기도 하고 혼자 타다가 고개 돌려 부모님을 확인하기도 하는 기억들.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그대로 소환된다. 그 기억들은 행복이다. 삶에서 가장 걱정 없고 행복했던 시기. 그래. 어린 시절에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즐기는 회전목마 하나로 세상 모두를 얻은 듯 행복했다. 그런 단순하고 소박했던 나와, 그 내가 사랑했던 시절의 한 장면이 스냅사진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어쩌면 그 시절의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어 버린 우리는, 그 시절의 내가 보는 시선으로 지금의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무 다른 생각 없이 부모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 건지도.


이 아름다운 작품 앞에 서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금의 부모님을, 혹은 훗날 다른 세계에서 만나게 될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잠시나마 그리운 시절의 행복 속에 치유 받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한다. 이 작품은 절대 팔지 않으실 텐데, 다음에 깨끗하고 조용하고 한적한 갤러리에서 꼭 다시 감상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디자인 아트 페어>와 현재 K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에서 전시 중인 안소현 작가의 작품들은 <안온한 시간들>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주제에 관한 안 작가님의 설명이다.




안소현 

기다림-카페 

60.6x50cm 

Acrylic on canvas 

2017


부스가 좁아서 작품들이 위 아래로 빡빡하게 전시되어 있어 감상하기에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안 작가님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것은 좋다. 이 작품에서 내 눈에 띈 것은 단연코 저 그림자였다.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혹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진지한 옆얼굴을 한 남성이 조용히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안소현 

두 의자 

65.1x53cm 

Acrylic on canvas 

2017





안소현 

Green 

72.7x53cm 

Acrylic on canvas 

2017





안소현 

비누 

53x53cm 

Acrylic on canvas 

2017


제목이 <비누>인데 내 눈에는 버터 조각으로 보였을 뿐이고.;; 내가 배가 고팠는가. 아마도 저 놋그릇을 연상시키는 접시ㅡ비누 받침대겠지ㅡ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놋그릇에 버터를 올리는 것도 딱히 평범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재밌는 게다. 평범한 사물들을 그린 것 같은데 가만히 쳐다보면 물음표가 자꾸 생긴다. 얌전하고 단아한 모습 안에 독특한 세계를 지닌 작가님 답다고 느끼는 부분. 비누라 보더라도 저렇게 고급스런 접시 내지는 트레이에 정성스레 올려둔 모습이 신기하다. 받침대에 물 한 방울 없이 단정히 놓여 있는 저 비누는, 세상을 향한 마음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 내고픈 마음일지도.




안소현 

조각연구소

145.5x89.4cm 

Acrylic on canvas 

2018









안소현 

나의 두 의자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17








안소현 

기다림

116.8x72.7cm 

Acrylic on canvas 

2016










안소현 

자켓과 야자수

100x80.3cm 

Acrylic on canvas 

2016









안소현 

하늘 테라스

112.1x145.5cm 

Acrylic on canva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