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afur Eliasson
The parliament of possibilities
http://leeum.samsungfoundation.org/html/exhibition/main_view.asp#self
http://www.olafureliasson.net/
전시에 관한 훌륭한 기사와 사진들
(이 포스팅의 몇몇 멋진 사진들은 아래 기사에서 가져왔음)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9916
http://www.sedaily.com/NewsView/1L2JSSJ88Z
그리고 뉴스 (동영상 감상용)
http://www.ytn.co.kr/_ln/0106_201610010110520585
아이슬란드계 덴마크 설치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전시에 다녀왔다.
미학강의 듣는 사람들 모두 가야 하는 과제인데
단체감상날에는 내가 시간이 안 되어서 미리 다녀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갔던 전시회.
작품 사진 아래에 파란색으로 싣는 것은 팜플렛에 실려 있는 설명이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과도 거의 비슷하다.
참고로, 파란글자만 읽으면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파란색만 읽으시죠.
"천장에 달린 환풍기가 관람객들의 머리 위에서 정해진 궤도 없이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스스로의 바람에 의해 공간을 가로지른다."
티켓을 제시하기도 전에 만나게 되는 엘리아슨의 작품.
작품들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처음에 링크한 리움미술관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총 22점 밖에 안 되는 작은 전시였지만 말이 22점이지,
설치미술작품 22점은 즐길 것이 꽤 된다.
"철망에 엮인 순록 이끼(Cladonia rangiferina)가 미술관 전시장의 긴 벽 가득 설치되어 있다. 순록 이끼는 아이슬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지역에서 자라나며, 종종 건축모형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 이끼는 건조할수록 수축되면서 색이 바랜다. 그러나 수분을 더하면 이내 다시 팽창하고 색이 변하면서 코를 찌르는 특유의 냄새를 내뿜는다."
제목 따로 쓰기 귀찮아서 그냥 사진 찍은 걸 그대로 올린다. 귀차니즘만 늘어가고 있네.
벽 하나를 이끼로 채운 작품이다. 아이슬란드의 이끼라는데, 물론 말라 있다.
노루궁뎅이 버섯을 축소시켜 놓은 것도 같고, 해면 같기도 했다.
"하나로 이어진 얇은 철관이 둘둘 말려 중심이 같은 두 개의 나선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만들어졌다. 나선의 바깥쪽은 검은색으로, 안쪽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천장에 수직을오 걸려 있는 이 나선 기둥은 회전하는 모터에 매달려 있다. 두 나선은 회전하면서 물결모양 두 개가 끊임없이 서로를 스쳐 미끄러지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 내는데, 물결모양 하나는 기둥 안에서 항상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내려간다."
두 개의 다른 나선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작품이다.
일행은 '진부하다'라 평했는데, 난 그저 재밌었다.
전체적으로 엘리아슨은 기하학 형태에 심취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수학자 누구... 랑 같이 작업을 많이 했다는데.
흰색에 가까운 옅은... '희박한' 색채가 들어 있었다.
아름다웠는데, 로스코Mark Rothko 와 클라인Yves Klein, 말레비치Kazimir Malevich가 키워드다.
그들 중 누구라도 한 번 그렸을 법한 작품인 건데, 찾으니 없네?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단 말야? ㅡ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빨주노초파보 색은 자세히 보아야 간신히 구별할 수 있으며,
그 중 가장 식별하기 힘들었던 색은 보라였다.
언뜻 보면 엷은 회색 같았는데, 경계선을 보면 보라가 맞다.
아래의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시도한 작가가 이전엔 없었단 말이지...?
(위의 사진은 위에 실은 기사 중 하나에서 데려왔음)
"이 작품의 관람객은 마름모꼴의 거울과 삼각형 모양의 열린 부분이 번갈아 가며 배열된 벽을 마주한다. 열린 부분의 안쪽에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들이 무한하게 증식되는 공간이 펼쳐진다. 거울로 된 안쪽에는 삼각형의 반사 이미지들이 겹쳐지며 복잡한 배열을 만드는데, 그 속에서 관람객은 스스로와 주변 환경을 파편화해 보는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될 뿐 아니라, 반대편 입구를 통해 벽을 들여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보게 된다. 이 벽은 육각 쌍뿔(밑변을 공유하도록 맞붙인 두 개의 육각뿔) 형태의 쌓을 수 있는 모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육각뿔의 면에는 거울 같은 광택을 지닌 스테인리스 스틸 판과 삼각형 모양으로 열린 부분이 번갈아 배열되어 있다. 각 모듈 사이에 생기는 틈을 가리기 위한 구조물 외부의 마름모꼴판들 역시 반사율이 매우 높은 거울 관택의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져 안과 밖, 앞과 뒤, 관람객과 대상물 사이의 구분을 흐리는 반복적인 패턴을 만들어낸다."
제목이 재미나지 않은가? 자아가 사라지는 벽.
영어로 Less Ego Wall이긴 한데.
작품상의 느낌으론 자아가 해체되는, 정도의 느낌이다.
재미난 작품이었다. 작품이 설치된 공간은 일종의 동굴처럼 여겨지는데,
안에서 꽤나 재미난 실험을 할 수 있다.
나는 키가 받쳐주지 않아 할 수 없었지만...
거울들이 조각나 있는 사이사이로 벽이 뚫려 있는데,
내 목을 제대로 위치시킨다면, 내 목이 잘리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거거든.
한 172cm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부러워요.
이런 식으로 몸이 쪼개진다. 그리고
이런 재미를 즐길 수도 있지.
이게 무슨 놀이였는가 하면, 저 별표 있잖아?
하필 내가 검정색 옷을 입고 갔어서 폰카로 못 잡은 것인데 저 부분에 내 몸통이 있다.
별표 위의 네모가 내가 손에 든 팜플렛이고.
그런데 얼굴 부분이 뚫려 있어서, 반대쪽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던 아가씨가 잡힌 것이지.
즉, 위치만 잘 맞추면, 얼굴은 저 아가씨, 몸통은 나, 다리는 저 아가씨, 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가 하이브리드인 거야!
덕분에 아름다운 아가씨의 얼굴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다. 으하하.
병맛같죠? 해 보세요. 재밌을 걸.
이 작품은 제목이 <사라지는 시간의 형상 The shape of disappearing time>이다. (2016)
"기하학적으로 모호한 형태를 띠는 곡선의 철골구조가 천장에 매달려 있고, 그 구조 안쪽에는 광택이 감도는 삼각형의 황동 판들이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작품의 안쪽 중심에 있는 조명은 주변 공간에 신비로운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형태는 1929년 과학자 폴 샤츠가 발견한 기하학적 형태인 올로이드이다. 올로이드는 같은 크기의 원 두 개로 구성된 삼차원의 기하학 형태로, 한 원의 중심에 다른 한 원의 둘레가 수직으로 교차되어 있다. 수 많은 삼각 황동 판 표면에 비치는 반사 이미지들은 관람객들의 움직임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며 미끄러지고 변화한다. 자굼 주위를 도는 관람객들의 움직임은 이 복잡한 형태에 끈임없이 새로운 시각을 더해나가며 휘몰아치는 듯한 움직임과 빛을 만들어 낸다."
"검은 벽 위에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유리 구슬 천여 개가 여러 개의 무리를 만들며 큰 구성을 이루고 있다. 부드럽게 빛나는 구의 색조와 유기적인 배열은 별자리나 성운과 같은 천문학적인 현상들을 연상시킨다. 몇몇 구의 뒤쪽 삼 분의 일 지점은 거울로 되어 있어 관람객들과 주변 환경을 선명한 반전 이미지로 비추기도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많은 동시다발적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생성해내며 관람객과 자굼의 상호작용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예쁜 작품이었다. 어지간한 여성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리움 로비에 있는 나와 쿄헤이의 <중첩된 사슴>에 사용된 구슬을 연상시켰다.
소재가 같아 연상되는 것이니, 뭐.
사진으로 역시 표현이 안 되는데,
구슬 안에는 아름다운 세상이 뒤집혀 있다.
맨 아래의 까만 원은 <사라지는 시간의 형상> 위의 천장이고,
그것과 내 머리 사이에서 빛나는 것이 <사라지는...> 작품이다.
실제로 보면 반짝반짝 예쁘다.
"물이 얕게 채워진 큰 수조 안에 엉성해 보이는 비계(공사용 임시 가설물)가 네 층으로 세워져 있다. 비계는 각 층에 하나씩, 총 네 개의 직사각형 물통을 받치고 있다. 펌프와 호스로 구성된 장치는 중력의 흐름을 거스르며 한 물통에서 다른 물통으로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 물은 물통과 큰 수조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적시며 사방을오 튄다. 물줄기 소리는 전기 펌프가 윙윙거리는 사이로 분명하게 들리고, 공기는 미세하게 습기가 감돈다. <뒤집힌 폭포>는 실내와 실외에 설치된 바 있다."
이 작품을 보다가 어느 순간 뒤의 그림자가 눈에 띄었는데,
가만히 있던 그림자가 갑자기 막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로 옆쪽 벽에 설치된 두 개의 움직이는 불빛 작품인
<당신의 예측불가능한 동영상>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재미나서 아래의 동영상을 찍었다.
도마달루의 한 지점에서 어느 여름날 12시간 동안의 풍경을 찍은 사진이라 한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푸르스름한 부분들은 꼭 필름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투명해 보였다.
한 자리에서 다른 시각의 모습을, 때문인지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연작이 떠올랐다.
세잔 공부 해야 하는데. 대체 언제 하지.
"2004년 작품 <무제(돌 바닥)>은 네 종류의 화산암(조립현무암, 유문암, 청색 현무암, 기름칠된 흑색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맞물려 있는 육각형과 평행사변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타일의 패턴은 삼차원의 입체 도형이 반복되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한편, 그 형태는 분명하고 단일한 구조로 보이기 보다 관람객이 어느 곳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보인다. 이 패턴은 올라퍼 엘리아슨과 그의 스튜디오가 레이캐비크 하르파 콘서트홀의 수정 모양 파사드에 사용했던 공간 채움용 12면체인 유사 벽돌의 단면에서 유래한다."
에셔M.C. Escher가 떠올랐던 작품. 반복된 패턴 때문이었을까, 계단을 연상시키는 무늬 때문이었을까.
예술을 구성하는 재료로서 공간을 끌어들인 작품이다.
엘리아슨의 작품들은 대체로 앞에 앉아 멍때리기, 혹은 명상에 잠기기 좋다고 생각해.
재미났던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엘리아슨은 확실하게 기하학과 패턴 자체에 관심이 많구나, 생각했다.
일단 황금색 일그러진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은 모네의 작품 속에나 등장할 법한 모양으로 뭉그러진다.
이 패턴은 가만 보면 보기 나름으로 얼마든 선을 이을 수 있다.
몇 개만 간단히 해보아도 이렇게 나오는데, 이 속에서 이런 선을 얼마든지 찾아내며 놀 수 있겠더란 말이다
ㅡ라 쓰고 보니 뭔가 아스퍼거 증후군스러운 생각인가 싶군.
의외로 벽에 비친 그림자가 예뻤다.
내가 은색, 금색을 좀 좋아해.
아니 그런데 지금 보니 제목이 '기상학적'이네?
어... 그 제목에 맞추어선 생각을 안 해 봤다, 그러고 보니.
이런.
"어두운 공간 안에서 여러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미세한 물안개로 이루어진 둥근 장막을 비춘다. 어느 시점에서는 떨어지는 물 사이로 빛을 내며 일렁이는 무지개가 보이는데, 관람객이 다가가거나 멀어짐에 따라 그 무지개 빛은 강도를 달리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어 왜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짧지.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면 나타나는 작품인데, 가까이 오자 다시 내려가고 싶었다.
동영상 찍고 싶어서. 근데 이미 늦었지.
에스컬레이터가 통과하는 공간은 잠시 몹시 어둡다. 그리고 터널을 통과하듯 어두운 공간을 지나면서
서서히 이 광경이 보이는 것이다.
언뜻 보면 무슨 연극무대 같지 않은가?
다 관람객들입니다.
오른쪽 구석엔 우산이 준비되어 있는데, 뭐, 우산 쓰지 않고 물안개를 통과해도 괜찮다.
순간, 폭포 속을 들어가는 기분이 들고, 안에 들어가면 둥근 공간이 나온다.
딱 드는 생각은, '여기에 소파 하나 있으면 좋겠다'였다.
그 소파에 하루종일도 앉아 있겠더라며.
일행은 '이곳에 레스토랑이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꽤 괜챃은 생각이다.
나오지 않을까, 그런 레스토랑?
이런 예술의 한 조각을 응용하여 대중화하는 것이 상업예술 아니겠는가.
근데 상업예술이란 예술장르가 있나? 아, 영화.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안개는 가만히 보면
어느 여성의 출렁이는 금발 같기도 하고 무지개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로라 같았다.
언젠가 꼭 한 번은 보아야 할 북유럽의 오로라.
이렇게 짝퉁오로라?라도 체험하니 좋았는데,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물안개벽을 통과하면서 말이다, 죽음을 통과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생각이 들었지.
비내리는 하늘 같지.
리움은 역시 리움이다. 모든 것이 쾌적하고 명쾌하고 시원시원하다. 너그럽고 깔끔하고 세련되었는데 딱히 사랑스럽진 않은 어떤. 리움이 소개한 엘리아슨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즐길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몹시 신났다.
아주 신났다. 그 '신난 것'이 일반 미술전을 감상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인 건데, 뭐랄까. 설치미술은 항상 그렇다. 볼 때는 신나서 막 흥분하며 즐기는데, 돌아서면 '놀이동산'에 다녀온 기분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짜릿하고 멋진, 딱 내 취향의 근사한 놀이기구가 가득한 놀이동산 말이다. 끝없이 나를 두드리는 직접적이고 원색적인 자극의 향연에 넋을 잃고 꺄꺄거리며 여기저기 눈 휘굴리며 다니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추를 날리지만, '미술전시'가 아니라 '놀이동산' 같다는 거다. 어쩌면 이것은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한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설치미술을 보면 미술이 과학을 이식받는 것 같달까, 미술이 아닌 새로운 종으로 변종되는 과정 같아 보인다. 그러하겠지. 면 위에 형태와 색채로 구성되던 2차원적 미술은 로스코와 말레비치를 끝으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 서사도, 형태도, 색마저 죽여버린 궁극의 미술이 자체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탈출하려면, 자신의 팔다리를 잘라 버리고, 과학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장착해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과학은 한계에 부딪힌 미술, 아니 문학, 음악, 모두에 있어 막강하면서도 유일한 구세주임에 틀림 없다. 과학을 입지 않은 그 어떤 돌파구가 존재한단 말인가. 해서 예술은, 미술은 지금, 미증유의 괴물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로봇미술이라 하겠으나, 언젠가 미술로봇이 되겠지. 그리고 나면 언젠가, 로봇에 삼키워져 미술은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전방위적 현상 앞에서,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취향을 고답적으로 고집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내게는 색이 필요하고, 그래도 내게는 형태가 필요하고, 아니, 색, 형태가 없다 해도, 면 만으로도 괜찮아, 라며 꺼져가는 미술의 숨을 간신히 부여잡고 버티는 나는 아마 곧 낙오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전통적인 미술이 건재하지만, 점점 인간사 구석구석을 잠식하며 그 그림자를 키워가는 과학의 존재감이 참 너무 불편하다. 아... 예술에 관한 한 중도진보이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골수보수였던 걸까. 과학의 혜택을 누구 못지 않게 누리는 주제에, 부쩍 과학이 피곤해지는 요즘이다. 아, 빨리 과학전쟁 책들을 읽어버리고 싶은데.
뭔 전시후기가 기승전과학싫어냐.
난 파란색만 읽으시라 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