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포스팅: 20180628
2차 포스팅: 20180702
3차 포스팅: 20180709 (예정) 조금씩 쓰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웬만하면 위의 (작성 중)이 사라지면 읽으시죠.
<햄릿 - The Actor>
* 일시: 2018.06.22(금) ~ 2018.07.15(일) 평일(화-금)
오후 8시 / 주말(토,공휴일) 오후 3시, 오후 7시 / (일) 오후 3시 / * 월요일 공연없음
*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https://www.sacticket.co.kr/SacHome/perform/detail?searchSeq=34117
[시놉시스]
<우리의 손을 떠난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느 순간 왕궁에서 소외되어버린 햄릿. 자신의 아지트에서 의미 없는 시간만을 보내던 햄릿의 눈 앞에 아버지의 혼령이 등장한다. 유령과의 대화 중 아버지의 죽음이 의도된 타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은 복수를 결심한다. 때마침, 햄릿을 찾아온 두 배우 캠벨과 사라. 햄릿의 우울증 증세를 걱정한 어머니가 보낸 햄릿의 오랜 친구들이다. 햄릿은 복수의 내용을 담은 연극을 왕 앞에서 공연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아지트에서 두 배우와 함께 즉흥극을 펼쳐나간다. 일명 ‘복수의 리허설’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햄릿의 계획과는 점점 다르게 흘러가는데…
<출연>
햄릿(Hamlet) : “복수하고 싶어.. 그래서 이걸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
- 이호협
- 류지완
사라(Sara) : “복수의 리허설.. 재미있겠는데요”
- 서지유
캠벨 (Campbell) : “그래서 때때로 연극은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무대를 통해 드러내기도 하지요”
- 김형균
- 김성겸
셰익스피어 본고장인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 진출 제작진의 작품이라 한다. 배우가 단 세 명인데 1인 8역까지 한다니 누가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하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Hamlet』 본문 PDF: http://vanodif.tistory.com/1206
→ 원작을 미리 읽고 가시면 이해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연극을 감상하는 재미가 증폭합니다.
꼭 미리 읽고 가시길 권합니다.
다음은 공연 프로그램 노트에 실린 내용이다.
[기획의도]
최무열이 제작하고 성천모가 연출하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그 화려한 극성과 더불어 빛나는 배우들의 향연이 되었으면 하는 의도가 처음부터 깔려 있습니다. 햄릿의 흔들리는 눈빛으로 대변되는 섬세한 연기를 표현할 수 있는 배우인 이호협과 류지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품과 수상을 통해 입증된 탄탄한 연기력의 소유자 서지유를 사라 역에,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까지 진출한 실력파 김형균과 김성겸을 캠벨 역에 캐스팅한 이유도 이러한 기획의도에서 출발합니다.
연극 <햄릿-The actor>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와 같이 삶과 죽음 앞에 놓여 있는 비겁한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공연은 살아있는 사람이 행하는, 환경에 따라 그때그때 바뀔 수 있는 시간 예술이며, 관객과 배우의 조화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객과 배우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어떤 것'으로 인해 공연은 매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소극장 공연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 측변에서 <햄릿 - The actor>는 관객과 배우가 함께 살아 숨쉬기 좋은 공연입니다.
대한민국 창작 공연 현실이 그리 훌륭하지 못합니다. 특히 개인 제작자가 만드는 연극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공연이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 부분에서 채우려고 노력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관객의 훈훈한 열기로 그 부족한 부분이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ㅡ 프로듀서 최무열 인터뷰 중에서 발췌
여러 기사를 찾아 봤는데, 아래 기사의 평이 정성스러웠다.
http://www.newsculture.asiae.co.kr/sub_read.html?uid=37940§ion=sc158
맘 같아선 제대로 논문이라도 쓰고 싶으나, 두 번의 공연과 두 권의 『햄릿』을 읽은 후라 에너지가 얼마 없다. 계속 이 작품만 생각하기엔 다른 일들이 있으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해서... 뭐, 어차피 다이어리식으로 후기를 남기는 공간이니 만큼 형식을 갖춰 쓰진 않고 그냥 내 편한대로 쓸 예정이다. 표현이나 어휘 선택, 심지어 오탈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점들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경고하니 알아서들 걸러 읽으세요. 내가 읽은 관련 자료가 박우수 선생님의 해설이다 보니, 아마 거의 그 해설을 언급하게 될 것 같다. 틀을 정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될 지는 모르겠으나. 박우수 선생님의 해설은 열린책들에서 출판한 『햄릿』의 역자 해설인 「햄릿, 그 영원한 모나리자」를 의미한다. 바로 앞의 노란색 하이라이트를 클릭하면 비록 부분이나마 해설을 읽을 수 있다.
* 심각한 스포일링이 포함될 예정입니다. 아직 공연을 보시기 전이라면 아래 내용은 읽지 않으시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
<햄릿 - 디 액터 Hamlet - The actor>, 연극의 정체성을 말하다.
이 연극은 세계적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과 배우의 정체성을 말함에 있어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후 『햄릿』)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구로 사용했을까? '거울'이다. 연극 <햄릿 - The actor>는 『햄릿』을 거울 삼아 시대를 비춘다. 그런데 그 거울은 '양면거울'이다. 해서, 시대를 비추고는 연극과 배우 자신들도 비춘다. 그 뿐 아니다. 극이 고조됨에 따라 거울은 그 크기를 점점 확대시키고, 결국 객석에 앉은 관객까지 비춘다. 연극은 묻는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배우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스치듯 이런 후기를 보았다. "햄릿의 깊은 고뇌를 다루기엔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느꼈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연극은 '햄릿의 고뇌를 주제로 다루는 연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햄릿의 고뇌는 꽤나 유려하게 표현했다. 다만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인해, 위대한 비극의 카타르시스에서 빠져나오지 않기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장담하건대 『햄릿』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몹시 재미있게ㅡ조금은 얼떨떨해하며ㅡ이 연극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햄릿』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분께는 다시 한 번 『햄릿』을 읽고, 또 여유가 되신다면 다시 한 번 이 연극을 보시기를 권한다. 『햄릿』을 알고 그 희곡을 좋아할수록 이 연극을 보는 쾌감이 증폭하기 때문이다.
『햄릿』의 희곡을 좋아할수록 짜릿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 연극의 대본 때문이다. 대 셰익스피어의 『햄릿』ㅡ기실 대본ㅡ을 낱장, 아니 문장 단위로 해부한 다음 처음부터 다시 끼워 맞춘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맞춘 순서가 아니다.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 원작에 아주 충실하다. 대부분의 대사가 『햄릿』의 내용에 일치한다. 그런데 희한하게 순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온통 앞뒤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 그게 썩 근사하게 말이 된다. 마치 대본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 당신의 훌륭한 문장들을 이렇게도 배열할 수 있단 말이죠." 감히 대 셰익스피어에게 말이다.
연극을 보고, 집에 와 『햄릿』을 다시 읽고, 다시 연극을 보고, 다시 『햄릿』을 읽었는데, 내 머릿속에서 『햄릿』의 책이 뜯어지고 책에 담긴 글자들이 폭발하듯 종이에서 뛰쳐나와 허공 가득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 바로 그 글자들이 익숙한듯 새로운 모양으로 착착 배열되는데, 그 혼돈과 같던 군무를 끝내자 단정하게 빛나는 황금빛 대본. 멋진 분위기의 유쾌하고 밝은 미소가 탁, 하고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셰익스피어를 향한 깜찍한 도전은 성공적이다. 훌륭하다.
『햄릿』의 장소적 배경은 12세기 덴마크 왕국의 엘시노어이며 시대적 배경은 16세기 영국이다. 배경이 다소 복잡한 이유는 『햄릿』의 전신이라 생각되는 덴마크 구전 전설 <Amleth>가 12세기에 편찬되었으며, 그것을 셰익스피어가 16세기에 Hamlet이라는 희곡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인인 셰익스피어가 영국이 아닌 덴마크를 배경으로 영국인에 대한 글을 썼는데, 머나먼 시대와 장소를 건너 21세기 한국에서 그 『햄릿』을 배경으로 한국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극중극. Play within a play. Mise en abyme. 사실상 『햄릿』 자체가 바로 그 '극중극'을 수없이 품고 있으니, 과연 이 연극은 셰익스피어 『햄릿』에 충실한 것이 맞다.
『햄릿』에서의 햄릿은 누구인가? 덴마크 왕자이며 아버지 왕이 삼촌 클로디우스에게 독살 당하였고, 그 직후 왕비인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에서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걸리는 인물이다. 그는 왕자다운 고귀한 성품을 지녔으나,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탓에 결정적인 행동을 취해야 하는 순간, 생각에 매몰되어 우유부단하게 일을 망쳐 버리는, 치명적이고도 비극적인 결함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면서 어머니로 인해 받은 상처를 같은 여성이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오필리어에게 투영하여 그녀의 마음을 매몰차게 찢는 비열함도 지녔으며, 그 뿐 아니라 실수로나마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우스를 죽였음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잔인함을 지닌, 실로 '21세기 현대적'이라 보아도 무방할ㅡ이라기엔 현대로서는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의ㅡ복잡하고 다채로운 인물이다. 중요하게는, 그 모든 비극성에 압도되어 자신의 삶마저 비극으로 휘몰아버리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다양한 햄릿의 캐릭터 중에 '21세기 현대인'에 잘 어울리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의 성격 중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유부단함이지만, 연극 <햄릿 - The actor>에서 주목하는 것은 '우울증 환자'다. 21세기에 있어 우울증은 드물지 않은, 어쩌면 누구나 인생에 한 번 정도는 거쳐야 할 홍역 정도라 여기는 증상이 되지 않았는가.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라는ㅡ귀여운ㅡ책제목처럼, 햄릿이 겪는 우울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크게 비극적이랄 것 없는 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몰입하게 된다, 그의 우울과, 우울로 인한 의심과 망상 속으로.
그런데 16세기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21세기 <햄릿 - The actor>의 햄릿이 똑같이 앓는 우울증인데 어째서 결말이 다른 것일까? 심지어 그들이 하는 대사는 굉장한 싱크로율을 자랑함에도 말이다.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같다. <햄릿 - The actor>에서 '캠벨'과 '사라'라는 임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두 배우는 햄릿의 동창이었던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 그리고 그들에 이어 등장하여 <곤자고의 살인 The Murder of Gonzago>를 연기하는 이름 없는 배우들을 통합하여 새로 이름 붙인 캐릭터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붙일 가치가 없었던 이 두 배우의 존재가 바로 <햄릿 - The actor>의 핵심 요소가 된다. 참 영민하게 틈을 찾았다. 그리고 그 틈을 오히려 가장 매혹적이고도 큰 무기로 탈바꿈시킨 빼어난 대본과 연출에 존경을 보낸다.
<햄릿 - The actor>에서 배우들은 여러 번 배우와 연극에 대해 정의한다. "배우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지요"라든가, 또 연극에 대해서도 몇 번 정의를 내렸었는데 쉴 새 없이 대사가 몰아치는 바람에 두 번을 보았어도 그 대사를 잡아내지 못했다. 슬프군. 무튼, 이 부분에 대한 원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Suit the action to the word,
the word to the action, with this special observance,
that you o'erstep not the modesty of nature. For any-
thing so o'erdone is from the purpose of playing,
whose end, both at the first and now, was and is to
hold as 'twere the mirror up to nature; to show virtue
her feature, scorn her own image, and the very age
and body of the time his form and pressure.
― Act 3 Scene 2 17-24
말을 행동에 맞추되
특별히 자연스러움을 넘어서서는 안 되네. 지나치면 연
극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법이라네. 연극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하자면 자연에다가 거울을 비추어서 미덕의
본모습을 보여 주며, 가식을 경멸하고 시대의 모습을 있
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네.
― 박우수 번역
이 연극에서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번역본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번역이야 번역가마다 다를 수 있으니 원문을 잡고 이해하면 좋다.
이처럼,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도 연극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만 <햄릿 - The actor>에서 훨씬 적극적으로 연극과 배우에 대한 정의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을 기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유난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뮤지컬이건 연극인건 노래건 자신의 장르에 골몰한 내용을 선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가수가 부르는 'Music is my life'라거나. 그런 류. 이 연극을 처음 보았을 때 배우와 연극에 대한 배우들의 선언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는 피곤해졌더랬다. 그런데 다시 책을 읽고 두 번째 보니까 다른 것이 보였다. 물론ㅡ누차 강조하지만ㅡ이 연극은 연극과 배우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연극이 기존의 장르 함몰적 컨텐츠에서 벗어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결정적 단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 햄릿의 여러 캐릭터 중 어떤 '정체성'을 대표로 지목했는가 하는 것이다. 명확하다. The actor. 제목에서 더없이 확실하게 말하듯 왕자도, 아버지를 위한 복수심에 불타는 청년도, 어머니의 부정함에 치를 떠는 아들도, 우유부단한 성격의 고귀한 우울증 환자도 아닌 바로 '배우'. 실제로 햄릿은 원작에서도 배우의 역할을 한다. 아니, 박우수 선생님의 말씀대로 원작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연기를 한다.
햄릿의 광기가 오필리아에 대한 연정이 좌절된 데서 연유했다는 사실을 왕에게 증명하기 위해 폴로니우스는 자신이 연출하고 딸이 연기하는 연극을 만들어 내는데, 이로써 햄릿도 연극을 하고, 왕도 연극을 하며, 폴로니우스도 연극을 하게 된다. 사실상 이들은 모두 배우이다. 폴로니우스는 극 중에서도 대학 시절 줄리어스 시저의 시해를 다룬 연극에서 브루투스에게 살해되는 시저 역을 맡은 적이 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며, 우리는 폴로니우스의 죽음에서 그 극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햄릿』 역자 해설 「햄릿, 그 영원한 모나리자」 p230
셰익스피어의 『햄릿』 자체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골자로 한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역시 원작에 충실한 해석이다.
한밤중의 망루 위에서 파수병이 던진 <서라, 거기 누구냐?>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나는 덴마크 사람 햄릿이다>를 거쳐 <살아 있었더라면, 훌륭한 왕이 되었을 인물>이라는 정체성의 규명으로 끝난다. 이렇듯 작품의 흐름 자체가 이미 존재에 대한 탐구를 시종일관 제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햄릿』 역자 해설 「햄릿, 그 영원한 모나리자」 p215
그리고 햄릿의 다양한 정체성 가운데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했다는 점이 이 연극의 의도와 방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연극과 배우의 역할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왕자와 아들과 우울증환자라는 다양한 정체성을 뒤로한 채 '배우'로서의 햄릿을 선택한 이 연극의 결말이, 모든 주요 인물들이 죄다 죽어 버리는 비극 중의 비극인 원작 『햄릿』과 정반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말한 이름 없던 두 배우, '사라'와 '캠벨' 덕분이다. 처음에는 이 두 사람이 햄릿의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존재들로 인식되었는데, 결말을 보니 그 반대였음을 알게되어 '반전'의 묘미가 즐거웠다. 희극보다는 비극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취향에도 불구하고, 그 반전은 명쾌하고 유쾌했다.
원작에서 햄릿은 미친 척 연기했을 뿐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와 호위병 마셀러스, 버나드도 아버지의 유령을 함께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햄릿 - The actor>에서 아버지의 유령을 본 사람은 햄릿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이것은 우울증에 걸리다 못한 햄릿이 정신분열증의 문턱을 막 넘었음을 시사한다.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지나치게 빠른 재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햄릿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홀로 정신분열증의 길로 걸어들어가던 참이었다. 이때 등장한 이들이 바로 사라와 캠벨, 두 배우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부터 햄릿으로 하여금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나도록 '치료'를 시작한다.
그들이 시술한 '치료'는 다름 아닌 언어를 기반으로 한 연극을 통해 내면의 욕구와 불안을 표출하는 것이다. 할 말이나 표현하고픈 바를 표현하지 못하고 내면에 쌓아만 두었을 때 마음의 병, 즉 정신병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21세기 의학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바다. 하여, 아직 '정신과 의사' 내지는 '전문 상담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12세기 덴마크, 혹은 16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바로 그 마음을 담당하는 의사 역할을 한 것이다. 실로 굉장한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연극을 보면서 충분히 납득된다.
『햄릿』을 읽고 다시 보았을 때,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들의 연기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원작 『햄릿』에서는 햄릿의 의심이 참인 것으로 드러난다. 숙부 클로디우스는 선왕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맞았고, 어머니 거트루드는 아버지를 향한 정절을 배반하고 숙부의 손길을 받아들인 것이 맞았다. 본인들의 입으로 자신들의 죄를 독백 혹은 방백으로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로 죄를 지었고 햄릿은 그 죄를 통찰했다. 그런 실제 악행과 죄악이 난무하는 덴마크 왕궁은 필히 전부가 죽어 버리는 비극으로 닿아야 한다.
그러나 <햄릿 - The actor>가 그리는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햄릿의 초기 정신분열증 증세로 인한 망상일 뿐, 클로디우스도, 거트루드도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서, 햄릿이 커튼 뒤에 숨은 자를 죽이고는 '클로디우스'이기를 바랐을 때ㅡ그것은 원작에도 있는 대사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모두가 '연극'이라는 상황 때문에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것이다ㅡ 서둘러 사라가 '폴로니우스'로 돌려 버렸다. 사라는 클로디우스를 죽어야 할 사람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성 중) 방전.ㅠ
황금 좌석.
황금 대본.
황금 배우들.
황금 무대. 조명. 음악.
최고의 효율성을 보여준 수준 높은 공연.
좀 더 제대로 후기를 쓰고 싶은데...
시간이 자꾸 가고 있네.
바라건대 가능한 빨리 다시 후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