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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현대 무용] SIDance 2018 - 미트칼 알즈가이르 Mithkal Alzghair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by Vanodif 2018. 10. 1.




<SIDance 2018 - 미트칼 알즈가이르 Mithkal Alzghair>

* 일시 : 2018년 10월 2일 화요일 저녁 8시

* 장소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 https://www.sacticket.co.kr/SacHome/perform/detail?searchSeq=37971

* SIDance 홈페이지 : http://www.sidance.org/2018/main.php




<미트칼 알즈가이르 - 추방>
 
“파리 당스 엘라르지 2016 우승작, 뿌리뽑힌 망명자의 갈 곳 잃은 스텝”
내전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온 젊은이들이 힘겹게 무너져 내린다. 커다란 흰 천은 굴복의 백기인지 자신들의 가림막인지 알 수 없다. 중동의 민속춤 다브케는 낡은 부츠에 실려 덜거덕거리며 화려한 스텝도 그럴듯한 포즈도 없다. 수척한 뺨과 깊은 두 눈. 이들은 무얼 말하는 걸까. 걷기로 시작된 공연은 각자 퇴장으로 끝을 맺는다. 몸은 우리의 시간과 역사를 담고 있다. 이들의 춤은 보여주기보다 보아주기를 바라는 춤인 것 같다. 안무자 미트칼 알즈가이르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건너와 다음 비자를 기다리며 자신의 삶과 예술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 파리 당스 엘라르지 승 작으로 현재 전 유럽을 순회공연 중이다.






요즘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한 시국인데, 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시간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제목을 보면 이 작품인 것도 같고. 그런데 설명이랑은 좀 달라서. 만약 이 작품이 맞다면 와... 굉장하다! 단번에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이 떠올랐다. 한 눈에 보아도 난파 뗏목에서 구조요청을 하는 몸짓임을 알아 보겠고, 그러다 등 뒤로 두 손목이 묶인 노예와 같은 모습, 그러다 알라신께 기도하는 듯 돛대 같은 티셔츠를 벗고 절하는 동작. 단 세 명의 무용수가 거의 흡사한 동작을 하는데도 각각 동작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한 명은 살았다! 한 명은 알라여, 굽어 살피소서/고맙습니다, 한 명은 검사를 받는 듯한 경직된 자세. 의도한 메세지를 컴팩트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전달한 멋진 안무다. 이 영상을 보니 기대된다.




Théodore Géricault

Le radeau de la Méduse

1819

Huile sur toile

491 x 716 cm

Musée du Louvre


* 그림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047





As part of Dublin Dance Festival 2017 26 & 27 May 2017 
Abbey Theatre, Peacock stage



"이것은 단순히 시리아 전쟁에 대한 다큐가 아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시리아 출신 무용수이자 안무가 미트칼 알즈가이르는 군역을 피해 프랑스로 도주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에서 망명의 불확실성과 탈출에의 희망, 그리고 다시는 조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시리아 민속춤에서부터 시작하여 변형되는 이 안무를 보면 확실히 정착이나 안정과는 거리가 먼, 끝없이 부유하는 불안 속에서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감정이 든다. 직접 보면 어떤 느낌일까.








좀 후기를 잘 쓰고 싶은데 밤새 감기가 걸려 버려 정신이 몽롱하다. 아쉽게도 어제 보면서 마음 먹은 만큼 잘 쓰진 못할 것 같다. 반 년이 넘도록 <춤추는 강의실>을 듣고 있는데, 그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이번 SIDance를 보면 지금껏 배운 강의 내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 하다. 나는 이 공연을 얼리버드로 구입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많은 공연들 중 이 공연을 선택했던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프랑스 현대무용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을까 싶은데. 프랑스이긴 한데 미트칼 알즈가이르의 이 안무는 '난민'을 모티프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번 SIDance에서는 '난민'쪽의 테마로 들어가는 것 같다. 알즈가이르 본인은 이 춤이 '난민' 코드에 국한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종호... 이종호 님이 맞나? 내가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는 얼굴도 기억 못한다ㅠ;; 암튼, <춤추는 강의실>에서 두 번 강의를 해주셨던 이종호 님(틀리지 않기를ㅠ)께서 설명하시기를, '무용이 아름다움을 다루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 무용계에서 아직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것은 좀 미흡하지 않았나 싶다. 해서 이번 SIDance는 사회적 이슈 중 <난민>에 초점을 맞추어 올리기로 결정했다'고 말씀하셨다. 위에 연결해둔 SIDance 홈페이지로 가면 예당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국가들로부터의 다채로운 공연들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역시나 풀영상이 없어서 구체적인 후기를 쓰는 것이 힘들게 되었는데. 여담이지만 작품을 보면서 '어째서 공연 풀영상이 배포되지 않는 걸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관객의 입장에선 참 서운하고 불편한 일인 건데,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이유를 더듬어 가보고 싶었다. 그래봐야 제작자의 입장이 아니라 관객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다겠지만서도. 위에 올린 두 영상 만으로 상상했던 것과 실제로 본 공연은 당연한 말이지만 달랐다. 기실, 공연 풀영상을 보고 간다 해도 현장에서 직접 대했을 때 크게 느낌이 다른 것이 공연 예술의 특징이며, 그 중 가장 차이가 심한 것이 무용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금껏 무용 공연에 데려간 사람 치고 '동영상으로 보던 것과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훨씬 좋다'라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만큼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 무용 작품의 풀영상이 많이 공개되기를 관객의 입장에서 희망한다. 


이 작품의 경우 전체 안무를 모른 채 현장에서 공연을 대했기 때문에 다가온 장점이 있었다. 바로 '충격'인데, 인상이 더 강렬했다. 이 말은 곧 '메세지 전달에의 효과'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에서 이것이 현대무용의 정체성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 고전/낭만 발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발레를 보면서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참 좋다.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즐겁거나 슬픈 세계로 들어가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나옴으로써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렇게 '감정이 해소된 이성'은 다시 돌아온 현실의 잡다한 고뇌들을 조금 떨어진 시야에서 관조할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 속에 맴도는 동안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회를 갖는다ㅡ는 것이 예술의 대표적인 선기능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무용의 '메세지'라는 것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감상자로 하여금 좀 더 깊은 현실로 이끈다. 다만 내가 보던 것과는 다른 쪽 문이 열리기 때문에 같은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 약기운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적당히 걸러서 읽으시라. 암튼 현장에서 비로소 전체 안무를 대한다는 것은 '메세지 전달'에 있어 효과가 좋았다. 다만 그러려면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안무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 난제일 텐데, 알즈가이르는 이 점에 있어 훌륭한 실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애써 이해를 한 것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입장에선 풀영상이 가능한 많이 풀리기를 바랍니다아.



위의 두 번째 영상이 내가 본 공연과 같은 영상이다. 그런데 영상은 턱도 없이 짧다. 공연을 직접 보면서 위에서 내가 저 영상 만으로 추측했던 의미들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 틀린 건 아니고 세 사람이 셔츠를 벗는 장면의 이해가 틀렸던 것 같다.


현대 예술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작품의 의미는 관객 내에 존재할 것이다. 좋은 안무가라면 자신의 의도가 관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기뻐하리라. 그만큼 작품의 의미와 가치가 풍성하게 증식하는 것이니까. 아 자꾸 뜬금포를 타네...;; 이래서야 작품 내용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공연이 시작하면 알즈가이르가 곱개 개어진 하얀 천을 두 손에 들고 나온다. 그 천을 바닥에 놓은 그는 공연 시작 전부터 무대 앞에 놓여 있던 장화 한 켤레를 신는다. 처음부터 '난민'을 테마로 했음을 알고 간 나는 맨발의 그를 '노예 상태'로, 그리고 장화를 신는 행위를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상태'로 해석했다가 곧 그 해석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신은 장화는 다름 아닌 '군화'였던 것이다. 군화를 신은 그는 불안하게 흔들흔들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춤이라기보단 구령에 맞춘 행군을 연상시켰다. 일정한 박자를 지닌 군화의 딱딱한 소리가 어찌 들으면 탭댄스 같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행군과 같은 춤을 추는 알즈가이르의 얼굴에 어떠한 확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불행해 보였다. 그렇게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던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하얀 셔츠를 벗어 바닥에 놓고는 그 셔츠를 밟기 시작했는데, 그 부분이 난해했다. 아마도 자신의 인간성을 짓밟은 전쟁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긴 했는데. 셔츠를 짓밟은 그는 군화를 벗었고, 입고 있던 바지를 발목까지 벗었다. 그러자 그의 바지는 그의 두 발을 옥죄는 족쇄가 되었고, 손목을 등 뒤로 교차한 그는 다름 아닌 포로, 또는 노예가 된 셈이었다. 그 자세로 이리저리 고통스럽게 바닥에 쓰러지고 뒹굴던 그는 마침내 일어나 다시 바지와 셔츠를 입고는 무대를 퇴장한다. 전쟁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짓밟는지,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존엄성은 한 사람의 인격을 발가벗겨 버리고는 그를 노에나 다름 없는 상태로 만든다는 메세지를 받았다.


2막?이 되자 알즈가이르를 포함하여 세 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간헐적으로 시리아인의 허밍소리가 녹음되어 들렸고, 또 가끔은 무용수 본인이 흥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세 명은 등장하여 서자마자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 11자로 들어 올렸는데, 음... 이 자세는 작품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예습을 했을 땐 위에 실은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떠올렸더랬는데, 직접 보면서 이상하게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떠올랐다.




Pablo Ruiz y Picasso 

Guernica 

1937 

Huile sur toile 

349.3 x 776.6 cm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Madrid, Spain



아마 오른쪽의 두 팔을 든 사람 모습이 떠올랐던 것일 텐데. 겁에 질린 눈빛으로 두 팔을 높게 든 세 명의 무용수는 파도 치는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있는 것처럼 몸을 흔들거리는가 하면, 이리저리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두 팔을 등 뒤에서 교차시킨 채 허리를 숙이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들은 내내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러다가 위의 첫 번째 영상 3분 50초 지점에서 세 명이 셔츠를 벗고는 두 팔을 높이 든 장면에서는 타국에서 마치 죄인이 된 것 처럼 조사 받는 난민들의 상황이 느껴졌다. 그들은 범죄자가 아니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즉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을 했건만, 막상 그들이 닿은 나라에서는 범죄자나 다름 없는 신분이 되어 버린 것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그리고는 아래 영상의 1분 30초 부분에서 처음에 알즈가이르가 등장할 때 가지고 왔던 커다란 흰 천을 세 명이서 펼쳐 들고 춤을 추는데, 기실 나는 그 천과 벗은 티셔츠의 의미가 궁금해서 공연 후 <예술가와의 대화>에 남았던 건데 아무도 그 질문을 해주지 않았고, 내가 하려고 했을 땐 질문 시간이 끝나 버려서 결국 하지 못해 아쉬웠다. 커다란 천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지만 입은 세 명의 무용수가 큰 천으로 그들의 몸을 거의 가린 채 춤을 출 때 천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가 마치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인데, 천을 든 채 뒤돌아서 춤을 출 때의 그림자에서는 흡사 그들의 머리가 잘린 것 같아 보였더랬다. 거봐... 풀영상이 없이 글로만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지. 답답하다.ㅠ 암튼 그렇게 천을 들고 춤을 추는 동안 그들이 벗어 두었던 티셔츠는 바닥에 구겨져 있었는데, 맨 나중에 두 명이 춤추는 동안 한 명이 큰 천과 티셔츠를 곱게 개어서는 차곡차곡 포개는 장면에서 그 천과 티셔츠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었다. 뭐, 알 수 있는 기회는 없어져 버렸고. 검색을 하기엔 에너지가 없고. 암튼 큰 천은 조국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자 동시에 자유와 희망에 대한 마음이었고, 티셔츠 역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존감,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나하고 나는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작품의 대부분을 보는 동안 나는 이 작품을 '난민에 대한 이야기'라 여겼다. 그런데 끝으로 가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작들을 대하면서 순간,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난민'은 '전쟁이나 재난 따위를 당하여 곤경에 빠진 백성'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명상하자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불가항력적 고통에 처한 자'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 누구라도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이 가진 존엄성은 어떤 모습이 되며,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가. 이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난민'이라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멸시를 받거나 동정을 받아야 하는 이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난민 문제'라 하면 일단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품어 주어야 한다고 느끼게 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 제주도에 닿은 예맨 난민 문제가 화두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간단하지만은 않다. 2016년 독일 쾰른에서 있었던 난민 연루 집단 성폭행 사건도 떠오르거니와, 최근 우리나라 불법체류자의 성범죄율이 85% 증가했다는 기사가 있었던 만큼, 여성의 인권이 낮은 이슬람 문화권 출신 남성들이 대거 입국하는 것은, 상당히 안정된 치안으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성범죄율이 높은 우리나라에 사는 여성으로서는 불안하게 느끼게 되는 점이긴 하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 예맨 난민의 성범죄 사건은 보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난민 수용에 관대한 정책을 썼던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에서 난민 범죄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이후 난민 수용에 대해 긍정적이던 시각이 조금 타격을 받은 건 사실이다. 허나 생각해 보면 난민이 저지른 범죄보다 자국민이 저지른 범죄율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고. 그들에게 '난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기에 극히 일부가 저지른 범죄가 더욱 크게 부각되어 인식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모르겠다. 아직 생각 중이다.


난민에 대한 내 의견의 현주소가 이렇듯 갈팡질팡인 중에 접한 이 공연은, '난민'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의도하지 않은 불가항력적 곤경에 처하여 존엄성이 손상된 그들'의 모습이 나와 전혀 상관없이 불쌍하고 꺼려지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도 처할 수 있는 모습임을 상기해 볼 때, 그들의 그 절박함은 나의 절박함으로 연결될 수 있다. 아... 이 후기를 어떻게 맺어야 할 지 모르겠네. 몽롱한 중에 뜬금포까지 타다 보니 푯대를 잃은 것 같다.ㅠ 


짧은 영상으로 보았을 때도 효율적인 안무라 생각했는데, 직접 공연을 보자 '참 영리한 안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실한 눈빛을 한 채 높이 든 두 팔은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항복을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며, 신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올리는 손 같기도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 주시오' 라는 절규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공감해 주시오'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공연 후 있은 인터뷰에서 알즈가이르는 이 작품을 두고 '난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만든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라고 강조했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정신적 난민의 상황에 처한 경험이 있는 만큼 이 작품은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붉은색 티셔츠가 미트칼 알즈가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