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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연극] 나이팅게일의 소리 by 극단 ETS @나온씨어터

by Vanodif 2018. 5. 18.




* 극단 ETS 페북: https://www.facebook.com/ETS.TheaterCompany



<나이팅게일의 소리>


• 공연 일시 : 2018.05.17. - 05.27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3시 7시, 일요일 4시) 

• 장 소 : 대학로 나온씨어터 

• 문의/예약 : 010-4589-2663, 010-2312-5318 

• 예 매 : 인터파크티켓, 플레이티켓 극단 페이스북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워 - 40% 할인








* Motivated by Ovid, Procne and Philomela, Metamorphoses


오비디우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http://vanodif.tistory.com/1167


* 2009년 여고생 강간, 방화 살인 사건: 

https://namu.wiki/w/%EB%B6%80%EC%B2%9C%20%EC%97%AC%EA%B3%A0%EC%83%9D%20%EC%A7%91%EB%8B%A8%EC%84%B1%ED%8F%AD%ED%96%89%20%EC%82%AC%EB%A7%9D%20%EC%82%AC%EA%B1%B4



* 이 연극은 위의 오비디우스 작품과 2009년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작품 속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긴 하지만, 오비디우스의 작품은 미리 읽어 간다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연극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2010년 짧게 올렸던 극단 ETS의 한국 창단 공연으로, 이후 7년의 발효와 숙성을 거쳐 이번 5월에 다시 올리게 된 작품이다. 극단 ETS의 공연은 작년 5월, 국립극장에서 보았던 <프로메테우스> 이후 1년 만이다. 이번 <나이팅게일의 소리>에 대한 정보를 미리 접했을 때 나는 덜컥 걱정이 앞섰다.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강간, 학대, 친족살해, 식인이라는 자극을 위한 자극과도 같은 비극으로 점철된 오비디우스의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의 내용도 읽기 힘들었지만,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비극이 이 땅에 버젓이 자행된 실례實例인 2009년 여고생 강간, 방화 살인 사건을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주하기엔 너무 아프고 불편하여 외면해 버리고 마는 진실. 그리하여 매몰된 진실의 한맺힌 목소리를 대면하라는 극단 ETS의 초대 앞으로 흔쾌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민을 하고 또 했지만 작년 <프로메테우스>를 다룬 깊은 통찰력을 믿었기에 두 눈 꼭 감고ㅡ가 아니라 부릅뜨고ㅡ그 소리를 들어 보겠다 마음 먹었다. 밥을 먹다가 동물이나 아기, 살인, 공포, 신체 절단, 사고 장면이 나오면 입에 있는 음식물을 삼키지 못한 채 뱉어 버리는 나를 잘 아는 일행은 몇 번이나 '사양하라'는 권고를 했으나, 내 안의 비겁과 나약함을 잠시 접어 두고 극단 ETS를 믿어 보기로 했다.





대학로 위쪽 로터리를 지나 혜화 초등학교 직전 맞은 편 골목에 위치한 나온씨어터는 찾기 쉬운 듯 쉽지 않고 쉽지 않은 듯 쉬운 곳이었다.





주신 자리는 내 입장에선 황금좌석이었는데, 앞에서 두 번째 중앙 좌석이었을 뿐 아니라 양 옆으로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집중하기에 좋았다. 전체적으로 자리가 거의 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시작하기 전 무대 배경 화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I'm Sorry가 반복되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끝나고 집에 와 계속 검색했지만 어떤 곡이었는지 찾을 수 없다. 작품을 통하여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소녀를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기도 하겠고, 그런 비극을 초래한 이 사회를 만든 우리의 마음일 수도, 또한 그런 억울함을 듣지 않으려 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작년에 보았던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나이팅게일의 소리> 또한 고전을 재해석하여 현대의 사건과 연결시킨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고전을 재해석했다고 하지만 <나이팅게일의 소리>의 경우, 「나르킷소스」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등에 비하면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로크네와 필로멜라」를 다루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것도 단순히 고전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만 한 작업으로 보기에는 연결하는 사건들이 너무 구체적이고 메세지가 분명하다. 해서, 두 작품을 연결하여 드는 느낌을 정리해 보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인간사의 비극'이라는 답이 나왔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인간의 탐욕과 폭력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란 생각. 『총, 균, 쇠』를 저술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인간의 기본적인 고민거리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인간은 여전히 자녀양육, 노화, 분쟁해결, 건강 등을 걱정하고 있다'고 했는데, 과연 유구한 역사 속 인류 문명의 발전과 인간성의 변화 사이에는 크게 상관 관계가 없는 것인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인간사의 비극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변할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수긍한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동안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억울하게 상처 받으며 죽어가고 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연출가는 바로 그것을 묻고 있는 것 같다.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당장 칼을 빼어 들고 뛰쳐 나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라! 가 아니라, 이리로 와서 피해자들을 듣고, 함께 생각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그리하여 나와 내 주변부터라도 조금씩 변화시켜 보자는 것. 그것이 아닐까.


작품을 보기 전 지레 잔뜩 긴장하고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작품의 구성과 연출은 품위있고 세련되었다. 흔히 '강간, 방화, 살인'이라 할 때 연상되는 '자극적인' 장면은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했기에 더욱 대사와 작품의 의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소재의 작품이 중학생 이상 관람가일까'라고 보기 전엔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알겠다. 중학생 이상 관람가가 맞다. 아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폭력이 얼마나 추하고 파괴적인지, 그 피해자가 얼마나 비참하고 억울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자극적인 장면 없으니까 부모님들은 걱정 마시고 자녀분들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물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권할 만한 작품이다. 우리가 외면하여 접고 넘어간 사회의 모서리 아래에 짓눌린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의 억울함이 고여 사회 전체가 곪기 전에, 뒤돌아서 접어둔 모서리를 들추어 흥건히 배인 눈물을 닦아주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한다.






* 이후 쓰는 내용에는 심각한 스포일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보시기 전이라면 보신 후 읽으시길 권합니다. *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전체 줄거리나 내용상의 세부사항은 직접 연극을 보세요. 나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라 보았던 포인트와 그에 대한 내 소감 만을 적는다.



먼저, <나이팅게일의 소리>에는 등장인물이 세 명 밖에 없다. 피해자 여고생, 여고생의 아버지, 그리고 가해자 한 명. 하지만 그 세 명으로도 작품은 꽉 차고도 남을 정도로 응축된 대사들이 빛난다. 몇 군데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나의 해석 내공이 부족하여 그러한 것이고, 전체적으로 정성들여 빚어낸 대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 인물의 상황과 성격에 맞는 내용과 어투까지 적절하게 구사함으로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였다. 일행에 따르면 '연극 같은 대사'가 아니라 '실제 인물이 할 법한 대사'다. 이 부분에 있어선 일행의 분석이 더 나으니 그것을 싣자면, '여고생, 정확히는 여고생의 영혼은 영혼답게 연극적인 대사와 딕션을 했지만, 아버지와 가해자 학생은 살아있는 인간답게 실질적인 대사와 딕션을 하여 더욱 실감났다' 라 했다. 연기력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메아리치는 대사들이 있었다. 그 대사들이 포스터에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은, 그만큼 곱씹어 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인물별 인상적인 대사를 올려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여고생의 영혼. 


"너를 눈 멀게 한 건 뭘까?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차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미로. 그게, 땅 위에도 있는 거야. 그렇지?"


이 대사는 어려웠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차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미로'라는 대사는 정확히는 영국 계관시인 테드 휴즈 Ted Hughes가 시로 재창작하여 옮긴 Tales from Ovid 에 나온 부분이다. 여동생 필로멜라의 비극적인 상황을 들은 직후 언니 프로크네의 마음에 일어난 상태로, 오비디우스 원전으로부터의 번역에는 'She stormed ahead, confusing right and wrong 정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고 앞으로 내달았고'라 적힌 부분이다. 그 부분을 테드 휴즈는 


By the devouring single idea 

Of revenge. Revenge 

Had swallowed her whole being. She had plunged 

Into a labyrinth of plotting 

Where good and evil, right and wrong, 

Forgot their differences. ('labyrinth' 검색 또는 Elaine Fantham의 Ovid's Metamorphoses p.149)


복수라는 일념에 온통 사로잡힌 그녀는

음모의 미궁 속으로 곤두박질쳤으니,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는 미궁이었다.


라 해석했다. 이 부분이 내게 어려웠던 이유는 '미로(미궁)는 땅에도 있어'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늘에도 미로가 있다는 뜻인가?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러하다. 이 대사는 프로크네에 해당하는 대사였다. 프로크네는 신화 속 인물이다. 즉, 프로크네가 겪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 못하는 미로'는 신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어이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땅', 즉 현실, 그것도 21세기 현실에도 존재한다. 피해자 소녀의 이 대사는 처음에는 '너를 눈 멀게 한 건 뭘까?'로 인해 가해자들을 향한 말처럼 여겨졌다.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비디우스 작품에서의 이 구절이 피해자 필로멜라의 언니인 프로크네에 해당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그 대사는 프로크네, 즉 피해자로 인해 가슴 아픈 피해자 가족을 향한 말이자, 그들을 바라 보는 우리 관객을 향한 말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있겠다. 일차적으로는 선과 악을 가늠하지 못했던 14세 청소년 가해자에게 한 말임과 동시에,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한 말일 것이다.


소녀의 또 다른 대사는 이러했다.


"나이팅게일은 밤에만 운대요.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우는 나이팅게일이 암컷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는 건 수컷이래요." 


이 대사 때문에 나이팅게일을 검색했다. 밤에 우는 새가 거의 없기에 밤에 우는 것으로 인상 깊은 나이팅게일은 주로 수컷이며, 밤에 우는 것은 짝짓기를 위함이란다. 생각이 이에 이르면 당연히 '피해자 소녀'를 상징하는 이 '나이팅게일'이 밤의 정욕을 참지 못해 발광하는 '가해자'로 그 정체성을 옮겨 간다. 이 점이 신기했는데, 이 부분은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음을 밝힌다. 작품에서는 '수컷이다' 까지만 언급했지 짝짓기를 위한 소리인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해서, '밤에 우는 다른 수컷'을 생각해 보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새벽에 우는 수컷은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깊은 어둠 속에 홀로 우는 수컷. 그렇게 생각하면 '수컷 나이팅게일'은 '피해자 소녀의 아버지'가 된다. '밤'이라는 것은 '밤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시기'를 의미할 테고, 그것은 '사랑하는 딸을 비참하게 잃고, 직후 아내는 일을 놓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당장 부양해야 할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힘든 시기'를 의미하게 된다. 그 힘든 시기에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딸의 억울함을 상소하지도 못한 채 가슴 뜯으며 울부짖는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새벽에 홀로 우는 수컷 나이팅게일이다.


물론 제목 <니이팅게일의 소리>에서 연상되는 '나이팅게일'은 피해자 소녀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다. 이 대사 자체가 피해자 소녀 영혼의 대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컷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는 건 수컷'이란 부분을 다시 생각해 보면, 억울하고 아픈 건 피해자 소녀 뿐 아니라 피해자의 아버지, 즉 가족까지다라고 확장해 볼 수 있겠다.


이제 그에 이어지는 대사를 보자.


"도심의 나이팅게일은 더 큰 소리로 우는데,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도심의 소음에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래요."


도심은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다. 즉 자신이 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더욱 큰 소리로 운다. 그만큼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대사다. 울어도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21세기 서울. 그 대사는 그대로 아버지의 "우리 애 얘기, 누가 신경이나 쓰나"로 연결되지만 그 대사는 좀 있다 쓰기로 한다.


문제는, 이 대사가 세 번 정도 반복되었는데 마지막 이 대사에서는 맨 끝에 조금의 시간을 두고서 "고마워"란 말이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 부분에서 잠시 멘붕이 왔었는데, 곧 나는 이렇게 이해하였다. 수컷 나이팅게일을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아버지라 보았을 때, 그 아버지께 한 "고마워"였겠고, 나이팅게일을 피해자 소녀 자신이라 보았을 때, 자신의 그 말을 들어주러 온 우리 관객을 향한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2009년의 소녀는 죽었고 우리는 그녀를 너무 쉽게 잊었다. 그런데 연극에서 그 소녀의 영혼이 아직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아버지 곁에 서성이듯이, 마음 풀 길 없는 그녀의 영혼이 어쩌면 아직도 이곳에 남아 그 공연장에 앉아 울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억울한 울음들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눈물에 익사한 채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고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백 수천 년을 곪다 이제야 겨우 종기 터뜨리듯 터져나오고 있는 미투운동을 두고, '뭐만 하면 미투에 걸릴라'하며 조롱해대는 이들이 이 작품을 보면 무엇이라 할까 궁금하다. 당신의 딸이 그 일을 당한다 해도 그렇게 말한 것인가, 라는 기초적인 질문은 이미 마비될 대로 마비된 그들의 심장에는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한 지 오래다.



이제 아버지의 대사로 넘어가 보자.


"해 줄 얘기도 없고, 하고 싶은 얘기도 없어요. 가요, 가서 다른 기사 써요. 우리 애 얘기, 누가 신경이나 쓰나. 그래 봐야, 바뀌는 것도 없어. 자식 새끼 먼저 보내는 나같은 위인이 뭐 할 말이 있겠어. 가!"


작품에서 몇몇 부분 아버지와 가해자 소년은 인터뷰를 당하는 설정인데, 그 중 한 장면이다. 이 대사에서 볼드 처리된 부분은 '바뀌는 것도 없어'이지만, 들었을 때 가장 아팠던 대사는 '우리 애 얘기, 누가 신경이나 쓰나'였다. 그래. 누가 신경이나 쓰나,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나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프로메테우스>에서의 이오도 그러하고, 김혜리 극작가겸 연출가는 계속해서 소외되고 외면 당한 이들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이끈다. 들으면 듣는 동안이나마 관심을 가질 것이고, 관심을 가지면 마음이 바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기에 바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듣기라도 한다면, 그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적어도 그들을 듣기라도 한다면 사회는 지금과는 다르게 변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계속해서 그들을 대변해서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상처를 받았으되 말할 혀를 잘려 말할 수 없는 필로멜라처럼, 소가 되어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게 된 이오처럼, 이미 죽어버려 산 자에게 말을 전달할 수 없는 피해자 소녀 처럼, 돈과 권력과 지식이 없어 사회로부터 짓밟히고 억눌리고 상처 받아도 마땅히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사회 약자들을 위해, 필로멜라의 자수와 이오의 발 같은 역할을 하는 목소리를 작가는 연극 작품으로 내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들었으면 좋겠다. 많은 돈과 권력으로 비싼 변호사들을 사서는 자신의 굳은 혀 대신 번드르르한 말을 뱉어내게 하는 잘난 권력층의 변명과 자기합리화를 우리는 이미 많이 들었다. 나를 비롯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변호할 마땅한 말도, 그 말을 대신할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갖지 못한 이들을 대신하는 이 연극을 통해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으면 좋겠다.



"씨발, 어린 게 내 잘못인가. 요새는 애들끼리 돌아다니다가 지들끼리 맘에 안 드는 애 하나씩 골라서 패다가 죽는 것도 존나 많은데, 같이 살다가 패죽이는 것도 있고. 사고로 기집애 하나 죽은 걸 뭐 어쩌라고. 왜요. 아이, 말 안 해."


함께 한 일행은 욕 알러지가 심해서 설정상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청소년의 대사를 힘겨워했다. 작품 속 가해자는 가해 학생 여덟 명 중 가장 어려서 감옥도 가지 않은 14세 청소년이다. 이 시점에서 청소년 범죄 처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평소에도 생각하는 바인데, 개인적으로는 청소년과 정신적 문제로 인한 감형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어쨌건 간에 그들이 상해를 끼친 것은 한 사람의 인격체다. 실수였건 몰랐건 당한 사람은 그 길로 남은 생이 망가진다. 그런데 어리다는 이유로,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면, 아무 잘못 없이 치명적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권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나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보호 받아야 할 청소년이나 정신질환자 만큼이나 일반인 피해자 역시 안전권을 보호 받아야 마땅한 인격체다.


작가는 여기에서 죄는 죄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보자는 입장을 취한다. 가해자 소년의 저 대사는 구역질나는 것이며, 명백히 동정할 가치가 없는 가해자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지은 죄에 대한 죄값은 받아야 하되, 죄를 넘어 그 소년 자체에 대해 들여다 보게 만든다. 부모가 버린 소년. 애초 원해 낳지 않은 소년. 찌들어지게 가난한 할머니와 함께 살다가 구질구질함이 싫어 뛰쳐나가 하루하루 여기저기 친구집, 그날 만난 여자애가 데려가는 찜질방을 전전하는 소년은, 그 나이에 마땅한 부모나 선생님의 울타리가 없이 야생에 방치되어 야만적으로 자랐다. 분명히 소년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지만, 과연 그 책임이 소년에게만 있는 것일까? 주변에 그 소년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바로 잡아주는 제대로 된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소년은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런 기본적인 '안정'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부모를 포함한 그 누구도 원치 않은 채 이 세상에 홀로 내팽개쳐진 소년. 그 소년을 독버섯으로 키운 것은 사회였다. 가해자 소년들은 처벌 받아 마땅하나 그들을 계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회적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작품이 품위 있는 이유는 '자극을 위한 자극'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온전히 언어와 연기의 힘으로만 뚝심있게 의도한 메세지를 충실히 전달한 솜씨 좋은 대본과 연출, 연기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 작품의 근본적인 타겟은 유전무죄를 행사하는 권력층이다. 그런데 그 권력층은 누구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이런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작품에 권력층 가해자를 등장시키는 것은 손쉽고 효과적인 장치겠으나, 동시에 자극이 증폭되어 감정의 진흙탕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권력층 가해자를 배제한 채 피해자들만을 등장시켰다. 가해자 소년은 가해자임과 동시에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자, 또 다른 의미에서의 피해자라 볼 수 있는 인물로, 이처럼 피해자만을 등장시켜 피해자들의 내면 깊은 이야기를 듣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천천히,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보고 나온 직후 드는 느낌은 '깊은 내용이지만 군더더기 없다', '지저분하지 않고 깔끔하다', '품위 있다', '세련되었다' 였다. 나 뿐 아니라 일행도 공감한 느낌이다.



다음은 연기자들에 대한 감상이다. 




권재은(소녀 역)


<프로메테우스> 때도 느꼈지만 극단 ETS는 모든 배우분들의 발성이 좋다. 특히 권재은 님은 딕션이 참 좋으셨는데, 그 어떤 단어도 놓친 것 없이 또렷하게 들려서 좋았다. 드럼통에 허리를 꺾어 숙인 채 하는 말이 그대로 다 들려서 깜짝 놀랐다. 그런 건 특급 오페라 가수에게서나 가능한 줄 알았는데. 극단 ETS는 연기와 춤을 조화시키는 감각이 뛰어난데, 시작할 때 권재은 님의 춤으로 인해 순식간에 극으로 몰입하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그 동작에 담긴 의미까지는 모르겠다. 


일행과 나는 감상하는 시선에 있어 차이가 있는데, 일행은 권재은 님의 연기를 다소 경직된 면이 있어 비인간적인 영혼을 표현하는 데 잘 어울린다고 보았고, 나는 깔끔한 감정 처리로 보았다. 나가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조르는 장면에선 그 나이 소녀답게 애교 많고 귀여웠고, 시종일관 발랄한 모습이 아직 철들기 전의 청소년다웠다. 다만 상처에 대한 이야기나 회한의 장면에서는 충분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범진(아버지 역)


아버지 역의 우범진 님과 소년 역의 허 진 님에 대한 일행과 나의 감상은 공통점도 있고 다소 큰 차이점도 있다. 우선 두 분 다 나는 모든 단어가 다 들리진 않아서 답답한 부분이 두어 번 있었다. 그런데 일행은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욱 일반인으로서의 실감이 나게 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했다. 이 부분은 대부분 사람들이 일행의 말에 동의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내가 언어에 좀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를 먼저 들은 후에 감정을 받아 들여 처리하는 시스템을 지녔기 때문에, 내게는 언어가 우선한다. 그래서 대사가 다 들리지 않으면 감정의 흐름에도 방해를 받는다. 그리고 나와 같은 시스템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니 나의 아쉬움은 배부른 투정 정도로 여기도록 하자.


그런데 딕션이 문제가 아니다ㅡ라기엔 거의 모든 딕션이 훌륭하셨다. 발성은 말할 것도 없고. 우범진 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연기력이다. 소년 역을 맡으신 허 진 님을 버스에서 마주쳐 달려들었을 땐 실제로 싸움이 벌어지는 줄 알았을 정도로 실감났다. 그 뿐 아니라 매 순간, 시선에서부터 대사 처리, 감정 처리 모두 훌륭했다. 감쪽같은 전라도 사투리를 매끄럽게 구사하심으로 소박함이 강조되었고, 소녀가 외출 허락을 해달라고 조를 땐 소녀를 정말 사랑하면서도 짓궂게 놀리기도 하는, 비록 삶이 바빠 다 관리해주지는 못할 지라도 딸을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아빠의 모습을 잘 연기해 주셨다. 그러면서도 소년을 만났을 때와 소녀의 죽음에 대해 가슴을 치며 오열할 때는 재가 되어 버릴 듯 깊은 분노와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식 잃은 부모의 모습을 절절히 연기하셨다. 매일 저렇게 연기하시다간 진이 다 빠져 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혼신을 다한 연기였다. 그러면서도 가진 것 없어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자신과 가족의 생이 망가진 비극 앞에 끄덕 없이 차가운 세상에 대한 체념 또한 잘 보여주셨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우범진 님의 대사에. 진정성 가득한 연기 때문이다.




허 진(소년 역)


건들건들, 괘씸하도록 뺀질거리며 뻔뻔하지만, 너무 일찍 세상의 민낯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바람에 독초로 자랄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슬픈 어둠을 잘 연기해 주셨다. 신문 읽을 때는 정말 어려운 단어 뜻을 모르는 애가 읽듯 적절히 더듬거리시는 모습에서 소년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다가왔다. 


비록 소외와 외면으로 인해 사회의 독초로 자랐지만, 그에게도 죄의식과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신문 읽기가 두렵고 꺼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맞닥뜨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가 없었다. 해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인했다. 자신을 책임져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탓에 누구에게서도 책임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범진 님도, 허진 님도 참 자연스러웠다. 일행 말대로 '연극 특유의 억양이나 말투가 없고, 정말 길가에 가다 만나는 누군가가 할 것 같은 말투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주셨다.






7년 전 작품은 어떠했는지 난 볼 수 없었으나, 7년을 숙성시킨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민감하고도 자극적인 주제를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 세련되게 다룬 작품이었다.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귀와 마음을 닫은 채 우리가 외면해 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 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려 공들인 작품이었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소외되고 희생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레퀴엠. 부디 그들의 상처 받은 마음에 평안과 안식과 치유와 새로운 희망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훌륭한 작품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