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의전당 홈페이지: https://www.sacticket.co.kr/SacHome/perform/detail?searchSeq=36203&reviewYn=Y
* 볼쇼이 발레단 홈페이지:
와...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오딜 춤 보고는 언어가 휙, 날아가 버렸다. 언어가 없다.
이거 후기 써야만 할 것 같은데 지금은 꺼낼 언어도, 언어를 꺼낼 에너지도 없다.
마치 "발레란 이렇게 하는 거야"를 보여주는 것 같은 무대.
가슴이 벅차다. 진심 러시아인들이 세상 누구보다 부러워지는 밤이다.
매주 이런 공연을 보고 산단 말이지...
아 모르겠다.
넋이 날아가 버렸어.
내일은 후기를 쓸 에너지가 생길지 모르겠네.
내일 공연 또 보고 싶어서 예당 홈피를 계속 새로고침해도 일찌감치 매진된 표의 반환표 따위 뜨지도 않는다. 엉엉.
하긴 지금 이 시간이면 반환표가 안 되는 것이로군.
와... 내일 공연 가시는 분들 증말 부럽습니다.
이 표도 나로선 무리한 것이었는데, 내일 표 하나 더 무리했을걸. ㅠ
※ 다음은 프로그램북에 있는 <백조의 호수 주요 장면>이다. 내용 이해와 감상에 아주 도움이 많이 되는 설명이다. 물론 프로그램북에는 이것 외에도 작품 감상에 도움 되는 설명이 더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이 부분만 싣는다.
1막 1장: 파 드 트루아
지그프리트 왕자의 성년식이 열리는 연회장. 검을 받고 기사로 임명된 지그프리트가 신하들의 춤에 화답하기 위해 두 여성과 함께 무대에 나선다. <백조의 호수>는 전반적으로 대칭과 반복을 중심으로 짜여있는데, 파 드 트루아(3인무)는 일반적인 파 드 되(2인무)보다 동작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아다지오 - 여성 솔로(1) - 남성 솔로(2) - 코다' 순으로 진행되며, 춤추던 중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나타나 구애하듯 장난치는 어릿광대의 마임은 재미를 더하는 포인트. 특히 시원시원한 점프와 스텝, 우아한 팔 동작이 돋보이는 왕자의 솔로는 남성 무용수의 춤이 이토록 우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막 2장: 악마의 등장
성대한 연회가 끝나고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녘에 홀로 남은 왕자는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던 중 악마 로트바르트가 접근하고, 그의 어두운 힘에 사로잡힌 왕자는 어느 새 백조 무리가 있는 호숫가에 다다르게 된다. 앞선 왈츠풍의 음악과 대조적인 <백조의 호수>의 라이트 모티프(주도 동기)가 연주되며 백조 오데트와의 만남과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왕자를 조종하는 듯, 왕자와 악마의 호흡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1막 2장: 백조의 호숫가
24마리 백조가 일사불란하게 발맞춰 등장한다. 순백의 튀튀(고전 발레에서 착용되는 스커트 형태의 무대의상)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몽환적인 분위기의 '발레 블랑(백색 발레)'을 연출한다. 클래식 발레의 진수라 일컫는 장면으로, 한 마리의 백조가 된 무용수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동작을 수행해낸다. 백조의 날개처럼 팔꿈치를 꺾고 손목을 구부려 두 팔이 S자를 이루는 포르 드 브라(팔 동작)와 고개를 약간 숙여 더욱 길고 우아하게 연출된 목선이 작품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달빛이 비친 듯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도는 호숫가, 백조가 된 무용수들은 줄지어 서있다가 원형으로, 때론 두 줄로 대형을 바꿔가며 클래식 발레의 미학을 보여준다.
1막 2장: 백조의 파 닥시옹
애절하게 떨리는 현의 선율에 맞춰 백조 여왕 오데트와 왕자의 파 닥시옹(줄거리의 전개를 위해 마임을 포함한 극적인 발레)이 펼쳐진다. 오데트와 왕자가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그랑 아다지오가 끝나면, '작은 백조의 바리아시옹 - 큰 백조의 바리아시옹 - 오데트 솔로 - 코다'가 이어진다. 백조의 파 닥시옹은 1막 2장의 전부라 해도 될 만큼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남녀 주역의 춤이 진행될 때면 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군무가 움직이지 않는데 반해, 여기선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백조들이 끊임없이 대형을 바꿔가며 춤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갈라 공연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지만, 군무와 함께 완전체를 보기는 쉽지 않으니 집중해서 봐야 할 장면이다. 이어지는 작은 백조의 바리아시옹은 흔히 4마리 백조로 부르기도 하는 장면으로, 손을 교차로 맞잡은 무용수 네 명의 발 동작과 긴밀한 호흡이 돋보이는 춤이다. 큰 백조의 바리아시옹은 작은 백조와는 대조적으로 대담한 점프와 데벨로페(다리를 높게 들어 올리는 동작)가 자주 등장한다. 섬세한 밸런스와 완벽에 가까운 아라베스크를 요구하는 오데트의 솔로와 코다가 끝나자 왕자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2막 3장: 다섯 공주의 춤
막이 오르면 무대는 다시 성으로 바뀌어 있다. 성년이 된 왕자에게 청혼하기 위해 모여든 각국 공주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작품의 내용상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재미와 볼거리를 위해 삽입된 짧은 길이의 춤 '디베르티스망'으로, 마리우스 프티파의 클래식 발레에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공연 형식이다. 헝가리, 러시아, 스페인, 나폴리, 폴란드 공주들이 차례로 자신의 춤을 뽐내는데, 백조들의 군무가 다소 심심했던 관객이라면 눈과 귀가 즐거워질 타이밍이다. 헝가리의 춤곡 차르다시에 맞춰 우아하게 시작해 정열적으로 마무리하는 헝가리춤, 화려한 머리장식을 하고 등장해 두 손바닥을 활짝 펼쳐 넓은 대륙을 자랑하는 러시아춤, 부채를 들고 점프와 턴 동작으로 시선을 사로잡으며 활달한 기상을 뽐내는 스페인춤, 이탈리아 춤곡 타란텔라에 맞춰 탬버린을 들고추는 나폴리춤, 그리고 폴란드의 춤곡 마주르카에 맞춘 폴란드춤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2막 3장: 흑조 파 드 되
정작 왕자는 아리따운 공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오데트만을 떠올리며 우수에 차있다. 그 사이 악마 로트바르트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흑조 오딜이 등장한다. 오데트와 꼭 닮은 오딜에 일순간 매료된 왕자는 모든 공주를 제치고 그녀에게 춤을 청한다. 1막의 '백조 파 드 되'가 아름다운 아다지오였다면, 2막의 '흑조 파 드 되'는 화려한 알레그로다. 흑조는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던 왕자를 밀고 당기며 자신에게 푹 빠지도록 매혹한다. 그랑 아다지오로 시작해 왕자와 오딜의 솔로 바리아시옹을 거치며 무대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마지막 코다에선 그랑 파 드 되의 백미라 할 수 있는 32회전 푸에테가 등장한다. 남녀 주역 무용수의 화려한 테크닉의 향연을 엿볼 수 있다.
2막 4장: 마지막 호숫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됨을 깨달은 왕자는 호숫가로 달려오지만, 로트바르트의 저주를 풀지 못하게 된 백조는 상심이 가득하다. 백조와 흑조 군무가 교차하며 파국에 이른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발레단마다 결말이 조금씩 다른 것도 <백조의 호수>의 특징이다. 왕자가 로트바르트의 날개를 찢어 백조에게 걸린 마법을 푼다거나, 두 사람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는 등 행복한 결말도 있지만, 대다수는 호숫가로 뛰어든 백조를 따라 왕자도 죽거나, 두 사람이 영원히 헤어지는 등 비극적인 결말을 택한다. 볼쇼이 발레단은 악마 로트바르트의 손에 백조가 죽고, 왕자만 홀로 남겨지는 장면을 선택함으로써 비극성을 더하고, 사랑과 맹세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ㅡ글: 김태희 무용 칼럼니스트
* 경고: 삼천포가 엄청난 후기가 될 예정이다.
딴소리 정말 많이 할 거니까 그런 후기에 안 맞는 분이라면 아래 두 영상만 보시고
더는 읽지 않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정확하게는 이 버전에 있는 안무다. 누가 찍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찍은 거면 옳지 않은 건데.... 감상자의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지만 말이다. 다만 이 동영상은 화질도 나쁘고 무엇보다 음악이 없다. 그래서 보면서 웃었다. 그렇게라도 올려주면 고맙단 마음이 드는 것이 또 신기했고. 음악이야 잘 알려져 있으니 정말 원한다면 따로 찾아서 적당히 맞추어 보면 되는 것이니. 무대장치와 의상, 무엇보다 안무의 구성을 감상하며 예습하는 데에는 그저 고마울 뿐인 영상이다. 이렇게 예습하고는 공연에 가서 무용수분들의 기량과 표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위와 아래 두 영상 다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이다. 그리고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안무다. 그런데 두 영상은 결말이 다르다. <백조의 호수>에는 다양한 결말이 있어 어떤 결말이 선택될지가 궁금한데, 이번 내한 공연에서는 윗영상의 결말을 택했다. 윗영상은 1분 58초 38이 엔딩입니다. 그 뒤에도 영상이 연결되어 있어 헷갈리는 구성이다. 끝에 오데트가 죽고 지그프리드만 남아 사랑과 맹세의 덧없음을 강조한 버전이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죽어버리는 결말을 가장 선호합니다만, 그래도 마리우스 프티마와 레프 이바노프 안무 버전의 해피 엔딩보다는 이 버전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 버전은 해피 엔딩이지만 유리 그리고로비치답달까.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의 비실비실하던 지그프리드가 난 데 없이 힘이 뿜뿜 솟아 대단한 로트바르트를 물리친다는 버전 보다는 오데뜨에게서 힘을 받은 지그프리드가 기운을 차리고 마침내 둘이서 힘을 합쳐 로트바르트를 물리친다는 쪽이 더 개연성이 있다(로트바르트에게서 오랜 기간 시달려온 오데뜨는 로트바르트의 약점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지그프리드에게는 오데뜨에게 부족한 물리적인 힘이 있을 테니까. 그도 아니면 식상하지만 둘의 마법적인 사랑의 힘으로 '짜잔'도 가능하다). 물론 이는 1막에서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로트바르트를 더욱 강력하고 비중있는 존재로 등장시켜 전체적으로 지그프리드의 힘을 빼놓았기 때문에 아귀가 맞는 결말이 되었다. 그리고로비치의 해석과 안무는 개인적으로 취향에 잘 맞는 편이어서 보기에 즐겁다. 그러나 역시 이 발레는 비극이 되어야 한다. 강력한 로트바르트의 마법과 악으로 인해 모두가 죽어 버려야 그 비극성이 극대화되어 차이콥스키의 곡 자체가 주는 신비로움과 비극적인 분위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건 뭐 시작도 하기 전에 삼천포가 대단하시고. 후기 에너지 어쩌려고 이러고 있는지.;;
밀린 후기도 어마무시하게 많은데 더 지치기 전에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번 후기는 두 번째 영상을 보고 복기하기로 한다. 아무래도 음악이 있으니 그 편이 좀 더 용이한 건 사실이다. 결말을 제외하곤 거의 안무가 같은 영상이기도 하고ㅡ는 공연 영상이 이래서 필요한 겁니다. 공연을 보는 순간 순간에야 세밀한 감상을 하며 감동 받지만, 뒤로 갈수록 더욱 임팩트 있는 장면들이 나오는 작품의 구성상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아닌 나로서는 뒤로 갈수록 앞의 감상에 대한 기억이 퇴색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이렇게 공연 영상이 있으면 예습 뿐 아니라 복습하며 구체적으로 후기를 쓰기에도 너무나 큰 도움이 되는 겁니다. 영상 좀 풀어주세요. 엉엉.
안무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은 제외한다.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안무는 몇 년 전 국립발레단에서 다루었던 바, 아마 이전에 썼던 후기가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후기는 지금의 것과는 많이 다르겠지만서도ㅡ이불 킥. 그때 로트바르트를 이재우 님 버전으로 보았던 것 같은데ㅡ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로트바르트의 키가 지그프리드에 비해 몹시 컸거든. 그 정도 차이라면 이재우 님이시겠지ㅡ당시 그리고로비치 버전을 처음 접했기 때문에 몹시 신선했었다. 거기다 다크 카리스마를 뽐내는 이재우 님의 날렵함과 존재감으로 인해 로트바르트와 작품 전체의 매력이 엄청나게 상승했던 기억인데, 사람의 기억은 시간 속에 조작된다면서. 내가 이재우 님을 넘 좋아하게 되어서 이렇게 기억하는 걸까나. 아 자꾸 삼천포.;; 암튼 안무에 대한 감상은 생략합니다. 위의 영상을 보며 직접 느끼셔요.
The Bolshoi. 이번 공연을 한 마디로 수렴하자면 'THE 볼쇼이'가 된다. 바로 그 볼쇼이다. 그리고 볼쇼이의 그 <백조의 호수>다.
며칠 전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의 공연을 보고는 아직 후기를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좋거나 생각보다 실망하면 쉬이 후기를 쓰지 못하곤 하는데, 불행히도 그 공연은 후자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겠지만. 그 공연을 보면서 '우리 국립과 유니버설이 나은데?' 싶었다. 작년 마린스키 때의 감동은 실로 어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발레와 붙여 볼 만 하겠는걸' 싶었더랬는데, 어쩌면 그건 김기민 님 버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젤>에서 본 김기민 님 점프가 머리에서 사라지질 않아. 혹은 4층에서 보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군무 전체 대열을 감상하기에 예당 오페라 4층은 최적의 장소지만, 군무와 무용수 개별 동작을 함께 감상하기엔 3층이 지금의 내게는 가장 좋다. 지난 <말괄량이> 때 본 1층과 2층은 개별 동작 감상의 섬세함에서는 탁월했으나 군무 대열 감상에 있어 3층을 따르진 못했다. 암튼 그래서 이번 볼쇼이 백조를 너무너무 기대했더랬다. 우리 발레의 수준이 세계 최고 발레단에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일까가 궁금했다.
결과는 볼쇼이 승이다. 앞에 THE를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대체 불가의 발레단. 볼쇼이가 이토록 감동적인 이유는 모든 무용수의 안정감에 있다. 물론 마린스키도 모든 무용수가 안정되었다. 다만 안정되고 부드럽고 우아했으나 가벼움에 있어 우리 국립이나 유니버설 무용수분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볼쇼이 역시 우리 무용수분들을 '압도'하진 못한다. 이에 대해선 좀 있다 쓰기로. 겨우 한 번씩의 공연을 본 것으로 두 발레단을 비교한다는 건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만, 이곳은 내 기억의 저장을 위한 공간이니 부족한 감상이나마 내가 느낀 차이점에 대해 마음껏 망나니칼을 휘둘러 보기로 한다. 탄탄한 기본기에서 비롯된 안정감과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가벼운 무게감, 둘 다를 완성도 있게 잡아낸 볼쇼이는 문자 그대로 완벽했다. 흠잡을 것이 없어. 보면서 그 지독한 아름다움에 몇 번 한숨을 쉬었는지 모른다.
볼쇼이의 모든 무용수는 안정감 있었다. 주연은 말할 것도 없고 솔리스트, 파 드 트루아, 꺄트르, 코르 드 발레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무용수를 보아도 불안함이 없다. 1막의 노란 옷을 입은 아가씨 중 한 분의 회전이 살짝 불안했던 것을 제외하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도록 모든 무용수가 안정되어 있었다. 그 안정감은 여성 무용수들의 독립성에서 매력이 폭발했는데, 볼쇼이 여성 무용수들은 남성 무용수가 필요 없는 완전한 독립체들이었다. 시종일관 발끝으로 선 동작들로 인해 대부분 남성 무용수가 서포트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화려한 기교에는ㅡ아주 특별한 주연이나 솔리스트를 제외하고는ㅡ동작이 불안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볼쇼이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무용수도 다른 무용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독보적인 안정감은 한쪽 발끝으로 서서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에서 극대화되었다. 포인한 한 쪽 발로 다른 쪽 다리를 들어 올린 상태에서 오랜 시간 흔들림 없이 지탱한다. 그 뿐 아니라 그 상태에서 다른 팔과 다리 동작을 매끈하게 소화한다. 주연과 솔리스트 뿐 아니라 '모든 무용수'분들이. 그게 말이 되는가? 볼쇼이의 코르 드 발레는 못해도 다른 발레단의 솔리스트급이며, 볼쇼이의 솔리스트는 다른 발레단의 주연을 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정감은 필연적인 '자연스러움'으로 연결된다. 모든 동작이 안정적이기에 점프도 점프 같지 않다. 걷듯이 점프하고, 손을 잡듯이 리프트 하며, 고개를 돌리듯이 회전을 한다. 굉장한 기술들이 난무하는데도 그 어떤 동작도 '나 지금 기술 들어갑니다'라는 느낌이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듯 초고급 기술들이 펼쳐지는데, 그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우아함과 기품이 풍성해진다. 서두르지 않고 요란스럽지 않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귀족적 품위. 그것은 탄탄한 기본기와 기술로 인한 뿌리 깊은 자신감과 자연스러움에서 빚어지고 발효된다. 모든 무용수의 선이 올곧습니다. 상체의 수직을 유지하면서 배꼽 아래로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고 팔과 다리의 각도가 깔끔하다. 라섹 수술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도록 시야가 깔끔해진다.
볼쇼이의 개별적이고도 전체적인 안정감이 주는 최대의 혜택은 당연히 군무에 있다. 1막에서 지그재그 대열을 그리며 백조들이 등장하고 마침내 스물 네 명의 백조가 대열을 완성했을 때, 마치 무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 드디어 이 공연의 '주인공'인 우리가 왔어." 한 명 한 명으로 연결된 전체에서 가득 뿜어져 나오는 그 자존감과 존재감. '우리가 바로 볼쇼이의 코르 드 발레야"라는 느낌. 주연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그 자신감에 가슴이 설렜다. 이런 자존감을 뽐내는 코르 드 발레를 본 적이 있던가. 그리고는 시작하는 백조 군무의 동작은... 이걸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동영상 백 번을 보아도 알 수 없다, 이 감동은. 몸의 선, 팔, 다리, 목, 머리, 손끝은 물론이고 발등의 선까지 똑같은 스물 네 명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움직일 때의 치마 각도 뿐 아니라 치마의 출렁이는 곡선마저 같다는 거다. 미치는 줄 알았다.
우리 국립발레단의 많은 장점 중 하나는 여성 무용수분들의 키와 체격이 거의 고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용수분들이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눈이 편안해. 볼쇼이도 그러했다. 전체적으로 우리 국립보단 좀 키가 큰 것 같은데, 다들 키와 체격이 비슷하다. 해서 그러한 통일성이 주는 쾌감마저 더해진 볼쇼이의 군무는 그야말로 완벽에 이른다. 그 군무를 보며 볼쇼이의 <지젤>은 어떨까, 볼쇼이의 <호두까기>는 어떨까, 볼쇼이의 <라 바야데르>는, 아! 볼쇼이의 <스파르타쿠스>는 어떨까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펑펑 폭죽을 터뜨리기 시작해 넋을 일을 지경이었다.
볼쇼이의 <스파르타쿠스>는 어떨까. 뛰어난 여성군무는 말할 것도 없었으나 실력만으로 보자면 우리 유니버설의 칼군무도 만만치는 않다. 그런데 볼쇼이에는 또 다른 놀라운 점이 있었는데, 바로 남성 군무다. 남성 군무. 발레는 여성 무용수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장르라 여성 군무가 뛰어난 경우는 많지만, 굳이 메인 안무로 의도하지 않은 한 남성 군무까지 뛰어난 경우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따로 '남성 군무'라고 할 것도 거의 없으리만치 남성 무용수분들의 춤은 거의가 솔로이거나 서로 같은 동작을 똑같이 하는 것이 매력 포인트인 남성 파 드 되, 까트르 정도에 집중되어 있다. <백조의 호수>에는 '남성 군무'라 부를 만한 장면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기 보단 1막과 2막 사이사이에 잠시 삽입되어 있는데, 그 군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도록 너무나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위에 올려진 두 번째 영상(이후 '동영상')에서는 1막의 25분 20초에 해당하는 지그프리드와 친구들의 춤 부분과 2막 1분 16초 23의 스페인 공주와 호위 귀족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동영상에서 보면 알겠지만 그냥 보고 넘길 만한 짧은 부분인데, 그 부분이 특별히 확대되어 인식될 정도로 독특했다. 일단 남성 무용수들의 체형까지 그토록 모두 고른 것도 인상적이었고. 다들 긴 다리와 팔을 똑같은 각도로 시원하게, 여성 군무 못지 않은 통일성으로 뻗는 것이 시원하고 신선했다. 이런 남성 군무라면 <스파르타쿠스>나 음... 쓰려고 하니 좀 재미나긴 한데... ㅋㅋ 우리나라 유니버설의 <심청>에 등장하는 '선원의 춤'을 추면 어떠할까 몹시 궁금해진다. 남성 군무 특유의 땀냄새 가득한 힘찬 강인함이 어떻게 표현될까.
음. 또 한 가지 사소하지만 개인적으로 특이하게 인식되었던 것은 여성 무용수들의 발목이었다. 바깥쪽으로 부쩍 많이 휘어 보였달까. 다리를 뻗으면 뻗은 각도에서 끝에 살짝 더 꺾여 올라가는 것이 꼭 우리 전통 기와지붕의 버선코 처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군무를 추면 전체적으로 다른 군무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 났다. 모르겠다. 마린스키 군무도 그러했을 텐데,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점이어서 이번에 신기했다. 담에 국립이나 유니버설 군무 때 다시 눈여겨 보아야지. 나로 말하자면 그런 점을 딱히 '좋다'고 인식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게 휘어진 발목은 그만큼의 부단한 연습에 대한 증거겠으나, 의도한 각도에서 좀 더 휘어진다는 점이 아직 감상 초보인 내 눈에는 특별히 '아름다움'으로 인식되진 않았다.
의상은 지금껏 본 발레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자랑했다. 무대는 상대적으로 단순해 보였는데, 그랬기 때문에 의상의 화려함이 더욱 돋보였을 수 있겠다. 특히 왕비님. 의상도 의상인데 어쩜 그리 아름다운가요. 3층에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빛나는 미모를 자랑하는 무용수였다.
내한 공연은 13년 만이지만 볼쇼이 오케스트라까지 동반한 공연으로는 23년 만이라 했다. 그래서 티켓이 더욱 비쌌던 것이리라. 연주 실력 자체는 우리 코심(코리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보다 딱히 더 좋은 건 못 느끼겠더라ㅡ는 내 귀가 막귀여서일 수도 있다. 여기저기 바이올린 솔로 음 많이 불안정하던데. 그리고 어떤 공주였더라... 2막의 어떤 공주 엔딩 동작에 음이 좀 많이 늦은 적이 한 번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용수분들의 동작에 아주 잘 맞는 음악을 연주해 주셔서 찰떡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딱히 음악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무용수분들의 동작과 세심하게 맞는 연주였다. 우리 국립이나 유니도 전문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완벽 호흡으로 공연의 질이 더욱 높아질 텐데. 물론 코심이 몹시 잘 하고 있지만서도... 러시아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화를 보듯 발레를 보며, 러시아의 발레 무용수들은 우리나라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다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 발레도 아이돌급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면 지금보다 더 탄탄해진 자금과 후원으로 개별 오케스트라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실력 자체만으론 별로 뒤지지 않는데 말이야. 예당과 국립, 유니버설의 노력으로 그동안 꽤나 대중화가 되었지만 좀 더 많은 사랑을 널리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입장에서 최근 TV에서 발레 예능이 있다고 들었는데, 비록 티비가 없고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로 나는 본 적이 없지만 긍정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1막 시작의 왕궁파티는 시작부터 완벽한 혼성군무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1막 시작 부분에서의 간단한 4인무 안무는 백조 군무에서의 3, 4인무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혼성군무에서 그냥 간단한 제자리 리프트를 하는데도 어째서 가슴이 뛰었던 건지 모르겠다. '완성도'라는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대체 어떤 점 때문에 '완성도'가 마무리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정도 내공은 언제쯤 쌓이려나.ㅠ 그리고 이 군무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무용수분들의 사뿐함이다. 지난 <말괄량이> 때 박예은B님의 발목이 유난히 말랑하고 부드럽다 느꼈는데, 볼쇼이의 모든 무용수가 그런 발목을 가지고 있었다. 다, 당황...;; 마치 손목과 발목에 뼈가 없고 대신 밀가루반죽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낸다. 전체적으로 볼쇼이 여성 무용수분들의 발이 좀 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선지 포인했을 때 다리가 더욱 길어 보이며, 땅에 디딜 때 좀 더 우아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연상된 분이 황혜민 님이었는데, 부서질 듯 작고 가녀린 체격에 비해 발이 길단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황혜민 님의 발등이 자아내는 독특한 느낌이 남달랐던 것이 생각났다.
1막 파티의 매력은 단연코 광대다. 지난 마린스키의 광대는 뛰어난 기술에도 불구하고 너무 근엄하고 귀족적으로 보여서 당혹스러웠는데 볼쇼이의 광대 역시 우아합니다. 뭐, 당시 궁정 광대라는 존재가 마냥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고 때로는 왕에게 필요한 신랄한 비판을 유머 코드 속에 넣어 조언하기도 했던 존재이니 꼭 가볍기만 할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안 그래도 주연부터 코르 드 발레까지 모두가 다 우아하고 진중하고 기품있는데, 광대 한 명 정도는 깃털처럼 가벼운 캐릭터여도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날 볼쇼이 광대를 맡은 안드레이 코시킨 Andrei Koshkin은 익살스럽고 귀여웠다. 하지만 우리 국립에서 발레를 맡으시는 남성 무용수분들 특유의 가벼움과 상큼함까지 표현하진 못한다. 점프 높고요, 회전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나라 광대 역 무용수분의 회전이 빠른 속도와 가벼움을 특징으로 한다면, 코시킨의 광대는 역시 아름다운 선... ㅡ볼쇼이의 그놈의 선... ㅠ 앞으로 계속 등장합니다ㅡ을 자랑하면서 회전의 '힘찬 가벼움'을 보여준다.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난 우리나라 광대 역을 맡으시는 남성 무용수분들이 공연의 포인트로서 좀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건 심미안이 아니라 애국심 때문이지!'라 따진다면 '그래서 뭐.'
유리 그리고로비치 <백조의 호수> 안무 중 가장 독특한 점 중 하나가 바로 로트바르트의 부각인데, 미하일 크류츠코프 Mikhail Kryuchkov는 음... 2막 오딜과의 등장 후 추는 독무에선 굉장했으나 1막에선 전체적으로 좀 무거운 느낌을 주었다. 지그프리드와의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내겐 딱히 매력적이지 않았다. 다만 프로그램북 설명에 있듯 지그프리드를 조종하는 듯 두 사람의 멋진 호흡이 돋보였다.
1막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백조의 춤 중에서 아기 백조 네 마리의 춤은 동영상에서 54분 5초부터 시작된다. 마린스키 때는 확실하게 우리나라 아기백조 네 마리가 훨씬 가볍고 귀엽다고 느꼈던 기억인데, 볼쇼이의 아기백조는 신기했다. 음... 분명 우리나라 아기백조의 깨물어주고 싶은 귀여움은 없다. 딱히 '아기백조'라 하기엔 민망하도록 우아함으로 가득 차있다. 심지어 살짝 경직되어 보일 정도였는데, 그런 포인트들은 이 4인무를 감상하는 데 있어 감점이 될 만한 요소였을텐데도 이상하게 이 춤은 좋았다. 몹시 좋았다. 보통 아기백조 감상 때는 고개의 움직임이 귀엽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볼쇼이의 작은 백조 춤에서는 다리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길쭉길쭉하고 곧고 가느다란 다리 네 쌍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움직이는데, 겹쳐 잡은 가늘고 긴 팔의 선과 연결되어 기하학적인 무늬가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마치 한 덩어리 속의 변화하는 이미지인 듯 느껴진 점 때문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 계속 다리 선의 교차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가만 보니 물론 동작의 일치성이 가장 큰 부분이겠지만, 네 명 무용수의 어깨와 몸통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로지 긴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가끔 고개를 살짝, 그리고 똑같이 까딱였는데, 단 네 명으로 전체 군무를 보듯 굉장한 통일성을 느낄 수 있어서 새로운 감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깔끔함의 극치.
우아함과 오차 없는 동작으로 강조된 차고 매끈한 느낌으로 인해 이들을 '아기 백조'라 부르기엔 좀 어색하고, 프로그램북에서처럼 '작은 백조 네 마리'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래서인가, 그 부작용이 다음에 이어지는 3인무에서 드러났다. 우리 무용수분들이 표현하는 '아기백조 네 마리'의 귀여움과 가벼움으로 인해, 직후 등장하는 '어른 백조 세 마리'에서는 시원시원한 동작의 고상함과 우아함이 강조되는 반면, 볼쇼이의 '큰 백조 세 마리'는 물론 데벨로페 동작으로 인해 우아함이 고조되었지만, 앞선 작은 백조와의 극명한 대조의 느낌은 다소 덜했다. '우아함 뒤의 더 큰 우아함'보다는 '귀여움 뒤의 우아함'이 주는 임팩트가 더 큰 것이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볼쇼이 무용수들의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차치하고 하는 말이다. 춤 자체로 보자면 새로운 색깔의 파라다이스가 초단위로 펼쳐진다.
2막 파티에서의 공주들의 춤. 먼저 헝가리 공주는 그 우아함이 돋보였다. 그 다음 러시아 공주는 발목이 유난히 눈에 아름다웠던 기억이고, 스페인 공주는ㅡ당연한 말이지만ㅡ발레 <돈 키호테>가 연상되었다. 매력적이었습니다. 탬버린을 들고 춤을 추는 나폴리 공주는 경쾌하면서도 그... 동작의 이름을 모르겠는데, 한 다리를 든 채 다른 다리를 발끝으로 섰다가 발바닥으로 서는 것을 반복하는 동작이 섬세하면서도 예뻤다. 마지막 남성들과 함께 한 헝가리 공주의 춤은 시원했지만 좀 많이 절제한 느낌이었다.
재미난 건 다섯 공주의 5인무+지그프리드와의 6인무... 6인무면 파 드 씨스인가... 암튼 그 6인무가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점이다. 통일성이 코르 드 발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는데, 그러다 '각각 공주들의 매력을 살리기 위한 장치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그 또한 하나의 매력으로 인식되었다. 눈이 즐겁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각각 공주의 매력이 살아있는 6인무가 적절하겠다.
또 남은 것이 있나...? 에너지가 바닥을 긁고 있으니 이제 그만 지그프리드와 오데트/오딜로 넘어간다.
<백조의 호수>에서의 지그프리드가 좀 매력이 덜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에서의 지그프리드는 더욱 나약하다. 해서, 주인공 왕자의 흔한 강함의 매력이 아닌, 나약함의 갈등과 고뇌를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다만 화려한 의상과 춤 속에서 그 섬세한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일이 몹시 어려우리라 짐작한다.
아르템 아브차렌코 Artem Ovcharenko 가 연기한 지그프리드는 곱고 나약한 내면 연기에 있어 탁월했다. 비겁하진 않지만 강하지도 않은 '적당한 나약함'이 촌스럽지 않게 잘 표현되었다. 1막 궁중에서의 남성 군무를 이끌 때는 살짝 동작이 빠르긴 했지만 시원시원하게 멋진 선이 기품 있었고,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했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움직임의 정확성, 파트너의 손과 머리 위치를 확인하면서 파 드 되(2인무)의 뉘앙스를 챙기는 세심함은 파트너와 관객의 마음을 쉽게 움직인다'고 되어 있는데, 파트너의 손과 머리 위치를 확인하면서까지 서포트하는 장면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애는 썼지만 매번 오딜의 춤에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아브차렌코는 몸이 몹시 아름다웠다. 곧고 멋진 다리선이 언제나 시원했고, 높고 시원한 점프와 회전도 좋았다. 하지만 안무 구성상 전체적으로 '화려한 기술을 마음껏 뽐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로비치 버전 지그프리드의 어둡고 나약한 성격을 잘 표현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그리고 오데트/오딜을 연기한 율리아 스테파노바 Yulia Stepanova. 다른 여성 무용수에 비해 키가 살짝 큰 편인 스테파노바는 팔과 다리가 몹시 길고 곧고 가늘었다. 그래서 다리 하나 펴는 데도 시간이... 덕분에 우아함이 더해졌다. 스테파노바의 특징은 탁월한 선에 있는데, 마치 어떻게 놓아도 수직과 수평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처럼 느린 동작을 해도, 빠른 동작을 해도, 점프를 해도, 회전이나 리프트 상태에서도 몸과 다리가 수직으로 곧게 뻗어 있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리고는 ㅡ 다른 볼쇼이 무용수분들도 거의 그랬지만 특히 스테파노바는ㅡ팔이나 다리를 들면 90도, 135도, 그리고 180도에 이르는 깨끗한 선 때문에 마음 속 잡념들까지 씻겨 내려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다리로 6시 정각인 180도를 만드는 장면이 몇 군데 나왔는데ㅡ물론 이 자세는 우리 김지영 님의 특기 중 특기입니다만ㅡ어떤 무용수가 하시건 이 장면은 볼 때마다 심장이 조여 든다. 왜냐하면 그 정각 6시라는 각도가 굉장히 미묘하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175도일 바에야 135도가 훨씬 눈에 아름답다. 문제는 180도를 넘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훨씬 힘든 동작일 것임에도 181도가 되는 순간 모든 장면이 무너져 내린다. 과유불급이 여기에도 적용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그러했다. 선이 180도를 넘어가는 순간 아름다움이 다 일그러지면서 급격히 피로가 밀려든다. 해서, 그 정확한 180도를 볼 때의 쾌감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번 볼쇼이는 시작 때부터 모든 무용수들의 선이 아름다워 공연 내내 입이 귀에 걸린 상태로 감상했는데, 특히 스테파노바의 월등한 선을 보며 꿈결같은 시간을 보냈다.
스테파노바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마치 다른 두 사람이 추는 듯한 느낌을 내는 동작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의 1인 2역을 해야 하는 <백조의 호수>의 최고 감상 포인트인 건데, 보통은 그 차이를 '연기력'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스테파노바는 연기력이라기 보단 춤 자체로 그것을 보여주어 깜짝 놀랐다. 그 시종일관 곧은 선이 아니었더라면 다른 무용수라 여겼을 것이다.
보통 흑조의 캐릭터가 워낙 매혹적인 탓에 백조의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마련이다. 백조 연기를 아무리 잘 해도 흑조에서 백조의 감상은 다 날아가 버린다. 스테파노바 역시 흑조 연기가 아주 좋았다. 직후 언어가 날아가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백조가 만만치 않다. 아니, 전체적으로 보자면 백조로서의 표현력이 훨씬 우수하다. 왜냐하면 인상적인 흑조는 많지만 인상적인 백조는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스테파노바의 백조 오데트는 내내 슬펐다.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라도 하듯 온몸으로 비극을 휘감은 채 숨을 쉬고 걷는 사람이었다. 한국 무용수분들처럼의 파르르 귀엽도록 가녀린 느낌을 내지는 않지만, 느리면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비극이 깊이 서려있는 것처럼, 육체적 힘이 없는 것이 아니고 가련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슬펐다. 가련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여 애처로운 것이 아니라, 그녀의 운명을 장악해 버린 뿌리 깊은 비극의 무게로 인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처럼 기품 있는 비극을 연기한 오데트는 처음이었다.
예전에 본 김지영 님의 오데트가 떠올랐다.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무용수별 감상을 시작하게 한 바로 그 김지영 오데트. 다른 오데트들에 비해 김지영 오데트는 지그프리드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허약하고 가녀린 오데트가 아니었다. 자존감 가득한 그녀는 백조로 변한 많은 백성, 혹은 시녀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군주이자 공주였다. 그 공연에서 내게 김지영 님의 오데트는 '지적인 오데트'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스테파노바의 오데트에게서는 김지영 오데트에게서 받은 것 만큼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캐릭터를 느끼진 못했다. 대신 온몸으로, 온 동작으로 그녀의 삶을 나무 덩굴처럼 옥죄는 깊은 비극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희망을 느낄 수 없었다. 체념으로 봉인된 그녀의 슬픔. 그런 오데트의 슬픔과 지그프리드의 나약함은 잘 어울렸다.
2막 오딜에서의 스테파노바는 김지영 오딜을 연상시켰다. 딱히 '오데트인 척 하지 않는 오딜'. 살짝살짝 오데트인 척 연기하지만, 엄연히 '나는 오딜이야. 지그프리드 너도 알잖아. 알면서도 오딜인 내게 끌리는 거잖아'를 표현하는 그 거침없는 동작들. 그런데 김지영 오딜이 '어쩌면 오데트의 다른 모습인 건 아닐까?'하는 상상마저 끌어냈을 정도로 지그프리드에게 쌀쌀맞고 다소 신경질적이었다면, 스테파노바의 오딜은 다른 의미로 독특했다. 카리스마로 나약한 지그프리드를 밀고 당기며 가지고 노는 것 같았는데, 오데트인 척 하는 부분에선 지금껏 처음 느끼는 해석 때문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어떤 느낌이었느냐면, 백조인 오데트의 흉내를 내면서 '이 오데트 말이지? 약하고 시시해 빠진 오데트? 청순가련이라며? 이렇게...? 날개 죽지를 뻗으면서 고개를 길게 앞으로 내빼는 이딴 초라한 몰골을 한 오데트?' 하며 오데트를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오데트 흉내를 내는 동안 기이하게 팔을 살짝 떨면서 지그프리드를 노려 보았기 때문인데, 그 모습이 낄낄거리며 오데트와 지그프리드를 비웃는 것만 같아 머릿속에 폭탄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는 말짱하게 일어난 오딜은 카리스마 가득한ㅡ거만한ㅡ표정으로 지그프리드를 농락한다. '나약한 오데트와 나약한 지그프리드. 잘 어울리네.' 하듯.
직후 지그프리드와 오딜의 솔로 바리아시옹이 순차적으로 펼쳐지고, 코다의 32 푸에떼(헤아렸는데 33이었다)를 매혹적으로 성공시킴으로써 마침내 지그프리드의 맹세를 받아낸다. 흥미로웠다, 스테파노바의 오딜.
오데트로 춤을 출 때의 스테파노바는 부드러웠다. 음... 유난히 연결동작이 아름다웠는데 바로 그 점이 전체적인 기품을 더하는 효과를 냈다. 한 동작을 하는 데 드는 시간을 신체 부위별로 균일하게 배분하는 느낌이랄까. 접때 어떤 무용수에게서 이 느낌을 느꼈더라. 암튼, 팔을 하나 뻗는 동작이 있다 치면, 그 동작에 해당하는 음악이 진행되는 동안 균일하게 팔을 뻗기 때문에 뻗은 후 남는 시간이 거의 없다. 그리고는 서두르지 않고 같은 템포로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이 같은 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동작이 무리가 없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한쪽 발끝으로 서는 어려운 기술 이외에는 정지 동작이 별로 없으며 군더더기 없는 동작들이 빛났다.
오데트의 그런 우아하고 다소 느릿한ㅡ실제 박자상으로는 전혀 느리지 않다ㅡ 동작을 보며 인터미션 때 오딜이 궁금해졌다. 그런 동작으로 오데트와 다른 오딜을 느끼기엔 무리가 있을 텐데. 2막이 되고 오딜이 등장하고, 아까 말한 곧고 아름다운 선으로 스테파노바임을 알 수 있었을 뿐, 동작은 완전히 달랐다. 균일하게 배분되는 동작이 아니라 빨리 진행되어 날카로운 정지동작이 군데군데 있었다. 또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을ㅡ이 또한ㅡ균일하게 그리는 오데트의 섬세함과는 다르게, 같은 동작을 해도 포인트가 있달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팔꿈치, 손목 등의 선에서 뭔가 살짝 톡, 톡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어서 아예 다른 사람이 추는 춤 같았다. 오데트의 느리고 우아한 회전으로는 특유의 날카롭고 화려하면서도 폭발적인 인상을 낼 수 없었을 오딜의 날쌘 회전은 32 푸에떼에서 빛을 발했다.
우리나라 무용수분들은 워낙 32푸에떼 박수에 익숙하셔서 박수가 터질수록 더욱 힘차게 회전을 하시곤 하는데, 사실 이런 고난도의 동작에선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기본 매너이긴 하다. 그래서 혹시 몰라 나는 연속 회전들에는 박수를 치지 않았는데, 그래선지 어때선지는 모르겠으나 32 푸에떼 중 처음 박수가 터졌을 때 스테파노바의 중심이 살짝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회복하여 끝까지 훌륭히 해내는 그 탄력성에 감탄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무용수분들의 멘탈이 좀 더 강하신 것 같지? ㅋ
스테파노바의 오데트/오딜은 정말 훌륭했다. 완전히 다른 두 캐릭터를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연기력보단 춤 자체로 표현해 주어서 그 점이 더욱 즐거웠다.
아... 내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공연 하나의 후기를 이렇게까지 쓰고 있나 그래... 누구 나 좀 말려줘. ㅠ
이제 더는 못하겠다ㅡ지만 이것 만큼은 해야겠다.
볼쇼이는 볼쇼이의 명성을 보여주었다. 얼만큼 완벽한지, 왜 세계 최고인지, 그 뛰어남과 우수성을 기품있고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탄탄한 기본기에서 오는 안정감과 섬세한 부드러움, 가벼운 도약과 착지, 뛰어난 선의 향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무 등, 볼쇼이를 세계 최고 발레단으로 만드는 놀라운 요소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최강이 맞다. 정말 멋지다. 지금의 내가 파리 오페라 발레나 영국 로열 발레단의 공연을 본다면 과연 볼쇼이를 뛰어 넘는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싶도록 훌륭한 공연이었다.
허나, 우리 국립이 별로 뒤떨어진다는 느낌은 없다. 물론 한 명 한 명 전체 무용수의 그 안정감은 부럽고 또 부럽지만, 군무를 조금만 보강하면 우리 국립도 꽤나 경쟁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마린스키니 볼쇼이니, 우리 무용수분들의 탁월한 가벼움을 압도하진 못했다ㅡ는 나는 리프트에 있어 우리 무용수분들이 더 사뿐하고 가볍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자연스러움만 좀 더 첨가한다면 국립이 더 나을 수도 있겠는데 내심 생각하고 있고. 사실 수석 무용수분들의 기량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지영 님의 깨끗한 선과 캐릭터 해석의 탁월함이라든가, 박슬기 님의 유연성과 표현력, 김리회 님의 멋진 회전은 글쎄, 난 경쟁력 충분히 있다고 보고 있어서. 우리 발레 수출하면 안 돼요? 이만하면 붙어볼 만 할 것 같은데.
강수진 단장님 오시기 전에도 발레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챙겨서까지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강수진 단장님이 오신 이후로, 몰라, 발레를 보는 내 눈이 변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립발레단이 부쩍 많이 변한 것 같다. 훨씬 넓고 다양하고 깊어지고 있어서 국립이 어떻게 더 성장할지를 지켜보는 마음이 설렌다. 올해도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 하나요? 꼭 했으면 좋겠는데, 안무에 대해선 스코틀랜드 발레단 후기에 쓸 예정인데... 아... 쓸 수 있을까. 이 후기를 쓰고 나니 점점 후기 자신이 없어지고 있다. ㅠ 암튼. 끝까지 삼천포를 타는구나, 아주.
기왕 탄 김에 좀 더 나가 보자면.
몇 주전, <볼쇼이 바빌론 Bolshoi Babylon, 2015>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다큐 형식의 영화였는데, 2013년 실제로 있었던 볼쇼이 예술감독 염산 테러 사건에 대한 내용과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극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무대 뒤로 인간의 이기심과 불안에서 비롯한 갈등이 얼마나 추하고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보면서 '국립이나 유니버설 무용수분들도 그런 걸까' 싶어 슬펐다. 영화에서 가장 먹먹했던 부분은 그 사건에 대한 한 발레리나의 인터뷰였다.
"끔찍했죠. 형사들이 무대에 올라왔는데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충격적이었어요. 우리를 이해 못하더라고요. 우리가 세상 경험이 전무하다는 걸 말이죠. 전부 무대 위에서 벌어졌어요. 역사적인 무대 위에서! 우리에게 무대는 치성을 드리는 제단이에요. 무대는 이 극장의 전부이자 우리의 종교이고 신이에요. 무대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죠. 감독에서 청소부까지 모두 다요. 그런데 형사들은 무례했고 우리를 범죄자 취급했어요."
그 장면에서 <댄서 하우스>에서의 김지영 님이 생각났다. "쉬는 날 뭐 하세요?"라는 관객의 질문에 마치 '허를 찔린 것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재활치료 받고..." 하고 난 뒤 한참 눈을 굴리셨다. 그리고는 "그러고는 하는 게 없네요..." 하며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시던 모습. 평생을 발레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발레리나에게서 무대를 빼앗는다면 그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며 내 마음이 다 먹먹해지던 순간.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포스팅에서 또 다시 언급할 일이 있겠지만서도, 무튼 발레 하나 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온 '세상 경험이 전무한' 발레리나의 모습이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볼쇼이에까지 모든 발레 무용수분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은 동굴에 진동이 일었다.
'볼쇼이는 러시아의 비밀 무기다. 볼쇼이로 유럽에 침투하여 문화를 전파한다'라던 관계자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있어 볼쇼이의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볼쇼이'였던 것이다.
빈체로 주관이지. 미술계에 코바나컨텐츠가 있다면 음악계엔 빈체로가 있다. 그런데 발레까지! 가격이 내게 버겁긴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공연이므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높은 퀄리티의 공연을 주관하신 빈체로에 박수를 보냅니다.
물론 우리 예당♥(웬만하면 예당에 대한 나의 뜬금포 애정 표현에는 적응하도록 합시다. 뭔가를 애정하면 그 대상에 대해 실없어지는 인간이다) 덕분에 멋진 공간에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고, 또... 아 맞다. 훌륭한 라인업으로 멋진 감동을 주신 볼쇼이 발레단 여러분께 박수를 보냅니ㅡ인데 이 포스팅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느끼시겠지만 지금쯤은 내 정신이 육체를 이탈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쇼이 <백조의 호수>에 대한 기억 저장을 마친다. 수정은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상한 부분은 적당히들 걸러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