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이 급하다. 그냥 한 마디로 입장권 안 아깝습니다. 다양한 작가들의 좋은 작품 많이 왔다. 도슨트도 훌륭하시고. 도록은 아주 최고다.
다음에 싣는 거의 모든 그림은 오르세미술관 홈피(http://www.musee-orsay.fr/en/home.html)에서 가져왔고,
파란 글자의 내용은 도록의 내용을 발췌해서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
Eugène Delacroix (1798-1863)Tiger Hunt 호랑이 사냥1854Oil on canvasH. 73,5; W. 92,5 cmParis, Musée d'Orsay
이 작품은 외젠 들라쿠루아의 낭만주의가 19세기 근대 회화에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화가로서 원숙기에 이른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상원 및 하원의 장식화 주문을 받으며 최고의 예우를 받았는데, 당시 그는 루이 14세 수석 궁정화가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이 시작한 장식화 사업의 일환으로 루브르 궁 아폴론 회랑의 중앙 천장화 작업까지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들라크루아는 붓의 용법이나 색을 처리하는 기법에 있어 굉장히 자유로워진 상태여고, 동양풍으로 사냥 장면을 묘사한다. 당시 이러한 동방적인 분위기는 신선하고 이국적인 주제를 추구하던 고객층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사냥의 격렬함과 운동감이 느껴지는 화면 구성은 전에 없이 새로운 사실적 느낌을 자아내면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를 비롯한 선대 거장들의 위엄 있는 걸작들을 떠올려준다. 이로써 조형적 측면에서 획기적인 전형을 보여준 들라크루아는 후에 화가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으며, 들라크루아 이후의 화가 세대들은 사실주의 경향에 빠져들면서도 빛을 다루는 그의 뛰어난 기교에서 얻은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ㅡ 이 작품에서도 빚은 동물 가죽 같은 세부 묘사를 강조하는 한편 동작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낸다. ㅡ 뿐만 아니라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하는 그의 기교 역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러한 긴장감은 특히 이 작품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의 시저메서 공화국의 승리를 기념하는 1880년 만국 박람회 자리를 통해 선보인 이 작품은 1863년 고인이 된 들라크루아를 19세기 예술사의 한 주축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어떻게 보고 그렸을까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긴박감이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역시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드라마틱해.
Louis Janmot (1814-1892)Le supplice de Mézence 메젠티우스의 행렬1865Huile sur toileH. 113,5 ; L. 143,3 cmParis, musée d'Orsay
'산 채로 시신에 묶인 사람, 고대와 현대의 형벌 le vivant attache a un cadavre, supplice ancient et moderne'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에네이스 Eneide」에서 묘사된 고대 형벌의 집행 과정을 참고하여 그린 것이다. 로마가 점령하기 이전에 이탈리아 반도를 다스리던 에트루리아의 메젠티우스 왕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함께 묶는 끔찍한 형벌로 전쟁 포로를 처형한다. 죽은 자의 시신에 입과 입을 맞대어 산 자의 몸을 결박함으로써 부패한 시신과 함께 썩어 들어가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이었다.
19세기에는 대개 암울한 주제들을 단순히 그림으로만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 자체는 여러 화가들이 수 차례 쟇해석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가들은 작품 속에 당대의 모습을 암시하는 비유적 의미를 추가했고, 독실한 교인으로서 신비주의에 빠져 들던 루이 장모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무신론과 진보주의로 대표되는 '신흥종교'에 의해 기독교가 오염되는 사왕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이 그림이 포함된 '영혼의 시 Le Poeme de L'ame' 연작은 화가가 어린 시절 로마에 머물던 시절에서 시작하여 예술가로서의 생애 거의 전체를 다 바친 일생 일대의 역작이다. 「메젠티우스의 형벌」 보다 앞서 그려진 34점의 1차 연작은 현재 화가의 고향인 리옹 보자르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데, 이를 포함한 전체 연작에서 루이 장모는 문학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회화 작품을 선보이고 구도적 차원의 암시적 메시지를 내포하며 섬세한 그림을 선보인다. 이로써 루이 장모는 종교적 열기가 소생하던 당대의 분위기를 파고 들며 독특한 화풍을 선보인 화가로 자리잡는다. 뿐만 아니라 격한 감정의 표현에서는 쇠퇴하던 낭만주의의 흔적이 느껴지는 한편, 세기말의 상황에서 의미를 추구하던 상징주의의 전조 또한 감지된다. 강렬한 색의 대비가 두드러지는 1865년작 「메젠티우스의 형벌」에서는 잔혹한 상황이 잘 표현된 동시에 빛의 효과도 극적으로 사용됐다. 이로써 그림은 차후 사실주의에 그 자리를 물려줄 낭만주의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거듭나고, 결국 1865년 회화 부문 공식 살롱전을 통해 대중 앞에 선보인다. 마네 역시 살롱전에 작품 「올랭피아」를 출품한 해였다.
이 그림 재밌었다. 오른쪽의 산 자인 남성에 몸이 묶여있는 죽은 자가 왼쪽의 여성이란 점이 재밌었는데, 색깔은 푸르스름하게 시체를 나타내지만, 막상 꺾인 왼팔은 뻣뻣한 시체의 팔 같지 않고 낭창낭창 말랑해 보였다. 이 형벌을 내린 메젠티우스 왕은 좀 고약한 것이, 젊은 남성을 발가벗기고, 젊은 여성의 시체를 반나체의 상태로 묶은 것이다. 몸은 파랗지만 젖가슴이 유독 생기있게 봉긋하게 묘사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남성의 시선이 닿는 곳이 바로 여성의 드러난 가슴이었다. 얼굴엔 혐오가 가득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감도는 것 같은 복잡함이 담겨 있었는데, 그의 팔을 보면 오른팔이 등 뒤로 돌려 묶여있고, 그 오른 팔이 뒤에서 왼팔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드러난 왼팔은 뭔가를 만져보고 싶은 듯 다 펼쳐져 있지. 그것을 확인하니 고약하다 싶은 것이다. 남성은 살아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형벌을 받는 중이다. 살아있는 자신을 산채로 썩게 만들 시체는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리고 그 여성의 봉긋한 가슴은 너무나 탐스럽다. 아, 시체인데 왼손이 반응을 한다. 작품에서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빛을 받고 있는 탐스러운 젖가슴을 한 번 만져 보고 싶다. 그러자, 꿈틀대는 왼손을 오른손이 잡는다. 뭐하려는 거야. 저건 시체야, 시체라고. 정신 차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좀 더 감상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슬퍼라.
Jules LefebvreLa Vérité 진리en 1870huile sur toileH. 2.64 ; L. 1.12musée d'Orsay, Paris, France
이 작품은 우의적인 누드화이다. 시각적인 형태로 추상적인 생각과 철학적인 개념을 표현하고 있기에, 아카데미적인 전통에 따르면 회화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인은, '진리는 우물 밑바닥에 있다'는 속담을 의미하는 빛나는 거울과 밧줄을 들고 있고, 여인의 뒤로 양동이가 보인다.
반면 이 작품은 매우 인위적이고 해부학적으로 부정확한 구성을 띠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모사하기 보다 작가는 후기 르네상스의 인체 표현 양식인 '콘트라포스토 contrapposto 를 따르고 빛을 은은하게 표현하면서 매너리즘적 작품을 그리는 데까지 이르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es의 「샘 La Source」에서 볼 수 있는 누드의 표현 양식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이상한 조합이 이루어졌다. 여인 몸의 왼편은 정면으로 그려졌고, 과도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길게 묘사되었다. 반면 오른편은 옆모습이 그려졌고 아주 곡선적이며 둥글둥글 풍만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진리와 현실은 서로 매우 다르다고 언급했던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의기양양하게 비현실적인 그의 누드는 플라톤이 말했던 '진리'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정면과 측면의 가슴이 동시에 그려진 모습이 신기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여성누드화가 몹시 많았는데, 죄다 콘트라포스토였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La Source 샘1820-1856Huile sur toileH. 163 ; L. 80 cmParis, musée d'Orsay
위의 작품은 이번 전시에 오지 않았음.
이렇게 보면 상당히 많이 비슷하지?
William Bouguereau (1825-1905)Philomèle et Progné 필로멜라와 프로크네1861Huile sur toileH. 1.76 m ; L. 1.34 mParis, musée d'Orsay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등장하는 필로멜라와 프로크네 이야기는 윌리앙 부그로를 포함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고대 아테네의 왕 판디온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바로 프로크네와 필로멜라다. 트라키아의 왕 테레우스와 결혼한 프로크네는 아들 이티스를 낳고 몇 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동생 필로멜라를 그리워해 테레우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에 도착한 테레우스는 필로멜라의 미모에 욕정을 품고 겁탈한 후 혀를 잘라 산속 오두막에 가둔다. 필로멜라는 자시늬 사연을 옷감에 수놓아 프로크네에게 알렸고,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의 사연을 알게 된 프로크네는 남편의 거짓말과 부정을 알게 된다. 프로크네는 아들 이티스가 아버지를 닮은 모습에 분노해 죽인 후 저녁식사로 테레우스에게 내놓는 복수를 했다. 이를 알게 된 테레우스는 도끼를 들고 자매를 쫓았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제우스가 프로크네는 제비로, 필로멜라는 나이팅게일로, 테레우스는 매로 변신을 시켰다.
이 주제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과 요한 빌헬름 바우어의 판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함께 있는 두 자매는 푸른 색과 붉은 색으로 대비되어 표현되어 있고, 악기를 손에 들고 행복한 때를 보여 준다. 1825년 출생해 1843년부터 1850년까지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한 부그로는 19세기 후반 아카데미즘 화풍의 대표적 화가로 손꼽힌다. 형식과 기법 면에서 매우 엄격하고 신중했으며 고전주의 작품을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화풍에 녹였다.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라고 비판을 하고 살롱전 출품에도 반대했던 인상주의 작품이 근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으로 평가되면서 오히려 그의 작품은 한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부그로의 작품이 다시 조명을 받으며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부그로... 부게로가 더 익숙한데. 암튼 부그로는 여성을 참 예쁘게 그린단 말이지. 언제 부그로의 작품을 찬찬히 훑어봐야겠다. 이 작품 왼쪽의 여성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피부는 대체 어떻게 표현을 했담.
Elie DelaunayDiane 다이아나en 1872huile sur toileH. 1.465 ; L. 0.94musée d'Orsay, Paris, France
엘리 들로네는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나 이플리트 플랑드랭과 루이 라모트를 사사했다. 1848년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했고 1856년 로마상,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1등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생전에 높은 평가를 받은 아카데미즘 화풍의 작가다. 특히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 화풍으로 제작한 역사화가 인기를 끌었다.
1872년 제작한 이 작품 「다이아나」 또한 신고전주의 화풍으로 앵그르의 「샘」과 유사한 구도와 자세, 색감을 보여준다. 다이아나는 로마 신화에서 사냥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르테미스로 불린다. 여신 레토에게서 태어난 아폴론과 오누이 관계인 다이아나는 '목욕'이라는 주제로 많은 미술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데, 바로크, 로코코 미술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다이아나의 목욕은 '다이아나와 칼리스토', '다이아나와 악타이온' 주제로 나뉘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다이아나의 목욕 자체에 비중이 커짐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또한 다이아나의 목욕 자체에 비중이 커짐을 알 수 있다. 이 작푸 또한 다이아나가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는 장면을 표현했는데, 이전 시대의 장 앙투안 와토가 그린 다이아나의 목욕보다 더 엄숙해진 화면을 보여준다. 와토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다이아나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화면 왼쪽에 놓여있는 활과 화살통을 통해서이다.
진지한 표정의 아르테미스. 어김없는 콘트라포스토. 그런데 표정은 왜 저런 걸까?
William Bouguereau (1825-1905)L'Assaut 포위1898Huile sur toileH. 153 ; L. 105 cmParis, musée d'Orsay
아카데미즘의 대표 화가 윌리앙 부그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제도권 화가의 정도를 걷는다. 먼저 고향인 보르도에서 데생 도립 학교를 다닌 그는 이후 프랑스 최고의 우수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양성되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간다. 이와 더불어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운 부그로는 로마상을 수상한 이후 '아카데미 드 프랑스'의 지원으로 5년 간 '빌라 메디치에서 지내는데, 이 같은 로마에서의 체류는 그가 고대 로마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걸작들을 연구하는 기회가 됐다. 신화나 종교, 우의적 소재를 표현하는 데에 뛰어난 기량을 보이면서 우수한 화가로서의 전형적인 이력을 쌓아온 부그로는 이를 바탕으로 인기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크게 호평을 얻으며 프랑스 제도권 화풍의 대표 주자가 된 그는 이후 1888년부터 후학의 양성에 힘쓴다. 그렇다면 부그로는 시대 의식 없이 재능만으로 선대 유명 화가들의 기술을 답습한 제도권 화가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아니면 당대의 근대적 양상을 받아들인 재능 있는 화가였을까? 일단 그의 말년작인 「포위」에서는 부그로의 상당히 진화된 화풍이 드러나며, 세기말에 대한 점진적인 소멸의 시각 또한 섞여 있다. 원칙도 규정도 폐기하지 않은 이 작품은 사랑의 탄생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주제를 다루며 고대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그림이지만, 뛰어난 기교가 느껴지는 역동적인 구성은 알퐁스 오스베르의 상징주의적인 장식화와 화풍은 다르되 비슷한 분위기를 띠기도 한다.
너무 예쁘다, 역시.
Henri GervexMadame Valtesse de la Bigne 발테스 드 라 빈뉴 부인en 1879huile sur toileH. 2.05 ; L. 1.202musée d'Orsay, Paris, France©photo musée d'Orsay
루이즈 발테스 드 라 빈뉴의 본명은 뤼시 에밀리 드 라 빈뉴여쓴데 그녀는 '에고'라는 가명으로 『이졸라』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 이 자서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파리의 바리에테 극장 칸막이 좌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봐주었으면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다른 관람객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제비꽃다발을 가볍게 물어뜯었고, 불빛에 눈이 부셔서였는지, 아니면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는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금빛을오 반짝이는 듯, 독특한 붉은빛을 띠었다. 그녀는 보석과 금빛 편린으로 반짝이는 머리핀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눈부셨다. 가느다란 입술과 길다란 눈꺼풀 속에 감춰진 눈빛을 가진 그녀를 보면, 다가가서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에 의해서 생명을 얻은 갈라테이아와 같이,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귀스타브 장 자체, 에두아르 데타이유, 앙리 제르벡스, 에두아르 마네와 같은 화가들이 그녀의 모습을 작품을오 그렸고, 작가인 에밀 졸라는 그녀로부터 영감을 받아 『나나』라는 소설을 썼다. 정치인들 역시 파리 근교에 있었던 그녀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에게 열광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르벡스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크기가 압도적으로 컸다.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하기 위해 그려진 작품은 아니었고, 그는 그녀와 사적으로 맺고 있었던 오래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이 작품 속에서 표현하려고 했으며, 이 작품은 그녀가 소장하고 있었던 다른 주옥 같은 작품들처럼 그녀의 개인 저택을 꾸미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실내 풍경을 배경으로 인물을 그리곤 했던 당시 회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정원을 배경으로 인물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다. 고전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자연과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이 작품은 인상주의와 자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치마의 색이 상당히 오묘했던 작품이었다. 옅은 핑크빛 도는 보라빛이었는데, 치마의 색이 너무 예뻐서 인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인물이 그렇게 예쁜가...?
Edgar Degas (1834-1917)Portraits à la Bourse 증권거래소의 초상Entre 1878 et 1879Huile sur toileH. 100 ; L. 82 cmParis, musée d'Orsay
사진술 보급으로 화가들이 초상화라는 분야를 변화,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상황에서 드가는 1879년 네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된 이 작품을 통해 대폭 쇄신된 초상화 기법을 선보였다. 19세기 아방가르드 사조의 계보를 잇는 드가는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는 은행가 에르네스트 메이를 화면 중앙에 표현하면서 초상화와 장르화의 경계를 무너드렸다. 그는 이미 이런 방식으로 파리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바순을 연주 중인 연주자 데지레 디오를 재현한 바 있다. 1874년에서 1886년 사이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도로 엥대팡당 전시회가 열리던 시절 ㅡ 오늘날 같은 이름으로 묶어 부르기에는 그 격차가 꽤나 커 보이는 ㅡ 이 모임에 속한 화가들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작품을 선보였다고 비난을 받았다. 화가의 천재성은 이차원의 평면 위에 삼차원의 입체감이 나타나게 만든 기법을 감추는 것이라고 여기는 전통이 우세하던 시절 그들의 작품에서는 작업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당시 지극히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그림에서 초벌처럼 보이는 부분이 붓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움직임과 활기를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바로 여기에서 드가의 재능이 돋보인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화면 오른쪾에서 등에 뒷짐을 지고 있는 인물은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랜 시간 포즈를 취해야 했던 시절 예상치 못하게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지나가게 된 피사체처럼 흐릿하다. 드가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 순간성의 효과를 통해 그는 샤를 보들레르가 세기 중반 예술가들에게 고한 선언처럼 근대적 삶의 덧없음을 포착해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드가는 인상주의 동료들과는 달리 평생 야외가 아닌 작업실에서 작업을 했고 고전주의 거장의 전통에 따라 작품을 구성했으며 말년에는 '내 그림처럼 즉흥성이 떨어지는 작품도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드가의 고전적이면서도 근대적인 면모는 그를 오늘날 19세기 말 미술사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로 꼽히게 만들었다.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Des glaneuses dit aussi Les glaneuses이삭 줍기1857Huile sur toileH. 83,5 ; L. 110 cmParis, musées d'Orsay
이 작품은 십여 년 전 「키질하는 농부 Un vanneur」 라는 걸작을 기점으로 농민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오기 시작한 밀레의 프롤레타리아 농민 계급에 대한 표현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그림은 전경의 세 여인과 후경의 자작농들을 은근히 서로 대비시키는데, 여인들은 수확이 끝난 후 남은 지푸라기 가운데 떨어진 이삭들을 주워야 하는 입장인 반면, 자작농의 곁에는 부를 나타내는 높은 짚 더미가 쌓여있다. 허리를 굽히고 있는 여인들의 자세에서는 고된 노동의 강도가 부각되며, 저물어가는 해는 이들의 녹록치 않은 상황을 강조한다. 여인들은 해가 저물기 전까지만 이삭을 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일을 하느라 피부가 검게 그을린 세 여인은 ㅡ 몸을 숙이고 이삭을 주운 뒤 몸을 다시 일으키는 ㅡ 세 가지 동작을 분리하여 보여주는 동시에 종교적 삼위일체를 연상시키고, 이로써 세 여인은 역사화의 성가정聖家庭, 앙기 예수와 성모마리아, 성 요셉의 세 가족 ㅡ 과 동등한 위엄을 부여 받는다. 18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그림이 프랑스 미술관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밀레가 곧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 아마 가장 완성도가 높을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1857년, 즉 제2공화국 시절보다 더 분위기가 엄한 상황에서 등장한 작품이다. 치열한 가난을 그려낸 그림을 앞세워 언제 폭력적인 혁명이 터질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대중의 우려를 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화가는 '이 밝고 유쾌한 작품'을 자진해서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일부 사람들이 의도대로 믿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1857년에 그려진 작품은 관객에게 몇 가지 사실을 일깨워주면서 이들을 '혼란'에 빠뜨려야 할 필요성에 부합하고 있었다.
설마 진품일까, 하는 의심을 관객들이 많이들 한다던 도슨트분의 말씀. 그래서 오르세 미술관 벽에 붙어 있던 이 작품을 떼어내서 비행기로 수송해서 한가람 미술관 벽에 거는 장면까지 다 동영상으로 찍었고, 그것이 전시 끝부분에 있다고. 음... 못 본 것 같은데...;; ㅡ 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였을 게다. 당연히 진품이겠지.
저 뒤편에는 수확한 곡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무리는 일하는 여인들이다. 농민들이 저렇게 허리를 굽혀 일을 하는 동안 오른쪽 뒤로 주인, 혹은 감독관처럼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말을 타고 그들에게 손을 뻗어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전면에는 하층민임에 분명한 여인 셋이서 몇 줄기 되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빈약한 이삭을 힘겹게 줍고 있다. 이 모습들을 통해 부와 가난을 대조하고 있다고 한다. 이삭을 줍는 것은 해가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하늘은 뜨거운 한낮의 밝음을 잃고 있는데도 그녀들이 손에 쥔 이삭은 너무 적다. 그리고 숙인 자세로는 그녀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며, 오직 뙤약볕에서 매일같이 일하느라 얼굴이 까맣게 그을렸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다. 파랑, 빨강, 그리고 베이지색인 세 여인의 모자는 프랑스의 국기를 연상시킨다고. 하늘색이 뭔가 슬펐다.
말로만 듣던 이 작품이 이렇게 눈 앞에 있다니. 밀레의 작품은 지난 오르셰전에서 보았던 <봄>과 같이 온화하고 뭉근하다. 내가 구도는 잘 모르는데, 전시장에서 본 이 작품은 굉장히 구도가 좋았다. 이 작품 옆으로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그렸던 밀레의 드로잉이 있는데, 그 중엔 앞의 세 여인이 반대 방향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 드로잉을 보고 이 완성작을 보니, 이렇게 왼쪽으로 구부리는 구도가 훨씬 안정감을 주었다ㅡ는 이 작품이 눈에 익숙해서인 걸까.
Jules Breton (1827-1906)Le rappel des glaneuses 이삭을 줍고 돌아오는 여인들1859Huile sur toileH. 90 ; L. 176 cmParis, musée d'Orsay
장 프랑수아 밀레가 농촌에서의 노동을 작품으로 담아냈듯이, 쥘 브르통 역시 같은 주제를 작품으로 그렸다. 하지만 그는 농촌 사회에서 맺어지는 사회적인 관계를 두고 밀레와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밀레가 「이삭 줍기」 속에 묘사한 여인들에게서는 고된 노동의 애잔함이 느껴지는 반면, 브르통의 작품 속 여인들은 생생한 선으로 확력 있게 묘사되어 힘든 노동에 지친 나약한 기색이나 고통은 찾아볼 수 없다. 밀레 작품 속의 이삭 줍는 사람들은 추수 이후 바짝 메마른 채 떨어진 이삭을 주워 모으는 데에 반해, 브르퉁이 작품에 담아낸 인물들은 수확물을 양손에 가득 들고 있어 풍요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발을 헐벗고 있거나 입고 있는 옷이 낡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작가가 태어난 프랑스 북부의 '쿠리에르'라고 하는 마을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빈곤한 환경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에 은은하게 비쳐나가는 빛은 수확물을 나눠 가져가는 소작농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에 시적인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정치적인 의도가 담긴 이 작품은 1859년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프랑스의 유제니 황후가 당시 이 작품을 구입하였고, 이후 1862년에는 뤽상부르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밀레는 그가 그린 작품으로 인해 당시 보수층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반면에, 사회적인 불평등을 감추고 있는 이 작품은 풍성한 수확물을 작품에 표현함으로써 부유한 농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작품 배치 참 잘 한 것이, 밀레의 이삭줍기가 걸려 있는 방의 다음 방에 걸려 있는 작품으로, 도록 내 설명처럼 밀레의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똑같은 농민이지만 이들의 두 손은 무거우며, 그들의 얼굴은 노동에 찌든 것이 아니라 당당하다. 무엇보다 오른쪽 뒤편으로 번지는 놀이 참 아름답고 따뜻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온화하고 생기있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 다 이삭을 줍는 여인들이 소재인 건데, 어쩌면 밀레의 그림에서는 밭의 주인이 몹시 구두쇠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신의 곡물은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여인들이 주워갈 이삭은 거의 남기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반면 브르퉁 그림에서의 밭의 주인들은 마음이 넉넉했는지, 많은 이삭을 여인들이 주워갈 수 있도록 남겨두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Bergère avec son troupeau 양치는 소녀와 양떼Vers 1863Huile sur toileH. 81 ; L. 101 cmParis, musée d'Orsay
장 프랑수아 밀레가 전원생활에 관심을 가진 이유 중 하나는 농촌 사회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과 관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183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농촌 인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산업화에 따라 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자 시골은 곧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나 밀레는 단순히 향토적인 세부 묘사의 수준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이 그림 속 양치기 소녀는 녹록치 않은 농촌 환경의 표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나이의 소녀는 원경으로 보이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외딴 곳에서 홀로 양떼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해질녘의 황금빛과 두드러진 원근법 덕분에 작품은 굉장히 평온하게 느껴진다. 이 작품이 1864년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고 심사위원상까지 거머쥔 이유도 아마 이로써 설명될 듯하다. 뜨개질 작업에 열중하는 소녀의 모습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보편적으로 느끼는 우수 어린 감정을 암시하는데, 밀레의 다른 작품들도 대개 비슷하지만 이 작품에서 역시 정서적 측면은 사회적 양상의 표현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직후에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게 될 상징주의 분위기를 예고한다.
밀레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밀려 보다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목가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는데, 이에 따라 수집가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어린 양치기 소녀들이나 황혼 빛에 물든 양떼들, 철 따라 바뀌는 자연의 풍광, 신성함이 느껴지는 도상학적 표현 등에 마음을 빼앗긴다.
햇살의 온기가 느껴지고 아름답지만 고독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뒤의 고개를 숙인 양떼들은 이삭줍기의 여인들 같지 않은가.
Jules Bastien-Lepage (1848-1884)Les foins 건초1877Huile sur toileH. 160 ; L. 195 cmParis, musée d'Orsay
정확성을 추구하던 자연주의 회화의 환상은 1870년대 에밀 졸라의 소설을 중심으로 그 당시 인기를 끌던 문학 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카데미 성향이 짙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옛 제자였던 쥘 바스티앙 르파주는 1878년 살롱전에서 이 작품 「건초」가 크게 성공을 거둠에 따라 이 새로운 미학의 기수로 등극한다. 역사화의 전통을 이어받는 한편 인상주의 회화의 생략 기법을 활용하여 이 둘을 형식적으로 종합하는 자연주의 회화의 대표주자가 된 것이다. 이 그림 또한 조형적 측면에서 복합적인 해법을 제시하는데, 인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세심히 묘사하는 반면, 연한 색조의 풍경 부분은 의도적으로 원근감을 압축하여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권 기관에서는 유럽 전역에서 그 제자들이 모방작을 양산해낸 바스티앙 르파주가 1884년 요절한 다음에야 비로소 화가에게 찬사를 보내며 앞다투어 이 그림을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는 장면을 사진처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근대 회화의 기법이 극에 달해있지만, 그렇다고 상징성이 배제되지는 않았다. 우산 밭이라는 공간 속에 완전히 얽매여 있는 부부에게 있어 밭은 풍요로운 양식을 제공해주면서도 극한의 노동을 요구하는 곳이다. 즉, 삶의 원천인 동시에 고통의 근원인 셈이다. 또한 이 그림에서는 여인의 얼굴이 특히 심금을 울리는데, 장시간 고된 노동 끝에 진이 다 빠지고 일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바스티앙 르파주는 농민들의 작업 그 자체보다도 이들에게 있어 휴식이란 불가능하다는 점에 더 관심을 가졌는데, 잠을 자면서까지 무의식 중에 주먹을 쥐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렇듯 바스티앙 르파주는 과거 밀레가 다루었던 농민화라는 주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한다. 널찍한 화폭에 극적인 전개를 표현해내는 방식은 그가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기 전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화실에서 받았던 아카데미 화풍의 교육이 미친 영향이다. 「건초」를 비롯하여 이후에 제작한 작품들에서 농민의 열의 있는 모습을 담아내며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이후 바스티앙 르파주는 그 틀에 갇히지 않은 채 작품 「잔 다르크」처럼 역사화 장르의 작품으로까지 자신의 화법을 과감히 적용한다.
제3공화국 초 크게 인기를 끌며 태동한 자연주의 사조와 이 작품이 호평을 받은 이유는 이와 관련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평론가 폴 망츠의 지적대로 '이상향의 거울에 한 번도 자기 모습을 비춰보지 않은 시골 아낙의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충실히 재현'해놓았기 때문이다. 교태나 아양을 부리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여인을 표현해낸 이 그림은 대혁명으로부터 물려받은 민주주의 가치를 바탕으로 수립된 신임 정권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작품이 된다. 비록 고된 실상이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치는 일에 기여하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오르세전 도록은 참 설명이 좋다. 소장가치 높습니다. 어지간하면 구입합시다.
우선 작품이 커서 몰입이 잘 되긴 했지만, 도록의 설명에 있듯 여인의 멍한 표정이 한 눈에 심장을 쿵! 하고 쳤다. 아... 뭔지 알 것만 같은 저 느낌. 피로가 너무 심한데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온몸이 저릿한 상황. 그래 봐야 난 모르겠지. 저런 밭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하지만 저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극심한 노동으로 인한 피로 앞에 망연자실한 저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Paul Cézanne (1839-1906)Cour de ferme 농가의 안뜰1879Huile sur toileH. 63 ; L. 52 cmParis, musée d'Orsay
폴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했다. 그가 1874년 열린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동참하긴 했지만 언제나 다른 인상주의 전시회에 동참하긴 했지만 언제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독한 기질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당시 이 소재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세잔이 이 소재를 해석하는 독자적인 방식은 무엇이었는지 동시에 보려주는 작품이다. 세잔이 퐁투아즈와 오베르-쉬르-우아즈에 거주하던 1870년대에 그려진 이 회화는 그와 카미유 피사로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지만 그는 피사로가 그린 시골 풍경과는 달리 인물을 배제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의 중략감을 부각시켰다. 기존 풍경화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던 구성과는 달리 몇몇 요소가 화면에서 잘리는 대담한 구도를 통해 입체감을 살렸다. 세잔은 화면 오른쪽에 있는 벽면으로써 다른 소재가 돋보이게 하는 효과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화면 구성 요소의 조합과 색상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는 방식은 후경의 나뭇잎에서 보이는 사선으로 섬세하게 무수히 반복되는 붓터치와 함께 1880년대와 1890년대 초까지 그가 구사한 기법의 특징인데 이 작품에서도 이미 그 전조를 확인할 수 있다. 세잔은 쉼 없이 쇄신을 추구하는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였고 이 작품은 그 중 여전히 인상주의적인 기법에서 좀 더 형태적이고 추상적인 탐구로 전이되는 과정을 오롯이 보여준다.
폴 세잔은 굉장한 화가인데 내가 아직 세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답답했어. 언제 세잔에 대해 공부 좀 해야겠다.
Alfred SisleyLe pont de Moret 모레 다리en 1893huile sur toileH. 0.735 ; L. 0.92musée d'Orsay, Paris, France
파리에 정착한 영국계 가정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시슬레는 런던에서 몇 년간 유학을 하면서 존 컨스터블과 윌리엄 터너의 그림과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가 인상주의 회화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19세기 전반 영국 풍경화에 담긴 화풍이 후세기 프랑스 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서쪽 마를리-르-루아 근교 풍경을 즐겨 그렸지만 1880년부터 파리 남동쪽 퐁텐블로 성 인근 모레-쉬르-루앙에서 그가 1860년대 스위스 화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레데릭 바지유와 함께 수련하던 시절 그랬던 시골 풍경을 새롭게 발견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초창기에 겪었던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 덕분에 물질적인 어려움 없이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도시의 모습을 담은 그림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시슬레의 천재성은 그림 속 입체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투사법에 있다. 후반기 작품에서 시슬레는 색상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초기 대기 원근법을 뛰어 넘었다. 모네가 말년에 묘사보다는 해석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방대하고 장식적인 작품에 재능을 쏟은 것과 마찬가지로 시슬레도 예술가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나서 사실성과는 점차 얼마간 거리가 있는 색상의 서정을 통한 사실성과는 점차 얼마간 거리가 있는 색상의 서정을 통한 새로운 효과를 시도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다리로 만들어진 그림의 원근감은 정면으로 보이는 집에 대비되면서 전체적으로 역동성을 불어넣고 인상주의 회화의 꽃인 물결과 구름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살려준다.
Georges SeuratLe petit paysan en bleu 푸른 옷을 입은 시골 소년vers 1882huile sur toileH. 0.46 ; L. 0.38musée d'Orsay, Paris, France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평균연령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조르주 쇠라는 여섯 번째와 마지막 인상주의 단체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1886년 열린 마지막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이 점묘주의의 선언과도 같은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이다. 쇠라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 과학자 슈브뢸을 비롯해 여러 과학자들이 발전시킨 다양한 광학 이론을 과감하게 적용하면서도 인상주의 선배들의 가르침을 숙고했다. 초기작인 「푸른 옷을 입은 시골 소년」이 이를 반증한다. 그렇지만 추후 그의 주요 걸작에 담긴 기법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단순화된 형태로 그려진 윤곽선에 꾸준히 관심을 보였는데 이렇게 단순화된 형태는 관람객의 눈에서 색상이 혼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와 어떠한 성격도 짐작할 수 없는 단순한 형태의 얼굴로 인해 이 작품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모두 개별적인 기법을 발전시키며 뿔뿔이 흩어지는 시기에 인상주의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예고했다.
쇠라 작품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보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느낌이 나는 것도 같긴 한데, 그래도 쇠라란 이름이 없었다면 못 알아봤을 듯.
Alfred Roll (1846-1919)Manda Lamétrie, fermière 농부, 망다 라메트리1887Huile sur toileH. 214,5 ; L. 161 cmParis, musée d'Orsay
이 거대한 전신 초상화는 모든 장르를 쇄신하고자 하는 자연주의 화풍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어느 시골 여인의 평범한 일상을 다른 이 작품에서 알프레드 롤은 제목에 그림 속 인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선배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지금껏 귀족들에게만 한정시킨 크기와 표현 형태로써 익명의 시골 여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화가는 그 이름까지 정확히 표현해둔 것이다. 이에 따라 그의 작품에서 망라 라메트리 및 그녀의 소들은 그간 화가의 작업실에 찾아와 정교한 초상화를 주문하기 바빴던 사교계 인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1888년 프랑스 화가 협회 살롱전에서 그림이 크게 호평을 받으면서 작품 속 여주인공은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는데, 화가가 노르망디 해안의 휴양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여인은 자기 얼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음에도 그 생활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아주 큰 작품인데 소젖 짜는 여성의 모습이 담담하면서도 빛나 보였다. 예쁘지 않은 얼굴인데 참 예쁘다! 생각이 들었던.
Marie Bashkirtseff (1860-1884)A meeting 모임1884Oil on canvasH. 193; W. 177 cmParis, Musée d'Orsay
1884년 살롱전에 이 작품 「모임」이 전시되었을 때, 대중과 언론의 반응은 호평 일색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화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수상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마리 바사키르체프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긴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 상대적으로 부족한 작품들이 상을 받지 않았나.'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내가 얻을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고, 굴욕을 당했으며, 완전히 끝난 존재'라는 기록도 남겨 놓는다. 스스로의 재능을 확시했던 바시키르체프는 자신의 눈에 비친 부당함을 비판했지만, 화가로서 잊히는 두려움 또한 숨기지는 않았다. 고작 스물다섯의 나이에 결핵 선고를 받은 바시키르체프는 같은 해 10월 31일,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마는데, 에콜 데 보자르가 아직 남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던 시절,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이 젊은 여인은 '위대한 화가'로 남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안고 있엇다.
바시키르체프의 이 작품에는 그녀가 존경하던 쥘 바스티앙 르파주와 같은 사실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다. 동시대 화가인 페르낭 플레즈처럼 마리 바시키르체프 역시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 다루었던 주제를 도심 풍경 속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바시키르체프는 풍속화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 그 어떤 디테일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예리하게 잡아낸 몸짓과 표정의 어린 소년 여섯 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물건 중심으로 둘러 모여 있는데, 아마도 아이들은 이 물건을 사이에 두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중인 듯하다. 차림새로 보건대 아이들은 서민층 출신임을 알 수 있는데, 나무판자로 된 울타리나 벽의 낙서, 찢겨져 나간 벽보 등 주변의 풍경 또한 이러한 인상을 뒷받침한다. 옷차림으로 유추해 보건대 아이들이 초등학생임을 알 수 있으며, 그림의 시대적 배경이 된 1880년대 초반은 '쥘 페리 법'에 따라 무상, 의무, 세속 교육이 정립된 시기였다.
이 작품,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여성이란 이유로 상을 받을 수 없었던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린 후 죽게 된다고. 그런 배경설명이 전혀 없다 해도, 한 눈에 아이들의 너무나 있을 법한 태도와 사실적인 표정이 눈에 확 띈다. 한 명 한 명 표정이 너무나 생동적인데, 이 작은 사진으론 전혀 그 느낌이 나지 않네. 이 작품 만큼은 전시관에 가서 제대로 큰 원작으로 감상하면 좋겠다. 얼굴표정 뿐 아니라 아이들의 자세 하나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또한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 중 하나.
큰 사진을 구하지 못해서 아쉽다.
Gustave Moreau (1826-1898)Galatée 갈라테이아Vers 1880Huile sur boisH. 85,5 ; L. 66 cmParis, musée d'Orsay
귀스타브 모로는 비정기적으로 살롱전에 작품을 보냈는데, 1880년 살롱전은 그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자리였다. 1876년과 1878년 출품작이 호평을 얻은 후 '살로메 Salome' 화가로 유명해진 귀스타브 모로는 이 자리에 신화 속 여인을 다룬 두 작품을 출품한다. 하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트로이 전쟁을 유발한 「헬레네 Helene)」였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작품 「갈라테이아」이다.
갈라테이아 일화는 아키스를 사랑한 갈라테이아를 마음에 품고 있던 폴리페무스가 질투심에 그만 아키스를 죽인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모로는 이러한 갈라테이아 신화에서 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롭스와 바다의 님프 네레이스 사이의 상징적인 대립 구도만을 가져온다.
모로는 비단 오비디우스의 1660년판 『변신』에 나오는 '아름다운 님프를 사랑한 흉측한 거인'만을 표현한 게 아니었다. 사실 이를 통해 화가는 사랑과 좌절을 겪은 한 거대한 표상을 나타낸다. 미녀와 야수, 수산나와 노인들의 계보를 이어 가질 수 없는 사랑을 테마로 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해저 동굴 속의 해초들은 모로가 1878년 판본으로 갖고 있던 플로베르의 소설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마지막 대목에 환상적인 느낌을 가미해 그려 놓은 듯하다. 하지만 조금 더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귀스타브 모로는 세심한 자료 조사에 매진한다. 그는 판화 삽화가 들어간 잡지 『마가쟁 피토레스크』 뿐만 아니란 파리 자연사 박물관 서고에 있는 영국 전문 서적인 필립 헨리 고스의 『영국 극피동물지』까지 참고했으며, 이는 파리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일련의 수채화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참고로 고스는 해양 동물이 바닷물에서 벗어날 경우 모두 사멸해 버리고 말기 때문에 바닷물로 채운 수족관을 만들어 영국 해안 인근의 살아 있는 해양 동물군을 연구해야 한다고 맨 처음 주장한 인물이다. 이렇듯 모로는 고대의 전설이나 민담, 설화 등을 열심히 파고드는 한편, 당대의 과학 발전에도 민감한 편이었다.
모로가 그린 누드 가운데 가장 우아한 누드로 손꼽히는 「갈라테이아」는 「그리폰과 함께 있는 요정 Fee aux griffons」과 정반대로 대칭되는 자세를 하고 있다 ㅡ 다가갈 수 없는 여인의 이 또 다른 표상은 훗날 앙드레 브르통을 매료시키기도 한다 ㅡ. 폴리페무스의 경우, 수많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화가는 결국 그를 커다란 두상으로만 나타내기로 결심한다. 비록 이마 한 가운데에 저 유명한 키클롭스 족의 외눈이 박혀 있긴 하나, 모로의 작품 속 폴리페무스는 끔찍한 괴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그저 흠모의 상대에게 거절 당한 이의 안타까운 처지로 마음을 울린다.
1880년 살롱전에서 선을 보인 「갈라테이아」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액자에 전시됨으로써 주위의 자연주의나 제도권 순응주의 작품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귀빈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 사이에 놀라움을 자아내었으며, 흥분의 빛을 감추지 못한 이들도 있었고, 작품에 대한 논평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괴테, 다윈 등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 중 위스망스는 '이 탁월한 식견을 가진 자의 필치에서 나오는 신비의 마력을 추켜세우면서 해저 동굴의 표현에 대해 '성체를 모시는 감실처럼 보석으로 빛나는 신비의 암굴'이라 묘사한다. 이어 그는 '화려하고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찬 이곳에서, 입술과 가슴이 붉게 칠해진 뽀얀 몸의 갈라테이아가 미색의 긴 머릿결에 감싸인 채 잠이 든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1881년 6월, 이 그림은 에드몽 테니가 소유하게 되었으나, 모로는 그림을 재작업하길 원했다. 이 때문에 작품은 1881년 12월 13일까지 모로의 작업실에 있었고, 그림은 배경 부분의 손질과 함께 갈라테이아의 오른 손과 팔 자세에도 약간의 수정이 이뤄졌다. 이는 프랑스 미술관 연구소의 검사 결과로도 확인된다.
「갈라테이아」를 불후의 명작이라 생각했던 에드몽 테니는 1889년 만국 박람회 자리에도 이 작품을 대여해 준다. 제2제정 당시 최고행정재판소 참사원의 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장식예술중앙회의 핵심위원으로도 활약한 에드몽 테니는 나아가 그랑돔므나 가르니에 같은 칠보 세공 장인들이 과거 살롱전에 출품됐던 모로의 작품을 기반으로 장식 패널을 만들도록 부추긴다. 이 귀중한 장식패널들은 19세기 말 모로의 상징주의 미학이 전파되는 데에 기여한다.
대중에 공개된 귀스타브 모로의 다른 작품들처럼 「갈라테이아」 역시 장 로랭,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 앙리 드 레니에 등을 비롯한 상징주의 시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이들은 비록 사진으로만 이 작품을 접했을 뿐임에도 그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훗날 초현실주의 시인들까지 매료시킨다.
한 눈에 모로 작품이었음을 알고 감탄했다. 모로의 작품까지 오다니! 도록 설명에도 있듯 살로메의 작가이자 그가 그린 디오니소스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Gustave Moreau
The Apparition
1876
Watercolor
Musée d'Orsay, Paris
위 작품은 이번 전시에 오지 않았음.
갈라테이아는 사진보다 더 칙칙한? 색인데, 음산한 분위기의 동굴모습에서 찬 습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여인의 머리칼은 해초 혹은 오래 태운 양초의 굳은 촛농처럼 늘어져 있으며, 여기저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다.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아름답게 빛나는 갈라테이아의 육체가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그녀의 섹시하면서도 고상한 얼굴은 초연한 표정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갈라테이아의 다리 아래에 있는 꽃입이 눈에 뜨게 되는데, 볼펜이 아닌 붓으로 그린 것이 맞나 싶도록 아주 상세하고 예쁘게 그렸다. 묘한 매력을 내는 작가다, 모로는.
Odilon Redon (1840-1916)
Eve 이브
1904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문학적 소양이 풍부하고 놀라운 상상계와 몽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에 능한 오딜롱 르동은 이 그림에서 19-20세기 전환기에 많은 화가들의 관심을 사던 이브의 형상을 불러왔다. 이 당시에 회화, 건축, 장식 예술은 물론 건축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창조 작업에서 여성적인 형상이 범람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라인 강의 밤'에 등장하는 소녀들처럼 주로 길고 풍성하고 매혹적인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들은 유혹하는 힘과 그로 인해 매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에게 가해지는 잠재적인 위협을 구현했다. 장 자크 에네가 붉은 머리의 모델을 통해 사람을 홀리는 머리카락에 천착한 반면 르동은 죄를 짓기 이전 이브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주로 욕망과 결부되어 몸으로 짓는 죄에 책임이 있다고 인식되는 이브지만 머리를 올려 묶은 이 작품 속 그녀는 아직까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1881년부터 오귀스트 로댕은 금ㅈ된 과일을 먹은 후 알몸이라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고 몸을 감추려고 애쓰는 이브의 모습을 표현했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 속에서 이브의 이미지는 좀 더 부드럽게 누그러졌지만 조르주 루오에게 이브는 창녀에 가까운 모습이다. 어찌되었든 영원한 여성성의 아름다움이나 남성을 원초적인 본능으로 환원시키는 유혹적인 힘을 의인화한 이브라는 인물은 근대성의 아이콘이자 시미적 현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바탕으로 구축된 세계의 새로운 집합적 표상이다.
감상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작품인데 설명을 읽고 나니 김이 좀 새는 느낌이다. 그런 거였어? 싶은. 설명 자체는 훌륭하다. 당대의 유행을 작가별로 예를 들어 꼼꼼하게 해주었는데, 르동이 묘사한 이브의 모습이 '순수'를 상징한다는 사실이 좀 시시하달까. 르동의 시선 자체에 대한 실망이다. 타락 이전의 '순수'를 상징하는 이브는 여성성을 죄다 제거한 남자의 모습인가? 하며. 난 이 작품 앞에서 제목이 <이브>인 걸 보고 눈을 의심했거든. 그래서 뭔가 신기하고 재미난 의도가 숨어 있을 줄 알았다. 철저히 남성의 손으로 남성의 감성을 위해 남성의 시각에서 생산, 소비되는 것이 과거의 예술이라지만, 그래, 뭐 그런 한계를 넘을 수 있었겠어 싶고. 여성의 여성성이 그렇게 무서워요?
Jean-Jacques HennerLa liseuse 독서하는 여인entre 1880 et 1890huile sur toileH. 0.94 ; L. 1.23musée Henner, Paris, France
1829년에 태어난 장 자크 에네는 제2제정 체제였던 1865년 회화 부문 공식 살롱전에서 처음으로 호평을 받았는데, 참고로 그 해 살롱전에서는 에두아르 마네가 작품 「올랭피아」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그의 작품 「정숙한 수산나」는 한 노파 때문에 놀라게 되는 수산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당시 신고전주의의 모든 규범에 부합한다. 정부가 구입한 이 그림은 이후 생존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린다. 일찍이 1858년 로마상을 거머쥔 에네는 초상화가로서 먼저 이름을 날렸는데, 파리의 장 자크 에네 미술관에는 이 시기의 화려했던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하지만 1870년대부터 에네는 굉장히 특이한 분위기의 흐릿한 회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이로써 그는 '마지막 낭만주의 화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아카데미즘과 신진 화풍인 인상주의, 그리고 상징주의 사이의 미학을 연계한 화가로 자리잡는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사망 직전 마네에게 수여된 훈장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 작품에서 책 읽는 여인의 몸은 꽤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카데미 화풍에서 은밀한 디테일이 감추어진 몸의 표현 만ㄴ큼이나 추상적인 관능미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세하게 다듬어진 몸의 형태는 암시력으로 가득한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인의 몸을 드러내주는 신비로운 조명과 조화를 이룬다. 생애 말년에 화가가 집중적으로 파고들던 이 같은 화법은 여인의 피부를 상당히 서정적으로 표현해준다. 화가는 모델 중 한 명을 바탕으로 이와 관련한 연구를 시도했는데, 앙리 팡탱 라투르 같은 다른 여러 화가들과는 달리 에네는 인체의 표현에 있어 사진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책에서 본 그림이 실제 눈 앞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 사진 속의 그림도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는데, 원작이 주는 몽환적인 느낌은 굉장했다. 붉은 연기가 아른하게 피어 오르는 것 같았던. 다 빈치가 주로 사용했던 스푸마토 기법으로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했다고. 그리고 배경이 갈라져 있는데, 그것은 당시 새로운 물감재료로 아스팔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시간이 지나 아스팔트가 위로 올라와서 그러하다셨다. 이처럼 에네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화가였다고. 다 좋은데, 이 날 전시에서 여성의 나체를 너무 많이 봐선지, 아름다운 나체를 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예의 그 정육점에 온 기분이 들었어. -_ㅜ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