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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연극] 프로메테우스 by 극단 ETS @ 국립극장 별오름

by Vanodif 2017. 5. 20.








공연 예매: https://www.ntok.go.kr/user/jsp/ua/ua01_1db02v.jsp?pfmc_inf_idx=3546&year=2017&month=05&day=13&








김혜리 연출은 프로메테우스와 이오의 이야기를 두 축으로 고전의 깊이를 충분히 유지하면서, 입체감 있게 인물과 사건을 부각시켜 대본을 재구성하였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권력, 저항, 희망이라는 주제들을 어떻게 이 시대에 비추어 바라볼 수 있을지 이 극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평면적이지 않은 다양한 방식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삶을 견디고, 변화를 만들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극단 ETS만의 색깔을 지닌 현대적이면서도 강렬한 고전 작품을 관객에게 선사하고자 한다.


아래 포스터에 있는 이 설명은 이 연극의 주제이자 의도하는 바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원작을 읽고 간다면 이 연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또한 이 연극에서 특별하게 부각시킨 '이오'에 대한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링크 걸겠으니 참고가 되길 바란다. 그 외, 프로메테우스를 영웅으로, 제우스를 잔혹한 폭군으로 묘사한 아이스퀼로스와는 달리, 철저히 제우스 편에 서서 프로메테우스를 오히려 교활한 자로 그리고 있는 헤시오도스의 프로메테우스 버전도 싣는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왜 그토록 분노하였는지에 대해 인간의 제사 사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헤시오도스, 『신통기』 : http://vanodif.tistory.com/1013


오비디우스, 「암소로 변한 이오http://vanodif.tistory.com/1014




※ 위의 작품들은 미리 읽어 가시길 권합니다. 

연극을 이해하시는 데 더욱 풍요로워질 거예요. 











※ 이후의 후기에는 심각한 스포일링이 실려 있습니다. 

스포일링 원치 않으시면 더 진행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신화에 있어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갖는 캐릭터이다. 접때 명작 수업 때 '프로메테우스'를 주제로 재구성 숙제를 한 적도 있었고. 그때 나는 『신통기』만 읽고서 글을 썼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 - 판도라 구도로 글을 썼었지만, 이후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읽고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나의 것과 비슷한 시각도 있었으나, 내가 읽은 아이스퀼로스의 프로메테우스는 살짝 이상했는데, 이번 연극을 보고선 내가 좀 비틀린 시각을 가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아이스퀼로스의 프로메테우스가 오만한 이기주의자, 코러스는 제우스의 하수인이라 해석이 되었거든.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건 비틀어 보기를 즐기는 나의 취향탓임을 인정하는 바다. 프로메테우스를 저항의 영웅, 코러스를 그 프로메테우스의 저항정신에 감탄하고 그를 동정하는 존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연극의 꽃은 대본이다. 물론 연출도 중요하고 배우분들 없으면 아예 연극이 상영될 수 없다. 다만 '연극'이라는 행위 자체가 '대사를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업'인 만큼, 어떤 메세지를 어떤 대사로 잘 빚는지가 개인적으론 가장 궁금하다. 이 연극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를 기본 대본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처음과 중간 도중도중 이오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삽입했다. 미리 본 포스터에서도 그 부분을 가장 기대했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었다.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읽었을 때, 힘과 폭력, 헤파이스토스, 코러스, 오케아누스에 이어 등장한 이오는 뭐랄까, '징징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분명 고통을 당했을 것이나, 오비디우스는 『변신』에서 그녀의 고통을 묘사하는 데 인색하다. 이는 성경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이민족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으나, 정작 디나의 고통에 대한 묘사는 온데간데없이 야곱과 그 아들들의 분노와 복수에만 모든 초점이 맞춰진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 사건을 '디나의 호기심으로 인한 재난'으로 해석하던데, 그러한 생각 자체가 성폭력을 당한 여성을 두 번, 세 번, 네 번 죽이는 일임을 알고는 있을까? 이처럼 남성의 소비를 위해 남성이 생산하는 남성의 글에서 이오의 고통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인 나는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왜 이렇게 징징거릴까' 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오의 시각으로, 그 일을 당한 여성의 시각으로 그런 사건들을 바라본다면 절대로 그렇게 글을 써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강에서 나와 숲을 걸었을 뿐인데, 제우스가 반했다는 이유로 야만적인 겁탈을 당해야 하고, 또 그로 인해 원하지도 않았던 하얀 암소로 강제로 변해야 했을 뿐 아니라, 같은 여성인 헤라에게 시달려야 했던 이오에게 대체 어떤 잘못이 있었는가. 그녀의 그 말도 안 되는 불행을 단지 '훗날 태어날 영웅의 조상이라는 감투' 따위가 보상해 줄 수 있는가.


그러한 이오의 사건을 극의 처음부터 자세하게 다룬 것은 남성중심적 세계관과 작품관에 흐려진 나의 시야를 닦아 주었다. 그렇지. 이오를 그렇게 해석해선 안 되는 것이지. 단지 바람둥이 최고신에게 겁탈 당해 이리저리 시달린 수많은 여성 중 하나로만 치부하고는 그녀의 아픔이 어쨌건 말건 그래서, 그 다음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는 뭘 어떻게?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연출가는 수많은 사회 약자들의 고통소리에 무감각하게 귀를 닫는 이들을 두드려 깨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압제자 제우스에게 유린 당한 이오는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님들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부터 반복해서 외치던 "아버지!"는, 일본에 끌려갔던 이오 나이 즈음의 소녀들이었을 위안부 소녀를 연상시켰다. "아버지가 도와줄 거예요", "아버지는 저를 구해주실 거예요", "아버지, 왜 가만히 계세요?", "아버지! 아버지도 신이잖아요!" 라는 대사에서 '아버지'는 그대로 '국가'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일본이 개인보다 거대한 국가라지만, 한국도 국가이고 내 나라인데, 왜 국민인 나의 고통을 외면하는가'라는 그 절규가 비단 여성이어서만 절실한 걸까? 미국이 한국인을 부당하게 잡았을 때, 그 잡힌 한국인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한국은 그 한국인을 구하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인가. 이에 생각이 이른다면 자신과 다른 성과 시대에 살았던 여성들의 외침이라고만 팔짱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도와 상황이 다를 뿐, 누구나 약자는 될 수 있으므로.


이오를 위안부에 연결시킨 것은 통찰력 있는 해석이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아버지/국가를 신뢰하고 의지했으나 처절하게 버림 받은 약자로서 세월호의 아이들에까지 연결시킨 것 또한 적절한 해석이었으나, 개인적으론 표현이 좀 원색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과했던 이유는 메세지가 아니라 영상 때문이었는데, 결정적인 세월호 인양 장면이 화면에 보이는 바람에 후적박발厚積薄發의 묘미가 대폭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전해야 할 목소리 앞에 후적박발의 묘미 따위가 무엇이랴 싶겠지만, 내게 있어 예술은 현실 반영 뿐 아니라, 감상자를 위한 미적/지적 장치를 기대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처음 장면 이오의 대사에서 어렵지 않게 위안부 할머님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처럼, 세월호 역시 영상이 아니라 그와 같은 대사에서 연상되었더라면 그 효과가 증폭되었을 것이. 더더욱 이 영상이 아쉬웠던 이유는, 하필 헤라가 보낸 하수인들에게 이오가 겁탈 당한 직후 세월호와 위안부 소녀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영상을 탄핵 당하는 박근혜 전대통령의 모습에까지 연결시킨 것은, 각색/연출가의 탁월한 작품 해석과 구성 능력을 증명한다. 과연 절대 약자인 이오를 부당하게 핍박하는 자가 바로 같은 생물학적 약자인 여성이면서 최고의 권좌이 있는 헤라가 아니었는가. 세월호에서 죽어간 절대 약자 소녀/소년들을 외면한 권력자 역시 생물학적 약자인 여성 박근혜였다. 여성이라 해서 특정 일에 남성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던 자'가 약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했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우스/압제자 폭군=일본, 헤라(혹은 제우스)/ 약자의 고통에 부당한 반응을 보인 자=박근혜, 이오/피해자=위안부, 세월호 학생들]이란 구도는 통찰력 있는 해석이었다. 다만 그 출중한 해석을 영상이 아니라 대본으로 파악하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 싶었다.


폭력에 고통 받으며 저항하는 자로서의 프로메테우스는 엄밀히 말하면 이오 만큼의 절대 약자라 할 순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고통 당할 것을 '미리 알면서도' 기꺼이 저항의 길을 묵묵히 걷는 자였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프로메테우스를 보았을 때 '예수'가 떠올랐다. 프로메테우스는 매력적인 캐릭터인 만큼 여러 서양화가들이 바위산에 쇠사슬로 묶인 그를 그렸는데, 그런 그림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대부분 팔을 뒤로 한 채 쇠사슬에 몸이 칭칭 결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서있는 채로 양 팔을 펼쳐 결박됨으로,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를 연상시켰다. 그리스도 역시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유대교에 맞서 저항의 길을 끝까지 걸었으며, 대제국 로마의 압제 하에 고통 받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비폭력 저항을 했던 개혁가이자 혁명가였다. 인간을 사랑하여 신들의 불을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하니 닮았다. 


훌륭한 해석과 여러 모로 민감한 부분들을 세심하고 기술 좋게 연결시킨 솜씨가 매력적인 각색/연출이었다. 큰 박수를 보냅니다.





힘과 폭력, 그리고 우측은 제우스의 명을 받아 프로메테우스를 쇠사슬로 묶는 헤파이스토스.



배우분들의 멋진 몸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이 사진들로 충분히 증명될 것이다. 몸 만들기 힘드셨을 텐데, 아무래도 '힘'과 '폭력'인 만큼 근육질 몸매를 가꾸시니, 내용의 시각적 전달력이 상승된다. 아래 프로메테우스 역의 김동현 님 역시 멋진 근육을 만듦으로, 강인하고 곧은 의지의 프로메테우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해주셨다. 이오는 작고 가냘프지만 강단 있는 몸매로, 연약함과 나중에는 강한 마음을 먹게 되는 이오의 모습이 즉각적으로 전달되었다.


모든 배우분들의 딕션이 훌륭했다. 발성도 어찌나 좋으시던지들, 대사를 알아 듣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첫장면에서 그림자처럼 배우분들이 동작을 하다 육체들을 쌓고, 또 떨어져 나오는 장면은 너무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어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부분에서 현대무용을 감상하듯 리드미컬한 동작들이 인상적이었다. 





사슬에 묶이는 프로메테우스



편의상 배우분들 이름은 배역 이름으로 대체하고 존칭은 생락하겠습니다.


힘과 폭력: 아이스퀼로스의 글에서 느낀 '힘'은 제우스의 하수인 내지는 제우스의 일부분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연극에서의 힘과 폭력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 좋았던 점은, 두 분이서 으르렁대며 마치 맹수와 같은 이미지를 연기해주셨어서, 힘과 폭력의 광포함과 야만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헤파이스토스: 힘과 폭력의 눈치를 보는 듯한 연기는, 절름발이면서 올륌포스 최고 추남이자 아내 아프로디테의 외도에 분노했으면서, 기술이 뛰어나 이리저리 (친 혹은 의붓) 아버지 제우스에게 이용 당하는 헤파이스토스의 성격을 잘 표현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프로메테우스에 공감하고 동정하나, 폭군 제우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는 모습도 비록 짧긴 했지만 좋았다.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 곧고 강인하고 성숙하고 진중한 모습의 프로메테우스를 연기해 주셨는데, 이오를 대할 땐 그녀를 측은해 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아, 인간적이랄까... 는 신이므로 여기서는 안 맞는 표현이긴 한데, 암튼, 자상함과 다정함을 지닌 모습도 함께 잘 표현해 주셨다. 


코러스: 오케아노스의 네 딸로 그 중 한 분을 언어장애인으로 등장시키셨는데, 아...! 일행이 최고로 꼽았던 부분이었다. 이 한 명의 언어장애인 코러스는, '코러스'라는 이름 자체를 모순으로 만드는, 말하자면 코러스의 weak link인 셈일 테다. 그러나 정작 그 코러스가 누구보다 공감력/동정심이 컸으며, 자신의 아버지 오케아노스를 혼자서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인물... (이라기엔 신물이다;;)의 본심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지닌 자로 인식되었다. 어쩌면 언어장애신인 그녀 역시 아버지 오케아노스로부터 부당한 차별을 받아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약자의 존재를 확대하여 설정했는데, 무리 없이 소화되는 영민한 설정이었다. 코러스 네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극의 거의 대부분을 떠받쳐 주었는데, 한 분 한 분 배역에 대한 이해력과 몰입도가 높아, 코러스분들 덕분에 이오와 프로메테우스의 억울함과 절실함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오케아노스: 음. 오케아노스 배우분이 담긴 사진이 없네. 오케아노스는 내가 혼자 아이스퀼로스의 대본을 읽었을 때 생각했던 것과 가장 다른 이미지를 연기해주셨는데, 나와 같은 해석을 훨씬 정확하게 해주셨단 느낌이었다. 끊어 읽는 부분이나 억양, 어투, 뉘앙스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 만이 더해줄 수 있는 특유의 감칠맛을 잘 살리셨달까. 이 분이 등장하자, 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장면이 풍성해졌다.


이오: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셨다. 저러다 목 상하시는 것 아닐까 걱정되었을 정도로. 그녀의 절규가 가슴을 여러 번 울렸다. 때론 너무나 연약한 소녀였다가, 때론 분노하는 피해자였다가, 나중에는 의연한 전사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프로메테우스 못지 않게 열연을 하셨는데,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헤르메스: 비열하고 얄팍한 제우스의 하수인을 잘 표현해주셨다. 중간에 코러스 한 분의 머리채를 낚아채는 디테일은 잘 넣으셨어요. 깐죽대는 헤르메스의 차가운 면모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의상: 전체적으로 이 연극은 '영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의상 역시 그러했다. 특히 이오의 뿔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는데, 더없이 적절하게 설치하였다. 연기에서 중요한 얼굴 표정을 가리지 않으면서 충분히 고통 당하는 소를 나타내는 센스 있는 의상이었다.


무대: 간단했다. 그런데 적절했다. 다만 아직도 프로메테우스를 매단 구멍 뚤린 직사각형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겠다. 음... 지금 문득 든 생각으론 십자가에 달렸던 명패...?


조명: 불꽃 조명이라든가, 무대 뒤편으로 제우스의 은밀하게 지켜보는 눈빛 마냥 일렁이는 먹구름의 하늘이라든가, 생각 외로 다양한 조명이 사용되어 놀랐다. 이러한 조명으로 인해 현대적 감각이 더욱 부각되었다.







중간에 헤라가 보낸 자들에게 이오가 유린 당하는 장면은 여성으로서 너무 보기 힘들었다. 그 장면 보면서, 그 자리에 와 계시던 많은 남성 관객분들은 그 장면을 어떻게 느끼실까 궁금했다. 내가 느끼는 만큼을 같이 느낄까? 다른 시각에서 더 처절하게 느낄까? 아니면 전혀 다르게 느낄까? 선택 없이 장착된 신체적 차이가 사회적 통념 속에 강압적으로 버무려졌을 때, 개인의 의식과 의지는 어떤 것을 어느 만큼 극복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성으로서 나는 그 장면에서 세상의 남성들에게 동시에 명치를 두들겨 맞는 아픔을 느낀 것이어서. 솔직히 뛰쳐 나가고 싶었다. 다만 그 장면을 굳이 넣은 의도를 알았기에 끝까지 연극을 보았다. 그냥 평범한 여성인 내가 그러한데, 실제 그 일을 겪은 여성과 약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걸까.





아버지 이나코스에게 자신이 이오임을 바닥에 글자로 써서 설명하는 장면.



위의 장면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글로 읽었을 때도 눈시울이 붉어졌던 부분이었다. 저 '발굽'을 표현하는 손모양을 보라. 이런 부분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감각적인 장치가 정성스레 박혀 있는 작품이다.



언어 외에도 음악, 무용으로 다양하게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뮤지컬이나 오페라와는 달리, 연극은 언어에 내용전달의 절대적인 무게가 실려 있다. 하여 언어에 대한 관객의 집중도를 이끌어내고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대본이 중요하고, 또 그 대본과 캐릭터의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여 적확하고 풍성하게 전달해주는 배우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극단 ETS의 <프로메테우스>는,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현재 한국 사회상과 적절하게 연결한 탁월한 각색/연출이 돋보이면서도, 배우 한 분 한 분 각자의 배역에 잘 녹아난 수준 높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이다. 


이렇게 좋은 연극 만들고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관계자분들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